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91화 (291/410)

제73장 사부대중(四部大衆) (3)

고수.

무림에서 고수라는 칭호는 이미 흔해졌다. 조금만 실력이 있어도, 자그마한 소문만 돌아도 대단한 고수라고 허풍을 떨고. 또 그런 허풍에 빌붙어 떠받드는 자들 또한 입에 발린 소리를 불경처럼 외워대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근래 강호에 허랑방탕한 기풍이 유행하면서 더욱 심해진 편이어서. 그럴듯한 차림새에 겉만 번드르르한 병기 하나 들면 바로 고수로 칭해지곤 한다.

그러나 해원기의 사부는 함부로 고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검도에만 국한해서 따져도 이기어검(以氣馭劍)이나 검기성강(劍氣成罡)에 이르러야 비로소 고수로 불릴 수 있다고.

그렇게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해원기를 가르쳤었다.

그런 까닭에 해원기도 남에게 섣불리 고수라는 평가를 내릴 수 없었는데.

이 초로의 금의위를 보자마자 그 단어가 떠올랐다.

‘고수다.’

영약이나 술법 따위로 허망한 내공을 잔뜩 부풀린 게 아니다.

특별한 비보나 기연 덕에 요행으로 대단한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바탕을 단단히 다지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경지에 오른 자. 뛰어난 자질에 부단한 노력이 쌓여 참된 무공을 성취한 자.

이른바 진재실학(眞才實學)을 갖춘 인물이다.

단 일검.

그것만으로도 이 인물이 화산검협 마린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고, 지금까지 만났던 어느 현신장보다 강하다는 걸 직감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수보는 바로 이 인물을 믿고 허튼소리를 지껄였었나.

그런데 뜻밖이라고 여긴 건 해원기만이 아닌 듯.

“다, 당신이 어, 어떻게 여기에?”

수보가 말을 더듬다가 제대로 맺지 못하고, 사마대부를 비롯한 자들의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역력하다.

동창이든 이십사아문이든.

전부 뭔가에 찔린 것처럼 움찔하는 분위기.

비스듬히 선 초로의 금의위가 대뜸 혀를 찼다.

“쯧, 대단한 규모의 산도적 패거리를 은밀히 소탕한다 하지 않았소? 이형(理刑) 대인. 동집사창의 제독태감께서 그렇게 요청하신 거로 아는데.”

의아함과 불쾌함이 뒤섞인 말투.

그러면서도 시선은 조금도 해원기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놀리면서도.

해원기의 추켜세운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기묘하다.

고수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초로의 금의위가 등장하자 수보와 사마대가 등이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그 대화 또한 이제껏 동창의 인물들과 달리 생경하다.

밀각육학사의 우두머리인 수보를 그냥 이형이라고 칭하고, 동창의 정식 명칭인 동집사창에다 제독태감의 요청이란 표현까지.

달갑지 않은 못난 친척 대하듯 짜증이 섞인 어조다.

비어복에 관모 차림이 아니었다면 금의위가 아니라고 여겼을 정도. 동창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했다더니.

해원기가 이전에 흥륭에서 염상단의 황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동창의 책임자는 제독태감. 제독태감을 보좌하는 직분은 첩형. 첩형은 죄에 맞추어 형벌을 논하는 이형과 정해진 형벌을 집행하는 장형으로 나뉘어 두 명씩 총 네 명이다.

대명호에서 해원기에게 생포된 유 태감이란 자 또한 이형이었었고.

유 태감 밑에 위 소감, 그리고 위 소감이 지휘했던 금의위 천호들. 다루는 분야에 따라 반(班)을 가르고, 각 반을 맡은 자가 바로 영반(領班). 대강 그런 구조라고 했었다.

한데 지금 혼자 나타난 금의위는 이형인 수보를 남 보듯. 아니, 은근히 질책하는 기색을 드러낸다.

수보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고쳤다.

“어흠, 그렇지요. 여간해선 알아내기 어려운 적도들이 불측한 의도로 모여든다는 정보를 얻었기에. 워낙 삿된 무리라 만에 하나라도 실수할 우려가 있어서 주위를 단단히 둘러칠 계획이었소이다. 창위상의(廠衛相依)라, 국사에는 서로가 힘을 합쳐…….”

동창과 금의위는 서로 의지한다는 소리까지 덧붙이며 점잖게 관화(官話)를 이어가려는데.

“호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인원이 당했다? 대단한 규모의 산도적 패거리와 여간해선 알아내기 어려운 적도들에게 당해서? 이거 참.”

초로의 금의위가 말을 자르며 입맛을 다신다.

계속 시선을 잡아당기는 대상은 해원기 한 사람뿐.

어디에 산도적 패거리와 적도들이 있다는 말인가.

수보가 한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비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뜻이다.

수보의 난감한 처지를 공감하는지 사마대가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광경을 보면 알 수 있잖소? 서문(西門) 대인이 마침 잘 왔소이다. 당장 저 빌어먹을 젊은 놈을.”

그러나 해원기를 가리키며 욕을 마치기도 전에.

서문 대인이라고 불린 초로의 금의위가 허리띠에 올렸던 왼손을 가볍게 들어,

“마(馬) 공공. 제가 공공의 명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독태감께서 어떤 복안을 세우셨는지는 모르나, 대내아문(大內衙門)은 동집사창 담당이지요.”

딱 부러지게 말을 끊어버린다.

사마대가에게도 마 공공. 상선태군이나 직전고사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태도요, 이십사아문은 동창의 소관이니 금의위에 상관하지 말라는 의미다.

체면을 구긴 사마대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그런데도 더는 입을 열지 않으니.

서문 대인이라는 인물.

그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서문 대인이란 자가 말투를 바꾸었다.

“이형 대인, 여덟 반의 스물네 개조를 대지급으로 소집한 건은 나중에 얘기합시다. 지금은, 흠, 너는 이름이 어떻게 되며 무얼 하는 자인가?”

계속 눈길을 떼지 못했던 대상.

비로소 해원기에게 말을 건네지만, 이 또한 관청에서나 쓸 법한 고압적인 말이다.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해원기가 치켜세웠던 눈썹을 내리고,

고검을 두 눈 사이에 똑바로 세웠다.

신광을 갈무리한 두 눈,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

“강호의 일개 무부라도 처음부터 병기로 인사를 나누진 않는다. 관청에 몸을 담고 대내의 일을 본다고 해도 검을 쥔 자가 어찌 이리 무례한가?”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엄숙한 무게와 깊이가 담겼다.

검.

검을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일컫는 건 가장 뛰어난 병기라서가 아니다.

병(兵)은 흉(凶)이라고 했으나. 검이야말로 왕도(王道)를 걷고자 하는 의지의 상징이기 때문.

검객을 달리 검사(劍士)라 높여 부르는 이유다.

화산검협 마린에 못잖은, 아니, 어쩌면 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인물에게,

해원기는 제대로 예의를 따지고자 했다.

그 뜻을 알아들었을까.

서문 대인이란 자가 찌푸린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비껴든 자신의 장검을 천천히 세운다.

“흠, 검을 쥔 자라. 좋다. 나는 금의위 대영반의 자리에 있는 서문창(西門昌)이라고 한다.”

수검(修劍)의 예.

해원기의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서문 대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혹시나 했던 예측이 맞았다.

방수인이 농락했던 금의위 한 조로부터 들었던 이름이다. 대영반이라는 생소한 직위에 칠성검이라는 유치한 별호를 쓰는 자.

이름을 알았다고 궁금함이 가시진 않는다.

“내 이름은 해원기다. 그런데 금의위에 대영반이란 자리가 있는지는 몰랐군.”

치릿.

서문창의 장검이 얼핏 떨리며 빛을 뿜고,

“하, 소문의 절세검왕이 이렇게 젊을 줄은 나도 몰랐구나.”

찌푸렸던 각진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스쳤다.

즐거운 듯.

장검이 별처럼 빛난다.

서로 밝히지 않은 각자의 사정이 아직 남았으나.

두 사람 다 굳이 대화를 이으려 하지 않았다.

무수한 인원이 쓰러진 가운데 홀로 선 해원기. 그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금의위 대영반 서문창.

그걸로 충분하다.

검을 쥔 자가 서로 예를 취했으니 나머지는 검으로 결정할 일.

마치 그런 약속이라도 정한 것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기세를 일으켰다.

우우웅.

해원기의 고검에서는 웅장하고 은은한 검형이,

치리링.

서문창의 장검에서는 찬란하고 신기한 광채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공간이 삽시간에 은은한 검형과 신기한 광채로 뒤덮인다.

징!

이 무슨 소리? 멀리서 큰 종을 친 듯 울리는 여운. 그러나 뇌리를 꿰뚫는 감각에 수보와 사마대가 등이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냥 기세가 아니라 강기끼리 부딪친 것이다.

그리고 여운이 그치기도 전에 벌써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인다.

슈슈슈슈.

오악검법에서 가장 날카로운 기수검봉과 절세오검의 섬전추풍이 화살처럼 튀어나가자,

장검의 찬란한 광채가 폭포처럼 쏟아져 별 무리를 이루는 장관.

채채챙!

몇 번이나 부딪치는 건지. 발검제형의 수발여의를 모조리 막아낸 서문창이 단호하게 목을 울렸다.

“천운칠정(天運七政), 진국세(鎭國勢)!”

별 무리가 굼실거리며 장대한 흐름으로 덮치고,

해원기가 신왕검을 뒤집어 복룡검식과 붕악을 재단경위에 담았다.

쩡!

얼음이 쪼개지는 굉음. 별 무리가 산산이 흩어질 것 같은데.

서문창 또한 기쾌하게 장검을 흔들었고, 성광(星光)이 순식간에 한 줄기로 이어졌다.

“호국세(護國勢)!”

별자리가 뒤바뀌는 듯한 절묘한 변화요, 찬란한 검강이 재단경위를 통째로 뭉개려 든다.

공간을 뒤엎는 가공할 일격.

해원기가 두 발을 엇갈리며 신왕검을 내던졌다.

휘릭.

기다렸다는 듯이 팽이처럼 회전하는 검을 따라 재단경위의 변식인 신마공무가 저사직금으로 교차한다.

사부가 서른세 가지 검법의 정화를 모아 창안한 삼십삼천신마봉헌과 대천세계신마난무의 두 초식. 그 두 초식을 귀왕천형의 틀에 넣어 하나로 만든 것이 신마공무다.

공수 어디에나 쓰이는 재단경위지만, 변식인 신마공무는 철저한 공격.

공격에는 맞공격으로.

검강이 어검으로 변하는데.

호국세를 떨친 서문창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마주 검을 날린다.

파파팟.

비어복의 소매가 찢겨 날아갈 정도로 양손이 맹렬히 갈마들고.

“전국세(戰國勢)!”

단호하게 외치던 검결이 호통으로. 장검이 단숨에 일곱 번이나 꺾여 별자리가 현란하게 겹친다.

이것도 어검. 더구나 겹겹이 얽힌 검강으로 눈앞에다 밤하늘을 쏟아부은 것 같다.

단번에 승세를 쥐겠다는 건가.

두 사람의 손을 떠난 검이 정면으로 부딪치고,

쾅!

이미 엉망이 된 지면이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터져나갔다.

골짜기의 땅바닥이 한 치가 넘게 내려앉았을 터.

해원기가 손목을 튕겨 신왕검을 다시 쥐었다.

곧장 군림검으로 바꾸어 이기어검에서 어검대법으로 나아갈 생각이었는데.

훌쩍 뒤로 물러나 장검을 내리는 서문창.

기세를 풀었다.

대단한 공력에 가공할 검법. 과연 해원기의 추측대로 마린을 능가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자다.

검강과 이기어검을 병용하는 어검강이 훨씬 능숙해서 해원기와 평수(平手)를 이루었거늘, 왜 검을 거두는지.

시선이 해원기를 떠나 주위를 훑는 것도 묘하다. 대적할 때 한눈을 파는 미숙한 실수를 범할 리 없는 고수가.

“목숨을 잃은 자가 거의 없군. 태반이 아직 생기를 지녔어.”

나지막한 혼잣말에 경이가 담겼고, 다시 해원기에게 돌아오는 얼굴에는 의아한 표정.

두 자루 검의 격돌로 일어난 엄청난 충격. 그로 인해 골짜기 전체에 경력의 여파가 휘몰아쳤고, 사방에 널브러진 자들이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뒤틀리고, 피를 흘리며 혼절한 자들. 그중에 문득 깨어나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 자가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알아듣기 어려웠을 텐데.

서문창은 비로소 이 참혹한 광경 속에 그다지 시체가 없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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