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장 정서난심(情緖難審) (1)
세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딱히 감사를 바란 적이 없었고, 굳이 기억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망가진 몸을 끌고서 조용히 왔던 곳으로 돌아갈 때, 팔자의 언약을 맺어 이름조차 지웠다.
곁에는 사랑하고 아껴주는 여인들이, 슬하에는 착하고 기특한 제자가.
정을 되찾은 골짜기, 작은 보금자리에서,
좋은 사람과 어울려 행복하게 살련다.
그리고 떳떳이 술잔을 올리련다.
십육일 달빛을 밟고 떠나신 사부님,
끝까지 당부하셨던 그 말씀을 마침내 이루었으니 이젠 마음 놓으시라고.
일족의 원한을 전부 껴안으셨던 귀왕 할머님,
흉한 검에서 벗어나시어 이 못난 후손에 깃드시어,
원망도, 노여움도, 회한도, 서러움도.
저와 함께 나누시고 이젠 마음 푸시라고.
남은 이 생명을 다 바쳐서라도 기어이 그 넋을 달래드리리.
그렇게 살리라.
눈을 감은 해원기 앞에 사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온화가 불쾌한 심정을 얼른 추슬렀지만, 해원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야 했다.
가슴 한쪽이 아려와서.
그 심정을 훤히 아는 방온화가 낭패한 표정인데,
오소민은 한참 주제에 집중하느라 전혀 몰랐다.
“도연은 이미 죽은 거로. 그럼 정변이 일어나기 전부터 강호를, 그리고 지금에 와서 후계자인 묘능이 계획을 실현하려고…… 음?”
처음 듣는 얘기가 많기에 나름대로 맥락을 따져보다가,
비로소 분위기가 이상해졌음을 느꼈나.
절로 눈치를 보게 된다.
방온화에겐 오히려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꿀 계기였다.
“그렇지. 백여 년에 걸쳐 무림이 크게 약화했으니 그 틈을 타야 한다고 주장했더군. 오 장로도 잘 알겠지만, 지금의 대명(大明)은 본래 강호에서 시작되었잖은가. 원(元)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그 바탕이 어쩌면 당대에 와서 눈엣가시가 되었을지도. 더구나 수도를 과거의 연경(燕京)으로 옮긴 후에는.”
명을 건국한 태조 홍무제. 강호에서 구르던 하찮은 인생에서 일약 천하를 차지했고,
권력을 탈취한 성조 영락제. 힘으로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강호가 어떤 곳인지. 무림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모를 리 없고.
손에 쥔 절대의 권력이 통하지 않는 곳을 어찌 용인할까.
어떻게든 지배하에 두고 싶었을 것이요,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능력을 지녔다.
완전한 점령이 어렵다면,
입맛에 맞게 재편하는 방향으로.
수도를 북쪽으로 옮기고, 본래 수도였던 금릉을 남경으로 바꾼 것처럼 말이다.
오소민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에 도연이 그런 주장을 펼치고, 또 계획까지 세웠다는. 그 비록이 어떻게 남았을까요?”
비망록(備忘錄)이 아니라 비록(秘錄)이다. 나중을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숨겨진 내용.
황궁 내부에서도 극비에 속한 얘기일 텐데 그걸 대체 누가 기록했으며,
또 흥륭은 어떻게 접촉해서 얻어내었을지.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라 신뢰할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가 된다.
방온화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 역시 의심을 했었지. 접촉한 인물의 정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황궁의 비밀을 알게 된 연유도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음, 흥륭이 그 인물과 접촉하게 다리를 놓아준 사람,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나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네. 아버지도.”
방온화뿐 아니라 녹림노조까지 믿는 사람.
머리에 떠오르는 적절한 이름이 없어서 오소민이 얼른 묻는데.
“누구……?”
방온화가 미묘한 표정으로 해원기에게 머리를 돌린다.
“원기가 기억하려나. 계운산(計運山)이란 이름?”
오소민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라서, 강호에 그런 자가 있었나 하고 기억을 더듬지만.
해원기는 감겼던 눈꺼풀이 확 올라갔다.
“계 숙부요? 요동에 있을 분이 왜?”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기에.
호아도(虎牙刀) 계운산. 요동에서 이름난 백호표국(白虎鏢局)의 주인이라고 해도 중원에서는 먼 변경의 촌뜨기일 뿐이다. 더구나 근 십여 년은 아예 중원 출입이 없어서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 터.
개방의 순행장로도 모르는 사람을 당장 ‘숙부’라고 부르니.
과거의 인연이란 걸 오소민은 직감했고,
방온화가 친절하게 그 인연을 덧붙여준다.
“그래. 요동의 큰 표국 주인이고, 네 사부님의 벗인 추혼도(追魂刀) 손유상(孫維常) 대협의 의제인 분. 우리는 몰랐지만, 흥륭과는 가끔 거래가 있었나 보더라. 그러다가 최근에 원기가 무림에 나온 소식을 듣고는.”
더 얘기를 이어갈 필요는 없었다.
손유상과 계운산 모두 해원기가 처음 사부를 모실 때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고, 나중에 해원기가 잠시 경사에 맡겨졌을 때는 물심양면으로 지켜주기까지 했었다.
비록 사는 곳이 멀어 연락이 끊겼어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동창과 충돌이 있었다는 소문, 그리고 흥륭이 황궁의 내밀한 사정을 파악하려는 의도를 알자마자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원기가 번갯불처럼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비록을 구해준 인물이 현도관(玄都觀)의 강(康) 사부입니까?”
급하게 묻느라 목소리조차 뒤집혔다.
그러지 않아도 경사로 향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현도관을 찾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방온화에게 듣게 될 줄이야.
대량강문(大梁姜門)의 후대.
해원기가 갓 입문했을 때, 사부는 직접 돌볼 여유가 없어서 경사의 현도관에 부탁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 당시에 해원기의 글공부 선생을 맡아주었으며, 나중에 현도관을 물려받게 되면서 대량강문의 후손임을 숨기고자 다시 이름을 고친 강유행(康有行).
글을 배운 건 얼마 되지 않는 시간. 그래도 해원기에게는 또 한 분의 사부다.
경사의 현도관은 표면적으로 고관대작이 비밀리에 소장한 귀중품의 가짜를 제작하고 진품을 대신 보관해주는 곳. 당연히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될 일이고, 호문세가(豪門勢家)들의 감추고 싶은 내막을 훤히 알게 되지만.
그만큼 위험도 큰 업종이어서 언제나 만반의 대비를 해놓아야만 한다.
예전 현도관의 주인은 천교진인(天巧眞人)이란 엉터리 도호를 쓰던 괴팍한 노인. 그러나 그 진실한 신분은 바로 천하 지혜의 시조인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일맥이었고.
세상에서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기로 결정한 후에 현도관의 기업을 강유행에게 물려주었었다.
물론 필요한 조치를 충분히 갖추어주었을 터.
무엇보다 대량강문을 끝까지 지키기로 맹세한 조원록이 든든히 지키는 바에야.
사부가 직접 형의지결(形意之訣)을 전수해 원극순양공과 홍운백일품을 완성한 조원록이다.
그 충직한 성품으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니 지금은 가히 절정의 고수가 되었을 것이고, 함부로 남에게 비밀을 누설할 리도 없거늘.
낙양에서 습격해 온 태백종사란 자가 홍운백일품을 구사할 때부터 의혹을 들었었다.
강유행과 조원록은 다 숨어 살고자 하는 이들이다.
외진 산속에 숨는 대신에 번화한 시정 가운데에 숨었을 따름.
세상의 풍파와 관계없이 살아가려는 이들.
혹여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방온화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해원기의 다급한 반응 때문보다는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다.
“응, 음, 원기는 그 인물을 아는, 그런데 사부라고?”
되레 묻는 말에 해원기가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해원기의 사부는 ‘그분’. 그렇게 아는 방온화로선 의외였을 터.
“아, 네. 제가 어렸을 때, 사부님께서 글 선생님으로 소개해주신 분입니다. 흠, 현도관을 맡으셨으니 경사의 모든 소식에 정통한 건 당연하겠지만, 황궁 안까지일 줄은.”
과거를 구구절절 떠들 일은 아니다.
슬쩍 말머리를 돌리자 방온화도 바로 그 기미를 읽었다.
“그렇구나. 강 사부(師傅)라.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짐작할 수는 있겠다. 황권이 강화되고 동창이 득세하면서 영업이 갑자기 바빠졌다거나. 흐음, 하여튼 비록의 출처는 신뢰할 수 있으니까. 다만.”
굳이 어버이로 모시는 사부(師父)가 아니라 그냥 스승이라는 사부(師傅)로 구별하면서,
머리를 갸웃.
“그 비록에 적힌 내용은 분명히 도연의 주장과 계획인데, 글은 최근에 쓴 것이라서 처음엔 영 미덥지 않더구나. 뭐, 막상 읽고 난 후에 전문간선으로 들어온 소식과 대조해보고선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굳이 자세한 내막을 파고들지 않는 건 다 해원기를 생각하는 마음.
그러나 해원기는 고마움을 느낄 새도 없이 미간을 찡그렸다.
마지막에 방온화가 가볍게 덧붙인 한 마디.
영락제가 아직 연왕일 때, 그 책사였던 도연이 세웠던 계획. 이십 년이 더 되었을 과거의 일이란 게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건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얘기.
천기마저 뒤바꿔서 백 년이 넘게 강호를 희롱했던 벽세의 계획이 사실은 천교진인에 의해 시작되었음은 아무도 모른다.
사부에 의해서 잘못은 다스려졌고, 한때의 실수는 장본인이 책임을 지면서 다 끝이 났다.
지워진 역사요, 파묻힌 사실은 다시 들먹이지 않아야 한다.
사부 역시 팔자의 언약으로 자신을 지우지 않았던가.
지금은 그것보다 현도관이 염려된다.
“저, 소숙모, 강 사부와 현도관의 소식을 혹시.”
물으려던 해원기가 말을 멈추고 머리를 돌렸다.
조금 전에 식사를 마쳤던 판잣집에서 여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나와 머리를 조아린다.
녹림에서 무슨 연락이 왔다는 뜻.
대화를 중지하고 방온화가 몸을 일으켰다.
해원기의 소숙모요, 오소민이 꼼짝 못 할 재지를 지닌 선배지만. 여기선 녹림장관의 주인이다.
“아버지 연락이라 챙기지 않을 수가 없네.”
그렇게 얘기하고 방온화가 떠나자 정자에는 해원기와 오소민만 남게 되었다.
오소민이 해원기를 힐끔 쳐다보았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둘만 남은 김에 물어보려 했더니.
인상을 잔뜩 쓰고 탁자를 노려보는 해원기.
무거운 기운이 은근히 퍼져서 말 붙이기도 겁난다.
‘뭐야, 함부로 기세를 보이지 않기로 해놓고 왜 저리 무게를 잡는 거야. 신경 쓰이게스리.’
비록에 대해 따지느라 화제가 진행되지 않았다.
방온화 덕분에 그간의 사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고, 도무지 내막을 알 수 없었던 겁표 사건의 숨겨진 목적까지 짚어낼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진짜 상대를 파악하는 것.
책군에게 알아낸 것이 얼마 없지만, 그래도 태상이니 국사니 하는 자들과 동창성조와 사부대중이란 단서를 얻었다.
동창과 이십사아문의 관계, 태상의 정체와 국사와의 접점, 구양금오 아홉 개로 무림을 재편하려고 했다는 소위 구대문파의 의미 등등.
논의해야 할 문제가 산적했는데도 자꾸 엉뚱한 얘기가 나와 궁금하게 한다.
계운산은 누구고, 손유상은 또 어떻게 ‘그분’의 벗이 되었는지.
현도관은 뭐 하는 곳이기에 황궁의 비밀까지 알고, 강 사부라는 인물은 과거의 사실을 어떻게 최근에 적었을까.
무엇보다,
‘해 형은 어렸을 때를 어떻게 보냈지? 경사에서 글공부까지 했으면 엄청 귀하게 자랐을, 쳇, 그런데 왜 그리 둔팅이람.’
속으로 생각하는데도 입이 삐죽 나온다.
솨.
한 줄기 바람이 지나면서 한기가 느껴졌고,
오소민의 시선이 양쪽 소매가 다 없어진 해원기의 맨살을 스쳤다. 격전을 거친 흔적.
“안 추워?”
불쑥 입을 열고 저절로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상강 때라 밤낮 기온이 크게 차이 나지만, 이 정도로 추위를 탈 해원기가 아니잖나. 그러고 보니 저 더벅머리에 허름한 용모에는 팔뚝이 다 드러난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구나.
괜한 소리, 엉뚱한 생각. 툭 물어놓고 이유 모를 짜증이 나려는데,
“괜찮네. 추운가? 들어갈까?”
해원기가 머리를 들며 관심을 보이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맞아, 이런 친구였지.
바부탱이, 고구마 대장이라고 놀렸으나. 사실은 언제나 남 챙기느라 자신을 돌볼 줄도 모르는 성격이었다.
“들어가긴 어딜 들어가. 뭘 그리 고민하는 거야?”
“아, 그냥. 소숙모가 해준 얘기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네. 그간 의아했던 게 풀리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 같은. 뭐 그런 거지. 참, 몸은 이제 괜찮나?”
대충 둘러대는 티가 뻔한데.
“얼씨구, 빨리도 묻는다. 방 낭랑도 백초환이 있더라고. 제대로 조식할 틈만 있으면 회복은 금방이니까. 녹림장관의 전력이 다 지켜주는 셈이라 오랜만에 마음을 놓았지.”
낙양에서 여기까지. 돌이켜 보면 숨 가쁘게 달려온 길이었다.
“하긴. 편히 쉰 적이 별로 없었군.”
싱거운 대답.
오소민이 픽 웃곤 머리를 조금 내밀었는데,
“이제 어쩔 건가? 노조까지 온다던데 뵙고 나서 경사로 가나?”
“아니, 경사엔 혼자 가야겠어.”
대뜸 돌아오는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자기를 놔두고 혼자 가겠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