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장 요승전승(妖僧傳承) (1)
이렇게 만나리라곤, 아니, 여기에 와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십 대에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일 줄도.
큰 사모보다 한 살 적다고 들었으니 이제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들 텐데. 오면서 만났던 방수인을 낳은 어머니인데도.
주름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피부에 예쁘장한 용모는 아직도 소녀 같다.
당대 녹림장관의 주인, 여의낭랑 방온화.
작은 차탁과 의자만 놓인 대청에 들어서자 해원기가 흙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질 원기가 삼가 소숙모를 뵙니다.”
두 손을 짚고 큰절을 올리는 지극한 인사.
막 자리로 데려가려던 방온화가 질겁하며 해원기의 어깨를 잡아 올렸다.
“에이그, 됐다, 됐어. 예전에 이러지 않기로 했잖냐. 너도 참.”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손이 어깨를 두드리고, 흙 묻은 무르팍을 털어주고.
바닥을 짚었던 손바닥까지 알뜰하게 훔쳐 주다가 빙그레 웃는다.
“십 년이 넘었지. 이젠 내가 올려다봐야 하는구나. 참 보고 싶었단다.”
해원기의 눈매가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십 년이 넘었다.
그렇게 연락을 끊은 무정한 조카 녀석이건만, 그저 보고 싶었다고만.
방온화의 다정한 미소를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울컥해져서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런 심정을 다 안다는 듯 방온화가 해원기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일단 앉자꾸나. 오 장로가 바로 나올 거야. 함께 얘기하자.”
차탁을 사이에 두고 나눠 앉으면서 알뜰하게 차 한 잔도 따라주고.
남들이 보면 잃어버렸던 아들이 돌아온 줄 알 거다.
해원기가 감정을 추슬렀다.
“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계시는지?”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고, 방온화가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음, 위초산채랍시고 떠드는데 영 분위기가 이상해서 말이다. 가만히 방구석에서 구경만 할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해원기를 보며 눈을 찡긋.
“너, 수인이를 만났다며. 정록이가 엉뚱한 곳에서 연락을 취한 것도 전부 너 때문이고. 그래서 내가 직접 나오면서 팔대탐자를 전부 소집했지.”
그새 연락이 갔었나.
녹림장관의 연락망이 생각보다 훨씬 신속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나, 그보다 정록의 이름이 나오자 해원기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 소숙모께 사죄를 드려야.”
“그러지 말라니까. 앉아, 앉아서 정록이랑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부터 말해봐.”
손사래를 치는 방온화.
해원기의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습관 정도는 뻔히 알기에, 빠른 말로 화제를 바꾼다.
숙모의 말씀을 어찌 거역하나.
해원기가 엉거주춤 의자에 앉으면서 장안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없는 말재주를 죄다 동원해서 어떻게든 간결하게.
총명한 사람과의 대화는 힘들다.
단목정은 그나마 형님 아우 사이로 대하니까 괜찮은 편이지만, 숙모인 방온화 앞에서는 지난 사정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게 참으로 진땀나는 일.
대강 얘기를 마쳤을 때 오소민이 나와 준 게 다행이다.
“아, 해 형. 괜찮아? 이게, 자네가 온 걸 알았는데도 바로 나올 수가 없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서두르는데,
방온화가 소매를 흔들어 말을 끊었다.
“우선 자리에 앉지. 조금 있으면 따뜻한 음식을 가져올 테니 아무리 급한 사안이라도 조금 미뤄두세. 오 장로와 나무꾼 다 멀쩡하고, 우리 원기도 무사히 돌아왔고.”
“어, 네.”
오소민이 주춤, 안정을 되찾아 자리에 앉고 나서야.
해원기는 방온화가 일부러 자신에게 얘기를 시켰다는 걸 깨달았다.
오소민과 엽산초부를 만났으니 당연히 지난 얘기를 들었을 터. 두 사람이 책군을 데리고 피신할 수 있도록 뒤를 끊는 역할을 해원기가 맡았다.
그렇다면 이 배회촌에 해원기가 도착했을 때 무엇보다 먼저 어떻게 대처하고 왔는지부터 알고 싶었을 터.
엉망이 된 해원기의 옷차림에서 격전을 치렀다는 것도 눈치 챘을 텐데.
그저 반가이 맞아주며 정록과 만난 얘기를 물었던 건,
알고도 모른 척, 숨 돌릴 틈을 주기 위해서였다.
처음 마을 어귀에서 해원기에게 대례를 올렸던 촌부 몇뿐 아니라 배회촌 전체에 적잖은 고수가 몸을 숨기고 대기하는 중.
방온화는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녹림장관의 팔대탐자를 전부 소집했다는 의미를 해원기는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
은허의 운해신조경 때문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몰랐다.
운해신조경을 벗어나 바위가 쌓여 만든 동굴에서 잠깐 쉬었던 게 전부.
엽산초부와 은허로 들어갔을 때와 백오십이나 되는 동창의 무리와 싸웠던 때가 전부 오후였으나, 그건 이미 하루를 넘긴 시각.
이른 저녁때지만 상이 차려지고 음식이 올라오니 저절로 시장기가 돌 판이다.
물 한 모금, 떡 한 조각 입에 대지 못한지도 꽤 되었잖나.
그러나.
“자, 천천히 먹어라. 이것도 같이.”
방온화가 포실하게 찐 만두를 잘게 찢어주고, 구운 고깃점과 볶은 채소를 골고루 얹어주며 챙겨도.
해원기가 선뜻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소숙모.”
억지로 입을 열자마자 또 빙그레 웃는 방온화.
“괜찮아. 팔대탐자 중 다섯이 모였고, 나머지 셋은 수인이랑 같이 곧 도착할 거다. 내가 녹림장관에서 가장 뛰어난 정예를 서른 명 데리고 왔고, 아버지도 직접 녹건호한(綠巾好漢)들을 끌고 오는 중이니까. 동창이 전부 달려들어도 쉽지 않을 걸? 그럴 담량도 없을 테고.”
해원기가 뭘 염려하는지 다 아는 투.
그러니 마음 놓고 먹으라는 얘기지만, 해원기뿐 아니라 오소민도 놀라서 눈이 둥그레졌다.
“녹림노조께서 직접이요? 녹건의 망. 음음.”
나오려던 말을 급히 멈추느라 우물쭈물하는 오소민이고,
방온화가 돌아보며 키득거렸다.
“그래, 녹건의 망나니들. 호호, 취개 단 장로에게 들었겠군. 자, 그럼 어떻게 할까. 잘 먹고 잘 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럴 계제도, 그럴 마음도 아닐 거야. 이렇게 하자, 내가 먼저 얘기를 시작하는 거로. 서두르지 말고.”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는 시선은 어서 젓가락을 들라는 재촉.
얘기를 곁들인 식사가 겨우 이루어졌다.
처음은 방온화, 그다음은 해원기와 오소민.
대강 그런 식으로 순서를 정했을 테지만, 해원기와 오소민은 거의 방온화의 질문에 답하는 식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기보다는 필요한 조각만 끼워 넣는 느낌이랄까.
방온화가 처음 해원기의 소문을 들었을 때, 즉 호중객잔과 낙향하는 태감의 겁표사건부터 시작해서.
해원기가 지금까지 겪었던 갖가지 사건들의 연결. 그리고 그 안에서 오소민이 미묘하게 여겼던 시점을 덧붙인 후에,
끝으로 가장 최근의 정보까지.
그렇게 하나로 죽 엮어나간다.
어느덧 해원기가 칠성검 서문창과 헤어져 배회촌으로 온 부분까지 나오면서, 해원기와 오소민이 서로 마주 보며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전부 방온화의 능란한 주도하에 식사 중에 이루어졌다.
사람의 머리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 뭐든지 뜻대로 하는 여신, 여의낭랑이 그냥 붙은 명호가 아니었다는 걸 실감했다.
탁탁.
방온화가 젓가락으로 탁자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류삼사아(溜三絲兒)와 날자계정(辣子鷄丁)도 맛있구나. 급한 대로 마련한 거지만, 두 사람 입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어서 더 들고. 그래, 대영반 서문창이라, 은하칠정검법(銀河七政劍法)을 극성으로 익혔단 말이지? 그 부분은 다시 더듬어 볼 필요가 있어 보이네. 이쯤에서 책군이라는 자를 심문한 내용이 나와야겠다. 오 장로.”
식사 내내 이런 식.
의문점이 있어도 당장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는 과감히 생략하고, 바로 연관이 될 부분을 짚어낸다.
해원기에게 류삼사아를, 오소민에게 날자계정을 집어주면서.
오소민이 고마움을 표할 새도 없이 말을 받았다.
“네. 엽산초부 선배가 여러 수단을 썼지만, 알아낸 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몇 가지 기밀에 관해서는 뭔가 금제가 걸려있는 듯해서. 태상과 동창성조, 국사(國師)와 사부대중, 그리고 음양교태(陰陽交泰)라는 단어 밖에는.”
“오 장로의 추측은?”
“태상은 동창을 이끄는 실제의 우두머리. 제독태감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동창 내부가 이미 둘로 나뉜 감이 있으니까요. 태상이 획책하는 게 소위 동창성조라고, 조정을 뒤엎을 야심을 품었겠지요. 그런 동창의 내분을 일으킨 게 아마도 국사를 주축으로 하는 사부대중이 아닐까 합니다.”
“사부대중은 불가에서 쓰는 말이지.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 재가의 남녀 신도. 이렇게 넷을 가리키는.”
“맞습니다. 지금까지 동창을 상대하면서 기묘하게 여겼던 부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요. 수족과 주구를 거느리고 강호를 어지럽히면서 재물을 탐하던 무리, 요사스러운 행사를 벌이면서 민심을 교란하던 무리. 여기에 밀각이라는 동창 내부의 핵심이 나오나 했더니, 아예 이십사아문과 조정의 대관을 사칭한 자들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은허에서 처음 나타난 자들. 책군을 붙잡지 못했다면 국사와 사부대중은 아예 몰랐겠죠.”
“국사는 그 중일까?”
“경수사의 주지인 묘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민하고 활달한 오소민이 평소답지 않게 고분고분하다.
작은 무당이 큰 무당을 만난 격.
식사 내내 방온화의 기막힌 재지에 끌려 다닌 셈이라 저절로 존경심이 생겼나.
방온화가 대화를 멈추고 찻잔을 들었다.
“목이 좀 메네. 역시 요리는 직접 해서 바로 먹어야 하는데. 가져오기 편한 거로만 골랐더니 좀 퍽퍽하지? 응, 차를 더 줄까?”
화제가 깊어질 만하면 다시 음식으로.
중요한 얘기를 나누지만, 논의에 빠져들지 않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한다.
음식을 씹고 차를 마시는 여유. 그 여유가 문제를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도록.
다시 몇 가지 요리를 집어 해원기와 오소민 앞에 놓아주고서,
방온화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러고 있으니 불쑥 옛 생각이 나네. 원기나 오 장로도 들어봤을 거야. 과거에 고약한 것들의 속내를 파악하느라 머리 좋은 양반들이 아주 골머리를 썩였던 거.”
어느 정도 식사를 마쳤다고 보았나.
지금까지와 달리 옛날 기억을 더듬는다.
“그때는 철금선생 종 선배가 주축이 되었었지. 뭐, 툭하면 자신을 제갈무후에 비겨서 자랑하던 분이었지만, 혼자서는 힘에 부쳤거든. 여기에 신기수사, 아, 지금은 신기자(神機子)라고 명호를 바꾼 전 대협. 그리고 기가 막히게 흐름과 기미를 읽어낸 쾌주랑 도 대협이 함께하셨기에. 호호, 도 대협도 이제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이라고 불러야 한다나. 호호호.”
웃음에 딸려가듯 해원기와 오소민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젊은이는 옛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법. 특히 그 옛이야기가 자신과 깊은 관계를 지닌 영웅담인 바에야.
철금선생 종지음, 신기수사 전자방, 쾌주랑 도신주.
백 년이 넘게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던 벽세와 지부를 상대했던 지자(智者)들이다.
방온화가 웃음을 머금은 채 이야기를 이어간다.
“물론 전설처럼 전해지는 분들도 계셔서, 모르는 게 없다고 만박제일(萬博第一)로 일컬어지던 신유문의 노사 천지일사 어르신이나, 천하제일의 지혜를 지녔다는 적성문의 천문노인 어르신도 아직 멀쩡하셨을 때지만. 역시 천재는 시대에 맞추어 나타난다고 해야 할까. 당시에 내가 가장 경이롭게 여겼던 분은 신기자 전 대협이었단다.”
만박제일이든 천하제일의 지혜든.
방온화가 첫손에 꼽은 이는 전자방.
“기라성처럼 늘어선 고인명사를 하나로 묶어 지휘했던 종 선배나 사태의 미묘한 맥락을 직감으로 파악했던 도 대협의 능력은 참 어마어마했어. 그렇지만 그건 다 타고나는 것, 배워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상황을 면밀하게 살피고 국면의 배경을 간파하는 힘. 난 그 부분에 집중했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막 졸랐지. 무슨 비급 같은 거 있으면 내놓으라고. 흐흥.”
괴상한 코웃음에 해원기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세상에 지혜를 익히는 비급이라니.
탁 소숙과 함께 강호삼준(江湖三俊)에 들었던 분이니, 그 인연으로 강짜를 부렸던 모양이다.
역시 한때 ‘여우’라고 불렸던 숙모구나.
오소민 역시 조금 어이없는 표정. 그 표정이 재미있는지 방온화가 눈을 찡긋거렸다.
“황당한 요구지? 그런데 진짜 있었거든, 비급이.”
“네?”
절로 반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방온화가 천천히 웃기 시작했고.
“하, 백 년 넘게 이어졌던 사마의 음모와 그 계책, 그리고 그걸 어떤 실마리로 밝혔고 어떻게 깨뜨렸는지. 전부 정리해놓은 게 있었단 말이지. 남들은 몰랐지만, 전 대협은 사실 대단한 기록광이었다고. 에, 그러니까 전대(前代)의 천재가 그 지혜를 전승한 사람이 바로 나, 여의낭랑이란다. 하하하.”
그 웃음에 해원기와 오소민의 얼굴도 절로 허물어졌다.
이 무슨 뜬금없는 자랑이람.
그래도 참으로 흥미를 끄는 내용이었고.
식후의 즐거운 웃음은 소화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