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장 요승전승(妖僧傳承) (3)
해원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이고, 오소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분석, 그리고 남다른 시각으로 진상을 파헤치는 추리.
방온화의 얘기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으나,
그 전환을 바로 따라가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아홉 도적의 겁표 사건.
해원기를 무림으로 끌어들인 이 사건이 한통속과 다름없는 자들에 의해 벌어졌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원인인 낙향 행렬이 의도적인 연극이었는 데다가,
낙향했다는 상보감의 태감이 바로 동창의 태상이라니.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올까.
오소민이 상체를 바짝 당겼다.
“왜, 왜 이런 일을? 무엇을 노리는 거죠?”
마치 방온화가 태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그치는 물음이지만, 그만큼 당혹스러운 심정이라는 방증이다.
“흠, 여기서 잠깐 뒤로 돌아가 보자고. 시작은 아홉 도적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찾는 것, 그렇지만 나는 여기 두 사람과 달리 각지의 정보를 취합한 이점이 있었지. 비록 자상천답이 요사의 본질이긴 해도 그럴 만한 배경, 즉 욕심을 자극할 먹이가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낙향하는 표행의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봤던 거야. 아홉 도적은 과연 금오혈석이란 걸 알고 달려들었을까? 그렇다면 그 정보는 어디에서 새어나갔을까? 그러다가.”
방온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끊었다.
낙향하는 태감은커녕 궁중에서 쫓겨난 내시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아냈다는 설명.
아직 오소민의 다급한 물음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가늘어진 눈매가 잠깐 해원기를 향하고,
“원기가 하필 그때 호중객잔에 들른 건 우연, 아니, 이 일을 꾸민 자에겐 기막힌 불운일 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전체 계획이 처음부터 꼬인 셈이니까.”
“……?”
해원기가 눈을 껌뻑였다.
호중객잔에 들르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맞지만, 그게 이런 의미까지 지녔을까.
장풍무명 진자현을 쓰러뜨리고 금오혈석 하나를 얻은 건 정말 우연이었는데.
금방 알아듣지 못한 건 해원기.
오소민이 재빨리 그 의미를 풀어낸다.
“아홉 도적, 그중에 장풍무명이 낀 건 잘못이라는? 아니면 장풍무명이 본래 첫 번째 목표였으나 해 형이 끼어드는 바람에…….”
방온화가 한 ‘한통속’이란 단어에 집중하면, 섬북의 장풍보는 다른 여덟에 비해서 동떨어진 느낌. 지역뿐 아니라 원의 잔당과 선이 닿았다는 면으로도.
해원기가 장풍무명 진자현을 처리한 게 문제라는 뜻.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자, 방온화가 미소로 답했다.
“오 장로는 명석하네. 나도 그게 궁금해서 덕주에서 대첨산, 대첨산에서 태원까지 다시 샅샅이 뒤져보았지. 팔대탐자를 둘이나 보내서. 오 장로가 예측한 두 가지 중에 뭐가 맞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진자명이 대첨산을 통과하는 걸 미리 알았던 건 확실해. 호중객잔으로 통하는 길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고.”
해원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풍무명 일당을 처리하고 나타난 증명단, 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급히 찾아간 화전민 마을.
방온화의 얘기를 듣고 나니 그 상황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아홉 도적의 선발에 착오가 생겼을 수 있어. 겁표 즈음에 그 착오를 발견했고, 어떻게든 수정하려고 했을 거야. 뭐, 장풍보로 돌아갈 건 뻔하니까. 그러나 진자명이 남들은 알지 못하는 대첨산 내부의 숨겨진 길, 호중객잔을 이용할 줄은 몰랐겠지. 부리나케 대첨산을 뒤지고, 태원에 연락해서 사람을 부른다…… 하지만, 그래도 이미 호중객잔에 묵고 있던 원기보다는 느릴 수밖에. 예상 못 한 상황으로 바뀌자 일단 흔적을 전부 지우고 물러나기를 택한 걸 보면.”
“강호의 작풍(作風)은 아니군요.”
이제 대화는 오소민이 도맡듯이. 서둘러 답을 알고 싶어 하는 모습에 방온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일단 덕주에서 태원까지. 아무리 빠른 전서구라도 한참 걸리는 거리지. 미리 진자명의 정체를 알고 장풍보로 돌아가는 길목에 이목을 배치해놓지 않았다면 그렇게 신속히 대처할 수 없는. 개방이나 우리 녹림도 그런 인원과 조직력은 없으니까 관부가 분명해. 자, 각지의 관부를 움직여 광대한 지역을 제어할 역량을 가진 곳은 동창. 동창이 겁표 사건을 맡았다? 아니지, 다른 지역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잖나. 흐흥.”
누굴 향한 코웃음일지.
방온화가 차를 훌쩍 들이켜더니 양손을 뻗어 오소민과 해원기의 젓가락을 쥐었다.
탁탁탁.
자기 것까지 세 벌. 여섯 개의 젓가락을 가지런히 늘어놓곤 그다음으로 찻잔을 모은다.
여섯 개의 젓가락, 세 개의 찻잔.
“대강 그 괴상한 겁표 사건의 윤곽을 밝혀가다가, 문득 이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네. 당최 누가 누구고 뭐가 뭔지 헷갈리게 만드는, 그런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일삼았던 자들. 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고, 진짜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참으로 알기 어려웠던.”
“벽, 세.”
땅 울림처럼 무거운 음성.
해원기의 입술 사이에서 툭 떨어지는 단어에 방온화가 어깨를 움찔했다.
잘난 척을 하려는 게 아니다.
개방의 신비라는 순행장로 유룡개. 엽산초부가 알려주지 않아도 만나는 순간 남장여자인 줄 알아챘다. 그래서 신비라고 했었구나.
그간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해원기를 줄곧 도와준 믿음직한 동료.
총명하고 지혜롭다.
그러나.
해원기의 무공에 오소민의 지혜가 더해진다고 해도 상대는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더구나 둘 다 본래 무림에 몸담을 생각이 없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런 둘이 마주친 건 참으로 험악한 과거의 망령.
무엇을 상대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가르쳐주어야 한다.
자칫하면 다칠 테니까. 몸뿐 아니라 마음이.
어렵사리 얻은 좋은 인연까지 망가져 버릴 테니까.
다치지 않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기를,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것보다 다정한 협객으로 남기를.
한껏 돕고 싶구나.
그게 하나 남은 숙모가 할 일.
전자방이 남긴 비급이니 뭐니 엉뚱한 소리까지 하며 잘난 척하는 이유인데.
해원기의 음성이 너무나 그 사부를 닮아서 조금 놀랐다.
“그래, 원기의 말대로다. 머리가 셋 달린 줄 알았더니 등껍질 속에 또 하나가 숨어있던 요물단지. 입에 담기도 싫지만, 전 대협은 과거의 일을 모조리 기록해놨더라고. 천재들이란 이상한 버릇이 하나씩 있다니까. 그래서 그 징그러운 기록을 바탕으로 내 나름대로 분석을 해봤단다. 아홉 개의 금오혈석.”
방온화의 시선을 쫓아 해원기와 오소민도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젓가락 여섯 개와 찻잔 세 개.
젓가락은 육악지력을 표현하는 것일 터.
“사일신화에서 화살에 맞아 지상에 떨어진 아홉 개의 태양이라지. 진실이야 어쨌든 그중 여섯 개에 육악지력이 봉인되었다니 그것만으로도 희세의 보물이랄 수 있다. 현신장이라는 작자들을 만나봤다며?”
해원기가 굳어진 입을 풀며 하나씩 꼽아본다.
“네. 공동 요술사는 알유, 아미 오온존자는 대풍, 진여신승은 구영, 조양신문의 조양선사는 착치, 무명천의 암야무명은 수사. 다섯입니다.”
“음, 이번에 둘이 더 나왔군. 결국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 육악의 마지막인 멧돼지도 아홉 도적 중에 있을 거야. 그래야 말이 되거든. 금오혈석에 담긴 비밀이 육악지력이다, 이걸 전부 풀어내서 얻었다, 그런데 여섯이란 말이야. 그럼 나머지 세 개는 뭐냐? 골치깨나 썩였을 테고, 그러다가 사황령을 떠올렸겠지.”
사황령.
해원기의 이마에 다시 굵은 주름이 서려는데.
“아니, 사황령 아니라 다른 거면 어때. 사흉(四凶)이든 그 사흉을 지키던 환계수(幻界獸)든, 온갖 신공마력(神功魔力)을 마음대로 엮어내는 만상조화(萬象造化)도 괜찮고, 아예 음양일기(陰陽一氣)라면 더 좋고.”
방온화가 빠른 말과 함께 젓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젓가락 세 개와 찻잔 하나면 넷. 그걸 두 번 하면서 사흉과 환계수. 젓가락을 마구 뒤섞으면서 만상조화, 젓가락을 한데 뭉치면서 음양일기.
뭔가 더 할 말이 있으면서 그 정도로 그치는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해원기와 오소민의 인상이 험해진다.
전부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 삼색지보의 하나인 녹판이 낳은 두려운 결과들이었고, 그 녹판도 다섯 쌍, 열 개로 이루어졌다고 했잖은가.
방온화가 이제는 젓가락을 빼고 찻잔만 하나씩 짚어간다.
“진짜 신화대로라면 사일(射日)의 신궁, 하늘이 내린 옥결(玉決), 서왕모가 준 불사약(不死藥)을 운 좋게 얻을지도 모르잖아. 이왕 육악지력을 얻은 바에야 한바탕 도박을 걸어볼 만하지. 강호무림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놓고서.”
신화에 나오는 세 가지 기보.
아홉 개의 태양을 떨군 예의 활, 그 시위를 당기기 편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주었다는 옥반지, 그리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예를 위로하려고 서왕모가 선사한 불사약.
신화 그대로가 아니라도 이건 바로 신병이기, 신공비결, 영단묘약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탁자를 보던 해원기와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는 새 서로 마주 보았다.
용문에 나타났던 하백 빙이, 오래전에 실전된 진기한 무공과 요사스러운 술법, 정파의 신공과 지부의 오대마도, 비천무영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약과 오소민이 남자였으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었을 음침지독.
방온화가 바쁘게 늘어놓는 기묘한 단어들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게 전부 아홉 개의 금오혈석을 세상에 내놓아 실험한 결과라니.
방온화가 그런 둘을 보면서 짧게 혀를 찼다.
“쯧, 도박이니까 어느 정도 운에 맡겨야 하거늘. 아까 이건 야바위라고 했잖으냐. 강호무림 전체를 끌어들여 벗겨 먹을 작정인데 판을 벗어나면 곤란해지지. 더구나.”
얘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처음부터 돌멩이 하나가 사라졌단 말이야. 그것도 셋 중의 하나가. 흐흥.”
스윽.
해원기에게 밀어주는 찻잔 하나.
육악지력이 봉해지지 않은 금오혈석은 셋. 해원기가 진자명에게서 얻은 것이 그중 하나였으니.
방온화의 코웃음은 바로 야바위판을 차린 주모자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금오혈석의 정확한 명칭은 구양금오입니다. 그리고 육악지력을 봉했든 아니든 돌 자체의 독특한 성질 외에 다른 것은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아홉 개 모두.”
“……?”
해원기가 찻잔을 보며 하는 말에 방온화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무거운 해원기의 얼굴. 목소리도 아직 평소보다 낮다.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보다가,
“호오, 은허의 운해신조경인가 뭔가에서 찾아낸 게 있구나. 그러지 않아도 나무꾼이 대관문자를 보았다고 해서. 으음, 그렇다면.”
새로운 사실.
방온화가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자 오소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양금오라, 녹판과는 다르잖아. 설마 육악지력의 봉인을 풀면서 나머지 세 개가 평범하다는 걸 몰랐을까?”
생각에 잠겼던 방온화의 시선이 홱 오소민을 향한다.
“잠깐!”
손을 들면서 반짝 빛나는 두 눈.
눈매가 금방 부드러워지고, 입가에 미소가 어리더니.
“호, 이것 봐라.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네. 호호호.”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불쑥 나온 웃음에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 해원기와 오소민이 멀뚱멀뚱하게 바라보자 그제야 입가를 억지로 내리고,
“이해가 빠르다 했더니, 이전에 들은 게 있구먼. 녹판을 떠든 게 누구야?”
바라보는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니, 오소민이 바로 답했다.
“낙양에서 약왕당의 단목 당주께서. 아, 그러고 보니 태백종사라는 자를 심문해서 동창의 기밀을 밝힌다고 하셨는데.”
사정이 워낙 빠르게 변해서 미처 전할 틈이 없었으나. 책군이란 자를 생포하고 이렇게 방온화와 상황을 토론하는 게 단목정 때와 비슷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단목정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방온화가 대뜸 인상을 찌푸린다.
“얼씨구. 그 원숭이…… 에, 단목 당주였구나. 뭐, 그라면.”
얼른 말을 바꾸긴 해도 영 불쾌한 표정.
연유를 모르는 오소민이 어리둥절, 눈길을 보내자 해원기가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두 분은 어렸을 때 친분이 있으셔서. 음, 단목 형님도 소숙모와 비슷한 추측을 했었습니다. 다만, 단목 형님은 방금까지의 변화를 모르니까 상황을 좀 더 확대해서 추정했고, 소숙모는 좀 더 명료하게 축소해서 파악하셨고.”
변변찮은 말재주로 설명을 보태려는데,
“핏, 됐다, 됐어. 어차피 들어올 정보니까. 하도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통에 전문간선도 연락이 되지 않았거든. 나중에 만나서 한바탕 쏴주어야…… 호호, 그거보다 조금 전에 내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했던 말. 겁표 사건을 설계한 주모자에게 한 거라네.”
젊은이들 앞에서라는 걸 의식했는지.
방온화가 의젓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오소민에게 말을 돌렸다.
어리둥절했던 오소민도 마주 웃음을 짓는 수밖에.
‘어렸을 때 친구라. 그런데 한 사람은 형님, 한 사람은 숙모잖아.’
머릿속엔 얼핏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