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06화 (306/410)

제77장 산정취탁(散精聚濁) (2)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이다.

산발한 머리칼 사이로 이목구비가 얼핏 보였을 뿐이지만, 왠지 눈에 익은 느낌.

가느다란 눈매, 오뚝한 콧날과 갸름한 턱선이 아주 준수한 젊은이.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로 보이는 이렇게 잘생긴 사내를 본 적이.

‘구란와자?’

해원기가 기억을 떠올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남장했던 당령과 거의 똑같은 용모다.

그렇다면 이 젊은이는 바로 양귀비로 분장했던 당규, 가출했다는 사천당문의 막내아들이다.

개봉에서 약왕당으로 가는 도중에 함께 했던 당령. 꽤 시간이 지난 편인데 지금까지도 당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더구나 ‘놀자판’에 어울려 구란와자에서 여장까지 했던 당규가 왜 여기 있는지.

“흐르르르.”

코 고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는 당규.

지척에 있는 망루를 찾느라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다가 겨우 그 안에 향로를 내려놓는다.

푸슈슈슈.

망루 바닥에 무슨 장치가 있는지 팔뚝만 한 향 한 자루가 폭발하듯 연기를 뿜어내고,

해원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감각에 인상을 썼다.

사기. 환혹의 사법이 강렬해졌다.

향로를 내려놓은 당규는 오히려 신이 나는지 나왔던 곳으로 펄쩍 뛰어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몸이 가벼워진 것처럼.

덜컥.

뒤집혔던 바위가 다시 닫히는 소리에 해원기가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

이쪽만이 아니라 여섯 개의 망루에서 전부 자욱한 사기가 퍼진다.

당규처럼 누군가가 향로를 동시에 놓았다는 뜻. 진세를 이룬 이 기묘한 회랑 아래, 지하에 기관을 갖춘 공간이 있다.

민가 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 연못을 중심으로 삼각형이 겹친 형태로 회랑을 설치하고,

그 회랑이 보이지 않도록 진세에 환혹의 사술까지 썼으면서,

실제로는 지하에 기관을 갖춘 공간을 두었다.

막대한 재원과 인력이 동원되어야 가능할 일.

‘동창일 수밖에 없지. 이 아래에서 육악과 사황령을 제조한 건가.’

부신수영으로 유령처럼 바위로 접근하면서 동시안이 기관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런데 당규는.’

해원기의 미간에 파인 주름이 펴지지 않는다.

미친 사람 같은 그 행동은 어떻게 된 걸까.

벽에 듬성듬성 걸린 작은 호롱 탓에 흐릿한 불빛.

바위를 뒤집어서 지하로 내려온 해원기가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사람 둘이 겨우 움직일 좁은 통로. 캄캄한 밖에 비하면 훨씬 밝아진 셈이지만, 워낙 불빛이 약해서 멀리까지 보이진 않는다.

해원기가 내려선 곳은 통로의 끝이어서 당규는 일을 마치고 안쪽으로 간 모양.

길이 하나뿐이니 다른 선택지가 없다.

해원기가 몸을 한껏 낮추어 조심스럽게 앞으로 움직였다.

일직선으로 뻗은 통로가 조금씩 넓어지더니 백 보쯤 되는 곳부터 묘한 연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조금 전의 향연과 비슷한 냄새. 뭐지?’

조금 매캐하지만, 역하다기보다는 상쾌한 기분이 들게 하는 향기.

그 향연 때문에 통로의 불빛은 더욱 몽롱해진다.

뭔지 모를 향기. 그러나 이미 이곳이 동창과 연결되었다고 확신한 해원기는 되레 경각심을 높였다.

일체의 탁기를 구축하는 신왕공.

잠심침령에 더욱 집중하자 작은 소리가 귀에 들어왔고,

해원기의 부신수영이 다시 유령처럼 그 소리를 따라 미끄러졌다.

넓어진 통로는 작은 광장으로 이어지고, 그 광장에는 또 다른 통로로 통하는 구멍이 두 개.

작은 소리는 오른쪽 구멍에서 새어 나온다.

“아직도 오신다는 전갈이 없더냐?”

“네. 여전히…… 그나저나 탈주한 수사는 어찌합니까?”

“어휴, 뭘 어찌할. 인원이 다 빠졌으니 지금으로선 방법이 아무것도 없잖으냐. 당장 사고를 보고할 내선(內線)도 전부 끊겼다고. 으음.”

“아니 대체 뭔 일이 벌어졌기에. 갑자기 시간에 맞춰 올 수 없다는 연락만 보내곤 이렇게.”

“쉿! 말조심. 작은 불평이라도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에이, 지금이야 누가. 여기 남은 건 전부 미망산(迷妄散)에 중독된 실혼인(失魂人)들뿐인데요.”

“그래도 그것들이 본래는 나름대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라고. 제정신이 들면 자네나 나는 한주먹거리도 안 돼.”

“흐흥, 제정신이 들 리가.”

“됐네. 이럴 게 아니라 다시 한번 둘러보자고. 자네는 실혼인을 점검해서 옥침몽롱대법(玉枕朦朧大法)이 제 시각에 보충되었는지 확인해 봐. 나는 나머지 산정뢰(散精牢)가 멀쩡한지 돌아볼 테니까. 연독관(硏毒關)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고.”

“쩝, 알겠습니다.”

땅속에다 만든 건축이니 당연히 머물 공간이 필요하다.

개미굴처럼 얽혔다고 해도 중간 중간에 석실을 만들었을 터.

워낙 조용한 지하요, 좁은 통로로 연결되니 자연스레 공명이 일어나게 되고.

상당히 떨어진 공간에서 나눈 대화도 이렇게 들리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

나이와 성별을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지만, 불안과 초조함이 담긴 말소리였다.

벽에 찰싹 붙어 듣던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길지 않은 대화에도 알아낸 것이 적지 않았다.

‘수사는 확실히 여기서 나온 것이고, 당규는 미망산이란 약물에 중독된 상태로군. 그리고 이 지하건축은 상당한 규모.’

수사의 몸뚱이만 해도 엄청난 크기였는데, 산정뢰니 연독관이니.

당규 같은 실혼인들이 또 얼마나 있을지. 환혹의 사술이 옥침몽롱대법이란 건 알았으나, 그 아래 회랑으로 만든 진세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통로에 기척이 있자 생각을 멈추고 몸을 홱 돌렸다.

두 군데로 나뉘어 살펴본다고 했으니 이쪽으로 오는 자는 당규가 제대로 향로를 놓았는지 확인하려는 것일 터.

빠르게 왼쪽 구멍으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음?’

하마터면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올 뻔했다.

왼쪽 구멍에서 막 나오는 당규. 얼굴과 얼굴이 맞부딪칠 만큼 가깝다.

해원기의 이목을 속일 자가 얼마나 될까. 정상도 아닌 당규가 바로 앞에 이를 때까지 몰랐다니.

그러나.

해원기가 즉각 몸을 피하는 대신에 귀를 가까이 대야 했다.

초점 없는 당규의 흐리멍덩한 시선. 낯선 해원기를 봤으면서도 놀란 기색도 없고,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이 입으로 뭔가를 웅얼거린다.

“시독(時毒)과 이독(理毒)을 살펴야 비로소 화독(和毒)을 알 수 있다. 음침(陰沈)과 지독(至毒)을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서 수백 수천의 갈래가 나뉘는 법. 완급(緩急)을 조절하고 지쾌(遲快)를 지배하며…… 재변(災變)은 정화소재(精華所在)요, 앙화(殃禍)는 갈급오탁(渴急汚濁)이라. 이로써, 에, 입니다.”

해원기라도 청각에 공력을 들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웅얼거림.

오른쪽 구멍에서의 기척이 가까워지는 통에 해원기가 찡그린 표정으로 당규의 뒤로 돌아갔다.

제탁지검으로 당규를 제정신으로 되돌릴 생각도 했으나,

미망산이란 약물을 모르는 이상 모험이 된다.

‘조금만 참아요, 당 공자.’

명가의 후손이 이런 미친 꼴이 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이곳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우선.

안타까움을 삼키고 왼쪽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당규가 웅얼거린 게 본능적으로 외운 독문(毒門)의 비결이란 걸 잊지 않고서.

이곳은 육악을 만들어 사황령을 되살리려는 장소인 줄 알았는데.

왜 연독관 같은 독을 연구하는 곳이 있을까.

오소민이 땅바닥에 그린 몇 개의 도형을 골똘히 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어휴, 머리 아파. 어째 과해항룡진(過海降龍陣)을 배울 때보다 더 복잡하지. 쳇.”

혀를 차며 해원기가 간 곳을 살피다가 입을 삐죽거렸다.

“하나도 안 보이네.”

해원기가 알려줘서 그곳에 진세와 환술이 펼쳐진 걸 알았지, 혼자서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연못뿐.

가르쳐준 삼재와 육합의 진도를 궁리해 봐도 전혀 모르겠다.

어디에 회랑이 이어졌고, 어디에 망루가 있다는 건지.

뒤를 받쳐준다는 핑계를 대고 남았지만, 사실은 해원기의 걸림돌이 될까 자진해서 물러선 것.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면 어지간히 손발이 묶이는 성격이란 걸 잘 알아서다.

‘고구마 대장한테 맞춰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칫.’

자기가 왜 이리 해원기 신경을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속으로는 은근히 울화가 치밀 판.

그러다가 문득 손이 품에 올라갔다. 한 번 잃어버렸다가 찾은 후로 가슴팍에 간직한 하화가 진동하는 느낌.

진세와 환술을 간파하지 못한 오소민도 전면의 사기가 강해졌다는 걸 직감했다.

혹시 해원기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음?”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다 주춤,

도로 풀숲에 숨으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남서쪽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그림자. 환술은 몰라도 이렇게 뻔한 움직임을 놓칠 오소민이 아니다.

더구나 수십 명이 가마 하나를 옹위하고서 제법 위엄을 갖춘 대오이니.

‘가마라.’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중에 이런 곳에 가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점차 가까워지면서 형체가 또렷해지자 오소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전면에 길을 여는 역할로 열 명이 두 줄로 섰고, 가마 좌우로 간편한 연갑을 걸친 칼잡이가 각각 열 명, 뒤에는 단창을 들고 활을 등에 진 자들이 또 스무 명쯤.

가마는 온통 검정 칠을 한 사인교(四人轎)요, 지붕에서 멜대까지 두툼한 검은 천을 덮어 안이 보이지 않으며, 네 명의 가마꾼은 모두 커다란 체구의 장한들이다.

‘더구나 가마에 방한용 면포를 씌울 정도라면.’

날씨에 맞추어 제대로 준비한 고관대작의 행차. 대번에 동창의 고위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시각에 이런 곳에 심심해서 행차했을 리 없다.

‘하필이면.’

오소민이 입술을 깨물곤 풀숲을 기듯 동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를 받치며 신호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만, 가만히 지켜볼 상황이 아니잖나.

가마의 행렬도 환술이 펼쳐진 곳을 잘 모르는 듯.

작은 연못이 늘어선 곳 근처에 이르자 움직임이 느려지며 앞에선 열 명 중의 하나가 가마 앞에 허리를 숙였다.

“대인, 이르신 곳 부근입니다.”

가마 앞의 두꺼운 천이 흔들리며 퉁명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그래. 이번엔 아주 우리만 부려먹는구나. 그 주정뱅이가 아첨에만 정신이 팔려서. 아휴, 이걸로 내선부터 찾아봐. 그래야 누구라도 나와 맞이할 테니까.”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 그리고 팔각패(八角牌) 하나가 던져지고, 그 팔각패를 받은 자가 바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행렬의 앞에서 걸을 때와 달리 상당한 신법.

그가 연못가의 풀숲을 살피다 팔각패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딸각.

시커먼 관 하나가 튀어나오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하느라 이제야…….”

“조용히! 탁청대인(濯淸大人) 행차시다. 해진개문(解陣開門)하여 속히 영접하지 못할까!”

행렬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자도 오는 동안 어지간히 불쾌했던지 대뜸 꾸짖는 소리가 고압적인데.

“억.”

흘러나오던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도 상당히 놀랐는지,

당황한 신음과 함께 관이 쑥 들어간다.

탁청대인의 행차. 진을 풀고 문을 열어 영접해야 할 높은 분이 오셨다는데 인사 한마디 없다니.

지하에 있던 자에겐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고,

행차한 자들로선 이런 반응이 더 어이없었으나.

하여간 일 각이 되지 않아 눈앞의 정경이 흐물거리며 걷히기 시작한다.

스스스스.

앞섶이 젖는 걸 마다치 않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포복으로 접근한 오소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먼저 망루 한 개가 보이고 뒤를 이어 양쪽으로 벌어진 회랑, 그리고 그 회랑에 예각으로 교차하는 또 다른 회랑.

전체가 다 보이진 않지만, 해원기가 설명한 대로 삼각형 두 개가 겹친 모양이 그 일단을 드러내고,

망루 뒤, 땅에서 솟구친 것처럼 튀어나온 두 개의 그림자.

“삼가 탁청대인을 뵙니다!”

부복하며 목청껏 외치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진다.

진법에 환술까지 더해 감추었다면서 이렇게 요란스러운 영접이라. 신비를 가장한 주제에 허술하기 짝이 없는 행위.

강호의 상식으로는 황당한 광경이었으나, 오소민은 오히려 마음이 좀 놓였다.

아직 해원기가 발각된 것 같진 않았고, 이런 목청이면 해원기도 들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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