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장 요승전승(妖僧傳承) (4)
“오 장로 덕분에 또 한 가지 가능성을 확인한 셈이거든. 주모자는 상당히 머리가 뛰어난 자, 아니, 자기만 똑똑하고 남들은 어지간히 바보 취급하길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작자야.”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웃음을 터뜨렸던 건,
그 바로 전에 세 개의 구양금오가 평범하다는 걸 인지했는지에 관해 오소민이 의문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즉, 겁표 사건의 주모자는 처음부터 아홉 개의 구양금오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을 가능성.
아득한 세월 동안 육악지력을 봉인했기에 봉인이 풀리고 나서도 미약한 영향이 잔류했겠지만, 그건 이미 빈껍데기.
표면에 아무런 흠이 없고 힘주어 움켜쥐면 조금 따뜻한 느낌이 드는 매끈한 돌에 불과하다.
오소민이 금방 알아들었다.
“그러면 그 주모자는 처음부터 아무런 가치도 없는 돌멩이 아홉 개를. 음, 무슨 목적이었을까요?”
결국 맨 처음의 질문이 다시 나온다.
이미 봉인을 풀어 육악지력을 얻었고, 남은 건 빈껍데기인 돌멩이. 그걸 신비한 물건인 양 꾸며서 강탈할 도적을 끌어모은다?
이런 식이라면 보통은 강호의 분란, 즉 기보 쟁탈전을 일으키려는 미끼일 텐데.
아홉 도적은 소위 ‘한통속’. 동창과 선이 닿은 자들로 전부 입을 봉해서 강호무림 어디에도 소문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뭐가 잘못되었는지, 장풍무명 진자현의 몫을 도로 회수하려는 시도까지 했었잖은가.
지금까지 펼친 추리에 큰 구멍이 생겨 여기서 틀어지는데.
방온화가 가만히 웃음을 흘린다.
“호호, 논리에 허점이 생겼다고 생각이 성급하게 나아가면 곤란하지. 혹시 놓친 게 없나 다시 되짚어보자고. 금오혈석, 아, 구양금오가 바른 이름이랬지. 육악지력을 봉인하지 않은 세 개, 원기가 뭐하고 했더라?”
답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건만. 어째 방온화는 자꾸 애를 태운다.
오소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홉 개 모두 별다른 건 숨겨져 있지 않다고.”
“그래서 오 장로는 뭐라고 했었지?”
“육악지력의 봉인을 풀면서 나머지 세 개가 평범하다는 걸 알았을 수…….”
“그리고 또?”
“아무런 가치도 없는 돌멩이 아홉. 어?”
질문과 대답이 빠르게 오가다가,
오소민이 눈을 크게 떴다.
눈치 빠른 오소민이 방온화의 의도를 모를 리 없다. 소중한 가르침이다.
묻는 대로 답하다가 자신의 말이 계속 조금씩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특별한 게 숨겨져 있지 않으면 평범한 건가? 또 평범이란 단어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인가?
자신이 제멋대로 비약한 걸 자신이 놓쳤다.
방온화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대전제는 구양금오 아홉 개지. 구양금오, 즉 어떻든 사일신화란 말이야. 이미 육악지력으로 그 실체는 증명되었다고 봐야 하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건 구양금오에서 육악지력의 봉인을 어떻게 해제했느냐, 육악지력이 봉인되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거잖아. 그건 지금 당장 알 도리가 없지만.”
자분자분 말을 이어간다.
“한 가지는 상상할 수 있어. 육악지력의 봉인을 풀고 나서 나머지 세 개에도 별의별 짓을 다 해봤을 거라는 거.”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육악의 힘이 봉인된 돌멩이. 한데 숫자는 전부 아홉. 사일신화에 나오는 태양이 아홉 개이니 나머지를 가벼이 포기했을 리 없다.
육악지력을 하나씩 봉인했을 정도의 특별한 돌이잖나.
화살에 맞아 지상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본래 태양이었으니 일부분이라도 그 힘이 남아 있지 않을까. 혹시 육악지력을 봉인하느라 그 힘을 나머지 셋에 몰아두지 않았을까.
아니면 사일신화의 주인공인 예의 능력이나 그 근원, 혹은 사일신화와 연관된 불사약 같은 게 담겨 있을 수도.
오만 수단을 다 동원했을 터.
오소민이 집중해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받았다.
“그런데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더라.”
“언제부터 황궁에 보관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화시대부터 아홉 개가 한데 있었다는 거니까.”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겠죠.”
“혹여 찾아내지 못했던 게 드러날지도. 황궁을 떠나 아홉 개를 전부 뿔뿔이 흩어놓으면.”
“모험을 감수할 정도로, 아니지, 모험이라고 할 수도 없군요.”
“흐흥.”
방온화의 코웃음을 끝으로 대화가 뚝 끊겼고,
똑바로 방온화를 바라보는 오소민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거리자.
옆에서 묵묵히 두 사람의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해원기가 무겁게 탄식했다.
“허어, 참으로 교활한!”
고구마 대장도 다 알 수 있었다.
아홉 개의 구양금오를 거짓 표행에 넣어서 ‘한통속’인 아홉 도적이 겁탈하도록 꾸민 이유.
기막힌 간계(奸計).
강호무림 전체를 그저 새로운 방법을 시험할 장소로만 여기고,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려고 손아귀에 쥔 패로만 움직이게 하다니.
혼자서 두는 바둑판의 바둑돌 신세와 뭐가 다르겠나.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이유도 모른 채 희생되었을지.
당장 표행을 호송하던 자들은 시신도 남기지 못했고, 호중객잔은 횡액을 당해 터전을 잃었으며,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화전민 마을이 독살당했다.
속이 부글거린다.
사부에게 들은 적이 있다.
백여 년 전에 천하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은 신유문의 천지일사였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적성문의 천문노인이었지만,
끝내 벽세의 흉계에 빠졌고.
그 벽세의 배후에서 암약하던 환문의 환영검신 송기룡 역시 지부의 천마가 베푼 안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럼 천마가 가장 똑똑했냐고 했던 해원기의 철없는 질문에,
사부가 빙긋 웃으며 해준 말.
“천마의 지혜는 자부에 비견할 만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기어이 밝혀낸 이가 있었지. 천지일사도 천문노인도 못했던 일을. 신기수사 전자방. 이 사부가 처음 보는 천재였다.”
그럼 신기수사가 자부나 천마를 뛰어넘어 가장 똑똑한 건가.
사부가 또 웃었다.
“하하,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어울리는 천재가 나오는 법이지. 하지만, 진짜 천재는 스스로 자신이 나설 시대를 고른단다. 전자방은 백여 년에 걸친 음모를 끊임없이 궁리했었고, 마침내 자성일가(自成一家), 자신만의 지혜를 깨우쳤달까.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 아는 그가 네 탁 소숙을 돕는 이상, 지부와 벽세의 잔재는 결코 다시 머리를 들지 못할 게다.”
굳은 신뢰.
그때 해원기는 전자방에 대해 처음 들었고,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었었다.
일부러 옛 기억을 되살려 마음을 가라앉혀 보지만.
전신에서 새어 나오는 기세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휘익.
작은 정자 안에 돌풍이 일며 흙먼지가 날리자,
방온화의 가르침으로 추리의 단서를 잡았던 오소민이 미간을 찡그리며 해원기를 째려보았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해원기의 격해진 감정이 기세로 드러나는 경우.
그러나 방온화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해원기를 돌아보며,
“그새 신공이 다른 경지에 접어들었나 보다. 이젠 진짜 검왕이라는 명호에 어울리는걸.”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아이를 칭찬으로 달래는 어미 같다.
당장 돌풍의 기세가 흩어지면서, 해원기의 얼굴이 붉어지는데.
방온화가 그런 해원기의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요런 건 또 네 탁 소숙을 닮았네. 후후. 그래도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단다. 사실을 치밀하게 따진 추론은 거의 진상에 가깝지만, 그래도 아직 중요한 부분은 모호하니까. 대전제로 복잡한 과정을 뭉뚱그렸을 뿐이야. 음, 일단 겁표 사건의 목적은 찾아낸 것 같은데. 난 또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한 꼭지를 마쳤나.
화제가 조금 바뀐다.
방온화가 다시 탁자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홉 도적으로 꼽았던 세력들. 각지의 소식을 취합하면서 아울러 묘한 소문이 따라붙어 있는 게 눈길을 끌었지. 어디는 화재가, 어디는 풍수해(風水害)가, 어디는 돌림병이, 또 어디는 예전에 없던 병충해나 지진이 났다는 소문. 육악지력을 봉인했던 구양금오의 영향으로 보인다만. 굳이 아홉 개를 다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
갖가지 재난을 나열하면서 젓가락과 찻잔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북쪽에 하나, 동쪽에 하나. 그리고 여섯 개를 중원의 동서남북에 고르게 놓고 마지막 하나를 손에 쥔다.
북쪽은 요동의 무명천과 하북의 팽가장. 동쪽은 교주의 조양신문과 황산의 남궁검문, 남쪽은 휘주의 정수회와 서남쪽의 호화방, 서쪽은 반룡령에 속했다는 둘일까.
“전문간선으로 도출한 세력이 딱 들어맞지는 않아. 당장 서쪽 장안에 공동파와 아미파를 집어삼킨 현신장 셋이 나왔으니. 그래도 이렇게 사방으로 늘어놓으니까 구도가 잡히더란 말이지. 섬북 장풍보는 어울리지 않잖아? 그게 또 원기의 수중에 있고.”
손에 든 젓가락 하나가 해원기. 그 젓가락으로 동서남북을 차례로 가리키면서.
“자, 절세검왕과 유룡개가 보기에 이 여덟 개의 위치가 어떤가? 마지막으로 이걸 떡하니 중앙에 놔두면.”
굳이 명호로 부른 건 그 입장으로 보란 뜻.
손에 든 젓가락 하나를 가운데에 세운다.
해원기가 진자현에게서 얻지 못했다면 구양금오 한 개는 그 자리로 갔을지도.
명호가 불린 쑥스러움도 잊고 중원을 대입해보던 둘이 거의 동시에 답을 말했다.
“오악검파!”
“양도양경!”
중앙에 젓가락을 세우자 오악이 우뚝하고, 사방을 고르게 나누었으니 양도양경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미 장안에서 좌우봉원이니 떠들던 소리를 들었고, 유서 깊은 고도에서 보물찾기에 열중하는 꼴을 보았기에.
그런데 둘의 답이 나오기 무섭게 방온화가 덧붙이는 한 마디.
“새로운 구주정문.”
푹.
가운데 세운 젓가락이 탁자를 뚫고 박혔다.
오악(五岳)에 사경(四京)을 더하면 구(九).
더하기의 합이 구주정문이란 건 말도 되지 않는데.
“그걸 구대문파(九大門派)로 부르자고. 이미 이십 년 전에 초안(草案)을 만들었다더라. 우리가 생사를 도외시하고 싸울 때. 흥!”
방온화의 코웃음이 얼음처럼 차갑다.
이십 년 전이면 백여 년의 혼란을 끝내려고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었을 때건만,
구대문파는 무엇이고, 무슨 계획을 세우려고 초안을 만들었을까.
해원기의 입술이 비틀렸다.
“대체 누가…….”
오소민도 처음 보는 방온화의 얼굴에 절로 어깨를 옴츠렸다.
서리가 내린 듯 싸늘한 표정. 지금까지 대화를 즐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감정이 실린 답이 나온다.
“경수사의 전 주지, 도연이라는 요승(妖僧)이다.”
경수사의 도연. 연왕(燕王)을 도와 갖은 계책을 부린 심복이요, 마침내 연왕이 정변을 일으켜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영락제로 등극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모신(謀臣).
세속에서는 온갖 희한한 전설이 붙어 요괴(妖怪)로까지 칭해진다는데.
그 이름을 듣자 해원기와 오소민도 전신이 굳어졌다.
방온화가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아직 모르지만,
경수사의 현임 주지인 묘능은 바로 국사라 일컬어지는 자. 괴물처럼 비대해진 동창의 배후로 의심되는 자다.
긴 대화가 결론으로 접어들었다.
어른은 어른. 방온화가 먼저 표정을 풀며 고소를 베어 물었다.
“후후, 흥륭의 도움이 컸다. 설사 전문간선이 완벽했다손 쳐도 황궁 쪽은 선을 댈 곳이 마땅치 않았거든. 더구나 당세의 사정도 아닌 이십 년 전, 그것도 정변 전후의 내막은 기록조차 남기지 않아서. 다행히 흥륭이 황궁 내부의 거의 모든 기밀을 간직한 이와 접촉할 수 있다고.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비록(祕錄)을 구해왔지. 그걸 읽어보다가, 쯧.”
속에서 치미는 화를 삭이려고 혀를 차곤.
“비로소 지금의 국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았다. 요컨대, 정하불상침의 오랜 묵계는 연왕이 역심을 품었을 때부터 이미 깨졌었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벽세든 지부든 그냥 놔둘 것을, 아, 아니다. 말이 심했구나. 후우.”
또 한숨을 길게 내쉰다.
실제로 과거를 겪었던 방온화로선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 ‘팔자의 언약’까지 맺어 모든 공을 감춘 해원기의 사부는 폐인이 되어 생의 마지막에 돌아오지 않을 먼 여행을 떠났고.
방온화의 남편인 탁관영은 다른 협사들과 함께 이십 년 동안이나 지부와 벽세를 감시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