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장 정서난심(情緖難審) (4)
어쩌면 흔하디흔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찮은 고아가 우연히 훌륭한 사람을 만나 가족 같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컸다는.
물론, 그중엔 아픔도, 슬픔도 간혹 섞이겠지만.
원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잖은가.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닥치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이별이나 불행이 끼어들기도 하는 법.
굳이 천재지변을 언급할 필요 없이,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해원기의 출신과 이사모란 분이 아이를 잃었다는 얘기.
시작부터 전혀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라 오소민이 조금 놀랐지만, 섣부르게 위로를 건네지는 않았다.
그분.
천하제일검을 넘어서 백년제일검사로 일컬어졌던 그분을 사부로 모신 해원기다.
함께 갖가지 일을 겪으면서 그분의 제자답게 가공할 능력을 지녔다는 걸 실감했다.
풍모와 재주가 세상에 짝을 찾을 수 없고, 기세가 구천을 날아오르는 매와 같다는 ‘절세검왕’.
더벅머리에 허름한 차림새, 무덤덤한 표정에 답답한 말투.
그러나 일단 손을 쓰기로 마음먹으면 그야말로 그 별호에 걸맞은 절세의 신위를 드러낸다.
한데.
무림을 등지고 단지 장거리 쾌체로 지낸 세월.
무엇이 해원기를 그렇게 살도록 했을까.
두렵다고 했다. 뭐가 그리 두렵기에?
또 잃을까 라고 했다. 무엇을 잃었기에?
알고 싶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다시 아이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고. 어린 소유(小柔)도 눈치챘는지 많이 울더군. 아, 소유는 여동생 이름이야. 대사모(大師母)가 낳으신.”
묻지도 않은 걸 굳이 밝히는 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이리라.
해원기가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이사모는 본래 호방한 성격이어서 겉으론 금방 괜찮은 척,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울한 분위기가 되었지. 아는 분들이 위로하러 오는 것도 일부러 거절하고. 더구나 해를 넘기고선 소유도 떠났거든. 잠시 떠나는 일정이긴 했어도 아기가 태어났다면 아마…….”
캄캄한 밤하늘로 동강을 찾던 시선이 아련해지고,
담담하던 목소리도 얼핏 흐려진다.
가슴속 깊이 차곡차곡 접어두었던 기억을 다시 펼치기는 그리 쉽지 않구나.
일부러 얼굴을 돌려 오소민을 보면서,
“아까 왜 돌아왔느냐고 물었지? 사부님의 별명이 없는데도.”
집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갔다고 했었다.
“어, 응.”
가만히 귀만 기울이려던 오소민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내가 살던 환정곡에는 또 한 분이 계셨어. 사부님, 두 분 사모님, 소유. 그리고 교 노사. 사부님의 노복을 자처하셨던 분. 그분이 몰래 알려주셔서.”
비로소 해원기의 집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환정곡이란 골짜기에 함께 사는 여섯 식구.
해원기의 말이 자꾸 뚝뚝 끊겨서 오소민이 몰래 한숨을 삼키며 말을 받았다.
“교 노사란 분은 누구?”
얘기의 초점을 조금 바꾸려는 질문이다.
이사모는 난산으로 아기를 잃었고, 대사모의 어린 딸은 집을 떠나야 했으니. 슬픔과 적막에 잠길 뻔한 시기에 그나마 해원기가 되돌아가서 다행.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형도 알지 않을까? 예전에 종횡강호 십팔마검이라고 불렸던 검객들이 있었다고. 화산검협 마 장문인의 사부, 비마방 위 방주의 사부, 또 종남파의 노진인. 그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분이지. 외호가 수라검이라는. 그렇지만 그 외호와는 전혀 맞지 않는 분이라. 하, 얼마나 짓궂고 재미있는 성격이었는지. 툭하면 놀리고 걸핏하면 장난치고. 저 녀석하고도 가장 친하게 지내셨다니까.”
과연 해원기의 표정이 풀려간다.
“호오, 동강과? 영금신조는 여간해선 주인 외에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냥 영금신조인가. 주인의 머리를 둥지로 삼는 건방진 신응이거늘.
오소민의 맞장구에 해원기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글쎄. 사부님을 비롯한 다른 가족에겐 기가 죽어서 슬슬 피하는데, 유독 교 노사가 부르면 점잖게 팔뚝에 앉더란 말이지. 내가 곡을 떠난 기간 중 저 녀석이 보이지 않으면 교 노사 보러 간 거였다고.”
“아아, 그래서 때맞춰 소식을 전할 수 있었구먼. 해 형, 자네가 와서 어른들 마음 위로하란 뜻으로. 다정하시네.”
“그렇지? 그렇게 다정하, 했던 분이.”
비로소 해원기가 사부의 허락 없이 환정곡으로 되돌아간 이유를 알았지만,
다정하다가 다정했다로.
말을 바꾸는 해원기의 음성이 다시 잦아든다.
“다음 해를 넘기지 않고 돌아가셨다네. 후.”
남에게 들은 것 같은 말투지만, 짧은 한숨이 무겁기만 하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던가.
불행은 홑으로 오지 않는다고, 난산으로 아기를 잃고, 어린 딸은 집을 떠나는데, 노복을 자처한 노인이 홀연히 생을 마쳤다.
툭.
해원기가 아이들처럼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찼다.
“정말 갑자기였어. 소유를 보낼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어디 아픈 티도 내지 않던 분이 갑자기. 고된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누이듯, 오랜만에 편하게 깊은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아줄 때까지 킬킬거리셨으니. 뭐, 당신은 일생의 바람을 다 이루어서 아주 만족스럽다나? 쳇.”
한숨 대신 혀를 차고.
오소민이 뭐라 할 말이 없어서 해원기의 옆얼굴만 쳐다보았다.
심통 난 아이처럼 구는 행동. 그건 딱 할아버지를 잃은 손자의 외로움.
안쓰럽다.
“자네 사부님을 모시고, 더하여, 자네와 자네 여동생이 잘 큰 모습을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셨나 보지.”
이렇게 이해해주면 위안이 될까.
오소민은 차츰 해원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화불단행. 그 네 글자가 절로 머리에 떠오르면서.
잃은 게 많으면 자연스레 얻기가 두려워질 터.
그런데 실제로 잃은 이는 해원기라기 보다는 해원기의 사부잖나.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어서인지 걸음이 조금 느려지고,
해원기가 어둠 속을 멀리 내다보느라 미간을 좁혔다.
“그거야, 교 노사의 소원인데. 사부님은 뭐가 그리 부러우셨는지 마지막 바람을 기어이. 에, 그래서 몇 달간 아주 고생했다네. 자, 저쪽으로 돌아가면 소숙모가 가르쳐준 샛길이 나오겠군. 그쯤에서 숨을 좀 돌리세.”
자산을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둘의 실력이면 쉬지 않고 산을 넘을 수 있고, 여차하면 밤을 꼬박 새워 경공을 펼칠 수 있건만.
해원기가 먼저 쉴 곳을 찾는다.
해원기의 사부, 고검협 묵세휘.
외호와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는 이가 없어서 당세에는 거의 잊힌 인물. 아니, 잊힌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행적을 지웠다고 해야 한다.
팔자의 언약을 통해.
과거에 고검협과 함께 싸웠던 여덟 명의 사부들도 자세한 얘기를 해준 적이 없기에,
오소민이 아는 건 극히 적었다.
물론 해원기가 자신의 사부에 대해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떠들 리는 없지만, 얘기를 들을수록 고검협이란 인물이 더 신비하게 느껴졌다.
‘혼자서 백 년이 넘게 지속된 사마의 난세를 끝냈다고. 신화의 경지에까지 이른 절대의 능력으로 모든 난관을 넘어섰지만, 그보다는 세상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한 숭고한 정신에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매번 그런 얘기만 들었지.’
강호를 희롱하며 여간해선 남을 인정하지 않는 개방의 팔선이 죄다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
불행이 거듭 이를 때 그는 어땠을까.
소원을 이룬 교 노사의 죽음 앞에서 자기도 기어이 마지막 바람을 이루려 했다니.
어떤 바람이기에?
밤눈이 훤한데도 한참을 왔다 갔다 하던 해원기가 겨우 적당한 자리를 찾았나 보다.
“여기가 낫겠네. 자산이라는 이름처럼 쇠가 섞인 바위가 많아.”
가을도 저물어갈 때라 건조한 날이 이어지지만, 산등성이의 돌무더기는 붉은 줄이 이끼처럼 붙은 게 많았다.
자철이 녹이 슬어서일지.
그나마 멀쩡한 너럭바위 하나.
대충 걸터앉자 해원기가 물이 담긴 대나무 통을 꺼냈고.
아직 목이 마를 리 없지만, 오소민이 별말 없이 물을 받았다.
다시 얘기를 잇기 어려운 부분이라 궁리할 시간이 필요했었나.
물을 건네준 해원기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사부님은 천살(天殺)의 별 아래 나셨다고. 나는 살기를 거의 갖지 않아서 그 의미를 잘 몰라. 협의를 행했다고 해도 살생의 업은 참으로 막중하다는 것밖에. 업이라, 참 어려운 말이지만, 그 원한(怨恨)이 언제나 사부를 감싸고 있다고 하시더군. 그래서 후손까지 해를 입는다고. 이사모에게서 태어날 아기는 아들이었나 봐.”
툭 던지는 말.
“음?”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반응을 모르는지 해원기가 자신의 등에 멘 고검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 검. 한으로 뭉친 비를 내리고 원망이 담긴 바람을 부른다네.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룬 적도 있다고. 환정곡이 바로 발해에 연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검을 씻기 위함이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검을 선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무수한 선조의 영혼, 또 이 검에 의해 목숨을 잃은 자들…….”
오소민이 멍하니 눈동자만 움직였다.
얘기가 별안간 따라가기 어렵게 빨라졌고, 얼핏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천살, 살생의 업, 원한으로 후손이 해를 입는다.
검이 원한의 비바람을 일으켜 시산혈하를 이룬다니. 그리고 검을 선영으로 삼는다니.
태어날 사내아이가 죽은 것도, 어린 딸이 집을 떠난 것도, 평생을 모신 노복이 갑자기 숨을 거둔 것도 다 살생의 업 때문이라고?
“어, 소유라는 따님도, 그리고 해 형도.”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입이 제멋대로 반론을 내민다.
사모님 둘, 해원기와 소유는 멀쩡하잖나. 그리고 해원기는 다 알면서 그렇게 불길한 검을 메고 다닌단 말인가.
해원기의 옆얼굴이 바로 끄덕거렸다.
“맞아. 난 괜찮아. 소유도. 사부님이 원한을 품은 모든 영혼을 전부 받아들이셨으니까. 두 분 사모님도 같이. 진혼(鎭魂)과 위령(慰靈)을 마지막 소원으로 삼으신 거지. 내 성을 묵(墨)으로 바꾸지 않으셨고, 소유를 해중천(海中天)에 보내신 것도 다 그런 이유였어.”
묵원기가 아닌 해원기. 소유라는 딸을 보낸 곳은 해중천.
전부 바다 해(海).
아득한 바다여야만 쌓인 원한을 씻어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고검협과 두 부인은 진혼과 위령에 모든 걸 바쳤다.
해원기는 이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천마를 멸하는 천손의 숙명은 이제는 끝났으니, 나는 그저 무도(武道)를 걷기만 하면 된다고. 그게 사람이 살아가는 길 중의 하나.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박대정심이란 목표를 이루려면 넓은 세상에서 많은 걸 배워야 할 테니. 배움은 쓰임이라, 흉기인 검이라도 쓰일 곳이 반드시 있단다. 그러다가 뜻이 맞는 이와 벗이 되고, 너를 아끼는 좋은 사람도 만나게 될 터. 즐겁게, 행복하게. 훗.”
어느새 사부가 해줬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지만,
끝에 붙은 웃음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오소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비의 인물이라 여겼던 고검협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위대했지만,
‘위대한 것보다 너무나.’
참혹한 삶, 처량한 인생. 세상을 홀로 구한 영웅에게 이런 결말이라니.
가슴이 꽉 막혔고.
해원기의 모습이 갑자기 멀어진 것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이런 식으로나마 얘기를 다 했구나.
짧은 헛웃음으로 흐트러진 심사를 정리한 해원기가 문득 목이 말랐다.
드물게 많은 말을 해서인지.
대나무 통을 찾아 머리를 돌리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어, 왜, 왜 그러나?”
뚝, 뚝.
똑바로 해원기를 보는 오소민의 커다랗게 뜬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응? 응!”
오소민도 그제야 깨달은 듯.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눈물을 훔치려고 급히 들어 올린 손엔 대나무 통이 그대로.
“아얏.”
엉뚱하게 눈가를 찌르는 통에 펄쩍 뛰고. 해원기도 황망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
“으허엉!”
얼굴을 살피려고 두 손을 내민 해원기.
오소민이 불쑥 울어 젖히며 그런 해원기를 얼싸안았다.
왜 울음이 터졌는지 모르겠지만,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속을 다 털어놓으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