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장 이매망량(魑魅魍魎) (3)
낙양 용문의 빙이가 기괴(奇怪)했다면, 이 수사는 요악(妖惡)하다는 느낌.
태화(蛻化)가 뱀이 새로 태어나듯이 허물을 벗는 걸 뜻하지만, 이렇게 눈 깜짝할 새에 변할 줄은 몰랐다.
더구나 순식간에 벗어 던진 허물로 눈을 속여 폭령진화를 피하면서, 동시에 자철이 함유된 주위의 암석을 삼켜 금광섬삭을 버텨낼 줄이야.
마치 군림검의 오행어검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수사가 삼각형 대가리를 흔들자 돌가루가 뿌옇게 날린다.
암석에 담긴 자철을 흡수한 덕에 버티긴 했으나,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시뻘건 눈알이 자신이 벗어 던진 허물과 해원기를 번갈아 살피더니,
일으켜 세웠던 몸뚱이가 슬금슬금 줄어들었다.
그것도 그냥 대가리를 낮추는 게 아니라 주름을 촘촘히 당기는 괴상한 형태.
높이가 절반 정도 줄어들면서 몸뚱이는 반대로 더 두꺼워지고,
그렇게 허물과 거리가 가까워졌다.
해괴한 광경에 잠시 기가 막혔던 해원기가 두 손의 검결을 바꾸었다.
요물.
수신(水神)에 가까운 빙이는 단지 물을 조종하는 신통력에 주의하면 되었으나, 이 요물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기 어렵다.
까다로운 상대에게 여유를 줘서는 안 된다.
군림검의 눈부신 광채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수원광한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맴돌기 시작하자 한기(寒氣)가 뿌연 돌가루를 대신한다.
수사가 기미를 눈치챈 듯 와락 옆으로 기울었다.
한쪽으로 비틀리는 아가리.
솨악.
폭령진화를 통과시켜버린 자신의 허물이 냉큼 빨려드는데.
그쪽의 수염이 국자를 젓는 것처럼 허물 속으로 쑥 들어가고.
흡력에 의해 빨려들던 허물이 또르르 말려 동그란 덩어리가 되었다.
왼쪽 수염에는 실뱀 뭉치의 시커먼 덩어리, 오른쪽 수염엔 허물 뭉치의 희멀건 덩어리.
두 개가 매달리자마자 삼각형 대가리가 무서운 속도로 닥쳐들었다.
촘촘히 당긴 주름이 마치 용수철같이 튕겨낸 것.
벼락같이 해원기에게 달려든다.
처음에 바위를 부수며 수십 장 거리를 단숨에 좁혔던 게 바로 이런 방법이었다.
집채만 한 몸집으로 양쪽 수염에는 거대한 덩어리를 붙인 채.
그야말로 산사태가 눈앞으로 쏟아지는 것과 다름없지만.
해원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행어검대법의 수원광한은 얼어붙는 한기보다 공간을 점하는 데 묘용이 있다. 이미 신령검역을 펼쳤음에도 아무 지장 없이 움직이는 수사.
거대한 몸집과 요사스러운 능력을 묶으려면 올가미가 더 필요하다.
양손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엇갈렸다.
파파파파팟.
수생목(水生木)의 오행상생을 따라 수원광한이 등목구룡으로.
검기가 무수한 덩굴이 되어 공간을 덮었다.
크륵.
십여 장 앞에서 덜컥 돌진이 멈춘 수사의 아가리에서 희한한 소리가 나고,
대가리가 급히 좌우로 움직인다. 신체가 구속되는 감각에 양쪽 수염에 달린 덩어리로 덩굴을 부수려는 행동.
그러나 이 영악한 요물이 기민하게 대처할 걸 예상했던 해원기다.
오행상생이 돌연 오행상극으로 바뀌었고,
주먹 쥔 왼손을 떠난 오른손바닥이 힘차게 땅바닥을 때린다.
따앙.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쇠북처럼 울면서,
목극토(木克土)의 대괴무극에 공간을 누비던 군림검이 폭포처럼 검기를 쏟아부었다.
아무리 거대한 몸체라도 못질에 박히면 꼼짝할 수 없는 법.
위기라는 걸 직감했나.
수사가 시뻘건 두 눈을 끔뻑하더니 팽그르르 도는 두 개의 덩어리,
대가리 쪽을 튕겨냈던 몸뚱이 쪽이 거꾸로 빨려들면서 거센 돌풍이 일어났다.
휘리리리.
아까처럼 삽시간에 똬리를 틀지만, 수염에 매달린 덩어리 때문에 맹렬한 돌풍이 거대한 몸체를 타고 거칠게 솟구친다.
금광섬삭의 날카로운 강기도 막아낸 몸뚱이다.
등목구룡에서 대괴무극으로 바뀐 폭포를 이 돌풍으로 뒤집으려는 의도. 혹은 똬리가 또 한 번의 탈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해원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이전보다 훨씬 선명해진 상상지가 이것 또한 예측했기에.
굳게 다물었던 입에서 짧은 호통이,
“질(叱)!”
폭포처럼 쏟아지던 검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면서 지면이 화산처럼 터져나간다.
퍼퍼펑!
대괴무극은 토(土). 땅바닥을 때릴 때 검왕오형의 검림소연을 함께 담았으니 상극의 반발로 검기가 거꾸로 지면을 가르고 솟구친 것.
게다가 검림소연의 오의는 수주개와다. 일단 반발한 검기가 공간을 반복왕래하여 기둥을 늘어세우고 그 위에 기와까지 얹을 터라, 수사가 옴치고 뛸 곳이 없었다.
베이고, 잘리고, 찔리고, 끊기고.
화산의 분화 대신에 시뻘건 핏줄기가 사방으로 날면서,
수사가 미친 듯이 똬리를 풀며 날뛰기 시작했다.
크에에에에.
귀청을 찢는 괴성은 요물이 지르는 비명.
톱날 같은 이빨이 달린 아가리가 몸통 양쪽으로 쫙 찢어지고, 양쪽 수염에 달린 덩어리 두 개를 마구 휘두르지만,
오행상극이 연달아 꼬리를 무는 검림소연 안이다.
실뱀을 뭉친 덩어리도, 자기 허물을 뭉친 덩어리도 맥없이 쪼개지고, 뾰족한 뿔까지 잘려버리자.
수사가 몸통 양쪽까지 찢어진 거대한 입을 곧장 해원기에게 돌렸다.
슈우우우우.
비명을 지르던 아가리에서 휘파람 소리가 난다.
흡력. 견디다 못한 수사가 전력을 다해 해원기를 빨아들이려는 듯.
아마도 마지막 발악이겠지만, 아무리 교활한 요물이라도 어느새 해원기의 손에 돌아간 검이 고요한 기운을 풍기는 것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군림검이 아니다.
대괴무극이 검림소연으로 뒤집혔을 때 오행어검으로 공간을 채운 건 검왕오형.
되돌아온 검은 태양과 같은 군림의 기상을 벗고 그윽한 선향(禪香)을 품었다.
상상지가 기다린 것은 바로 수사가 최대한 흡력을 발휘할 때.
스윽.
검이 바람 한 점 일으키지 않고 수사의 아가리로 향했다.
바람에 깃발이 나부끼는 것은 바람이 움직인 건가, 아니면 깃발이 움직인 건가.
바람이 움직인 게 아니라 마음이 움직인 것이요,
깃발이 가라앉은 게 아니라 마음이 가라앉은 것이다.
수미전단검법의 육조심동(六祖心動)이 무량대적(無量大寂)으로 화하면서,
적멸검이 수사의 내부를 꿰뚫었다.
퍽.
잘 들리지도 않을 작은 울림 하나.
미친 듯이 날뛰던 수사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고, 동굴처럼 벌어진 아가리가 슬그머니 닫혀가더니.
몸뚱이를 뒤덮은 주름이 뚝뚝 끊기면서 삼각형 대가리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쿠웅.
원체 거대한 형태라 맥없이 쓰러지는데도 자산이 다 울릴 지경.
핏물이 곳곳에서 콸콸 쏟아지고 악취가 코를 찌른다.
해원기가 문득 등 뒤로 전해지는 맑은 기운을 느끼면서 비로소 숨을 들이마셨다.
악취를 몰아내는 맑은 기운.
“괜찮아?”
오소민이 하화에 항룡진기를 집중한 채 빠르게 다가왔다.
“지독하군.”
뭐가 지독하다는 건지.
산등성이를 거의 메우다시피 한 수사의 시체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오소민이 다시 해원기를 돌아보다가 콧등을 찡긋거렸다.
고검을 보며 인상을 쓰는 해원기. 상당히 불쾌한 표정이다.
하화 덕분에 악취와 더불어 요사스러운 기운도 전부 흩어져서 해원기의 얼굴이 조금 풀리는가 싶더니만,
더럽혀진 검신(劍身)에 기분이 상했나 보다.
어검과 검강이라는 상승의 검학을 시전했음에도 집채만 한 수사를 처리하느라 핏물과 요기를 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보기엔 대충 두드려 만든 뭉툭한 장검이지만, 천하에 비할 것이 없는 신검(神劍). 아니, 그보다 대대로 전해온 고죽지보(孤竹之寶)요, 사부가 직접 건네준 검이니.
요물과의 싸움에 이렇게 더러워진 게 전부 자기 잘못 같았다.
“그냥 피가 아닌가 보네. 씻으려면, 음, 술이 필요하겠어.”
오소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자, 해원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물통은 지금 오소민의 허리춤에 있고.
이런 더러움은 물로 씻기지 않는다.
“후, 우선 뒤처리부터 하세. 음?”
찌이익.
거대한 요물의 시체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 시선을 돌리던 해원기가 오소민의 행동에 눈을 껌뻑였고,
커다란 피풍의 접었던 윗단을 찢어내던 오소민이 미소를 짓는다.
한 손에는 찢어낸 천, 다른 손으로 피풍 안쪽에서 슬그머니 꺼내는 대나무 통.
“그거 귀한 검이잖아. 그대로 뽑아 들고 다닐 셈이야? 뭐, 같은 대나무 통이라고 똑같이 물을 넣으란 법은 없으니까.”
척하니 내미는 양손에 해원기가 웃음이 터졌다.
“하, 술을 가져왔나? 하하.”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먹을 걸 용케 챙겨두던 오소민이었구나.
“거, 판과도 날려 먹어서 제때 밥이나 해 먹을까 근심이 되더라고. 건량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져서. 흐흥, 빨리 받아.”
그래서 몰래 술을 담아왔다는 거다.
변명하는 오소민도 마주 웃고, 그 환한 얼굴에 해원기가 전신의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같이 있으면 언제나 즐겁다.
요물을 죽이고 나서도.
철컥.
고검을 닦아 검집으로 돌리고 나자, 오소민이 하화로 자기 뺨을 문지르며 혀를 찬다.
“쳇, 불 질러 태우는 게 좋은데 지금은 좀 껄끄럽고. 영 방법이 생각나지 않네. 그런데 이런 요물이 어디서 나온 거지? 진짜 수사라면.”
비록 시체가 되었지만, 거대한 몸뚱이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핏물과 그치지 않는 악취.
평소라면 깨끗하게 태워버렸을 것이나,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동창이 곳곳에 배치한 이목이 밤이라고 눈을 감았을 리 없으니, 자산에 불길이 솟으면 주위를 뒤질 게 틀림없고.
괜히 배회촌에게 피해를 줄 우려가 있다.
시체를 녹이는 독한 약 따위를 지니지도 않았으니 산길을 다 막은 거대한 요물의 시체를 어찌해야 할지.
그런 궁리를 하면서 아울러 이 요물의 내력과 출처도 따져보았나 보다.
해원기 역시 거뭇해진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수사는 본래 늪지에서 벌판으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지. 이쪽 지형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런데도 이게 수사라면, 흠.”
똑같은 곳에서 말을 멈추자 오소민의 눈매가 살짝 움직인다.
“신화의 육악이 이 정도일 리 없으니까, 누가 만들었다? 그거 고약하군. 어쩐지 조화부인을 쫓던 때가 생각나는걸.”
창피해서 되살리기 싫은 기억이지만, 오소민의 말뜻은 암습을 당하기 전을 가리켰다.
야점을 차려놓고 그 안에 늘어놓았던 열 개의 항아리. 거기서 꾸물꾸물 기어 나왔던 열 구의 음정수백을 그때도 오소민이 ‘요물딱지’라고 했었다.
해원기의 머릿속에 지난 기억이 떠오르면서 표정이 굳어진다.
상의신모, 도지태사, 그리고 엽산초부를 만났을 때 또 유사한 야점을 차려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사마대가들.
하나의 연결고리. 그건 ‘사황령’이란 단어다.
턱을 쓰다듬던 손으로 수사의 시체 뒤를 가리키는데,
“이만한 크기라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네. 어디서 나왔는지 따라가서.”
“불을 놓지.”
“음?”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고, 이 수사가 만들어낸 거라면 찾으러 올 놈이 있을 테고. 또 방 낭랑에게도 신호가 되잖아. 아예 크게 놓자고.”
빠르게 이어지는 오소민의 말에 해원기가 가리켰던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싸움이 끝나면 확실히 둔해지는 듯. 오소민의 생각을 따라잡는 데 시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