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장 요승전승(妖僧傳承) (2)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가면서도 방온화가 알뜰하게 챙겨준 덕에.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한 셈.
다들 젓가락 대신에 찻잔을 손에 쥐자 방온화가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았다.
“배불리 먹었나 보네. 그럼 뒷정리하라고 자리를 좀 피해 줄까? 집 뒤에 아늑한 곳이 있더라고.”
말과 함께 일어서니 따를 수밖에.
낡은 집의 좁은 대청, 그 뒤에 또 뭐가 있을까 싶었으나. 막상 집 뒤로 돌아가자 산기슭을 따라 작은 숲이 아담하게 펼쳐졌고.
조잡하게 얽은 작은 정자까지 보였다.
“자산이라는 이름대로 여기선 한때 자철(磁鐵)이 나왔지. 조정 몰래 철광을 만든 자도 있었고, 그때 각지에서 광부를 끌어왔을 거야. 대부분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들로. 그래야 괜한 말이 밖으로 새지 않을 테니. 뭐,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개중에는 아예 뿌리를 내리는 이도 있는 법이거든. 그렇게 우리 녹림의 일원이 된 거고.”
배회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뜨내기들이 모였기에 붙었을 터.
폐광촌이 된 뒤에는 살아가는 것만도 어려워서 결국 녹림의 보호를 받으며 은신처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 정자에 모여앉자 방온화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곳은 당분간 안전해. 이제 와서 관병을 동원한다는 소식도 없고. 잠시 정리할 시간은 되겠지. 원기가 무림에 나서고부터 지금까지.”
무림에 나서고부터 지금까지.
해원기의 얼굴이 굳어지지만, 방온화는 모른 척 오소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오 장로는 거의 전 과정을 함께 했으니까 내 얘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나중에 알려주면 고맙겠네.”
내 얘기.
방온화가 정리한다는 말에 오소민도 조금 당혹했으나.
두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방온화가 바로 말을 이었다.
“대첨산의 호중객잔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리고 덕주를 거쳐 제남으로. 원기가 태산을 넘어 낙양으로 떠난 후에 흥륭에서 은밀하게 연락이 왔다. 황하문의 명의를 빌리긴 했어도 원기가 마주한 사건이 심상치 않다는 걸 헤아렸기 때문에. 이것도 다른 설명이 필요하진 않을 게야.”
호중객잔은 바로 방송서의 도움으로 세워진 곳. 객잔을 떠나 태원으로 향하면서 녹림에 연락을 취했고.
해원기가 직접 구해준 흥륭상단은 이미 흥륭전장에서부터 해원기의 목적을 인지했었다.
아홉 도적의 겁표 사건.
흥륭의 비룡칠절이 비록 막내인 비천무영을 제외하곤 무림과 연을 끊었지만, 동창의 겁박을 당하면서 고유의 정보망으로 여러 가지 단서를 찾아냈고.
해원기에게 든든한 지원이 될 곳을 물색했으리라. 비룡칠절과 교분이 있었던 믿을 만한 인물을.
하북의 철금장이 가장 가깝고, 녹림노조 방송서는 바로 ‘그분’의 벗.
해원기뿐 아니라 오소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경과였다.
“그래서 나는 먼저 가까운 곳부터 소식통을 움직였다. 두 사람이 들었을지 모르겠다만, 하북 철금장은 과거에 전문간선(傳聞幹線)이라는 연락망의 중추였거든. 비록 이제는 대부분이 끊긴 그물이 되었으나 아직 연결되는 곳이 적지 않아. 여기에 흥륭의 정보까지 더해지면 진짜 전문간선에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지.”
전문간선은 벽세와 지부의 방대하고 복잡한 음모에 대항하고자 천하의 형세를 최단 시간 내에 파악하려고 설치한 거대한 연락망.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 연락망도 더는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걸 다시 가동했다는 것만으로도 방온화의 능력은 간단치 않다.
지난 고생이 떠올랐나. 방온화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구주정문 사이의 연계도 예전 같지는 않아서. 오죽하면 녹림장관이 팔대탐자까지 전부 떠나서 아버지와 나, 그리고 망나니들만 남았을까. 그래도 개방이 하오문을 거둔 덕을 크게 입었고, 그간 관부에 공들인 연줄도 나름 도움이 되더라. 호호.”
개방을 들먹이며 웃는 얼굴이 돌아오자 오소민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겸손의 말씀을.”
개방이 내실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세력을 많이 축소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
낙양 용문세가도, 소림이나 무당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들 자기 앞가림에 바쁠 때 혼자서 전문간선을 되살릴 궁리를 하였다니. 은근히 붉어지는 낯.
방온화가 부드럽게 오소민의 팔을 두드렸다.
“그래, 괜한 소리는 줄이는 게 낫지. 하여간 전문간선을 엉성하게나마 급조한 목적은 우선 겁표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어. 상보감의 태감이 쫓겨나 낙향하는 이삿짐 속에서 딱 하나의 마차, 그 마차 안에서 또 딱 하나의 궤짝을 노렸다. 그 궤짝 안에는 똑같은 아홉 개의 작은 상자가 있었고, 아홉 무리의 도적이 각각 하나씩 얻은 후에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건. 용문세가의 지낭을 무사히 호송한 후에 오 장로가 원기와 헤어진 것도 이 진상을 밝히려는 것이었을 테고.”
“아, 뭐.”
어물어물. 낯빛은 조금 더 붉어진다.
기민하고 영리한 오소민이지만, 지금 방온화 앞에서는 말을 받기만도 힘겨운 듯.
굳어진 얼굴의 해원기는 오소민을 살필 여유도 없이 방온화만 보고 있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머릿속으로는 온갖 상념이 뒤섞여 지나가는데, 그런 머리를 누가 세게 친 듯한 느낌.
무림에 발을 디딘 후로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겪은 셈. 그러나 자신이 무림에 들어선 계기가 무엇이던가.
사건에 휘말려 정신없이 뛰어나기만 했을 뿐. 본래의 목적은 거의 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홉 개의 금오혈석. 아니, 정식 명칭이 구양금오란 걸 알게 되었으나. 이름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인가.
아홉 개를 강탈한 아홉 도적이 누구인지, 또 어떤 의도였는지 알아내고.
무엇보다 그중에 어떤 자가 대첨산의 화전민들을 독살했는지 밝혀야 했거늘.
무고한 이를 해친 자, 마땅한 벌을 내려야 하거늘.
해원기가 무림에 나서고부터 지금까지라고 하더니.
해원기는 거의 보지 않는 방온화가 계속 오소민에게 말을 건넨다.
“아홉 무리의 도적이 누구누구인지 찾아보다가, 흠, 묘한 느낌이 들더구먼. 우연히 원기를 만나 경을 친 장풍보의 장풍무명을 기준으로 비슷한 능력과 지위를 지닌 자들을 훑어보았는데. 이게 수상한 구석이 아주 많았거든.”
“수상한 구석이라면?”
“꽤 오랜 전통을 지닌 곳도 있지만, 근래에 갑자기 등장한 자들이 대부분인데, 어쩐지 한통속 같더란 말이지. 아, 조금 다른 의미지만.”
“네? 한통속이요? 그, 아홉 무리의 도적이 누군지 다 알아내셨단 말씀…….”
“그 얘기부터 해야 하나. 흠, 섬북의 장풍보, 하북의 팽가장, 요동의 무명천, 교주의 조양신문, 황산의 남궁검문, 휘주의 정수회, 서남쪽에 있다는 호화방(豪華幇), 나머지 둘은 반룡령에 속한 것 같아, 아예 동창이 직접 나섰을 수도 있고. 밀각이니 현신장이니 다 겪어봤다며.”
연달아 질문만 하던 오소민이 입술을 깨물었고,
그녀의 시선에 나무토막처럼 딱딱한 자세의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는 표정이 들어왔다.
황산의 남궁검문이 재건되었다는 소문은 바람결에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이 남궁검문을 빼곤 거의 다 마주친 적이 있는 세력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전부 한통속이라니.
밀각과 현신장을 들먹인 걸 보면 동창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꽉 닫혔던 해원기의 입이 저절로 열렸고,
“한통속이면서 왜 따로?”
의혹을 감추지 못해서 새어 나온 혼잣말이었으나. 방온화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해원기를 보았다.
“조금 다른 의미가 있긴 하다만, 자상천답(自相踐踏)은 요사(妖邪)의 본질이란다. 사마외도가 협의와 대치되는 특징이지.”
협의와 대치되는 사마외도의 특징.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해원기와 오소민의 시선이 동시에 방온화를 향했다.
아홉 개의 구양금오를 강탈한 아홉 무리의 도적. 자상천답은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는다는 뜻인데 어떻게 한통속이 되는 걸까.
그게 또 요사의 본질이라.
“신기자 전 대협이 전해준 비결이라고 했잖으냐. 사마의 속성을 딱 그렇게 정의했더구나. 재물이든 권력이든, 또 무공이든 그 욕심이 끝이 없는 자가 옳고 그름을 따져 남과 어울릴 리 없지. 설사 필요에 따라 한데 모이기는 해도 결국엔 모든 걸 독점하려고 온갖 궤계를 부리기 마련. 지고무상(至高無上)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왕좌(王座)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 그래, 이미 인간을 저버린 요물이라고 해야 맞다.”
비급이니 비결이니 농을 섞었으나,
방온화의 말에는 단단한 힘이 담겼다.
백 년에 걸친 음모를 파헤친 지혜란 바로 사마의 핵심을 짚어내는 것이었기에.
어떤 자리에 있어도, 무슨 간계를 쥐어 짜내도, 무엇으로 둔갑해도 필경 사마외도에 빠진 자는 끝없는 탐욕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그런 자에게 주위의 인간은 단지 수단에 불과할 뿐. 쓰임새가 없으면 버리고, 때로는 먹어치우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요물.
그야말로 사람을 잡아먹는 요물이다.
과거의 신기수사 전자방은 깊은 성찰과 깨달음이 담긴 정의를 내렸고, 그 지혜를 고스란히 계승했다는 방온화의 눈은 혜광으로 반짝인다.
“그래서 한통속 같다고 한 거란다. 별다른 차이가 없는 아홉 개의 돌멩이, 딱히 순서를 정하지도 않고 공평하게 나누어 헤어진 듯하다만. 그건 아홉 무리의 도적이 거의 동일한 조건이거나 혹은 누군가가 그렇게 되도록 조작했다는 의미겠지. 자, 이제 이쪽으로 각도를 조금 틀어보자.”
아홉 무리의 도적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
그러나 방온화의 얘기는 이제 도입부를 지났을 뿐이다.
“동일한 조건이란 그 돌멩이들, 음, 금오혈석으로 의심된다고 했었지. 그 아홉 개의 금오혈석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의미랄까. 아니면 완전히 복불복에 동의했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하고, 마주 보는 오소민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걸 알 수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부분.
구양금오에 관해 가장 많은 내용을 알면서도 이렇게 전체를 따져볼 생각은 왜 하지 못했나.
“소림과 무당이 보호하는 꼬맹이 둘. 하! 성승과 도봉의 전인이라니. 그 소식을 듣고는 미래를 내다본 선인의 혜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육악지력이 당세에 봉인에서 벗어남을 예측했잖으냐. 그런데 육악지력은 여섯, 금오혈석은 아홉. 이건 동일한 조건이 아니지. 오 장로가 육피구단으로 의심했듯이 꽝이 될 확률이 지나치게 높아서 말이야.”
아미와 공동에서 온 인광과 수진. 오소민이 장안의 달걀 장수가 쓰는 상술에 빗대 의심을 표현한 일까지.
전부 다 알고 있다.
오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홉 개 중에 세 개가 꽝이라면 삼분지일의 확률이지만, 표물을 겁탈한 도적들로서는 누구 하나 감수할 수 없는 문제였을 터. 셋 중의 하나는 꽝을 뽑는다는 걸 알고 복불복에 동의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동일한 조건이든 복불복에 동의했든, 그렇게 여기도록 뒤에서 조작한 자가 있을 거야. 물론 아홉 도적을 전부 속이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그러나 조작자와 내통한 이들이 있거나, 아예 대부분이 자신이 조작했다고 여기도록 했으면 나머지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걸? 겉으로는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도 막상 뒤집어보면 의외로 길거리 야바위인 경우가 많으니까.”
길거리 야바위. 여럿이 신분을 숨기고 목표로 정한 손님 하나를 벗겨 먹는 속임수는 흔하디흔한 일이다. 같은 손님인 척, 그저 구경꾼인 척, 적당한 훈수로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눈과 귀를 가리고 정신을 빼놓는다.
아홉 도적 중에 절반 이상이 한패였을 경우다.
하북 팽가장, 요동 무명천, 교주 조양신문, 그리고 반룡령이라면 이미 동창의 앞잡이임을 알고 있으니.
하지만, 방온화는 의미심장하게 ‘한통속’이란 단어를 썼었다.
“여기서 의문 하나. 절반 정도가 동창의 수족이나 주구란 게 밝혀졌으나 나머지는 무슨 관계로 끌어들였을까? 원의 잔당과 선이 닿은 거로 추정되는 장풍보, 무너졌던 전통의 명문이 재건된 남궁검문, 차를 팔아 치부한 정수회, 사치스러운 풍속을 조장하는 호화방. 아홉 개의 금오혈석에 맞춰 수를 채우려고 끼운 건 아니겠지. 이걸 확인하려고 이리저리 더듬어보다가 참으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고.”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린 방온화가 자기 손으로 가볍게 뒷머리를 치고,
말을 끌며 해원기와 방온화를 쳐다보는 눈에 기이한 빛이 어렸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에 실소가 다 나오더구나. 이렇게나 어이없는 술수에 놀아났나 싶어서.”
뒤통수를 맞았다? 어이없는 술수?
뜻밖의 사실이 대체 무엇이기에.
의아함이 경악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낙향하는 상보감 장인태감의 행렬. 그런데 산동의 제남을 지난 후에는 그 행렬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거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거꾸로 더듬어 올라갔더니, 흥, 태감은커녕 말단 내시 하나 황궁에서 쫓겨난 기록이 없었다. 더구나 소위 이십사아문이라고 설치는 태감들 중에 가장 신비스러운 인물이 바로 상보감의 태감이더구나. 이름, 용모, 하나도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겁표 사건 자체가 허구였다니.
방온화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창의 우두머리, 즉 제독태감은 사례감의 장인태감이 맡게 되어 있지만. 나는 이 신비스러운 상보감의 태감이 태상이라고 추측한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추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