제78장 음식양쇠(陰蝕陽衰) (2)
사람의 말소리에 독기가 담겼다면 그 사람은 이미 독으로 호흡한다는 의미.
숨 쉬는 것만으로 남을 중독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나.
석실 문 안에서 거북한 음성이 들리자마자 해원기의 표정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제탁지검이 반응할 정도의 독기.
“물러서, 정 형!”
향연에 버티는 약을 복용했던 정록 역시 단번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훌쩍 거리를 벌리면서 소매로 가린 입에서 놀란 소리가 나온다.
“독종지인(毒宗之人)?”
실혼인들에게서 정기를 빼앗는 향연 따위가 아니다. 당장 숨이 턱 막히고 피부가 불에 덴 듯 따가운 느낌.
흔히 강호에서 독인(毒人)이라고 일컫는 독문(毒門) 비전의 연제법.
독을 다루게 되면 좀 더 강한 독을, 좀 더 방비하기 어려운 독을 얻고자 희귀한 독물(毒物)을 키우거나 숨겨진 무기로 사용하려 든다.
어떤 독이 가장 강할까. 전설에나 나오는 독을 찾아다니거나, 아예 새로운 독을 만들어내거나.
심지어 인체야말로 독의 정점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어서.
마침내 인체를 온갖 독으로 채우는 실험이 거듭되었고, 그걸 독문에서는 독종지인. 줄여서 독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삶의 섭리를 거스르는 결과가 멀쩡할 리 없다.
독종지인은 당연히 이지를 상실해서 몸을 녹이는 독기에 미친 듯이 날뛰고, 판단력이 없으니 상황에 대처할 줄 모르며, 독기가 전부 폭발하면 그 즉시 목숨을 잃는다.
다루기 어렵고 약점도 뻔히 드러난 이상, 고생해서 독인을 만들 이유가 어디 있겠나.
그런 이유로 독문에서도 기피하는 독인.
그런 독인이 연독관 안에 있다니. 더구나 멀쩡하게 말까지 건네면서.
정록이 독기를 피하면서 의문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석문 안의 목소리도 바로 의아함을 드러낸다.
“으응? 그러고 보니 환술이나 부리는 가짜 도사가 아니로구나. 더구나 이렇게 굳은 정기까지. 네놈은 누구냐?”
정록과 해원기의 존재까지 눈치챈 듯.
의문 끝에 음산함이 묻어나자,
해원기가 서슴지 않고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뭉클거리는 연기를 토하는 커다란 향로에서 직각으로 꺾인 안쪽 깊이 도사리고 앉은 시커먼 암흑.
해원기의 미간이 절로 좁혀질 만큼 형체조차 쉬 파악되지 않는 그런 어둠이었고,
그 어둠이 해원기의 등장에 출렁거리더니,
“오호호호, 이건 뭐야. 양기가 고르니 아직 딱지도 떼지 않은 순양(純陽), 그런데 저절로 조음화양(調陰和陽)을 이끈다? 그래, 고본정양(固本定陽), 아니, 이건 고본정원(固本定元)이 더 맞겠구나. 호옷, 설마, 설마, 이제야 마지막 시험을? 크큭.”
말은 해도 역시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가.
뭔지 모를 소리를 연방 중얼거리다가 키득거리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어둠이 땅거미 지듯 석실 가득히 퍼진다.
그러나 미간을 좁힌 해원기의 두 눈에서도 신광이 벼락같이 뿜었다.
휘이이이.
석실을 집어삼키려는 어둠을 밀어내듯 발밑에서 일어나는 돌개바람.
앙다문 입이 한 마디를 씹어 뱉었다.
“사황령.”
눈앞에 출렁이는 어둠의 정체가 아직은 모호했지만,
사부에게서 들었던 바로 그것임을 직감했기에.
뭐라고 딱 짚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그냥 일종의 기운이랄까. 그러나 기운도 그다지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는 건 이것이 어떤 의지를 지닌 듯하기 때문이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의지.
생명이라면 당연히 지니는 생성사멸(生成死滅)의 이치를 모조리 부정하고,
생명 그 자체를 미워하며, 희롱하고 괴롭혀서 기어이 이치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끝없는 욕망.
그래서 사황령이라고 불린다.
왜 독종지인이 사람처럼 말하는지 알겠다.
해원기에게서 반사적으로 일어난 풍뢰의 힘.
바로 뒤의 큰 향로가 마구 흔들리면서 뭉클거리던 향연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석실을 뒤덮던 어둠이 진흙처럼 벽에 들러붙는다.
“키힉, 뭔지는 듣고 들어왔느냐? 그래도 사황령이라기보다는 독황령(毒皇靈)이 올바른 이름이지. 한 갑자 넘게 고생하긴 했어도 이제는 오독합일(五毒合一)을 이룬 본존이니까. 그래, 지금부터는 독황이라고 불러라. 크헤헤헤헤.”
해원기가 자신을 알아주는 게 기쁜지.
어둠이 큰소리를 섞으며 괴소를 터뜨렸다.
사황령이 아닌 독황령. 어둠의 정체는 스스로 오독합일을 이루었다고 독황을 자처한다.
해원기의 눈썹이 불끈 일어섰다.
처음부터 이 어둠이 떠들어댄 희한한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었다.
삼음을 도울 양수니, 쇄가 쇄로 되어야 어쩌니저쩌니하던 것부터 고본정원이라는 심오한 구절까지.
그러나 그것들의 의미를 살필 새 없이 머리에 콱 박히는 단어. 바로 오독합일.
절로 오독진살(五毒眞煞)을 떠올리게 한다.
사천당문의 당령과 약왕당을 찾으면서 단목정에게 들었던 얘기. 백여 년 전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고, 아울러 당문의 추문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한 부분.
단목정에게 들었을 당시에는 증명단도 있던 자리라서 자세한 설명을 삼갔으나.
사부가 일러주었던 고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감로보병의 수정지력이 신왕공을 한껏 북돋는다.
펑.
검왕법신의 기세가 향로를 뒤집어버리고,
“너는 오독동(五毒洞)과 무슨 관계냐?”
우릉.
벽력같은 음성에 석실이 통째로 울렸다.
석실을 뒤덮으려던 어둠이 이에 놀란 듯 와르르 떨린다.
뚝 끊긴 괴소.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본존에게 감히…… 독황, 독황이라고. 아니지, 오독존(五毒尊)? 독문종사(毒門宗師)? 에에에, 그게 뭐 중요하다고. 크흐흠.”
벌컥 화를 내다가 뭔가 헷갈리는 이름을 중얼대더니,
어둠이 확 쪼그라들어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한쪽 무릎을 세운 반가부좌로 바닥에 앉은 인물. 새까맣게 반질거리는 머리칼이 어깨를 덮고 바닥까지 드리워져서 용모를 알아볼 길이 없으나, 온몸에 몇 겹이나 두른 짐승 가죽 아래로 삐죽 나온 맨발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발목까지 덮은 검푸른 비늘, 한 자는 돼 보이는 뾰족한 발톱이 달린 발가락이 앞뒤로 나뉘어 도저히 사람의 발이라고 여길 수 없다.
얼핏 동강을 연상시키는 기형의 발.
그러나 해원기는 그 기괴한 외모보다 이 인물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오독존, 독문종사.
당세에는 아는 이가 거의 없는,
백여 년 전에 사라졌던 이름이다.
마종본맥인 지부에 대항하고자 천하무림이 뭉친 신주영웅회. 정사흑백을 가리지 않고 백여 개나 되는 문파와 방회가 모이면서 같은 계통의 무인들이 서로의 배움을 논하게 된 게 그 시초였다.
소위 논무상조(論武相助). 무학의 경지를 한 단계 높이고자 서로 돕는다는 좋은 뜻이지만,
당시는 유례없는 정파성세(正派盛世). 어떤 분야든 전통의 정파 명문이 흐름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독문도 마찬가지.
더구나 독은 사파 흑도가 대부분이요, 유일하게 정파에 속한 곳은 사천당문뿐이었으니.
가공할 지부의 마세를 독으로 제거하려는 멸마지계(滅魔之計)의 결정권도 당연히 사천당문이 쥐게 되었다.
모든 마왕의 우두머리인 천마(天魔)라도 녹여버릴 수 있는 독. 그야말로 절대지독(絶對之毒)을 만들어내 마종본맥을 멸절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파인 사천당문은 무공을 완전히 배제한 독의 사용에 거부감을 드러냈으며,
이를 제안한 독문의 다른 문파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사천당문 자신이 삼재금독(三才禁毒)이란 이론적 성취를 지니고 있었기에.
이에 가장 반발한 문파가 바로 남황(南荒)의 오독동.
중원에는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군소문파였지만, 대의를 좇아 신주영웅회에 참여했건만. 오히려 독문 내부에서 사천당문에게 핍박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분개한 나머지 도를 넘는 다툼을 벌이다 마침내 신주영웅회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진다.
그 오독동의 주인을 일컫는 명호가 바로 오독존이요, 당시에 사천당문보다 훨씬 높은 독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광망하게 독문종사를 자처했었다나.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오독존이 설마.
정록이 석실 밖에 있고, 육신지궁을 서둘러 무너뜨려야 하지만.
해원기가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오독존이란 말인가.
“멸마지계를 주장하다 신주영웅회에서 쫓겨난 그 오독존?”
재차 신분을 확인하려는데.
키이잉.
괴인의 새 발톱 같은 발이 날카롭게 오므라들면서 산발한 머리칼 앞에 새까만 광채가 어린다.
머리칼과 똑같이 반들반들 윤이 흐르는 동그란 광채.
“독황이라니까!”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갈라진 고함과 함께 새까만 광채가 화살처럼 날아들고,
해원기가 본능적으로 대우신장을 갈겼다.
퍼엉!
공간을 뒤집어 내던지는 대우신장인데.
새까만 광채가 부딪치자마자 공 튀듯 돌아가면서,
해원기의 양쪽 소매가 어깨 어림까지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독강(毒罡)!”
해원기가 깜짝 놀라 손을 크게 털었다.
대우신장을 무시하고 전해진 독기가 소매를 전부 태워서 가루로 만들다니. 검왕법신의 호신지기에도 피부가 바늘로 찌른 듯 따끔하다.
그냥 독이 아니다. 독공을 지극한 경지로 끌어올린 강기는 이미 신공을 강상으로 연성한 것과 같으니.
엄청난 능력에 손이 빠르게 어깨로 돌아갔다. 거의 백독불침에 이른 신왕공이지만, 이런 독강이라면 고검으로 직접 제탁지검을 구현해야 한다.
이어지는 독강을 맞으려고 발검의 자세를 취하는데.
“크흐흥, 그래, 음양유명독강(陰陽幽明毒罡)이란 거다. 양의(兩儀)로 기초를 세워야 삼재금독을 실을 수 있으니까. 이런 이치도 모르고서 독문의 종주 노릇을 하려는 얼빠진 것들이. 자, 그러면 시험을 해봐야.”
키이이잉.
또 혼자서 중얼중얼. 발톱을 꼼지락거리자 이번에는 쟁반만 한 새까만 광채가 떠올랐다.
크기만 커진 게 아니라 주위에 달무리처럼 흐릿한 기운을 두르고 팽이처럼 돌아가면서.
석실 안의 기류가 모조리 그 광채로 빨려 들어간다.
음양유명독강.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 그러나 오독존이라 여겨지는 이 괴인은 삼재금독까지 알고 있다.
해원기가 고검의 손잡이를 쥐면서 자세를 낮추었다.
생전 처음 겪는 엄청난 독공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쟁반만 한 음양유명독강이 움직이자마자 해원기의 한쪽 발이 앞으로 미끄러지며 어깨에서 번갯불이 튀어나왔다.
발검제형에 판분천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검왕오형이 자연스럽게 천손검법에 스며든다.
더구나 상대를 사황령이라고 인지한 순간부터 풍뢰지력이 떨치고 일어나서.
번쩍.
그야말로 뇌신이 벼락을 내치듯.
음양유명독강을 그대로 꿰뚫었다.
쾅!
석실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폭음. 음양유명독강의 새까만 광채가 안개처럼 흩어지는데,
‘음?’
해원기가 경악을 삼키며 급히 내디딘 발에 힘을 주었다.
고막을 울리는 폭음까지 터졌건만, 어째서 검이 허공을 찌른 것처럼 중심이 앞으로 확 쏠리는가.
힘이 맞부딪쳤으니 반탄하는 충격이 생겨야 하거늘.
“크에에, 뭐냐? 벽독(辟毒)의 검력(劍力)? 뭐 이따위가 있어! 아니, 아니지. 이것도 독하니까. 그래, 시험, 시험이다아아.”
스스스스.
오독존도 크게 놀란 듯. 강기가 부서진 것보다 일체의 독기를 구축하는 제탁지검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등진 석벽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며 또 괴이한 소리를 지껄여댄다.
여전히 거창한 산발에 가려진 신체. 양손은 보이지 않고 새 발톱 같은 두 발로 어기적어기적 벽을 타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거미 같다.
해원기의 일검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서, 도대체 뭘 시험한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