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산정취탁(散精聚濁) (1)
계택은 현(縣)이니 아무리 작다고 해도 향진(鄕鎭)이 네다섯은 되고 촌락이 열 개를 넘는 곳.
그런데 남쪽으로 현의 경계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초가집 한 채 보이지 않는다.
지면의 흔적과 전면을 번갈아 보던 오소민이 코를 찡긋거렸다.
“이거, 냄새가 나네.”
“음? 아직도 악취가 나나? 조금이라도 독기가 남았을까 싶어 주의했는데.”
“아, 그 냄새 말고. 나 참.”
엉뚱한 소릴 하는 해원기에게 대뜸 눈을 흘긴다.
은허를 벗어난 후에 똑똑해졌다고 여긴 건 착각이었나 보다. 이 ‘고구마 대장’은 여전히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니.
느긋하게 노닥거릴 때는 아니니 참아야지.
“계택으로 이어지는 건 확실히 수사의 흔적이야. 무서운 요물이 미친 듯이 달려가니까 하다못해 들쥐 따위도 남김없이 도망갔겠지. 그런데 수사가 일부러 인적 없는 곳을 골랐을까? 산과 들만 있는 곳도 아닌데.”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해원기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계택에 가까워지면서 지형이 많이 평탄해졌다. 작은 시내가 곳곳에 웅덩이를 만들고, 아담한 숲이 이어지는 나지막한 동산들.
밭을 일구고 과수를 심기에 어울리는 땅이요, 시내와 웅덩이는 닭과 오리를 기르기에도 좋건만.
사람이 살지 않는다.
“수상한 냄새가 난다?”
“그렇지. 계택이라는 오래된 고을 이름까지 지닌 곳에 이렇게 인가가 없을 수 있나. 대강 이쯤에 향(鄕)은 몰라도 작은 촌(村) 하나는 있을 법한데 말이야. 이렇게 백성들이 줄어들면 현(縣)에서 금방 강등되는 게 상례. 그런데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고향을 등질 리 없어. 최근에 이쪽에서 특별한 천재지변이 난 것도 아니고.”
그럼 원인은 하나.
“일부러 소개(疏開)했다.”
“어려운 말도 아네. 흐흥, 쫓아낸 거지. 그럴 힘을 가진 놈이.”
동창에게 고을 하나 비우는 건 문제도 아닐 터.
신화에 나오는 육악은 아니겠으나, 수사라고 짐작되는 거대한 요물. 자산까지 오는 동안 얌전했을 리 없다.
그 출발점으로 의심되는 계택은 인적이 없고, 이런 상황을 동창이 만들었다면.
오소민이 정면을 가리켰다.
“그 덩치에도 뱀이랍시고 물웅덩이가 좋았을까. 흔적이 뚜렷해. 이거 예상보다 더 큰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흥미가 잔뜩 일어난 듯.
반면에 해원기의 표정은 바위처럼 굳어간다.
인위적으로 육악을 만들어내 사황령을 되살리려 한다는 게 오소민의 예상이었는데.
그 예상을 넘는다니.
인적은 없고, 흔적은 뚜렷하고.
해원기와 오소민이 바람처럼 나아갔다. 제대로 경공을 발휘한 이상, 도랑이나 웅덩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숲이나 동산도 평지와 다름없다.
그러나 한 식경이 되도록 사람 그림자는커녕 닭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고을 이름은 계택이면서 택(澤)은 있는데 계(鷄)는 다 어디 갔는지.
그런데.
막 작은 동산 하나를 넘어가던 해원기의 손이 오소민의 팔을 빠르게 낚아챘다.
“잠깐!”
앞에는 풀숲에 둘러싸인 연못 몇 개.
별다른 기척도 없는데 왜 그러나.
의아하게 쳐다보는 오소민의 눈에 미간에 주름을 잡은 해원기의 얼굴이 들어온다.
“왜…….”
“이젠 익숙해졌어. 이 기운.”
비췻빛을 머금고 선명하게 빛나는 두 눈.
동산 아래에 놓인 몇 개의 연못을 훑으면서 해원기가 자세를 낮추었다.
“진평현, 장안, 그리고 얼마 전 안양성 밖.”
동시에 목소리를 낮추는 건 경계하라는 뜻.
오소민이 해원기를 따라 자세를 낮추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진평현의 수차제. 싸움이 끝날 무렵에야 이르러서 나중에 얘기를 들었지만, 조화부인과 그 수하들이 수차제에 해괴한 진세를 펼쳤다고 들었다.
장안도 마찬가지. 밀각의 각주가 유명반혼진을, 장안성 전체에 유탕섭백대진을 깔아놓았다던가.
게다가 안양성 밖이라면 바로 오소민 자신이 조화부인을 뒤쫓다가 어이없는 꼴이 되었던 곳. 그 숲에도 잠종미리진이 있었다고 했었다.
해원기가 익숙해졌다고 한 것은 바로 진세의 기운이다. 그것도 요사스러운 진세.
오소민이 반사적으로 본신의 공력을 일으키려는데.
팔을 쥔 해원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항룡진기가 강해지면 하화가 보패지력을 흘릴 수도 있네. 환술(幻術)이 더해진 진법, 요사스러운 기미를 느끼지 못했으면 몰랐을 거야.”
공력을 일으키지 말라는 소리지만,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나.
“아, 아파.”
오소민이 찡그리며 얼른 팔을 풀더니,
“환술? 장안법(障眼法)인가?”
해원기보다 더 목소리를 낮추어 묻는다.
평소 같으면 눈을 흘기고 한소리 했을 텐데. 공력은 당연히 일으키지 않았고, 팔을 풀 때도 딱히 무공을 쓰지 않았으며,
그저 해원기의 답을 기다리는 눈치.
언제 이렇게 유(柔)해졌는지.
“웬만한 장안법으로는 우리 눈을 속일 수 없지. 정확하진 않지만, 환혹(幻惑) 계통의 사법(邪法)을 정통 진법에 덧씌운 것 같군. 저기 보이는 몇 개의 연못은 연못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회랑일세.”
“응? 회랑?”
“지붕을 다 올리진 않았어도 난간을 촘촘히 세운, 목책 모양의 회랑을 지면에 단단히 박아놓았어.”
동시안이 현혹하는 환술을 한 겹씩 벗겨 원형을 살피는 중.
오소민의 팔을 잡았던 손을 공중에 들어 그 모양을 그리자,
“회랑이라면 한 바퀴 돌겠지. 가다가 구부러진 곳은? 가운데에는 따로 뭐가 있나?”
전각이나 큰 절, 호화로운 저택의 값비싼 정원에 설치하는 게 회랑이다.
건물과 건물을 잇는 복도고, 장식으로 정자를 끼워 넣고 쉬어갈 의자를 놔두니 자연히 주위의 풍경도 어울리게 가꾸기 마련.
흔히 회랑 가운데에 기암괴석으로 가산을 꾸미거나 잉어를 잔뜩 풀어놓은 연못을 둔다.
해원기가 가장 큰 연못을 가리켰다.
“저 연못을 중심으로 삼각형 두 개가 거꾸로 겹친 형태. 꼭짓점 여섯 개에 정자라기보다는 조그만 망루를 세웠네. 삼재진(三才陣)을 저렇게 쓰는 건, 육화병진(六花兵陣)과 비슷해 보이지만, 동정(動靜)의 운용이 정반대라…….”
가리키던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중얼.
오소민이 질색하며 해원기의 옆구리를 찔렀다.
“으이구, 그건 나중에 따지고. 어때, 들어갈 수 있겠어? 지키는 자들은 안 보이나?”
조금 전의 보복인가. 옆구리를 어지간히 세게 찔러서 해원기가 움찔했다.
“어, 이상하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오소민을 보며 머리를 갸웃.
“지키는 자도 보이지 않고. 환혹의 사법을 빼면 저 특이한 진법은 바깥을 막는 게 아니라 안쪽을 가두는 형세로 보여. 흐음.”
옆구리 대신 턱을 문지르자, 오소민도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는 내내 그 흔한 마을 하나 보지 못했고, 외딴집조차 없었다.
그리고서 고수의 눈을 속일 정도의 사법이 더해진 회랑이 나오더니,
정통 진법의 이치를 따른 회랑은 또 안쪽을 가두는 형세라.
오소민이 짧게 혀를 찼다.
“쯧, 어차피 수사의 흔적은 이 부근에서 끊겼고. 저런 괴상한 구조가 숨겨진 건 분명히 수상하지. 직접 부딪쳐보는 수밖에.”
길게 생각해봤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런데 해원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머리를 젓는다.
“자넨 여기 있게.”
“음?”
“수사가 저기서 나왔다면, 또 다른 요물이 더 있을지 몰라. 이십사아문의 다른 우두머리들이 모여있을 수도 있지. 자네가 말했듯이.”
인위적으로 만든 육악. 그걸로 사황령을 되살리려고 하는 자들.
오소민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근거로 삼는 해원기의 표정이 진지하다.
확실히 예측할 수 없는 괴이한 장소이니 위험을 피할 수 없으리라. 이미 이십사아문의 태감 몇과 싸워본 해원기로서는 어떻게든 오소민을 안전하게 놔두고 싶었을 터.
그런 심정을 뻔히 알지만, 해원기의 진지한 표정에 은근히 심통이 나는 건 또 왜일까.
“뭐야, 쓸데없이 방해되니까 빠지란 거네.”
툭 던지는 불평에 해원기의 눈이 바쁘게 왔다 갔다, 진지한 표정도 금세 허물어질 것 같아서.
오소민이 그만 픽, 웃어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하, 됐어. 여기서 뒤를 받치란 뜻이지? 그럼 저 진세나 좀 가르쳐줘. 만약을 위해서 신호도 하나 정하자고. 여차하면, 알지? 흐흣.”
놀리는 재미는 있어도.
해야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하는 오소민이다.
해원기가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른 입맛만 쩍 다셨다.
‘알지?’라고 하면서 키득대는 모습에 슬쩍 놀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렇게 자기 뜻을 따라주는 게 그저 고맙고.
마음이 편해진다.
혼자 궁리할 때보다 남에게 설명할 때 뜻밖의 소득이 생기는 법이다.
워낙 영민하고, 또 고심한 무학의 이치를 아는 오소민이라 동산 아래에 펼쳐진 진법을 설명하는데 채 일 각도 걸리지 않았으나.
해원기 자신도 조금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삼재 두 개가 거꾸로 겹친 건 삼양개태(三陽開泰)로 육합운전(六合運轉)을 일으키는 도리.
목책 모양의 회랑도 이에 따라 일종의 ‘울’이 된다.
‘팔괘진(八卦陣)이 팔문금쇄(八門禁鎖)로 나아가듯, 이 육합진(六合陣)은 구궁장뢰(九宮藏牢)로 바뀔 수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삼양개태가 겹치지 않고 정반(正反)으로 나뉘어야 하는데. 뭔가 한 가지가 빠진 상태고, 그건 일원(一元)이 폐색(閉塞)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가운데의 큰 연못, 저게 문제의 핵심일 가능성이 커.’
미묘하게 불안정한 구석이 있는 진세다. 환혹의 사법이 덧붙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해원기는 그게 수사가 출현한 원인이라고 직감했다.
스스스.
탁 소숙에게 배운 부신수영의 경공을 한껏 시전하자 그야말로 바람에 나부끼는 유령처럼 흔적도 없이 망루에 달라붙었다.
사부와 달리 온갖 잡다한 기예까지 익힌 탁 소숙. 이 부신수영도 본래 정종(正宗)의 경공이 아니고, 신왕공을 잠심침령으로 내부에 집중시켰기에 환혹의 사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듯.
망루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곧장 회랑을 뛰어넘으려는데.
덜컹.
불쑥 바닥이 들리는 소리에 해원기가 황급히 목책 아래에 엎드렸다.
망루의 뒤쪽에 놓인 바위 하나가 뒤집히면서 시커먼 인영 하나가 올라온다.
손에는 향로, 향로에는 팔뚝만 한 향 한 자루. 그걸 들고 바로 앞의 망루로 향하는데.
술에 취한 듯 비척거리는 게 제대로 방향도 못 찾는다.
“흐흥, 흥흥, 흐르릉.”
산발한 머리 아래에서는 마치 코를 고는 것처럼 희한한 소리를 내고.
미친 사람 같은데, 얼핏 보이는 얼굴에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