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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292화 (292/410)

제73장 사부대중(四部大衆) (4)

궁금한 걸 속에 담아두는 성격은 아닌 듯.

서문창이 바로 말을 건넨다.

“하나만 물어보지. 그대가 정녕 소문의 절세검왕이라면 이른바 협의지도(俠義之徒)일 터. 이곳에서도 협의에 따라 검을 뽑았는가?”

특이한 질문이라 해원기가 눈을 한 번 껌뻑였다.

강호를 걷는 무인에게 협의를 따지는 건 헛된 일이다. 무림에선 누구나 협의를 내세우게 마련이고, 설사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 악도라도 자신이 협의를 저버렸다고 자인할 리 없으니까.

더구나 협의지도라니. 협객이나 협사라는 명칭이 아니라 협의의 무리란다.

꽤 생경한 물음이지만,

조금 전과 달리 진중한 목소리에 말투도 상당히 부드러워져서.

해원기도 천천히 고검을 내렸다.

“협은 모르겠으나 의를 잃지는 않으려고 애썼소. 무림에 발을 들인 이후로는.”

오는 말이 고우면 가는 말도 고운 법.

평소처럼 차분하게 받아주자 서문창이 다시 한번 해원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젊은 나이. 아직 이립(而立)도 되지 않은 애송이고, 더벅머리에 남루한 차림새라 어딜 봐도 절세검왕이라는 명호와 어울리지 않지만.

고풍스러운 한 자루 검을 든 자세에선 형용하기 어려운 기도(氣度)가 어렸다.

특이한 질문만큼 특이한 대답이다.

무림인이라는 것들이 입만 열면 협의를 떠든다고 여겼거늘, 협은 모르고 의는 지킨단다.

이건 겸손일까.

더구나 그 말에 따르면 목숨을 함부로 뺏지 않고 백여 명을 거꾸러뜨린 이유가 불의(不義) 때문이라는 뜻.

서문창의 눈이 감길 듯 가늘어지다가,

철컥.

예기를 뿌렸던 장검이 허리 뒤의 검집으로 들어갔다.

검사는 검을 뽑고 거두는 것만으로도 그 수준을 알 수 있다던데.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서 검이 검집으로 빨려들 듯 사라진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낮은 혼잣말이 또 묘한 느낌. 해원기의 대답이 거슬린다는 뜻인가.

상대가 검을 거두었으면 나도 거두는 것이 예의.

해원기가 천천히 고검을 등 뒤로 돌리며 서문창을 보았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왜 검은 거두는지.

이제껏 겪었던 동창의 인물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런 해원기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서문창의 시선이 돌아왔고,

“에, 이 사안은 당장 결정하기 어려우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음, 물러가게.”

어렵사리 건네는 말이 또 희한해서.

해원기보다 서문창 뒤에 늘어서 있던 수보들이 눈을 둥그렇게 뜬다.

“어? 대영반, 이게 무슨…….”

“잠깐. 서문 대인!”

첨유진과 수보가 급히 입을 열었고, 사마대가들은 어이가 없는 표정.

그럴 만도 하다.

금의위 대영반이란 자가 한 차례 검을 맞대고는 대뜸 물러가라는 소리라니. 보기에 전혀 밀린 기색도 없거늘 왜 손을 거두는 건가.

기막힐 상황이지만, 서문창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

“창덕부에도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고, 포정사사에도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더군. 산골짝이 터져나가는 게 보이지 않았다면 여기로 찾아오지 못했을 거요. 그리고선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장면이라. 여기 쓰러진 백여 명 중에 금의위 소속을 빼고도 낯이 익은 자가 적지 않소이다. 혹여 궁내(宮內)의 인사라면 설사 하찮은 직분이라도, 어흠.”

헛기침이 무겁고,

첨유진과 수보의 입이 닫히는 것보다 빨리 사마대가들의 안색이 홱 변했다.

서문창이 일부러 헛기침으로 줄인 말.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다.

금의위는 본래 황상을 보위하고 대내의 기강을 살피는 곳. 동창이 황제의 총애를 입어 비상한 권력을 쥔 것과 달리 기찰(機察)이 본직이다.

물 긷고 불 때는 천한 비복(婢僕)도 황궁에선 아무나 맡지 못하고, 그 조발(調發) 역시 하나하나 정해진 규정에 따라야만 한다. 갑자기 인원이 빠지거나 불쑥 모르는 자가 끼어들 수 없다는 거다.

이 골짜기에 모인 인원은 총 백오십. 동창의 권력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고 해도 제멋대로 궁인(宮人)을 동원하는 건 큰 죄요, 더구나 죄다 널브러져 있으니.

이번에는 수보보다 먼저 사마대가가 말을 받았다.

“어찌 모르겠소? 그러나 이는 모두 제독의 명을 받아서.”

황망히 방패막이를 내세우지만, 그마저도 서문창의 코웃음에 끊겼고.

“흥, 제독태감을 들먹이면 뭐든지 괜찮다는 거요? 그러지 않아도 근년에 들어 제독태감께서도 잘 모르는 행사가 빈번하다고 들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남경수비직(南京守備職)에 머물 시기이니. 아니, 그보다.”

말을 끌면서 아예 몸을 옆으로 돌렸다.

검을 거두었다고 해도 뻔히 해원기가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형 대인은 뛰어난 재지를 지닌 분. 여기서 이런 처지로 뭉그적거리는 게 옳을까요? 자칫 황상을 시중들어야 할 공공 몇 분까지 위험에 빠뜨렸다간 제독태감께 엄한 책망을 들을 거외다.”

서문창의 얼굴이 바위처럼 딱딱하다.

냉엄한 표정에 무서운 시선.

그 시선을 받는 수보와 사마대가 등이 움찔하는 게. 등진 서문창의 얼굴을 보지 못한 해원기도 알아챌 수 있었다.

경계를 늦추진 않았으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직감했고, 그러면서 신기한 느낌이 든다.

대영반 서문창.

무슨 목적으로 왔으며 이제 어쩔 셈으로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가.

수보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서문창의 기세에 눌린 듯 주눅 든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다 서문창에게 모여들었고,

해원기도 궁금해졌다.

뒤쪽에 할 얘기는 다 했다는 듯 서문창이 바로 몸을 돌린다.

“아직도 있었나? 물러가라 했잖은가.”

등 뒤의 작은 기척이라도 놓치지 않을 고수면서 머리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해원기가 잠시 시선을 맞추었다.

각진 얼굴에 깊숙이 박힌 서문창의 두 눈. 뭐를 생각하는지 알 수는 없어도 전혀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한다.

“무슨 뜻이오?”

물러가라는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나. 오가는 대화를 통해서 서문창이 지금까지 접했던 금의위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았으나.

또 무슨 수작이 숨겨졌을지 모른다.

서문창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뜻은. 혐의는 있되 입증할 수가 없으니 가라는 거지. 뭐, 오해로 일어난 불상사라고 해도 좋고. 강호를 잘 알지는 못해도 절세검왕을 산적 앞잡이로 여길 만큼 무지하지는 않네. 또 산적 떼 소탕하러 왔다는 관원들이 이렇게 모진 꼴을 당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주 복잡한 사안이라서. 흠, 아니면 끝까지 해보자는 건가?”

끝까지 해본다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검을 뽑을 생각은 없는 듯. 아무런 기세를 내보이지 않으니.

해원기가 무표정한 얼굴을 가볍게 저었다.

“나는 싸움을 즐기지 않소. 그렇다고 겁을 내지도 않고. 그러나 오늘은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협이든 의든 지나치면 본래의 의미를 잃는 법이니까.”

“그렇지. 동감일세.”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문창.

어쩐지 수보나 사마대가 등보다 해원기와 대화하는 게 더 편해 보이고.

두 손을 가볍게 맞잡는 시늉까지.

“이미 말했듯이 혐의는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같은 무인으로서 이해하는 면이 없진 않으나, 함부로 괜한 소문을 퍼뜨려 조정의 눈 밖에 나는 잘못은 범하지 않길. 또 보세.”

대충 예를 차리는 것도 마지막 경고를 확실히 전하려는 의도.

해원기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불긍기공(不矜其功), 불벌기능(不伐其能)이라 배웠으니. 딱히 염려할 필요는 없을 거요. 그럼.”

어려서부터 사부에게 항상 들었던 말.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고협(古俠)의 계율이다.

산적 떼 소탕하러 온 백오십이 형편없는 꼬락서니가 된 일이 강호에 퍼지면 참으로 난감하겠지. 그걸 괜한 소문으로 퍼뜨리지 말라고 한 완곡한 경고에 대한 답변이었으나.

그것뿐.

조정이 어떻든 하는 얘기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하여간 특이한 인물과의 기묘한 조우는 끝났고,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먼저 피하도록 한 오소민과 엽산초부와 한시라도 빨리 만날 필요가 있었고,

책군이라는 포로는 동창의 복잡한 내막을 밝힐 실마리가 될 터.

손을 풀며 서슴없이 몸을 돌린다.

격렬한 싸움의 영향으로 몸을 숨겼던 바위 동굴도 크게 무너진 상태. 멀쩡하다고 해도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내부에 숨겨진 통로를 드러낼 수는 없다.

어지럽게 포개진 바위 더미를 넘을 생각으로 머리를 들면서 해원기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작은 혼잣말이었으나,

해원기를 계속 주시하던 서문창의 눈매가 깊이 파였다.

황실의 권위, 조정의 체면. 금의위의 대영반으로서 나름 호탕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어도.

이 절세검왕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젊은 녀석이 순순히 물러날지 확신할 수는 없다.

절로 긴장이 되는데.

이어지는 해원기의 작은 말소리.

“황극천운(皇極天運)이 이미 완성되었구나.”

감탄인지 탄식인지 의미가 불분명하지만,

서문창의 눈매가 충격으로 바르르 떨었다. 어떻게 황극천운이라는 말을 아는가.

휘익.

흔들리는 시선으론 바람처럼 날아오르는 해원기의 신형을 쫓을 수 없고. 초점을 맞추지 못한 서문창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힌다.

뒤에 있는 자들과 남은 얘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은 채.

부신수형의 은밀하기 짝이 없는 신법으로 두 시진 남짓.

자산이 있는 방향을 대강 짐작하면서도 골짜기를 벗어나자마자 일부러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동강을 불러 두 사람이 피한 배회촌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나도 이제 강호인이 다 되었네.’

만일을 위해 조심에 조심을 더하는 습관이 생겼나.

저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맺힌다.

무림에 나선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건만, 그간 겪은 일이 하나같이 괴이하고 이상한 것들이라서일까. 경계와 주의가 어느새 몸에 배어버렸다.

불현듯 피곤함이 밀려든다.

면면부절(綿綿不絶)의 수정지기가 육신을 단단히 받치고, 응기수변(應機隨變)의 풍뢰지결이 뇌리를 환히 밝혀도.

허탈한 심정은 어쩔 수가 없다.

어딘가에 기대어 잠시라도 쉬고 싶다.

그러나.

삐잇.

잠깐의 희망조차 뺏을 셈인지 동강의 울음이 야속하게 귀에 전해지고,

해원기가 쓴웃음을 헛웃음으로 바꾸며 몸을 돌렸다. 괜한 생각이지.

동강의 울음을 따라 몸을 날리자 일 각도 되지 않아 작은 촌락에 이르게 되었다.

산기슭에 자리한 작은 촌락. 밭도 거의 보이지 않는 거친 산이고, 길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판잣집도 누추하기 그지없다. 마을 이름도 배회라니 제대로 농사를 짓지 않고 돌아다니기만 한다는 건가.

허름한 광주리를 든 추레한 차림새의 아낙네 몇이 나와 있다가 겁먹은 듯 주춤거리는데.

해원기가 우뚝 멈춰 섰다.

빨랫감이나 산나물 따위를 담은 광주리, 그리고 추레한 차림새의 촌부들. 그러나 심상에 비치는 예리한 기세.

눈에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한데.

해원기를 발견하자마자 촌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대공자(大公子)를 뵙습니다!”

가다듬은 목소리로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리니.

생각지도 못한 대례(大禮)에 해원기가 얼이 빠져서 가장 안쪽의 판잣집에서 불쑥 큰 목소리가 나는 것도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사부대중(四部大衆)? 그거 중들이 떠드는 소리잖아. 오 장로는 뭔 소린지 알겠어? 아, 마침 왔구나.”

지나치게 활달한 음성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높이 틀어 올린 머리가 삐죽 나오면서.

“원기야, 아니지, 현질(賢姪), 어서 와.”

활짝 웃는 얼굴.

조카를 반기는 숙모의 환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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