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산정취탁(散精聚濁) (4)
장안의 중심가. 종루와 고루 앞에서 벌어진 일장의 싸움 끝에 밀각 각주인 첨유진과 암둔으로 빠져나갔던 여 대부.
그때 여 대부로 변신한 정록이 은밀히 부탁하지 않았다면, 첨유진이 어찌 도주할 수 있었겠나.
그렇게 헤어지고 벌써 계절이 두 번째 바뀌어 간다.
동창의 내부를 염탐한다고 혼자서 호랑이 굴로 들어간 친구다.
그러지 않아도 경사로 향하는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정록을 찾는 것이었는데.
참으로 뜻밖의 해후.
그러나 다시 만난 친구끼리 그간의 회포를 풀기에는 시간과 장소가 다 어울리지 않는다.
먼저 서두르기 시작한 이는 정록.
“해 형이 왜 여기,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제길, 이러면 시간이 더…… 따라오게.”
벌떡 일어나 해원기를 잡아끈다.
그 다급한 모습에 의문을 표할 새도 없다. 해원기가 바짝 옆에 붙자,
“설명할 시간이 없어. 여긴 동창에서 만든 육신지궁, 이름이야 어쨌든, 육악의 괴물을 키우고 독으로 교배(交配)를 실험하는 곳이야. 워낙 공간이 넓고 진도와 기관이 섞여서 전모를 아는 데만도 한참 걸렸.”
“교배?”
정록이 이곳에 있는 이유부터 궁금한 게 많다. 그래도 워낙 서두르는 모습이라 일단 따르기만 할 셈이었는데.
희한한 얘기에 반문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육악의 괴물을 키워 독으로 교배하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
“응, 나도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어제 겨우 그런 사실을 파악했네. 이곳을 맡은 주초면국 놈들이 워낙 태만해서 관리가 엉망인 덕을 좀 봤지. 아, 하여간 말도 되지 않는 짓을 벌이는. 이쪽으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썼지만, 이런 곳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지 않아도 이곳에 당규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던 중이었다.
미망산이라는 약물에 취해 실혼인이 된 채로 독에 관한 이론만 웅얼대던 당규. 사천당문의 소가주로 집안의 독경(毒經)을 들고 가출했다더니.
육악과 사황령만 염두에 두었다가 의외의 단어에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가 눈앞이 확 트이면서,
“여기는?”
또 물어야 했다.
주위를 아홉 개의 기둥이 둥글게 둘러싼 것과 실혼인들이 번갈아 가루를 뿌리는 건 똑같은데.
이번에는 가운데에 수조 대신에 반구형의 철망.
안에는 굵기가 제각각인 장대가 빼곡하게 꽂혔고 안개가 자욱하다.
그 안개 속에 뭔가가 좁아터진 장대 사이를 오가는지 계속해서 울리는 작은 소음.
실혼인의 수도 알유를 가둔 곳보다는 훨씬 많다.
정록이 주위를 둘러보며 바쁘게 뭔가를 따지다가,
“음, 대풍(大風)의 새끼를 가둔 닭장이야. 태어난 지 열흘도 되지 않았다더군. 됐어, 여기는 지나가도 되겠어.”
닭장.
어처구니없는 이름이지만, 알유에 이어 대풍까지.
그것도 앞의 알유는 실혼인 한 명을 통째로 집어삼켰고, 이곳의 대풍은 이제 새끼라.
신화에 나오는 육악을 정말 되살려 기른단 말인가.
“이런 허무맹랑한!”
해원기의 탄식에 정록이 또 다른 통로를 가리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맞아. 말도 되지 않지. 진짜 육악일 리가 없어. 앞의 알유는 저 멀리 남쪽 늪에 산다는 악어(鰐魚)라는 놈의 변종이고, 이 대풍도 독짐(毒鴆)의 일종일 거야. 나머지도 전부. 이걸 육악으로 바꾼다는, 어디서 그런 방법을 구했는지 요사스럽기 짝이 없더라고.”
악어나 독짐 모두 이름만 들어본 짐승.
본 적은 없으나 극히 흉악한 성질을 지녔다던데, 그런 짐승을 모아다가 육악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다니.
“요사스럽다?”
“저 실혼인들. 멀쩡한 사람들을 미망산에 서서히 빠져들게 하면 체내의 정기(精氣)가 차츰 밖으로 빠져나온다고 하더군. 이 육신지궁에 가득 찬 이 몽롱한 연기 있지? 뭔지 모를 괴이한 향로가 있거든. 거기서 나온 향이 실혼인에게서 빠져나온 정기와 어울려 탁해진 거야. 나도 오자마자 하루에 한 알씩 이 몽롱한 연기를 버티는 단약을 받았으니까. 어, 자네는, 음, 괜찮지?”
서두르다가 이제야 생각이 미쳤는지.
해원기를 급히 살펴보다가 금방 맥 풀린 표정으로 물었다.
고력사의 지하 무덤에서 목격한 절세검왕의 신위. 여기까지 멀쩡하게 온 해원기가 무슨 영향을 받았을 리 없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썹을 세웠다.
처음부터 기이하게 여겼던 향연이다. 신왕공의 제탁지력이 반발하여 일어나지도 않았고, 맡으면서 뭔가 상쾌함을 느꼈던 이유.
정기가 어린 연기였구나.
그러면서 동시에 머릿속을 번갯불처럼 스치는 생각.
“산탁취정(散濁聚精)을 거꾸로?”
“역시. 나도 그 구결을 떠올렸었지.”
바로 답하는 정록의 표정도 바위처럼 딱딱해진다.
산탁취정.
탁기를 흩어내고 정기를 모은다. 이는 모든 내가공부(內家功夫)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구결.
천지의 조화로 생명을 얻어 태어난 인체는 자라면서 본래의 순수함을 잃는다. 불을 거친 음식을 입에 대고, 갖가지 맛에 혀가 익숙해지며, 평소의 좋지 못한 습관이나 행동이 차츰 몸을 망가뜨리니.
그래서 내공의 시작은 호흡. 체내의 탁기를 내뱉고 자연의 정기를 들이마신다.
이 수련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스스로 탁기와 정기를 구분할 수 있게 되고,
필요에 따라 강제로 조절할 수도 있어서.
흔치 않게 병이 들거나, 뜻하지 않게 중독되는 경우에 내공으로 병과 독만을 골라 체외로 배출한다.
신체의 치료와 수복을 동시에 이루는 비결 아닌 비결.
그런데 그 산탁취정을 거꾸로, 그것도 내공의 수련이 아닌 괴물을 기르는 방법으로 쓴단다.
해원기의 시선이 저절로 실혼인들을 향했다.
“계속해서 정기가 빠져나갔다간.”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육신지궁에 있는 실혼인은 전부 짐승의 먹이에 불과했다.
잠깐 멈춰섰던 정록이 황망히 손을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닐세. 빨리 다음 산정뢰로 가야 해. 이십사아문 중 완의국이 왔다고.”
육악을 하나씩 가둔 울이 바로 산정뢰란 걸 알게 되었으나.
계속 정록이 서두르는 이유를 아직 모른다.
“뭘 하려는 건가?”
또 통로로 접어들면서 해원기가 어깨를 나란히 하자 정록이 입맛을 다셨다.
“쩝, 여길 뒤집어놓으려는 거야. 생각 같아서는 어디서 화약이라도 잔뜩 얻어다 전부 터뜨려버려야 속이 풀리지만. 무고한 이들까지 해를 입게 할 수는 없지.”
육신지궁이니 뭐니.
결국은 사람들 정기를 빼서 괴물들에게 먹이는 흉측한 소굴이다.
해원기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다니는 처지, 정록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장안에서 첨유진을 따라 경사로 갔었는데, 가자마자 쉬지도 않고 남쪽으로 향하는 거야. 그러면서 녹림을 포위 공격한다는 계획이 나오고. 본래 요상을 핑계로 밀각의 내부를 살피려다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고력사의 지하 무덤에서 중상을 입은 여 대부로 변신했던 정록.
‘위초산채’의 암호로 녹림장관에 연락을 취하고 나서도 어떻게든 도울 방안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충성을 다 하겠다고 자원하니까 첨유진이 이쪽으로 보내주더구먼. 여 대부란 놈이 토목기관 쪽에 뛰어났었잖아. 그런데 묘한 지시를 덧붙이더라고. 사나흘에 한 번씩 이곳의 동태를 자세히 적어 올리라나. 내선(內線)이라고 여기서 유일하게 외부로 연결되는 곳이 있는데, 미리 정해진 놈이 있어서 알아서 받아줄 거라는 둥. 아, 이 얘기가 아니지. 젠장.”
설명이란 게 일단 시작하면 말이 길어지게 마련이다.
정록이 자신에게 불만을 표하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여기 실정을 알고, 또 녹림장관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서. 나름대로 머릴 좀 썼어. 연독관을 넓히다가 뱀굴이 나왔거든. 마침 그 근처에 수사의 산정뢰가 있기에 통로를 연결해서 밖으로 내몰았지. 그놈 잡으려고 다 튀어나가면 그때 몸을 빼려던 건데.”
자산에서 해원기와 오소민을 덮쳤던 수사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육신지궁에 들어가면 내선을 통하지 않고는 외부와 연락이 되지 않는 모양.
정록은 한편으로는 몸을 뺄 생각으로, 또 한편으로는 녹림장관을 공격하는 동창에게 혼란을 줄 셈으로 수사를 탈주시켰던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해원기의 말에,
“그 수사, 내가 잡았네.”
“엥?”
바쁘게 통로를 빠져나가던 정록이 멈칫거렸다.
육신지궁에 도착해서야 정록은 밀각의 대부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곳임을 깨달았다.
주초면국의 덜떨어진 작자들뿐 아니라 산정뢰와 실혼인을 관리하는 자들까지.
또 연독관이란 곳은 아예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기에.
우선은 지하의 토목기관을 둘러보며 지상에 회랑으로 구축한 음양쌍반진도를 점검하는 척해야 했다.
본래 고사사예(古士四藝) 중 고화문(古畫門)을 이은 정록이다.
토목기관이니 희한한 진도니 하는 방술잡학(方術雜學)에도 꽤 기초가 닦인 편이지만, 이 육신지궁은 그로서도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방대한 공간.
다행히 새로 판 구멍에서 큰 뱀굴이 발견되고 수사의 통로가 그쪽으로 연결된 기회를 얻었다.
혼란을 일으킨 후에 그 틈에 몸을 뺀다.
이미 ‘위초산채’라는 명목 아래, 밀각육학사가 죄다 동원되었고 이십사아문의 태반이 움직였다는 소식을 들은 상태.
처음 여 대부로 변장했을 때 기대했던 정보를 다 얻지는 못했으나, 더 머물 이유가 없었고.
그러면서 어떻게든 이 흉악한 실험장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통로 다음의 세 번째 공간은 두꺼운 철봉을 엮고 위에는 철판으로 뚜껑까지 덮은 거대한 울.
안에는 모래와 풀만 널렸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홉 개의 기둥 주위에 백여 명이나 되는 실혼인들이 비틀비틀 오간다.
정록이 거대한 울을 가리키면서 천장을 살폈다.
“여기가 수사가 있던 곳이야. 이 산정뢰가 어떤 모양으로 이어졌는지도 지금 확인하는 걸세. 처음에는 어지간히 미로를 거치면서 헷갈리게 했거든. 흥, 기관중추에 처박아 둔 덕분에 대강 추측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여기까지가 남쪽이로군. 그러면 나머지 산정뢰 셋은 북쪽에서…… 으음.”
알유, 대풍, 수사가 남쪽의 산정뢰.
그렇다면 착치, 봉희, 구영의 산정뢰가 북쪽일 터.
외부에서 회랑의 모양을 보며 진세를 짐작했던 해원기라, 정록이 인상을 쓰는 게 뭔가 풀리지 않은 문제에 봉착했다는 걸 알아챘다.
“삼재도형 두 개가 이상하게 겹쳤던데. 무슨 문제가 있나?”
“남삼양(南三陽), 북삼음(北三陰)으로 서로 맞물려 가두는 형국이어야 하니까. 그런데 요기 다음에 바로 연독관이 있어서. 쌍반진(雙反陣)을 이딴 식으로 구성하는 게 어디……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옥침몽롱대법이 더해져 외부에선 아예 보이지도 않는 곳이거늘.
새삼스레 해원기가 신기해서 정록이 눈을 껌뻑이지만,
해원기는 백여 명의 실혼인을 보면서 바로 말을 받았다.
“북삼음의 산정뢰는 어떤 차례지? 혹시 연독관이 구영의 산정뢰와도 이어지나?”
서두르던 정록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말투.
“으응. 맞아…….”
“구영의 산정뢰를 본 적 있는가?”
다그치는 듯한 질문이 평소의 해원기와는 다르지만, 멀거니 답하던 정록의 눈매가 바짝 당겨졌다.
절세검왕. 눈앞의 더벅머리 친구는 그 풍모와 재주가 세상에 짝을 찾을 수 없다는 절세검왕 아니더냐.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러고 보니.”
표정이 일그러진다.
“육신지궁에서 누구나 기피하는 연독관의 노독물. 그 노괴가 구영의 산정뢰만은 직접 관리한다고 해서 보여주지 않았어. 음양쌍반진도의 구성도 축(軸)이 항상 연독관 쪽이었고, 지하의 토목건축도 연독관 쪽으로만 넓히는 방향! 설마?”
말하면서 점점 커지는 정록의 눈이 마지막에 홱 한쪽으로 향했다. 수사를 가두었던 거대한 울 바로 뒤에 커다랗게 입을 벌린 구멍.
“음양쌍반진도가 아니라, 삼양을 육양개태(六陽開泰)로 불리고 그 위에 삼음을 극음폐비(極陰閉否)로 올리는. 구전화합술(九轉和合術)?”
진법이라기보다는 술법에 속하는 명칭이 툭 튀어나오고,
해원기가 이를 악물었다.
“여긴 고실(蠱室)이군.”
고(蠱)를 낳는 곳.
육신지궁의 정체를 파악하자 해원기와 정록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커다랗게 입을 벌린 구멍, 연독관이 있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