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산정취탁(散精聚濁) (3)
웅.
해원기가 들은 건 그저 모호한 울림뿐이었다.
당규를 피해 들어간 구멍. 그때부터 이어진 건 계속 갈라지는 통로였고, 곧장 복잡한 미로에 빠져버렸다.
잘못 선택하면 꽉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오거나 갈라졌던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기 일쑤.
잠심침령으로 감각을 비상하게 일깨웠건만, 방향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렵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움직이기만 해서는 체력만 허비하게 된다.
기척을 감추느라 계속 펼친 부신수영 역시 속도보다는 은신에 중점을 둔 경공.
희미한 등은 훨씬 줄어들었고, 몽롱한 연기는 더 짙어졌다.
한정 없이 머물 수도 없다.
부신수영을 풀고 멈추어섰다.
‘함정은 없어도 지독히 복잡한 건축이다. 지금까지 내가 거쳐온 길이.’
앞에 세 갈래 구멍을 두고 바닥을 유심하게 내려다본다.
목책 같은 회랑으로 만든 기이한 진세, 그 위에 겨우 이름만 알게 된 옥침몽롱대법이란 환술. 이런 설비로 감추어둔 지하가 평범할 리 없거늘.
토목기관(土木機關) 또한 진법의 이치를 바탕으로 한다.
옥침몽롱대법을 떠들었던 목소리가 언급했던 산정뢰와 연독관을 찾으려면 이 미로를 파악하는 게 우선.
지나온 경로를 다시 한번 되새겨 이 미로의 흐름을 살피려는데.
후우웅.
지하를 흔드는 괴음. 흙먼지까지 떨어지는 통에 집중하던 시선이 절로 한쪽을 향했다.
세 갈래 구멍 중의 맨 왼쪽.
조금 전의 모호한 울림과는 달리 정확히 그쪽에서 나온 괴음이고, 더구나 이제껏 느껴지지 않았던 불쾌한 기운이 확 밀려들어서.
해원기가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짐승의 울음과 불쾌한 기운이라면.’
수사와 같은 육악 중의 하나일 것이다.
미묘한 단서라도 지금의 해원기에게는 길잡이가 된다.
오소민이 눈과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오밤중에 해괴한 장소에 등장한 자들치고는 어이없을 정도로 요란스레 인사를 나누어서 가까이 갈 필요조차 없었지만,
한마디도 흘려들을 수는 없다.
땅에서 튀어나온 둘이 고함치듯 인사를 올리자,
가마를 덮은 면포가 조금 열렸다.
“왜 둘이야? 밀각에서 공사를 감독하라고 보낸 녀석까지 하면, 그래, 넷이어야 하는 거 아니냐?”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가 불만을 드러내고, 부복했던 둘의 머리는 더욱 낮아진다.
“아, 그게. 밀각의 대부는 음양쌍반진도(陰陽雙反陣圖)를 교정하느라 기관 중추를 떠날 틈이 없고. 저, 연독관의 노독물(老毒物)은 본래 나오지 않는…… 네, 그래서, 산정뢰를 맡은 저와 실혼몽롱을 맡은 여기…….”
그러지 않아도 잔뜩 겁을 먹고 있던 판.
더듬거리며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한다.
“흥! 그 주정뱅이는 대체 여기를 어떻게 관리했던 거야. 어쩐지 평소와 달리 야점 따위를 부지런히 짓고는 돌아갈 생각을 안 하더니만. 이 김에 튈 생각이었구먼. 그럼 지금 이 육신지궁(六神地宮)은 산정뢰주, 네가 맡았네? 이거 참, 어처구니가 없는. 가만!”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산정뢰주의 말을 끊었던 탁청대인.
분통이 터져 누군가를 욕하더니 돌연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밀각에서 보낸 대부? 들은 기억이 난다. 도지태사 밑에서 배운 애라고. 허! 본래 계획대로였으면 도지태사와 상의신모가 왔을 터. 그런데도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을 리가, 음양쌍반진도를 교정한다고 했지.”
“네? 네.”
산정뢰주의 대답은 들리지도 않는 듯,
면포가 가마 위로 휙 뒤집히고 화려한 홍단화(紅緞靴)가 튀어나왔다.
옷감으로도 귀한 붉은 주단을 가죽에 덧대어 만든 신발. 그 신발이 땅을 딛는 순간 가마 앞에 도열했던 열 명의 길잡이가 전부 한쪽 무릎을 꿇고,
흰 치마, 흰 소매가 드러나자 좌우의 칼잡이들이 허리를 굽히며,
마침내 온갖 장식으로 뒤덮인 머리가 나오자 가마 뒤에 창을 든 스무 명까지 머리를 조아린다.
황제라도 나타난 것처럼 어지간히 정중한 예의.
그런 예의를 본 척도 하지 않는 탁청대인은 살집이 두둑한 중년 부인인데.
나오자마자 목을 신경질적으로 꺾어서 수십 개의 머리 장식이 좌르르 흔들리고,
“공사 감독하러 보낸 애가 진도를 왜 교정해? 산정뢰주, 똑바로 보고해!”
몸집과 달리 가는 목소리가 바늘처럼 뾰족해졌다.
“자, 잘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이 위세에 기겁한 산정뇌주와 실혼몽롱을 맡은 인물이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는 모습은,
우습다 못해 가련할 정도.
전신을 벌벌 떠는 모습이 오소민에게도 훤히 보였다.
이 통로는 갈수록 넓어지고,
시야를 몽롱하게 만드는 향연 속에 고약한 비린내가 섞이기 시작해서.
해원기가 속도를 높였다.
‘수사가 풍겼던 기운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 지하의 미로는 괘상(卦象) 몇 가지를 뒤섞어 놓은 듯하니.’
지상에 포설한 이상한 육합진과 전혀 맞지 않는다.
오소민에게 육합진의 구궁장뢰를 설명해주느라 팔문금쇄를 예로 들어주긴 했으나, 삼양개태로 발동하는 울타리 속에 팔괘를 설치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적아를 불문하고 진도의 변화에 함께 파묻힐 터.
조금 전까지 겪었던 지하미로의 의미를 잠시라도 따져보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속도를 높이던 해원기의 신형이 돌연 멈추었다.
“흐르릉, 흐릉.”
코 고는 소리.
이미 당규에게서 들었던 소리라 곧장 몸을 천장으로 띄우면서 부신수영으로 바꾸었는데.
동시안의 시선이 비췻빛으로 번뜩였다.
넓어진 통로 끝의 탁 트인 광장.
족히 수십 명을 수용할 큰 공간이 나오고, 참으로 해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에.
“뭐라고? 이게 무슨, 아니다,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다. 앞장서.”
벌벌 떠는 산정뢰주에게 겨우 대강의 보고를 들은 탁청대인이 기가 막혀 소매를 내저었다.
육신지궁에서 기르던 수사가 탈주한 지 한참 되었는데,
어떻게 탈주했는지도,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단다.
내선이 죄 끊겨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그저 밀각에서 온 대부에게 음양쌍반진도가 제대로 되었는지 봐 달라고만 한 게 전부.
멍텅구리 주제에 권한은 뺏기기 싫어서 파견 나온 대부를 슬쩍 기관 중추에 처박아놓았다는 거다.
화가 나고 신경이 곤두서서 길잡이가 조심스레 올리는 말도 듣지 않았다.
“대인, 굳이 친히 납시지 않아도 저희가…….”
“시끄럽다.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좌우도수(左右刀手)와 후위창수(後衛槍手)를 전부 풀어 주위를 경계토록 하고, 너희 호교십시(護轎十侍)는 전부 따라와.”
가마의 좌우를 지키던 칼잡이가 좌우도수, 뒤를 지키던 스무 명의 창잡이가 후위창수.
가마 앞에서 길잡이 노릇을 하던 열 명이 호교십시인 듯.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탁청대인이 빠르게 지시를 내리니, 감히 거스를 자가 있을 리 없다.
산정뢰주와 실혼몽롱을 맡은 자 둘이 엉거주춤 일어서는 것도 못마땅해서,
“뭘 꼼지락거리는 게냐? 너는 밀각 대부를 불러오고, 너는 연독관의 노독물을 끌고 나와.”
거듭 몰아붙이는 통에 나머지 인원들이 콩 튀듯 움직였다.
망루 뒤의 구멍으로 급하게 몸을 날리는 자들, 마지막으로 탁청대인의 백색 의상까지 사라지자.
가마꾼 넷은 망루를 지키고, 나머지 도수와 창수가 빠르게 회랑 주위로 달려가는 것이.
꽤 훈련을 거친 티가 나서.
오소민이 인상을 썼다.
탁청대인을 영접한다고 환술을 해제한 덕에 회랑이 시야에 드러났지만,
이래서야 더 접근하기 어렵게 된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탁청대인이 사라진 망루 뒤를 노려보았다.
‘도지태사와 상의신모는 조화부인이 차린 야점으로 달려왔다는 자들. 이십사아문의 도지감과 상의감이었지. 그렇다면 저 탁청대인이란 자도 이십사아문의 하나.’
태감 주제에 태사니 신모니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설쳤다고 들었으니 살집이 두둑한 중년 부인도 같은 부류일 것이다.
탁청은 깨끗이 씻는다는 의미.
영민한 오소민이 대강 신분을 추측할 수 있었고,
‘궁중에서 의복 세탁을 맡은 완의국(浣衣局)일 거야. 그런데 가마에 호위까지 붙여서 후궁인 양 행세라니. 게다가 야점을 지은 주정뱅이란 자가 본래 이곳, 육신지궁을 맡았던 듯…… 아이, 밀각의 대부도 있다는데 어쩌지?’
탁청대부가 걸친 백색 의상이 귀한 나삼(羅衫)에 흰 면오(綿襖)를 덧댄 후궁의 옷차림이란 것도 알아보았다.
탁청대인이 완의국이면, 주정뱅이는 아마도 주초면국(酒醋麵局).
이십사아문이 내부적으로 갈라진 것 같다는 추측을 하긴 했어도 어차피 동창이라는 큰 덩어리 안의 문제다.
당장 이곳에도 밀각의 대부가 와 있다고 하잖나.
음양쌍반진도니 연독관의 노독물이니 전부 처음 듣는 소리지만,
육신지궁이란 곳에 잠입한 해원기가 점점 더 걱정된다.
오소민의 시선이 회랑 주위로 흩어지는 자들을 빠르게 훑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부신수영에 벽호유룡(壁虎游龍)의 신법까지 더해 천장을 타고 탁 트인 공간으로 스며들자,
해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에 거대한 수조(水槽)가 놓였고, 그 수조 주위를 빙 둘러 박힌 아홉 개의 기둥. 검은색과 붉은색이 번갈아 칠해진 그 기둥 위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자들은 전부 당규처럼 비틀거린다.
뭐가 안에 들었는지 모를 뿌연 액체. 사다리를 타고 기둥 위로 올라간 자들은 전부 가루 같은 것을 뿌리고 있다.
한 움큼도 되지 않을 분량. 가루를 뿌리고 나면 사다리를 내려와 바닥을 더듬어 가루를 쥐고 다시 올라간다.
기둥에 칠해진 색에 따라 바닥에 쌓인 가루도 조금 다른 빛깔.
느릿느릿, 비틀비틀하면서도 그것밖에는 할 게 없는 것처럼 계속 반복하는데.
가루가 떨어진 액체는 거품도 일지 않고, 파문도 생기지 않는다.
‘저들도 당규처럼 미망산에 취한 실혼인. 기둥은 무엇이고 수조 안에는 뭐가 있기에.’
이게 무슨 짓일까.
그런데.
수조의 뿌연 액체를 자세히 살피려고 공력을 높이는 순간,
후우우우웅.
뿌연 액체가 돌연 출렁이면서 수조가 크게 흔들렸다.
물보다는 꿀처럼 점성을 가진 뿌연 액체. 한쪽이 불쑥 치솟더니 마침 기둥 위에서 가루를 뿌리려던 자를 덮치고,
쿠륵.
그대로 수조 안으로 빨아들이곤 도로 잠잠해진다.
해원기의 눈이 커졌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그냥 가라앉는 게 아니다. 산발한 머리칼, 남루한 의복과 신발 따위가 먼저 들뜨고. 실혼인이라도 허우적거리는 게 본능일 터.
그런데 이 뿌연 액체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한입에 집어삼킨 것처럼 사람 하나의 흔적이 감쪽같이 지워지고,
수면에는 티끌 하나 남지 않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더구나 다른 기둥에 붙은 실혼인들이 멍하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어디선가 또 한 명의 실혼인이 빠진 수를 채우듯 비척거리며 나오는 건 뭔가.
‘약수(弱水)의, 알유인가?’
육악 중의 알유. 그 이름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해원기가 새로이 실혼인이 나온 곳을 찾았다.
들어왔던 곳과 반대쪽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
해원기가 그대로 그 구멍을 향해 천장을 가로질렀다.
또 다른 통로. 그 통로를 지난 곳에 이와 유사한 광경이 보인다면 확실히 육악을 키운다는 증거가 된다.
이미 통로 저편에도 요사스러운 기운이 진하고,
실혼인 외에 다른 기척이 없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에 해원기의 신형은 바람처럼 빨랐지만,
설마 통로의 천장에 구멍이 열리면서 누가 뚝 떨어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쿵.
“윽, 누구…….”
“이게 무슨.”
부신수영에 벽호유룡. 천장을 타고 미끄러지던 해원기에게 부딪치면서 바닥에 떨어진 자.
엉덩방아를 찧으며 눈을 홉뜨며 두 손을 떨치고,
깜짝 놀란 해원기도 순간적으로 신형을 뒤집어 내려서며 손을 뻗었는데.
서로의 손이 중간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멈춰버렸다.
좁은 어깨에 마른 체형, 훤한 이마에 굵은 눈썹을 지닌 중년 사내. 몸에는 그럴듯한 심의를 걸쳤고, 허리에는 철필 한 자루를 꽂았다.
이 중년 사내를 해원기는 이전에도 지하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밀각의 여 대부. 물론 진짜는 장안 외곽 고력사의 무덤 속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으잉? 해 형?”
홉뜬 눈을 껌뻑이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눈앞의 여 대부는 바로,
해원기가 내뻗은 손으로 중년 사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 형!”
정록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