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02화 (302/410)

제76장 이매망량(魑魅魍魎) (2)

오십여 장.

상당히 먼 거리고, 중간에는 많은 바윗덩이가 울퉁불퉁하게 쌓여서 동시안으로도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실뱀이라도 수백 수천이나 되는 엄청난 양.

해원기에 의해 주위 수십 장의 공중으로 쓸려나간 뱀 떼가 마치 한 곳에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빨려 들어가고,

드득.

처음에 지유진으로 단단히 땅을 밟았던 발까지 끌린다.

해원기와 오소민 둘 다 반사적으로 힘을 주어 버티는데,

그 저항을 느꼈을까.

“다가오네.”

짧게 말을 전한 해원기가 빠르게 오른손을 어깨 위로 돌렸다.

퍽, 퍼퍽.

시야를 가리던 바윗덩이가 엄청난 속도로 부서지고 깎여나가면서.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속에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일어났다.

잠깐 사이에 삼십 장이나 줄어든 거리.

“윽.”

형체를 파악하기 전에 먼저 확 끼쳐 드는 악취.

오소민이 신음을 삼키고, 해원기도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맡는 순간 머리가 띵하고 속이 메스꺼워지는 지독한 비린내다.

그리고 그 비린내의 주인공은 바로,

“용(龍)? 흡.”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고,

해원기의 동시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형체. 삼 장 높이에 폭은 일 장이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요, 꼭대기에 달린 머리통은 삼각형. 뾰족하게 솟은 두 개의 뿔 아래에 시뻘건 눈알이 양쪽으로 박혔고, 그 아래에는 깃발처럼 날리는 수염 두 가닥과 톱날 같은 이빨이 삐죽 나온 아가리가 주억거린다.

용문에서 이미 빙이, 혹은 기라고 불리는 괴물을 보았으나,

이 거대한 형체야말로 용이란 이름에 어울릴 듯.

그러나 해원기가 검병을 쥐면서 살짝 고개를 저었다.

“뱀이야.”

뿔이 있어도 녹각(鹿角)처럼 갈라지지 않았고, 시뻘건 눈에는 동자가 맺히지 않았으며, 깃발처럼 날리는 수염에는 털이 없다.

더구나 집채만 한 크기의 몸뚱이에는 갈라진 비늘 대신에 무수한 주름이 겹쳐져서 대장간에서 쓰는 풀무가 연상되니.

용생구자(龍生九子)라고 용의 새끼가 별별 모양을 다 갖춘다 해도 용의 특징은 하나씩 지니기 마련.

이십 장 밖에서 몸뚱이를 세운 이 괴물은 용이 아니라 뱀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뱀이 있을 수 있나.

해원기가 말이 부족했다고 여겼는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용도 삼킬 뱀.”

그 말을 들은 오소민이 미간을 좁혔다.

음침지독인지 뭔지에 당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던 얼마 전. 자신의 멍청한 꼬락서니가 한심스러워 더 집중해서 해원기가 겪은 과정을 들었었다.

현신장이 또 둘이나 나왔다고 했다. 하나는 조양신문의 우두머리인 조양선사, 또 하나는 무명천의 주인이라는 암야무명.

이름만으로는 어떤 자들인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이 둘이 육악지력을 하나씩 지녔다니.

특히 암야무명이 지닌 힘은 수사(修蛇).

머나먼 서역 끝에 코끼리를 통째로 삼키는 파사(巴蛇)라는 뱀이 있다던데. 지금 눈앞의 집채만 한 괴물이 용도 삼킬 뱀이란다.

자연히 파사와 수사가 연결되면서 신경이 곤두선다.

설마 이 괴물이 신화에 나오는 육악 중의 수사일까?

해원기가 덧붙인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서, 요대자를 쥐었던 손을 떼었다.

[백초환의 약력이 아직 남았고, 하화로 항룡진기를 한껏 일으키지.]

전음과 함께 해원기의 등을 가만히 건드리는 손길.

내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싸우라는 뜻이다.

이 자산에 이런 괴물이 왜 갑자기 출현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해원기의 방해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해원기가 머리를 끄덕이며 왼손을 신중하게 정면에 세웠다.

백초환의 약력이 남아있으니 당분간 독기에 당하지 않을 것이고, 보패인 하화를 사용해 항룡진기를 강화하면 호신에 큰 문제가 없을 터.

굳이 전음으로 설명한 건 해원기를 편하게 하려는 의도다.

과연 오소민이다. 총명하고 영민하다.

마음이 놓이면서 눈앞의 괴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정면에 세운 왼손으로 공중을 겨누었다.

오소민과 마찬가지로 해원기도 이 괴물이 수사라는 직감이 들었기에, 동시안이 세밀하게 그 형체를 관찰하는데.

도무지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뱀이라고 단정하긴 했어도, 세상에 이걸 진짜 뱀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대가리를 세운 높이가 삼 장. 그러나 꼬리가 어딘지 알 수 없어서 전체 길이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런 엄청난 크기면서도 삼십 장 거리를 단번에 주파해 다가왔고, 바윗덩이를 가볍게 부순 몸뚱이에는 상처 하나 없다.

뾰족한 뿔, 두 가닥 수염, 톱날 같은 이빨. 뭐로 덤벼들지 모르겠다.

혹시나 하고 뱀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다는 대가리 아래의 칠촌(七寸) 급소를 찾아보았으나, 몸뚱이 전체가 풀무 같은 주름이니.

단 하나 아는 건 실뱀 떼를 모조리 빨아들인 흡력.

왼손 끝이 차츰 위로 올라갔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눈이 약점이란 건 불변의 진리요, 땅 위에서 움직이는 짐승이라면 중심을 흔들어야 한다.

쿵.

지유진으로 땅을 박차면서 벼락같이 공중으로 솟구쳐올랐다.

챙.

진각의 경력이 미치기 전에 검이 뽑혔고,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 해원기의 전신에서 뻗었다.

시뻘건 두 눈을 베어버릴 셈.

그러나 이 거대한 뱀, 수사의 반응은 예상을 훨씬 벗어났다.

실뱀이 떼로 몰려들었을 때 지유진을 썼었다.

지면을 타고 전해지는 그 경력을 이미 겪어서 아는 것처럼, 해원기의 발이 땅을 박차자마자 수사의 몸뚱이가 기묘하게 뒤집혔고.

주름이 와르르 뭉치면서 삼 장 높이의 대가리가 다시 일 장이나 위로 치솟았다.

소리도 없이 몸뚱이 전체가 공 튀듯 뛰어오른 것.

검이 뽑히고 예기가 뻗치는 순간, 수사의 대가리는 이미 해원기의 머리 바로 위까지 늘어났고.

두 가닥 수염이 뒤로 확 젖혀지면서 삐쭉 튀어나온 아가리.

톱날 같은 이빨이 벌어지면서 시커먼 덩어리가 화살처럼 튀어나왔다.

화락.

직접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속도와 반응.

거대한 크기가 무색하게 영악한 대처고, 아가리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덩어리는 해원기 전체를 덮을 만큼 크다.

눈알을 노리던 검이 급히 뒤집혀 시커먼 덩어리를 막아야 했다.

이미 끌어올린 신왕공. 검신이 부르르 떨며 맹렬한 검풍이 일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덩어리다.

함부로 베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혹시 독이라도 있다면.

실뱀 떼를 날려 보냈을 때처럼 제탁지검을 실은 풍뢰일격.

우릉.

뒤늦은 뇌성이 울리지만, 그 전에 해원기는 황망히 왼손을 때려냈다. 공간을 뒤집는 대우신장.

팡.

창호지를 뚫은 것보다 약한 소리와 함께,

해원기가 황망히 공중을 차면서 몸을 옆으로 틀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고, 신형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밑으로 떨어져 내린다.

제탁지검을 실은 풍뢰가 닿으려는 순간에 시커먼 덩어리가 돌연 거꾸로 물러나고,

검세가 힘을 잃자마자 전신을 빨아당기는 느낌.

미리 흡력을 주의했기에 급히 대우신장을 펼쳤으나, 그 대우신장까지 빨려드는 듯.

간신히 몸을 빼낼 반동을 얻기는 했으나 균형이 무너졌다.

수사의 중심을 흔들려던 해원기가 되레 공중에서 버틸 수 없게 되었고.

아래로 떨어지는 해원기 위로 수사의 아가리가 또 벌어졌다.

화락.

다시 튀어나오는 시커먼 덩어리.

해원기의 머리 위로 바윗덩이를 내리친 것과 다름없는데.

더구나 아까보다 더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찌른다.

해원기가 검을 품에 안으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빙글.

거꾸로 회전하는 몸을 따라 검광이 원을 그리고, 그 속도가 삽시간에 빨라진다.

위잉.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원. 떨어지던 신형이 공중에 그대로 멈추면서 맹렬한 기세가 일고.

이번에는 시커먼 덩어리를 그대로 쪼개버렸다.

펑!

폭음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시커먼 덩어리. 그건 놀랍게도 실뱀 떼를 뭉쳐놓은 것인데.

탁 소숙에게 배운 건곤차륜세(乾坤車輪勢)을 응용했던 해원기가 그대로 지면에 내려섰다. 본래 차륜세 다음은 선전건곤(旋轉乾坤)이라는 절초.

수레바퀴가 종횡으로 엇갈리며 회전에 회전을 거듭해 공중을 도약하는 치명적인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쉬익.

해원기가 건곤차륜세를 펼쳤던 공간을 시커먼 덩어리 또 하나가 훑고 지나간다.

산산이 부서진 실뱀 떼는 어느새 사라졌고.

거대한 대가리가 먼저 공중을 점하는 바람에 시야가 좁아졌다.

풍뢰일격을 놀리듯 뒤로 빠지면서 흡력을 발휘했던 맨 처음의 시커먼 덩어리. 그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왼쪽 수염에 붙었고.

해원기가 간신히 옆으로 빠져 떨어지기 시작하자 수사의 모가지 주름이 좌악 늘어났다. 해원기의 머리 위 공간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는 행동.

그리고선 아가리에서 또 하나의 시커먼 덩어리를 토해냈고, 건곤차륜세로 부서지자 수염에 붙은 처음의 덩어리를 추(錘)처럼 후려쳤으니.

세로로 회전하는 건곤차륜세의 약점을 노렸다는 거다.

게다가 부서진 실뱀 떼는 도로 톱날 같은 이빨 사이로 빨려 들어갔고.

해원기가 바닥에 내려서는 동시에 몸뚱이가 또 뒤틀리면서 늘어났던 모가지가 와락 줄어들었다.

왼쪽 수염에 덩어리 하나를 매달은 채로.

시뻘건 눈알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해원기를 훑는다.

그 시선에 담긴 영악함은 이 수사가 지혜를 지닌 요물이란 방증이다.

[저렇게 교활하다니. 괜찮아?]

오소민이 제때 전음으로 알려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다.

[조금 더 뒤로. 저릿한 독기가 있어.]

두 번째의 덩어리. 건곤차륜세로 부술 때 전신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신왕공의 제탁지능(除濁之能)이 없었다면 마비를 피할 수 없었을 터.

실뱀한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독기가 수사가 토한 덩어리에서는 강하게 퍼졌다.

뒤에서 지켜보며 수사의 교활한 공격을 알려준 오소민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해원기가 전음으로 답하는 동시에 검을 머리 위로 띄웠다.

위이이잉.

이 수사는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교활함을 지녔다. 실뱀 떼를 뭉쳐 내단(內丹)처럼 토해내는 것도 그렇지만, 번갈아 끼치는 흡력도 문제. 용문에서 상대했던 빙이보다 훨씬 고약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태양처럼 강렬한 빛이 떠올랐다.

군림검을 꺼내면서 양손의 검왕수가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으로.

신령검역으로 가두고 어검대법으로 단숨에 파괴할 생각이다.

그런데.

군림검의 눈부신 광채가 떠오르자 수사의 시뻘건 눈알이 기괴한 빛을 머금고,

촤라라라라.

거대한 몸뚱이가 미친 듯이 맴돌기 시작한다.

군림검의 빛이 두려워 숨는 것처럼 대가리를 파묻고, 몸뚱이가 겹겹이 얽혀서 똬리를 트니.

단숨에 높이가 오 장까지 올라가 엄청난 탑처럼 변했다.

드드드드.

광분한 똬리 틀기에 지면이 마구 흔들리고 바윗덩이가 절로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해원기가 두 손으로 검결을 짚었다.

수사가 독기를 속에 품었다는 걸 알기에 처음부터 폭령진화.

화르륵.

공간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화염.

대번에 탑처럼 거대한 똬리가 불길에 휩싸였다. 아무리 영악한 요물이라도 빛과 불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

하지만, 폭령진화를 쳐냈던 해원기의 눈매가 비틀리며 검결이 빠르게 좌측으로 바뀌었다.

치이잉.

군림검이 순간적으로 금광섬삭으로 변해 지면을 가르고,

콰앙!

화약이 터진 것처럼 날리는 돌조각. 땅속에서 수사의 삼각형 대가리가 요동치며 솟구쳐오르는데,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똬리는 또 좌르르 풀리면서 오른쪽으로 화염을 토해낸다.

언제 땅속으로 기어들었나.

요동치는 삼각형 대가리가 아까와 달리 자철을 품은 것처럼 붉고, 똬리가 속이 텅 빈 통처럼 폭령진화의 화염을 배출한 걸 알아챈 해원기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탈피(脫皮)?”

그 짧은 틈에 허물을 벗어 폭령진화를 그대로 통과시키고, 본체는 지하로 파고들어 주변의 암석을 흡수해서 금광섬삭까지 버텨냈으니.

진짜 영사태화(靈蛇蛻化)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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