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04화 (304/410)

제76장 이매망량(魑魅魍魎) (4)

화르르.

거대한 불길이 새파랗게 타오른다.

나무도 풀도 찾아보기 어려운 자산이지만, 삼매진화로 붙인 불은 수사의 거체를 한꺼번에 불살라버렸다.

자산 주위만이 아니라 창덕부 전체에서 보일 만큼 엄청난 불길.

본래 가려던 샛길에 올라 자산 뒤쪽으로 빠지던 해원기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지나치지 않을까? 이제 넘어가려는 하북 쪽에서까지 산불이 난 줄 알겠어.”

눈을 부릅뜨고 바닥을 유심히 살피던 오소민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흥, 수사라는 요물이 그리 기름질 줄은 몰랐지. 뭐든지 처먹는 주제에 배때기에는 기름을 가득 채웠었나. 뭐, 창덕부건 하북이건 이 자산이라면 산불이 날 리도,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을 것도 훤히 알 거야. 그보다 문제는.”

말을 멈추면서 찡그린 얼굴을 든다.

“문제는?”

“동창이라는 이 괴상망측한 조직이 어떻게 유지되느냐는 거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래서 황친국척, 고관대작을 막론하고 동창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벌벌 떠는 세상인데. 이게 하나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책군이란 놈이 말한 사부대중도 그렇고.”

삼매진화로 수사에게 불을 놓은 후에도 계속 생각하던 부분이라, 해원기가 신중하게 말을 받았다.

“소숙모와 얘기하던, 동창이 둘로 나누어졌다는.”

“응, 그렇지. 제독태감이 세상을 뒤엎어 동창성조라는 새 나라를 세우는 쪽, 묘능이란 요승을 뒤에 두고 강호를 노리는 쪽. 뭐, 이것도 대충 거칠게 나눈 편이지만. 중요한 건 지향하는 곳이 다른 만큼 서로 몰래 엉뚱한 짓을 한다는 점. 흐흠.”

오소민이 일부러 목을 울리며 짐짓 무게를 잡는다.

“방 낭랑 덕분에 그간 희미했던 게 훨씬 선명해졌어. 이전에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확실히 내시들이 앞에 나와야 해. 자네도 마지막에 봤다며? 금의위 대영반이란 작자가 다른 태감들을 무시하던 장면을.”

“음. 칠성검 서문창이라고. 그자는 제독태감을 당당히 거론하더군.”

“그 작자 얘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고. 하여간 동창이 표면적으로는 이십사아문을 전부 흡수한 듯하지만, 사실은 딴마음을 먹은 자가 분명히 있어. 야점에서 보았던 항아리 열 개, 똑같은 게 산속에도 차려져 있었다고 했지.”

“맞아.”

“수보를 필두로 몰려나온 밀각의 목적은 은허에 숨겨진 비밀. 하지만, 남쪽에서 온 자들과 산속에서 기다렸던 자들은 다른 이유로 회합하려 했을 거야. 그 안에 자네가 신경 썼던 그.”

“사황령.”

“그래, 사황령이 관계되었을 소지가 있어. 생각해봐, 꼭 여기서 회합해야만 했을까?”

“!”

해원기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 못했던 부분. 워낙 희한한 행동을 벌이는 동창이라 그러려니 넘어갔었다.

딴마음을 품은 태감들이 밀각의 수보가 있는 곳에서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무엇일까.

오소민이 불길이 이는 곳과 샛길이 갈라지는 방향을 번갈아 가리켰다.

“나도 조금 전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어. 저 요물이 불쑥 나타나지 않았다면. 동창의 행사를 방해한 절세검왕을 기어이 찾아야겠다? 그랬다면 사냥개를 풀어야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대뜸 자산에다가 요물을, 그것도 육악의 하나로 보이는 수사를 푼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특히 이 요물이 수사라는 게 아주 묘하거든.”

“묘하다.”

그저 추임새를 넣는 일밖에 못 하는 해원기.

“육악지력은 전부 풀려나왔잖아. 에, 아직 봉희(封豨)는 안 보였지만. 이번에 상대한 둘이 착치와 수사였으니까.”

“조양신사와 암야무명.”

“이름 따위야 뭐든.”

한참 열중해 말하던 오소민이 눈을 한번 흘기고,

“신화에 나오는 수사일 리 없지. 실뱀 떼나 놀리고, 허물을 벗거나 바위를 씹는 정도로 무슨 신화의 괴물. 용문에서 봤던 빙이는 그나마 수신다운 분위기라도 있었거늘. 흥.”

어이없다는 코웃음을 덧붙였다.

사황령이 관계된 태감들의 회합. 그것과 신화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수사의 등장. 얘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따라가기 바쁜 해원기다.

추임새가 없자 오소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황령이란 거 어떻게 만드는 거야? 혹시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괴물이 필요한 거 아냐?”

“으음?”

해원기가 우뚝 멈추어섰다.

비로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기에.

사황령이란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천마지기(天魔之氣)와 다름없다고 일컬어지니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오마왕전(五魔王殿)이라 불리는 과거의 지부. 거기에는 왕위(王位)에 오른 마왕 다섯이 있고, 그들이 힘을 합쳐 절대(絶對)의 마존(魔尊) 하나를 길러 받들어 모신다고 했다.

그 절대의 마존이 바로 천자마왕(天子魔王), 줄여서 천마다.

그러나 다섯 마왕의 힘, 소위 오대마도(五大魔道)라는 가공할 마공을 전부 합쳐도 완벽한 천마를 낳을 수는 없으니.

이른바 고대에 마계(魔界)에서 유래한 마종지력(魔宗之力)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승되던 마종지력은 해원기의 사조에 의해 파괴되었고,

사부와 싸웠던 당시의 천마는 그 마종지력을 보완할 방법을 녹판이라는 기물에서 찾았단다.

사흉(四凶)을 봉인한 네 개의 녹판.

탐욕스러운 도찬(饕餐), 옳고 그름을 모르는 혼돈(渾沌), 신의를 저버리는 궁기(窮奇), 고집불통에 흉악한 도올(檮杌). 어린아이도 아는 전설 속의 그 사흉을 봉인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악기(惡氣)에 노출되었고,

그 악기들이 한데 뭉치면서 마침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괴이한 능력이 탄생했다.

마(魔)에 버금가는 사(邪).

천마(天魔)에 대응하는 사황(邪皇).

사황령이란 이름은 그렇게 붙었다.

사황령을 이용하던 자들과 사황령을 낳은 네 개의 녹판이 모조리 파괴되었지만,

과연 완전히 사라졌을지.

형태조차 의심스러워 사황의 영(靈)이라고까지 했던 것이.

“자네 말은.”

몇 번이나 사황령의 존재를 의심했었으나 함부로 단정할 수 없었던 해원기다.

오소민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했잖아. 수사를 누가 만들어냈을 거라고. 심지어 수사뿐 아니라.”

“육악을 전부?”

“그래서 불을 크게 지르자고 한 거야. 어떤 사정인지 몰라도 저 수사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인위적으로 육악을 만들어내려면, 또 만들어낸 육악이 필요한 자라면.”

“육악을 봉했던 구양금오. 사정을 알고 그 힘을 이용하려는 자.”

“맞았어. 호오…….”

갑자기 척척 얘기가 이어지는 게 신기했나.

오소민이 문득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으로 해원기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희한한 웃음을 흘린다.

“은허에서 나 모르게 뭔 일이 있었나. 똑똑해졌는걸. 흐흐.”

못 알아들으면 바부탱이, 바로바로 이해하면 똑똑해졌다고.

짓궂게 놀리는 게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아서,

해원기가 고소를 머금으며 손에 든 대나무 통을 입가에 댔다.

“고맙네. 그럼 이건 상으로.”

쭉 들이켜는 모습에.

“어? 어, 이봐, 그건.”

오소민이 당황해서 얼른 달려들었다.

해원기가 손에 든 대나무 통에는 자신이 몰래 챙겨온 술이 들었잖은가.

검을 닦으라고 건네주고선 돌려받는 걸 깜빡했다.

오소민은 해원기가 준 물을, 해원기는 오소민이 준 술을. 서로 바꾼 셈이다.

“잉, 이번엔 당했네.”

“당하긴. 난 딱 한 모금 마셨다고.”

“그래도 남은 게 얼마 없잖아.”

“허, 검 닦으라고 먼저 건네준 사람이 누군데.”

대나무 통은 각각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갔고, 유치한 투덕거림이 잠시 이어지다가.

오소민이 피풍을 바짝 여몄다.

“오른쪽으로 빠져야 할 것 같아. 어때 보여?”

해원기도 마찬가지. 방립을 슬쩍 들고 전면을 보는 동시안이 진지해졌다.

삼매진화로 붙인 불은 무서운 화력(火力)을 지녔으나, 대상물을 다 태우면 번지지 않고 사라진다.

비록 수사의 몸뚱이가 크긴 했어도 둘이 자산을 다 넘기까지 아무런 기척은 없었고.

오른쪽으로 길도 없이 푹 꺼진 절벽이 나왔다.

본래는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이었을 듯, 수사의 거체가 산으로 기어오르면서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직 방온화가 일러준 길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절벽을 내려가면 방향이 많이 어긋나게 될 터.

해원기가 성큼 절벽 쪽으로 나아갔다.

“경사도 서둘러 가야겠지만, 이쪽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네.”

비로소 찾아낸 사황령의 단서다.

사흉에서 비롯된 사황령이 잔재를 남겼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똑같은 방법, 즉 육악을 이용해서 새로운 사황령을 제조하려 했다면.

새로운 사황령을 위해서 사마대가를 포함하는 태감들이 음정수백 같은 기괴한 것들을 모으고 있다면.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

바짝 뒤를 따르는 오소민의 말에 미간이 굳어진다.

“여태껏 동창 놈들이 신화의 단서를 찾으려고 양도양경 같은 옛 도읍지를 헤맨다고 여겼지. 육악지력을 다 얻었고, 남은 구양금오를 미끼로 삼아 야바위판을 벌인 목적은 한 가지가 아닐 수 있어.”

방온화가 설파했던 동창의 궤계.

기존의 구주정문을 무너뜨리고 새로이 구대문파로 재편하려는 의도가 숨겨졌다고 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동창성조의 태상이든, 사부대중의 국사든 누가 주도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육악지력의 재현, 혹은 육악지력의 합일.

이를 위해서 기보(奇寶)를 모으고, 단서를 찾고, 괴물을 깨우고.

신기역의 감로보병을 노린 게 대표적인 예.

강호무림을 철저히 농락한 것이다.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이니 아무리 고수라도 시야에 한계가 있기 마련.

해원기가 동시안을 운용하면서 먼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온통 바위와 돌뿐이던 자산이 이쯤부터 부드러운 흙으로 바뀌었고, 새까맣게 바닥도 보이지 않는 아래쪽은 무슨 이매망량(魑魅魍魎)의 소굴 같다.

“이거, 또 뭐가 나올 것 같네그려.”

머리만 빼꼼히 내밀며 중얼거리는 오소민.

마치 장터에 나간 어미 잃어버릴까 봐 치마폭을 꼭 쥐고 따르는 아이처럼, 아예 해원기의 요대자에 손 하나를 턱 걸쳐놓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은근히 겁이 나는 모양.

‘하긴 뱀 떼를 거느리고 지독한 악취를 내뿜던 수사였으니까.’

여자잖나.

이러다가 뛰어내린 절벽 밑에 쥐 떼라도 우글거리면 질겁을 할 것 같다.

등 뒤에 바짝 붙은 오소민의 머리에 걸리지 않게 해원기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소리가 나네.”

“흐음, 우리가 자산을 넘었으니까 이쪽이면 한단(邯鄲) 뒤로 빠지지. 창덕부를 북쪽으로 벗어나서 다시 동쪽, 그렇다면 계택(鷄澤) 부근이겠어.”

“딱 한 번 와본 적이 있는데, 상당히 복잡한 지형이더군. 사하(沙河), 명하(洺河), 장하(漳河) 등의 하류가 주위를 둘러싸서. 하지만, 범람이 극히 적고 도리어 살기 좋은 곳인데.”

하북에서도 쾌체 일을 잠깐 했기에 해원기가 대강 설명을 더하자,

“그런 곳이니 오히려 남의 눈을 피하기 쉽지 않았을까? 나도 들은 적이 있어. 하북, 하남, 산동, 산서. 어느 곳이든 다 통하지만, 의외로 왕래가 드문 고을이라고. 육지 속의 섬이랄지.”

물길이 많고 습지가 많아 예로부터 닭과 오리를 키우는 이가 많다는 고을.

그래서 이름이 계택이다.

오소민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뱀이 살기에도 좋겠지.”

해원기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같이 내려가세. 조심하고.”

어느새 오소민의 피풍 자락을 조심스레 쥐었고, 그 어깨는 오소민더러 손을 얹으라는 뜻.

경공을 최대한 펼칠 생각이다.

동(冬), 설지서(雪之序)

화르륵.

아궁이 불이 보기 좋게 타오른다.

해원기가 손에 든 장작 하나를 툭 던져놓고 일어섰다.

그 잠깐 새, 등허리가 젖을 정도로 눈이 쉬지 않고 내려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해원기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허, 이렇게 펑펑 쏟아지다니. 벌써 사흘째네.”

설날 아침부터 조금씩 뿌리기에 금방 그칠 줄 알았는데. 점점 눈송이가 커지더니 사흘째는 아예 동서남북을 분간하지 못할 폭설이 되었다.

환정곡이 온통 파묻힐 만큼 대단한 눈. 해원기도 처음 겪는 일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어쩐지 뭔가 의미가 담긴 듯해서.

둘러보던 시선을 거두며 몸을 돌렸다.

해마다 가을이 끝나면 아무도 없는 환정곡으로 돌아와 지냈다. 혼자서 장작도 장만하고 사냥도 하면서 겨울나기 준비. 그렇게 겨울잠 자는 곰처럼 보내다가 설을 쇠고 날이 풀리면 다시 떠났는데.

이런 어마어마한 폭설은 환정곡에 산 이래로 처음 보는 것.

사부와 사모들이 백산(白山)으로 떠난 지 몇 해런가. 이번 설을 지나면 해원기도 벌써 스물둘이다.

독특한 지형 덕에 한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환정곡이건만,

올해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하염없이 내리는 눈.

쌓이는 눈을 따라 마음도 무거워진다.

백산.

어렸을 때, 요동 벌을 헤매던 그 시절에. 딱 한 번 멀리서 바라본 적이 있었다.

정수리가 하얗던 신기한 산.

그 신기한 산으로 떠난 사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방이 금세 따뜻해졌지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푹, 푹.

경공을 쓰지 않으니 걸음마다 눈이 무릎까지 차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예전에도 무공을 익힐 때 외에는 평범하게 걸어 다녔었다.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가고, 물을 길으러 계곡 아래로 내려갈 때는 언제나. 머리와 어깨에 낙엽을 잔뜩 맞고 내려온 적도,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은 적도 많았다.

사부는 그런 일상을 소중히 여겼지.

‘그래도 남들이 보면 전혀 평범할 리 없지만.’

아름드리나무를 두부 자르듯 베어 산더미처럼 지고서 산을 내려왔고,

장정 하나가 들어갈 항아리 두 개에 물을 가득가득 담아서 계곡을 올라왔었으니까.

신공(神功)이란 게 본래 그런 거라고.

‘그러면서 빙긋 웃곤 하셨…….’

해원기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며 발에 힘을 주었다.

집에만 돌아오면 온갖 기억이 다 떠오른다. 지금이 이렇게 옛 추억에 잠길 땐가.

환정곡을 둘러싸듯 펼쳐진 숲, 그리고 그 숲 뒤에 깎아지른 듯 세워진 절벽.

검단(劍壇)으로 향하는 걸음이 급해서,

퍽퍽퍽퍽.

뜰 가운데 쌓인 눈이 놀란 듯 솟구쳤다.

검단에 모셔놓은 고죽지보. 세상에서 흔히 고검(孤劍)이라 부르는 검.

곡을 떠나면서 절벽 속에 감추어두었고, 또 그 주위에 배운 재주를 다해 세 겹이나 되는 진세를 베풀었다.

혹시나.

사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고검에 무슨 표시라도 나지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지금은 검이 멀쩡하게 잘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사부를 찾아가듯 부리나케 뛰었다.

여전히 경공은 쓰지 않고.

방은 참 따뜻했지만, 그보다 고검이 더 따뜻했다.

물론 절벽에 파묻혔던 쇳덩이가 이 겨울에 따뜻할 리 없다.

그래도 오랜만에 손에 쥔 고검을 요리 보고 조리 보고, 봉인결(封印結)로 꼼꼼히 묶은 검대(劍帶)를 풀어 세심하게 살피고.

기어이 검을 뽑아 조심스럽게 날을 닦기까지.

손에 쥐어본 지 한참 되었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무런 표시도 없었고.

괜한 헛수고.

그래도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게 어딘가.

도로 절벽 속에 넣어둘 마음이 들지 않아서 이렇게 방으로 들고 와서는,

벽에다 세워놓고는 물끄러미 보기만.

그러지 않아도 조용한 환정곡이 눈까지 펑펑 내리는 통에 고요하기 그지없으나.

해원기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사부가 바로 앞에 있는 듯. 한편으로는 지난 추억이 꼬리를 물고 눈 앞에 펼쳐지고, 한편으로는 틈틈이 환정곡을 떠난 후에 겪었던 일들을 알려드리느라.

어느 거리에서는 어떤 곳을 보았고, 어느 골목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또 어떤 집에서는 어떤 일을 당했다고.

시시콜콜한 얘기에도 사부는 미소로 받아주신다.

그러다가,

얼핏 잠이 들었나 보다.

새까맣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 땅은 갈라져 나락처럼 시커멓다.

그 가운데 홀로 검을 든 사람.

검은 장발이 폭풍에 미친 듯이 흩날리고, 몸에 걸친 검은 장포도 갈가리 찢겨 나부끼는데.

그 사람이 든 검 또한 검다.

아니, 검은빛 속에 붉은색이 짙게 배어서 소름이 끼친다.

무엇이든 파괴하고 죽여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검.

과연 그 검이 움직이자 하늘에선 한 맺힌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리고, 땅에선 원망 어린 탄식이 바람이 되어 불어닥치니.

검은 장발에 검은 장포를 입은 사람은 바로 그 검의 비와 검의 바람을 전부 혼자서 뒤집어쓰고 있었다.

검우(劍雨)가 꽂히는 곳마다 구멍이 숭숭 나고,

검풍(劍風)이 스치는 곳마다 살이 쩍쩍 갈라지는데도.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얼핏 돌아보는 얼굴. 순간적으로 딴 데 정신을 팔아서일까.

무서운 비바람이 그의 오른쪽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검은 장발이 가루가 되어 날리고, 얼굴 절반이 흉하게 부서지며, 오른팔은 살점이 모조리 뜯겨나가면서.

남은 건 왼쪽 눈 하나.

그러나 그마저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시야를 뒤덮는 시뻘건 핏물.

새까맣던 광경이 새빨갛게 변했다.

“허억! 사부……님.”

해원기가 와락 머리를 세우고 숨을 헐떡이다가,

눈을 껌뻑였다.

조용한 방 안. 자신은 가운데 앉은 그대로고 맞은편 벽에 세워둔 고검도 그대로.

꿈이었구나.

악몽도 이런 악몽이 있나. 스스로 어처구니없었지만,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다 땀이 목덜미까지 흥건할 걸 비로소 깨달았다.

방이 따뜻해서가 아니다.

사부를 따라 배운 후로 악몽을 꾼 적이 없거늘.

오늘은 도대체 왜 이럴까.

폭설이 이어지는 날씨도 처음이요, 고검을 앞에 두고 이런 해괴한 악몽을 꾸기도 처음.

“후우우.”

긴 한숨.

그 한숨이 끝나기 전에 검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멍청한 놈.”

한심스러운 자신에게 욕을 하면서 곧장 방문을 열고 나선다. 마음이 흐트러진 걸 모를 수가 없으니.

방구석에서 청승이나 떠는 꼴을 사부가 보았다면 얼마나 꾸지람을 내리셨을지.

주먹만 한 눈송이가 펄펄 날리는 뜰로 뛰어나갔다.

잡념을 지우는 데는 수련보다 좋은 게 없다.

솨솨솨솨, 위이이잉.

뜰 한가운데서 연검대초를 휘두르는 해원기.

눈보라가 거꾸로 치는가.

뜰에 쌓인 눈만이 아니라 목옥과 모옥, 심지어 헛간 위에 덮인 눈조차 모조리 날아가 버린다.

정도 오악검법, 마도 절세오검, 흑백연주오절검을 포함해서 자신이 익힌 일흔두 가지 검법을 모조리 펼쳤고.

탁 소숙에게 배운 봉법, 창법, 극법에다가 둘째 사모가 가르쳐준 도법까지.

풍뢰결을 담은 검기가 환정곡 전체를 뒤덮으면서 눈에 파묻혔던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사부가 사조와 살았던 원래의 모옥, 사모 둘이 어색한 손재주로 지었던 목옥, 해원기 혼자서 끙끙거리며 올렸던 헛간.

사부가 즐겨 앉았던 바위와 얼어붙은 연못.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셈이다. 얼마나 눈이 더 오더라도.

윙윙윙윙.

검집째로 휘두르는 연검대초지만, 두 시진이 넘어가자 검의 경력이 점차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해원기의 정수리 위에도 한 자나 되는 김이 기둥처럼 서고,

마침내.

우지직, 쿵.

헛간 한쪽이 주저앉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뚝.

고검을 멈추고 멍하니 돌아보는 얼굴에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떤 해원기가 고개를 하늘로 젖히며 바보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얼마나 오랫동안 검을 휘둘렀는지.

눈은 벌써 그쳤고.

검기에 휘말려 솟구쳤던 눈가루가 어쩌다 물이 되어 하나둘 떨어질 뿐.

그런데.

하늘을 보며 웃어대는 해원기의 얼굴은 온통 젖어있었다.

두 시진이 넘게 검공(劍功)에 열중해서 땀이 났나.

새벽이 가까운지 눈 갠 하늘이 파란빛을 머금고 그런 해원기를 내려다본다.

쏴아, 철썩.

폭설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망고암(望古巖)까지 하얗게 변했다.

해원기가 그 위에 단정히 앉아 멀리 시선을 보냈다.

해가 뜬다.

사부의 손을 잡고 올랐던 곳. 자신이 여동생을 안고 올랐던 곳.

무릎 위에 고검을 눕히고서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며,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사부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저는 검을 들고 세상을 걷고 싶지 않거든요. 제 뜻대로 살라고 말씀하셨지만, 검을 들면 어차피 무림에 나설 수밖에 없지요.”

해가 뜨는 동쪽. 폭설 탓인지 물안개가 짙은데, 물안개 너머를 향해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뵙지 못한 사조. 그렇게 엄청난 희생을 하시고도 천외인협이란 외호만 남기셨고. 사부는 아예 이름까지 잊히도록 조처하셨잖아요. 그게 협(俠)이라는 걸 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해치고, 죽이는 그런 세상. 무림이란 곳은 본래 저와 맞지 않았고, 이제는 더욱 싫습니다. 사부님도, 두 분 사모님도, 그리고 소유도…”

전부 떠나게 했잖나.

쏴아아, 철썩.

파도가 쳐서 해원기의 말소리를 삼키고 물보라로 흩어진다.

“무림이니, 강호니. 사부님도 그런 큰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싸우셨다고.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이들은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싸우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싸워야 할 이유도 없지요. 저에게 건네주신 이 검.”

시선이 잠깐 무릎에 놓인 고검을 향하고.

“선조의 원령이 담긴 귀왕검을 사부님이 삭제하셨으나. 제가 이걸 쥐면 또 얼마나 많은 원한이 생길까요. 저부터 이렇게.”

원망스러운 것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살며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봉인하고 떠나렵니다. 그저 사람들 사는 곳에서 어떻게 어울려 사는지 알아보렵니다. 땔감이 없는 이에게 나무를 해주고, 마실 물이 없는 이에게 물을 길어주고, 배고픈 이에겐 직접 음식을 끓여주는. 그런 일을 찾아보겠습니다.”

쿠르릉.

해원기의 말에 놀란 것처럼 커다란 파도가 망고암 앞에서 들끓는다.

“혹시 마을 하나, 고을 하나를 제가 구할 힘이 있다면 좋겠네요. 사부님이 예전에 일러주신 대로 본래 신공은 그렇게 쓰여야 옳으니까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물길을 돌릴 힘 정도는 되겠지.

고검을 받쳐 든 두 손이 바닥에 닿고,

절을 한 자세가 되었다.

“제가 세운 서원을 제가 지키지 못하는. 이 원기는 참으로 어리석은 제잡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사부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는다.

‘끔찍한 무림에서 남을 돕는 무인이 되겠다.’라고 했던 서원.

자신이 세운 서원조차 부질없다고 여기자,

사부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겹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솨아아, 철썩, 철썩.

한바탕 큰 파도가 들끓고 물러나서인지 망고암 주위로 잔물결이 부드럽게 오르내렸다.

괜찮다는 듯이.

망고암의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두 시진이 넘는 검무로 억지로 날려버린 환정곡 안의 눈더미와 달리,

때가 되어 온기가 전해지면 자연히 녹는 법이다.

절령제십구(節令第十九) 입동(立冬)

예로부터 전통적인 사계(四季)의 기점을 ‘사립(四立)’으로 구분하였다.

입춘, 입하, 입추와 마찬가지로 입동의 입(立)은 건(建)이니 시작한다는 의미. 그럼 동(冬)은 무엇인가. 바로 종(終)이니 만물이 그 생명을 수장(收藏)하여 휴양(休養)의 상태에 든다는 말이다.

입동 때에는 가을에 거두어들인 작물을 전부 잘 말려 창고에 넣는다. 곧 한해 농사가 비로소 끝나기(終) 시작하는 때라. 이로부터 봄이 올 때까지 생명은 차분히 다음 순환을 준비한다.

차분한 준비는 또 뭔가. 겨울이 시작되면 처음엔 물이 얼고, 다음엔 땅이 얼며, 그다음으론 꿩(雉)이 큰물에 들어가 조개(蛤)가 된단다.

옛사람은 날이 추워지면서 들새들이 전부 사라지고 대신에 바닷가에 색깔이 비슷한 대합조개가 보이니까 꿩이 조개가 되었다고 여겼던 것이지만,

아무리 추워도 바다는 얼지 않고, 눈과 얼음이 뒤덮어도 조개껍데기는 깨지지 않으니.

생명이 엄혹(嚴酷)한 한랭(寒冷)을 어떻게든 피하려는 본능은 제대로 간파했다고 할까.

그렇게 견디고 버티면서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린다고. 그런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일러주는 듯.

입동에서 소설(小雪)에 이르는 초겨울, 즉 맹동(孟冬)에는 날씨도 화창하고 햇볕도 따스해 마치 봄날 같지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눈 깜짝할 새 빙설천지(氷雪天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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