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장 이매망량(魑魅魍魎) (1)
삐잇.
해원기만이 들을 수 있는 동강의 울음.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갔는지 영교(靈交)를 타고 전해진 울음이 겨우 들리고,
얼싸안고 울어대던 오소민이 움찔할 만큼 해원기의 전신이 굳어졌다.
“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참으로 쑥스럽기 그지없는 상황.
오소민이 얼굴을 파묻은 해원기의 앞섶은 눈물로 범벅이요, 그런 오소민을 해원기가 또 꼭 끌어안은 자세였으니.
그러나 쑥스러움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품에서 고개만 들어 올린 오소민의 눈에 해원기의 바짝 긴장한 아래턱이 보인다.
“이상하군.”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느라 바짝 당겨진 목젖이 짧게 움직였고,
그제야 오소민이 슬그머니 해원기를 밀어냈다.
이게 무슨 꼴이람.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두 남녀가 서로 끌어안았지, 게다가 여자 쪽은 애처럼 엉엉 울기까지 해서.
훤한 대낮이었다면 쥐구멍이라도 찾았을 것이다.
‘그나마 달빛도 없는 밤이라 다행이네. 그런데.’
빛이 없어도 보는 데 지장 없는 고수들이지만 벌게진 얼굴을 그대로 들 수 있어서 다행.
해원기가 집중해서 동강을 찾는다는 걸 알아봤다.
오는 동안 말머리를 찾느라 대충 찾는 척하던 것과는 다르다.
긴장한 모습으로 유심히 살핀다.
“이상하다? 동강에게 문제가 생겼나?”
함부로 세상일에 끼어들지 않게 되어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영물인 신응이다.
아득한 하늘 위에서 어떤 날짐승도 건드리지 못할 터.
해원기가 시선을 내리며 미간을 좁혔다.
“떠날 때 잠시 배회촌 주위를 지켜보다가 나중에 따라오라고 했었는데. 뭐가 불쾌한지 욕을 하면서 멀어지네. 영교가 끊길 정도로.”
신응이 욕설까지 한다는 얘긴 처음 듣지만.
오소민은 이게 단순한 우스개가 아니란 예감이 들었다.
은허의 운해신조경에서 벗어나 계곡에 숨겨진 바위 동굴로 피했을 때, 동창의 무리가 대번에 뒤를 쫓아왔었다.
물론 그 원인이 된 물건, 즉 책군이 지니고 있던 묘한 신패는 이미 파괴했으나.
금의위 대영반. 칠성검 서문창이란 자가 등장하면서 물러난 자들이 그걸로 추격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상대는 당대의 권력을 움켜쥔 자들.
대내의 무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관군을 움직일 수도 있으며, 강호에서 매수한 자들도 가벼이 볼 수 없다.
예전에 해원기가 약왕당을 떠나 북상하자마자 이목이 따라붙고 살수가 덤벼들었던 일.
엽산초부의 정체를 파악했다면 해원기의 행선지를 태항산 위에 있다는 녹림장관으로 예측했을 수도.
이 자산 근처까지 괴상한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해원기도 굳이 동강에게 배회촌 주위를 지키도록 했을 것이다.
욕설까지 하는 영물이 함부로 주인의 뜻을 거스를 리 없건만.
오소민이 소매로 얼굴을 닦으면서 기민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나 풀보다 바위와 돌이 더 많은 거친 산.
날이 밝았다면 바위에 섞인 자철 때문에 온통 불그레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겠지.
“너무 조용해.”
해원기에게 나직하게 건네는 말에 낭패감이 묻어난다.
어지간히 정신이 나갔구나.
혼자 떠나겠다는 해원기를 꼼짝 못 하게 만들어서 같이 가게 되니까 희희낙락했던 걸까.
자신의 과거를 얘기했으니 해원기도 전부 털어놓게 하려고 기를 썼었나.
그러다가 그만 지나치게 몰두해 감정적이 되는 바람에.
‘미쳤군, 미쳤어.’
딱히 무림인이 아니라도 강호를 떠도는 자가 밤길을 나서면서 주위를 살피지 않다니.
흑야(黑夜)의 정적(靜寂).
지금은 가을이 끝나가는 무렵. 아무리 바위투성이 산이라도 겨울나기를 대비해 어슬렁거리는 짐승이 있을 법하고, 철이 지난 걸 모르는 풀벌레 소리라도 나야 하거늘.
지나치게 조용한 걸 비로소 깨달았다.
“좋지 않은 느낌. 일단 움직이세.”
마찬가지로 주변을 훑어보던 해원기의 눈에 비췻빛이 어렸고, 선뜻 앞으로 나선다.
뭐라고 딱 짚어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특별한 기척이 전해진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은밀한 기운이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불쾌하다.
“동강으로 하여금 욕을 하며 멀리 떨어지게 할, 요사스러운 게 막 산 뒤로 올라온 듯하군.”
어차피 자산을 넘어야 하북으로 빠진다.
방온화가 가르쳐준 샛길 쪽, 곧장 산 뒤로 향할 셈.
오소민이 손에 든 대나무 통을 허리춤에 찔러넣으며 바짝 붙었다.
“요사스러운 거라. 뭐길래 동강이 욕을 했을까.”
신응이 영교가 끊길 거리까지 피했다면 평범한 요물은 아닐 터.
그런 게 왜 갑자기 이 자산으로 기어올라 왔을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지만.
‘왜 하필 이때지?’
속으로 생각을 굴리는 오소민은 어쩐지 은근히 심통이 났다. 왠지 모르게.
예전에 동강이 청강주의 기연을 나누어 받은 후론 되도록 낮게 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줘야 했었다.
호랑이든 곰이든 질겁하고 도망 다니기 일쑤였으니까.
심심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맹수들의 눈알을 빼먹고 돌아다녔고, 짓궂게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괴롭히다가 사부에게 훈계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 함부로 짐승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고, 식사도 되도록 해악을 끼치는 독물을 골라 잡아먹었는데.
해원기가 신왕공을 끌어올리며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오소민의 말대로다.
웬만한 요물이면 오히려 먹이로 삼았을 동강이 견디지 못하고 피하면서 경보만 울려줬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상황.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동시에 두 번이나 희귀한 독에 당했던 오소민이 해를 입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제탁지검을 오른손의 검왕수에 실었고,
걸음걸음마다 지유진의 힘을 흘렸으며,
왼손은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뒤로 돌아 오소민을 지키듯 펼쳐졌다.
‘여름이 되기 전, 대별산에서 산소(山魈)를 만났을 때 같구나.’
문득 얼마 되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갑자기 쏟아지던 폭우, 증명단과 당령을 데리고 약왕당을 찾아가다가 산중에서 요괴를 만났던 일.
그때와는 다른 기분이지만, 이렇게 불쑥 요기가 나타나는 건 똑같다.
자산에서 자생한 요물이 아니라는 뜻.
한 걸음, 한 걸음.
돌무더기가 곳곳에 쌓여 가려진 샛길로 접어들었다.
방온화가 일러준 대로라면 이 자산의 중턱을 빙 돌아 곧장 넘어가는 길. 예전에 여기서 자철을 파냈을 때 만든 광도(鑛道)의 흔적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해원기의 발이 멈칫,
동시안이 전면을 향하고, 등 뒤에 딱 붙어서 좌우를 살피던 오소민이 신음처럼 억눌린 소리를 냈다.
“으으, 이거 뱀이잖아.”
개방의 순행장로가 뱀 따위에 겁을 먹을 리 없지만,
전신을 부르르 떨며 얼핏 해원기의 허리춤을 잡는 건,
그 수가 엄청나기 때문이었다.
스스스.
바위와 돌을 타고 좌우에서 몰려드는 것들.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 굵기인 뱀들.
그런데 그게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무리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이렇게 늦게 발견했던 이유는 뱀들이 워낙 작아서.
흔히 숲속에서 보이는 풀뱀보다도 더 가는 실뱀들이 슬금슬금 밀려들고.
그뿐 아니라,
해원기가 주시하는 전면에도 종이에 물이 번지듯 뱀 떼가 지면을 덮어간다.
“이게 말이 돼? 자산이 아니라 사산(蛇山)인감?”
이때 이런 곳에.
오소민의 황당하다는 혼잣말처럼 상리에 어긋나는 현상.
해원기가 발에 힘을 주면서 말을 건넸다.
“웅황탄이 있으면 쓰게.”
개방 비전의 웅황탄. 화산에선 퍼지는 독기를 풀어내느라 쓰였으나, 본래 야생의 독물을 몰아내는 효과가 있다.
말을 마치자 힘차게 발을 굴렀다.
쿵.
지면으로 경력을 전해 상대의 중심을 흔드는 지유진은 사부와 탁 소숙 모두 즐겨 썼던 수법이지만,
지금은 해원기를 중심으로 퍼지는 물결처럼 동심원을 이루었다.
드드드.
뱀 떼보다 먼저 돌무더기와 바위가 크게 흔들리고 공간이 확 넓어지는데.
크르르르르.
눈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서 돌연 괴상한 소리가 울렸다.
지면을 타고 퍼지는 지유진의 힘을 도로 밀어내듯 바닥에 착 깔린 울음.
그 울음이 울리자,
스스슥.
물결처럼 출렁이며 밀려가던 뱀 떼가 돌연 맹렬히 뒤엉키기 시작했다.
본래 뱀은 동면할 때가 되면 서로 몸을 얽어 한 무더기가 되는 법이지만, 그것도 보통 열댓 마리 정도.
수백 수천의 뱀이 미친 듯이 엉겨 붙는 광경은 소름이 끼친다.
펑, 펑.
때맞춰 좌우로 웅황탄이 터지면서 누런 연기가 퍼지지만,
“두 발이 다야. 쯧.”
개방의 장로라고 해도 평소에 지닌 웅황탄은 기껏 두 개. 웬만하면 하나만 사용해도 독물이 질색하며 물러나겠으나.
지금은 엉겨 붙은 뱀 떼의 덩어리가 되레 웅황탄의 연기를 깔아뭉갤 듯.
오소민이 자신 없게 혀를 차는 소리에,
해원기가 왼손으로 전면에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어떤 요물이 냄새를 피우는지 알아보세.”
말과 함께 자세를 고치느라 그랬는지 오소민이 잡은 허리춤을 슬쩍 들이민다.
어쩐지 요대자를 단단히 잡으라는 것 같아서.
멋쩍게 손을 고쳐 쥐던 오소민이 문득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냄새라.
그러고 보니 이렇게나 많은 뱀 떼가 몰려들었는데 어째 비린내 한 줄기 나지 않았을까.
어마어마한 수의 뱀 떼에게 포위당한 걸 몰랐던 건 단지 실뱀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걸 알고 냄새라고 했나? 하여간 싸울 때는’
믿음직한 등을 흘겨볼 새도 없이.
해원기가 제탁지검을 실은 오른손을 힘차게 내질렀다.
우우웅.
오소민이 흘겨보려던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로 거대한 검형.
발검제형이 폭풍을 끌고 벼락처럼 뻗는다.
와르릉!
뒤늦게 공간을 흔드는 우레.
전면을 뒤덮었던 뱀 떼는 폭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날아가고, 좌우에 엉겨 붙던 덩어리들은 뇌성에 놀란 흙더미처럼 무너진다.
가공할 위력.
은허에서 천금가 천응령의 마지막을 확인한 후부터 신왕공이 또 다른 경지에 접어든 듯.
삼산을 갖지 못한 해원기로선 여전히 이 경지를 삼전태라 여기기 어려웠지만,
지금의 발검제형도 제탁지검의 기운을 공간 전체에 폭발시킨 풍뢰일격(風雷一擊).
헤아릴 수 없이 많던 징그러운 뱀 떼가 단번에 쓸려나갔다.
오소민이 해원기의 어깨너머로 보다가 입을 딱 벌릴 정도.
그런데.
딱 벌어졌던 입에서 뒤집힌 목소리가 튀어나왔고,
“에엥? 저, 저거.”
굳이 오소민이 가리킬 필요도 없이 해원기 역시 얼굴을 굳히며 시선을 모았다.
솨솨솨솨.
낙엽처럼 날아가고,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리던 뱀 떼가 돌연 한 방향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니, 뱀 떼만이 아니라 돌무더기와 작은 바위까지.
대략 오십 장이 넘는 거리, 샛길이 완만하게 꺾이는 바로 뒤쪽에 무슨 공동(空洞)이라도 생긴 것 마냥.
해원기에게까지 흡력(吸力)이 미친다.
괴상한 울음이 울렸던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