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장 정서난심(情緖難審) (2)
성질을 내면서 따질 틈조차 없었다.
채 삼 각도 지나지 않아 행장을 꾸리는 해원기를 하릴없이 바라보는 수밖에.
급히 떠나야겠다는 해원기의 말에 방온화가 반대조차 않았으니.
오소민이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썼다.
‘방 낭랑은 뭔가를 알기에 말리지 않은 거고. 그렇다고 해도 그냥 보낼 셈인가?’
뒤뜰 정자에서 ‘혼자 가야겠다.’라고 말하곤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한 해원기.
방온화를 찾아 자기 뜻을 밝혔고,
그 말을 들은 방온화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상당히 어색하고 침중한 분위기여서,
오소민은 아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왜 갑자기 혼자서 가겠다는 건가? 정록을 찾아 동창의 내막을 확인하고 강유행의 안위를 파악하는 게 갑자기 급해졌나?
아무 말 없이 승낙한 방온화는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일까? 그 이유가 해원기 혼자가 가야만 되는 일인 걸까?
아니, 그 전에 해원기는 어디로 갈 셈인지. 현도관이란 곳을 제대로 찾기나 할지.
경사라는 곳이 어디 시골의 방앗간도 아닌데.
뭐 하나 짐작 가는 게 없어서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아직 방온화와 함께 논의하던 화제도 다 끝이 나지 않았거늘.
‘소숙모잖아. 해 형을 친자식처럼 알뜰하게 생각하는 게 분명하던데.’
함께 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어도 방온화의 진심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내야만 할 일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게 짜증을 북돋는다.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그만 속에 있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해원기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방온화가 긴 얘기 속에 여러 가지 가르침을 더했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덕분에 그간 모호했던 점이 많이 명확해졌고, 그저 동창이라고만 여겼던 상대의 실체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할 계기도 얻었다.
그러나.
‘비록’의 출처. 그리고 태백종사가 익힌 홍운백일품.
이 두 가지가 다 얽힌 건 큰일이다.
강유행과 조원록은 강호무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관계가 있다면 예전에 어린 해원기를 가르치고 돌봐주었던 것뿐.
현도관을 직접 찾아가야 한다. 그것도 혼자서.
남들과 함께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문제요,
혹시라도 좋지 않은 상황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은허에서의 싸움까지 겪으면서 알게 된 적의 세력. 동창의 수족과 주구만이 아니다. 이십사아문에도 별별 능력자가 다 있었고, 밀각은 현신장과 육학사 외에 또 어떤 자들이 있을지. 게다가 후예가 남긴 제천신궁을 노리고 나중에 등장한 자들.
태상과 동창성조, 국사와 사부대중. 그리고 요사스럽기 짝이 없는 조화부인.
적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경사에선 관병까지 동원할 수도 있겠다.
‘정 형을 무사히 만날지도 장담하기 어렵고. 오 형을 또 지키지 못했다간…….’
오소민이 중독된 게 벌써 두 번째.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녹림노조 방송서가 이곳으로 올 예정이란 걸 알면서도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마른 식량 조금, 대충 몸에 두를 커다란 피풍 하나, 머리에 뒤집어써 용모를 가릴 방립(方笠).
그렇게 간단한 행장을 꾸리다가,
문득 들리는 오소민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응? 뭐라고 했나?”
오만상을 쓴 오소민이 기둥에 기대어 노려본다.
이런 식으로 말을 나눌 생각은 아니었지만.
오소민이 혀를 찼다.
“쯧, 그렇잖아. 노조가 녹림의 망나니들까지 몰고 오신다던데, 그걸 굳이 중간에서 되돌려 보내면서까지 서둘러야 하나? 도무지 모를 분위기라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뭐 때문에 그리 안달이 난 거야?”
일단 입이 열리자 불만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녹림노조 방송서가 녹림호한을 이끌고 오면서 보낸 연락. 그 연락을 확인하러 자리를 비운 방온화를 찾아가 대뜸 바로 출발한다고 했으니.
결국, 방온화는 가장 빠른 방법을 찾아 방송서 일행에게 돌아가라는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녹림노조 방송서의 당대 무림에서의 위치는 차치하고라도, 해원기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역시 지나치게 무례한 행동이잖은가.
소숙모의 부친, 탁 소숙의 장인에게.
우선 그것부터 따지려다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해원기에 대한 심통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고,
해원기가 오소민의 노려보는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큰 실례라는 건 잘 알고 있네. 그러나 지금 노조가 직접 나서는 건, 음, 이쪽은 자네가 더 잘 알잖나. 장안에서 내가 겪은 일, 또 낙양에서 벌어진 사건…… 소림사의 산문에서도 영 불안했고.”
무슨 핑계를 대나 싶었는데, 더 잘 안다는 소리에.
오소민이 눈썹을 조금 띄웠다.
장안에서 해원기가 겪은 일이라면 화산에서 화청궁, 고력사의 무덤, 기루 골목을 거쳐 종루와 고루의 싸움이었다.
낙양은 용문석굴과 골동품 거리. 그리고 소림사의 산문이라.
엉뚱한 핑계를 늘어놓는 줄 알았다가,
‘화산검협, 청령선고, 예홍쌍잠 위 방주, 그리고 종남의 노진인이 몸소 나왔고. 에, 우리 개방 총단이 습격당하면서부터 단목 당주가 올 때까지, 나중에 방주 사형이 직접 손을 썼던. 그렇구나!’
무슨 뜻인지 알아챈 오소민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인광과 수진을 지키려다 소림사는 관병들에 의해 곤욕을 치를 뻔 했었다.
지금 해원기가 열거한 사건엔 전부 구주정문의 장문인이나 그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엮여있다.
상대의 실력이 어디까지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서 계속 내 손의 패만 내보이는 실수.
여기서 또 녹림노조를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강호무림의 관념이 어떻든 관에서 보기엔 그저 산적 떼의 우두머리.
동창의 숨겨진 실력도 실력이지만, 괜한 빌미만 자꾸 내주는 꼴이 된다.
이런 과정을 가장 잘 아는 이는 해원기 말대로 오소민 자신이지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 맞는 말이라고 해두지. 하지만, 그건 절반의 설명 밖에 되지 않는다구. 방 낭랑의 가르침 덕에 이제야 저들의 속셈이 읽히는 판인데. 여기에 단목 당주가 연결될 때까지는 기다리는 게 옳잖아?”
맞는 말, 옳은 말.
녹림노조 방송서에 관해서야 해원기가 맞다고 해도, 혼자서 이렇게 서둘러 경사로 향하는 데에는 옳은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자꾸 얘기가 어긋나서 짜증과 심통이 영 풀리질 않는다.
맞고 옳고를 따지기 시작하는 게 바로 시비(是非). 자신이 시비 건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난감하다.
비록 오는 도중에 경사의 인연을 털어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담긴 과거의 내막까지 다 밝히기는 어려운 일.
더구나 기구한 신세의 오소민에게는 아주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
말재주가 없어서 둘러대는 것도 힘겹다.
“그, 불안해서.”
말이 뚝 끊기고, 그 답답한 꼬락서니에 오소민의 입이 더 빨라졌다.
“아, 왜 속 시원히 말을 못 해? 흥륭의 일곱 형제가 예전에 무슨 황룡칠절이었다며? 또 그 글 선생이란 양반이 남옥의 옥사에 연루되어 멸문한 집안의 후손이요, 글 선생을 지키는 사람이 자네 사부님께 배운…… 나 참, 방 낭랑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였나? 그걸 다 알고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왈칵 쏟아내는 불평.
“아니, 황룡칠절은 이미 무림을 떠났고. 강 사부와 조 아저씨 역시. 뭐, 굳이 소숙모에게 숨길 내용도 아니고. 그래도.”
그런데도 뚱한 표정으로 하나씩 핑계를 찾는 해원기.
오소민이 이젠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래도 뭐? 이제 아귀가 맞잖아, 현도관인가 뭔가에 있다는 강 사부가 이십여 년 전 도연이 지껄인 내용을 비록으로 전해줬고, 낙양에서 달려들었던 태백종사란 놈의 홍운백일품은 조 아저씨란 사람이 익혔던 무공이고. 그럼 당연히 그쪽에서 무슨 탈이 났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동창에 놀아났거나. 날 똑바로 보라고!”
목소리가 확 높아지자, 해원기의 눈썹도 꿈틀거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그럴 분들이 아닐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말하는 건.”
“그래, 잘 모르지. 모를 수밖에 없지. 제대로 알려준 게 없는데 어떻게 알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지껄여서 미안하구먼.”
“지껄였다고 하진 않았네.”
“흥, 이젠 말꼬리까지 잡네. 아이고, 속 터져. 어째서 항상 이렇게 우물우물 넘기려는 거야?”
“우물우물 넘긴 적 없네. 예전부터 나를 알고 지켜봐 주셨던 분들 외에 내 사정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오 형, 자네야. 다만.”
“다만?”
“흐음.”
오소민의 재촉하는 반문에 해원기가 한숨처럼 무거운 신음을 내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소민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든 말든.
이 무슨 유치한 말싸움인가.
잠시의 침묵.
“후우우, 정말 힘든 친구네.”
침묵을 깬 건 참다못해 장탄식이 터져버린 오소민이었고,
쌍심지가 돋았던 눈이 어두워졌다.
“해 형의 사정을 가장 많이 안다? 흐, 해 형은, 아니, 절세검왕께서는 독불장군이시로군.”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투로 바뀌어서,
미간을 좁힌 채 돌덩이처럼 입을 다문 해원기의 표정이 더 굳어질 정도.
화를 내다가 이젠 비아냥거릴 셈인가.
그런데 오소민의 목소리가 확 가라앉는다.
“신향 부근에서 화해했을 때, 자넨 나보고 귀띔조차 하지 않았다고 야단을 쳤었지. 자네가 그 때문에 더 나를 걱정했었으니까. 그럼 나는.”
풀기 없는 음성이 이어지다가 어두워진 눈동자가 해원기의 시선을 찾는다.
“그저 맘 편하게 있으면 되나.”
움찔.
해원기의 표정이 흔들렸다.
독불장군. 비아냥이 아니었다.
터벅터벅.
오소민이 기댔던 기둥을 떠나 한 걸음씩 다가왔다.
“하긴. 자네가 보기엔 내가 귀찮은 혹일 수도 있겠네. 도와준답시고 들러붙었으면서도 내 내력을 직접 털어놓지 않았고, 들통 난 후에 자네를 놔두고 떠났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으니까. 게다가 툭하면 중독이니 인질이니 걱정만 끼쳤지. 진짜 필요할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그건 아냐!”
이번엔 해원기의 음성이 높아졌다.
단호하게 오소민의 말을 끊은 해원기가 성큼 나서고,
“자네가 위험할까 봐, 자네가 옛일을 떠올릴까 봐. 그렇게 다치고 상하면.”
두 손이 덜컥 오소민을 맞잡은 걸 의식하지도 못하고서,
더벅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또 자네를 잃고 싶지 않아.”
또.
오소민이 잡힌 손을 뺄 생각도 없이 똑바로 해원기를 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눈매,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걸 처음 본다.
슬픔, 두려움.
순해 빠져서 ‘바부탱이’라고. 답답하기 짝이 없어서 ‘고구마 대장’이라고 놀렸었다. 그래도 그냥 웃으며 넘어가는 성격이란 걸 알았으니까.
나이보다 대범하고 진중한 건 훌륭한 사부를 모시고 수양했기 때문이겠지.
그런 해원기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지금 오소민의 눈에 비치는 건 스물여덟 먹은 절세검왕이 아니라 그저 혼자 강호를 떠돌면서 작은 판과로 밥을 지어 먹고 아무 데서나 웅크리고 잠드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가슴이 울컥하다.
거칠게 흔들리는 해원기의 얼굴을 보려고 눈을 가까이 댔고,
풀기 없이 중얼대던 음성이 한층 더 낮아졌다.
“절대로 그럴 일 없어. 꼭 곁에 있을 거니까. 언제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감추고 감추었던 감정이 기어이 새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