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99화 (299/410)

제75장 정서난심(情緖難審) (3)

위험에 처하면 몸을 다치고, 옛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상한다.

다치고 상하면 어떻게 되나.

많이 다치면 거동이 불편하고, 많이 상하면 마음을 닫아걸게 될 터.

목숨을 잃을 수도, 살아도 산 게 아닐 수도.

해원기는 그렇게 잃은 적이 있나 보다.

사랑하는 이를.

그래서 ‘또’ 잃을까 두려웠구나.

오소민도 힘주어 해원기의 손을 맞잡았고, 다짐하듯 다시 되뇌는 말.

“나도 해 형을 잃고 싶지 않아.”

거칠게 젓던 해원기의 머리가 딱 멈추었다.

“그럴 일 없네. 그렇지만…….”

오소민을 보는 눈동자가 여전히 불안한데,

코끝이 서로 닿을락 말락.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걸 비로소 깨달은 오소민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맞잡았던 손을 황급히 뿌리치면서,

“뭐, 뭐야. 자넨 절세검왕이니까 괜찮곱, 윽.”

서두르다가 혀를 씹은 듯, 그래도 하던 말은 끝까지 한다.

“나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거야? 아니면 이런 나를 지켜줄 자신이 없다는 건가? 사내대장부가 좀스럽기는, 흥.”

코웃음은 쑥스러움을 숨기려는 것이겠지.

그런데.

뿌리쳤다고 여겼던 손이 여전히 해원기에게 잡혀 있고,

“맞아. 난 자신이 없네.”

어두운 눈매만큼 무거운 음성에 오소민이 멈칫거렸다.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부끄러움도, 그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가장도 다 잊고서.

진심이다.

해원기의 자신 없다는 말. 기막힌 능력을 지닌 이 더벅머리가 이렇게 맥빠진 소릴 할 줄이야. 그리고 그 바닥에 깔린 두려움까지.

전부 다 해원기의 마음속 깊은 곳의 울림이었다.

오소민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침상 위에 널린 꾸리다 만 행장. 손목을 쥔 해원기의 손을 가만히 풀어내면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량을 담은 꾸러미, 마실 물이 담긴 대나무 통. 그 옆에 던져 놓은 커다란 피풍과 방립.

“나는, 나는 사실 내 성이 방(方)인 줄도 몰랐었지. 어슴푸레한 기억 속의 얼굴, 그냥 ‘어르신’이라고만 불렀던 사람이 아버지란 것도. 어르신은 무척 엄격해서 어려서부터 무서워했어. 엄청나게 공부를 시켰거든. 어머니와 또 어머니처럼 나를 귀여워해 준 여러분이 없었다면 참 힘들었을 그런 생활. 그 생활도 한순간에 무너졌고…….”

차분하게 옛이야기를 시작한다.

정실 소생이 아니었는데도, 사내아이가 아니었는데도. 타고난 천품이 뛰어난 걸 알고는 정성을 들여 가르쳤고. 집안뿐 아니라 지인들에게도 품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단다.

그게 멸문지화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원인이 되었으니.

십족구멸(十族俱滅)이라는 역사에 전례가 없었던 참형.

쏟아지는 황제의 분노를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와주는 이는 갈수록 줄고, 가까웠던 자들의 배신은 갈수록 늘고.

가족과 다름없는 일꾼들조차 피투성이로 쓰러졌다.

친자매처럼 지냈던 유모의 딸이 어머니와 함께 형구(刑具)를 쓰고 끌려가던 광경. 얼굴에 검댕을 묻힌 채 거지꼴이 되어 더러운 골목에서 벌벌 떨면서 울지도 못했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이렇게 되도록 얼굴 한번 보이지 않는 ‘어르신’을 원망했더랬다.

사정을 제대로 알게 된 건 몇 년 뒤, 어느 정도 철이 든 후였지만.

그때는 또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서 원망이 희미해졌는지. 아니면 마음이 그만큼 단단해졌는지. 뭐, 애초에 충신 방효유라고 해도, 십족구멸이라고 해도 그다지 실감할 수 없었으니까.”

침상 끝에 걸터앉아 피풍을 접었다가 폈다가. 방립을 만지작대는 손길에도 아무 의미는 없었다.

오소민이 고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사부님들은 내가 괜히 원한이니 복수니 할까 봐 은근히 걱정했던 모양인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 그저.”

영락제에 의해 십족구멸에 처한 충신 방효유의 후손.

얼핏 처연한 빛이 얼굴을 스친다.

“어머니와 함께 형구를 쓰고 끌려간 유모의 딸, 춘매(春梅)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미소 짓던 모습만은 잊히지 않더라고.”

“음?”

멍하니 듣던 해원기의 눈가가 접혔다.

오소민의 어머니와 같이 끌려간 춘매는 유모의 딸. 처형될 걸 알았을 텐데도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니.

그 춘매가 오소민의 대역으로 끌려갔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린 오소민은 끝내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잊히지 않았다면 혹시…….”

오소민이 갑자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다. 저절로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유모의 먼 친척이라도 찾지 않았느냐고? 어이, 우리 사부들이 누군지, 내가 어느 방파인지 까먹었어? 후후.”

대답 대신 짓궂은 웃음이 돌아왔다.

오소민은 개방 팔선의 제자요, 지금은 천하를 두루 돌아보는 순행장로인 유룡개.

세상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거지도 있게 마련.

“없더라고. 유모도 어지간히 외로운 인생이었나 보지. 뭐, 찾는다 해도 생판 낯선 거지가 반가울 리 없을 터. 그래서 그냥 여기에다가.”

방립을 만지작거리던 오소민의 손이 가슴팍에 닿았다.

“묻어두기로 했어. 어쩔 수 없으니까. 그 대신이라긴 그렇지만, 신나게 살아보자고, 에, 강호에 회자될 기인이사(奇人異士)나 되려고. 음, 이건 좀 부끄럽군.”

부끄러운 건 아까부터였으면서.

하던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난감해졌던지.

얼른 피풍을 들고 일어선다.

“그나저나 이건 너무 크지 않나? 이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겠는데. 설마 나도 똑같은 크기면 곤란하겠네.”

해원기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오소민이니 이불을 넘어 포댓자루 같을 터.

한참 얘기에 빠져들었던 해원기의 눈썹이 쇳덩이라도 달아맨 것처럼 내려앉았고,

오소민의 손을 잡았던 손이 이번엔 피풍을 쥐었다.

확 낚아챌 것 같더니만.

피풍을 쥔 채로 가만히 섰다.

“고집쟁이.”

펄쩍 뛰면서 뭐라고 한소리 할 줄 알았더니 입에서 나온 건 짧은 단어 하나. 탄식 같은 그 말에 피풍을 사이에 두고 오소민이 피식 웃었다.

“허, 바부탱이 곁에 있으려면 고집쟁이 정도는 되야잖아.”

해원기가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지켜줄 자신이 없다고까지 했건만, 자신의 과거를 다 털어놓으면서 기어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오소민.

숨김없이,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굳이 과거를 밝힌 이유는 그만큼 해원기를 믿는다는 뜻이다.

정(情).

믿고 의지하며 함께 있으려는 마음을 어찌 모르랴.

이렇게 정에 호소하면 더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예전에 몇 번이나 보았었다.

“이길 수가 없지? 하하.”

오소민은 해원기가 하다 만 말이 뭔지 다 아는 듯 명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피풍을 잡아당기고,

손아귀에서 힘이 빠진 해원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펄럭.

방 안에서 휘날리는 피풍 너머로,

“그래, 그렇군.”

눈매가 가벼워졌고, 입가엔 웃음이 걸린다. 얼핏 떠오른 기억 때문에.

‘사부님도 두 분 사모님의 고집에는 꼼짝 못하셨지.’

마치 환정곡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지만, 웃으려던 입가를 일부러 힘주어 당겼다.

“그럼 자네도 준비를. 흠, 가면서 얘기하세.”

어쩔 수가 없다.

기억은 기억일 뿐. 더구나 사부님과 두 분 사모님 사이였잖나.

오소민이 남자였다면 차라리 형제처럼 느꼈겠으나.

여자란 걸 알기에 얼핏 떠오른 기억이 되레 어색하기만 하다.

해원기에게 여자란 두 분 사모님, 그리고 어린 여동생밖에는 없었기에.

그래도 오소민에게 속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게 무슨 심정인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똑같은 차림새.

그래도 오소민은 체구에 맞게 커다란 피풍 윗단을 솜씨 있게 접어 걸치고, 용케 방립 대신에 술이 달린 전립(氈笠)을 찾아 머리에 얹었다.

“난 빼어난 미모를 좀 가려야 하니까. 흠흠. 하여간 방 낭랑이 바로 단목 당주와 연락을 취한다니 참 다행이지?”

기분이 좋아졌는지 출발하자마자 우스개를 섞어 말을 건넨다.

배회촌 뒤쪽의 자산 기슭으로 방향을 잡은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민이 해원기와 동행하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을 지었던 방온화. 자산을 우회해 하북을 거쳐 경사로 가는 경로를 자세히 일러주고, 곳곳에 숨겨진 녹림의 이목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함께 논의했던 화제의 결론을 단목정과 내겠다고 하였다.

‘소 숙모는 신기수사의 가르침을, 단목 형님은 천문노인의 지혜를 이은 분들이니.’

태상과 동창성조, 국사와 사부대중. 구양금오로 재편하려는 무림의 구대문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머리 좋은 이들에게 맡겨두면 된다.

해원기는 당장 서둘러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가까운 이들을 구하고 지키는 것.

어쩌면 모든 일의 시작이, 온갖 모략의 원흉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음, 그런데 또 한밤중에 길을 떠나게 되었구먼.”

날이 흐려서 별도 보이지 않고, 찬바람이 피풍을 펄럭이는 밤.

추워진 날씨에 피풍을 여미던 오소민이 입을 삐죽거렸다.

“흥, 해 형이랑 있으면 편히 쉬긴 애당초 틀린 일이지. 이게 뭐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던가. 항상 뭐에 쫓기듯 바빴구나.

“그랬나? 하긴. 환정곡을 떠난 후론 언제나 그랬던 것 같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잘 먹고 잘 쉬는 걸 잊지 말라고 그리 말씀하셨는데.”

감상이 실린 대답. 오소민이 궁금해졌다.

“언제 떠났는데? 가끔은 돌아갔다고 했잖아?”

“되도록 새해엔 있으려고. 처음 떠났던 게 열여섯이었으니까. 본래 사부님의 별명이 없는 한 돌아가지 않으려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갔었지. 그리고 한 석 달 정도 있었던가.”

열여섯. 벌써 십 년이 넘었다.

묻는 대로 해원기가 선선히 받아주자 오소민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왜 돌아갔어? 그리곤 또 어디를 돌아다녔기에?”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풍문이 대략 십 년 전에 돌았지만, 금방 잊혔었다. 사부님의 명으로 집을 떠났을 텐데. 왜 강호무림을 멀리했을까.

채근하듯 묻는 건,

내 옛일을 다 털어놓았으니 너도 과거를 전부 실토해야 수지에 맞는다는 심정일까.

해원기가 보폭을 줄이면서 시선을 캄캄한 밤하늘로 던졌다.

“난 원래 요동 구석에서 매를 잡아 길들이던 작은 부족의 아이였네. 열 살에 저 녀석과 함께 생신 선물로 중원에 팔려왔지. 낯선 곳에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꼬맹이, 그 꼬맹이를 거두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신 분이 사부님이고.”

오소민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득한 밤하늘에 동강이라는 이름의 신응 한 마리가 떠 있을 터.

잘 보이지도 않겠지만, 굳이 눈에 힘을 주면서 계속 해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두 분 사모님은 친아들처럼 대해 주셨지. 귀여운 여동생도 하나 있어서…… 하지만, 이사모(二師母)가 난산 끝에 아기를 잃으신 후론. 흠,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담담하게 말하려 해도 쉽지 않아서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말재주도 없으면서 막연하게 시작하는 바람에 얘기에 두서가 없다.

그래도 애를 써봐야지.

오소민이 보여준 정의(情誼)에 보답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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