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90화 (290/410)

제73장 사부대중(四部大衆) (2)

반선진(盤旋陣) 계통이라고 짐작했었다.

진을 이룬 자들의 힘을 한군데로 모아서 진에 갇힌 대상을 약화시키고, 진의 내부에 발생한 경력을 은밀히 흡수해서 자기들의 힘을 복원하는 그런 진법.

신령검역이 장애를 만난 듯했을 때부터 예측했었고, 그래서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파진운보를 곁들였으며.

진세의 중추가 될만한 곳을 신창삼절예로 노렸다.

조양선사와 암야무명, 일곱 호궁역사를 상대하는 것보다 먼저 진세를 깨야만 한다.

과연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마치 철벽을 두른 것처럼 울어댔고, 전해지는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애애반환진’이란 들어본 적도 없는 진세.

밀각의 대부와 연갑의 무장들을 절반 가까이 쓰러뜨리긴 했으나,

충격을 풀어내려면 보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고검을 거두면서 춤추듯 물러서는 몸짓. 그런 해원기를 향해 나머지 절반인 오십여 명이 목청이 터지라 기합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대부들은 대부분 맨손, 드물게 판관필이나 옥홀 같은 걸 든 자들이 있고.

무장들은 검과 도가 태반이다.

슈웅, 슈웅.

공간을 가르는 권장과 도검의 소음이 졸지에 골짜기를 가득 메우면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우박처럼 쏟아진다.

현신장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죄다 일정한 성취를 이룬 자들. 전부가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해당하는 강기경력(罡氣勁力)이라 조금만 스쳐도 뼈가 부러지고 경맥이 상할 터.

진형이 깨졌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공격에 작은 골짜기가 일시에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해원기가 물러서던 두 발을 교차하며 검을 크게 흔들었다.

촤르르르.

공중에 떠오르는 열 폭 병풍. 장생십경이 면밀하게 해원기를 둘러싸자.

펑펑펑펑펑.

기다렸다는 듯이 폭음이 연달아 터졌다.

달려드는 자가 오십여 명.

강호에서 흔히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진법으로 꼽는 소림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이나 개방의 타구대진(打狗大陣)보다야 적은 수지만.

나한 대진이나 타구대진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공수를 전환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애애반환진이 무너지면서 무작정 달려든 상황이다.

육악지력을 지닌 현신장 둘과 오련칠법으로 연제한 호궁역사 일곱을 앞세웠는데도, 단번에 아홉 명이 나가떨어지면서 애애반환진까지 무너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직접 당한 자들. 거의 공황에 빠진 심리여서 전력을 다해 미친 듯이 몰아칠 수밖에.

어떻게든 일장 일검이라도 더 내지르려 하다 보니 저절로 공간이 벌어진다.

퍼퍼펑.

자신의 권장이 제대로 목표를 노리는지, 자신의 도검이 먹혀드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어지럽게 몰아치는 힘줄기가 제멋대로 소용돌이치고,

돌가루와 흙먼지가 새까맣게 시야를 덮었다.

아무리 해원기라도.

천손검법의 장생십경이라도 이래서야 어찌 견뎌낼까.

수비를 공세로 전환할 틈조차 없는 광포한 몰매와 다름없다.

위이이이잉!

돌연 울리는 기음. 미쳐 날뛰는 소란스러움을 무섭게 꾸짖으며,

눈부신 빛이 불쑥 치솟았다.

공황에 빠져 있는 힘없는 힘 다 쏟아 붓던 오십여 명이 멈칫거릴 정도.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자,

돌가루와 흙먼지 가운데 이리저리 뛰는 해원기의 그림자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권장과 도검을 고스란히 맞아주던 열 폭 병풍의 윤곽도.

그런데.

뭘 하는 건가.

어깨를 으쓱거리고, 팔꿈치를 퉁기며, 손을 흔든다. 고갯짓을 따라 왼팔에서 오른팔로.

허리도 이에 맞추어 흔들리면서 무릎이 오르락내리락, 발끝이 파도치듯 솟구친다.

춤사위.

오십여 명의 미친듯한 협공 속에서 춤을 춘다고?

더구나 그 춤에 주위를 가리던 병풍들이 장단을 맞추는 것처럼 달라붙으니.

양쪽 팔꿈치와 두 손, 양쪽 무릎과 두 발, 어깨와 허리.

공중에서 찬란히 빛나는 군림검 아래.

장생십경을 걸친 해원기의 몸짓이 더욱 경쾌해졌다.

휘두르는 오른손에 거대한 바람이 몰아치고, 휘어지는 왼쪽 팔꿈치를 따라 구름이 자욱하고.

들어 올린 무릎에선 우레가 은은하고, 내치는 발끝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솨아아아.

와르르릉.

허리를 뒤틀 때마다 풍뢰가 더욱 심해지면서, 무서운 예기가 팔방으로 뻗었다.

손짓 발짓이 전부 검.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이 내외표리(內外表裏)를 이루면서 전신에서 무수한 검형이 폭출한다.

권력과 장공을 오악검이 무찌르면, 검강과 도기를 절세오검이 쪼개고.

유리검이 추상검을 부르면, 본연검이 사신검과 자리를 맞바꿔서.

오십여 명의 합공을 모조리 맞받아치는,

완전한 검왕법신이 더해진 폭풍만뢰. 그건 가히 풍치전체(風馳電掣)라 불러야 할 위력이었다.

콰앙!

골짜기가 통째로 터진 듯.

무지막지한 굉음이 하늘까지 울린다.

와수수수.

골짜기 주위를 뒤덮었던 무성한 숲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광풍과 우레에 휘말렸던 돌조각과 흙더미도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좁은 골짜기에 메아리치는 소음과 진동 때문에 정신이 어찔할 정도. 뒤에 물러나 있던 자들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광포하게 달려들었던 자들뿐 아니라 애애반환진을 펼치다 주저앉았던 처음의 절반까지 죄다 나가떨어졌다.

눈에 들어오는 건 사방에 널브러진 육신들. 총합 백오십에 이르는 인원 중에 제대로 서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허리가 나가서 나뒹굴거나. 피를 토하면서 꿈틀대다가 아예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이게 말이 되나.

수보는 멍한 표정. 첨유진의 낯빛은 창백하다. 비틀거리는 학사 셋을 챙기지도 못한 채.

사마대가 쪽은 더 심해서 상선태군과 직전고사 다 엉덩방아를 찧은 모습.

상상도 하지 못했던 광경 앞에서 넋이 빠졌다.

그리고 자욱한 흙먼지 속에 우뚝 선 그림자 하나.

고검을 가슴 앞에 세운 해원기가 두 눈에서 무서운 광채를 흘린다.

무려 백오십에 이르는 인원을 혼자서 쓰러뜨렸음에도 그 안광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고,

부스슥.

과연 세 학사 앞에 불쑥 일어나는 움직임.

풍치전체의 위력 아래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조양선사와 암야무명, 그리고 호궁역사 둘이었다.

그들도 멀쩡하진 않아서 몸에 걸친 심의가 걸레쪽이 된 조양선사의 코와 입에서는 핏물이 계속 흐르고, 전신을 휘감았던 암혼번이 모조리 날아가 버린 암야무명은 정신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조양선사의 어깨에 기댄 채. 호궁역사 둘은 각각 팔다리가 부러져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다.

경옥신공을 대성하고 착치의 힘을, 영사태화를 한껏 익힌 위에 수사의 힘을 이은 현신장이건만.

호궁역사를 방패로 세우지 않았다면 헛되이 목이 달아날 뻔했다. 오련칠법으로 연제되어 금강에 버금가는 신체를 지닌 호궁역사 일곱도 전부 파괴되고 망가진 둘만 겨우 남은 판이니.

이 광경이 더욱 기막혔던지.

“허! 어찌 이런 검이.”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진 덕에 정신을 차린 수보.

눈을 몇 번 껌뻑이다가 소매를 털며 앞으로 나선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잠시 넋이 빠졌으나 그렇다고 곧장 꽁무니를 뺄 생각은 없는 듯.

“대단하군, 대단해. 절세검왕이란 명호를 처음 들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실은 딱 맞은 명호였단 말이지. 제일대적에 오를 만하네.”

아무렇지 않은 척 감탄을 덧붙인다.

뭔가 또 믿는 구석이 있나.

수보가 소매를 털고 입을 놀려서일까.

첨유진이 놀란 토끼처럼 학사들과 현신장에게 달려가고, 사마대가 역시 급히 상선태군과 직전고사를 돌보는데.

해원기는 검을 세운 자세 그대로 무서운 시선을 보낼 뿐.

그런 눈치를 살피며 수보의 목소리가 차츰 커졌다.

“곳곳에 끼어들어 공사(公事)를 망친 게 우연이 아니라고 진즉 의심이 들더구먼. 그러나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그 나이에 혼자서 대드는 건 무리. 더구나 매번 일을 벌일 때마다 더욱 뛰어난 무위를 드러냈다는 건, 흠, 아주 교활한 배후가 적절히 안배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감탄과는 다르지만, 혼잣말 같은 말투.

해원기가 말없이 바라보는 걸 예상한 것처럼 수보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무공이 고강한 젊은 고수 하나를 내세워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다라. 어디 보자, 제남에서 흥륭과 황하문, 태산을 거쳐 남하하면서 용문세가와 개방, 응, 풍진삼우와 어울렸으니 개방만이 아니라 소림과 무당도 포함되겠군. 소림에선 관병들을 겁박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는 사천당문과 약왕당이었고. 섬서로 넘어가선 또 화산, 종남에 비마방까지 얼굴을 들이밀었지. 호오라, 이게 얼마나 되는 거야? 그, 강호에서 뭐라고 하더라?”

해원기가 무림에 발을 디딘 후의 행적을 하나씩 꼽아가며.

뭔가를 떠올리는 시늉.

“맞아. 구주정문이랬지. 흐음, 그럼 구주정문이 감히 조정에 대항할 속셈이다?”

교활한 배후라더니.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꺼낸다.

해원기의 입매가 비틀렸다.

딱히 수보의 헛소리를 들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백오십이나 되는 적을 쓰러뜨린 후 잠시 숨을 돌렸을 뿐.

삼전태의 깨달음으로 풍뢰와 보병의 힘을 이었으나 역시 공력이 순간적으로 허탈해지는 걸 면키 어려웠다.

신령검역에 자재검도.

사조의 영령이 깨우쳐준 이치, 사부가 전수한 검왕수의 오의. 함께 시전할 힘을 갖췄어도 아직 원활하지 않다.

경중대소(輕重大小)가 타당하지 못하기에 약한 상대에겐 너무 지나치고 강한 상대에겐 너무 부족했다.

과(過)는 불급(不及)과 같은 것. 진력(眞力)의 허비(虛費)를 가져온다.

생사활살의 도리를 알면 뭐하나. 신령검역과 자재검도를 펼칠 수 있어봤자 적당(適當)에 이르지 못했음에야.

자연(自然)이라고 다 당연(當然)은 아니란 걸 실감하느라 호흡을 가다듬었더니.

이런 엉뚱한 헛소리를 듣게 되었구나.

동창성조니 뭐니. 대역무도한 언행을 감추지 않던 자들이 이제 와서 조정에 대항한다는 누명을 씌우려 든다.

해원기가 양손을 나누며 앞으로 움직였다.

한 마디도 받아줄 마음은 없었고,

학사들과 태감들이 힘을 되찾을 때까지 놔두는 건 바보짓이다.

이자들이 막판에 괴상하게 공력을 증강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니잖나.

나름 경지에 이른 자들만 남았기에 그 회복도 대단히 빨랐다.

직접 해원기와 싸웠던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을 빼곤 애애반환진의 파괴에 영향을 받은 자들. 첨유진과 학사 셋, 사마대가를 비롯한 태감 셋이 당장 수보를 중심으로 모여들면서.

다가오는 해원기를 향해 자세를 잡았다.

조양선사, 암야무명, 반병신이 된 호궁역사 둘에겐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만큼 겁을 먹었다는 의미.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해원기가 여덟 명에게서 피어오르는 기운을 가늠하며 검결을 짚는데.

앞으로 나아가려던 검극이 돌연 불끈 일어섰다.

슈와앙.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모를 매서운 경풍.

쨍!

귀청을 찢는 쇳소리와 함께 환상처럼 피어나는 빛무리.

나아가던 발을 멈춘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손목을 울리는 무거운 충격. 예사로운 공격이 아니었고, 매서운 경풍을 몰고 날아든 것은 바로.

‘검강지기?’

완벽하게 강상을 이룬 대단한 일검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요?”

맑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뒤를 이으면서 공중으로부터 한 사람이 장중에 내려선다.

금실로 수놓인 비어복에 높다란 모자를 썼고, 각진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뻣뻣한 수염이 밤송이처럼 뻗쳐서 위맹해 보이는 인상인데. 한 손에 비껴든 장검에서 흘리는 예기도 숨이 막힐 듯하다.

오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해원기의 시선이 똑바로 그 얼굴을 향했다.

굵은 눈썹을 찌푸린 채 주위를 둘러보는 인물은 차림새로 보아 금의위가 분명할 터. 그러나 지금까지 이렇게 엄청난 기세를 풍기는 금의위를 본 적은 없다.

이미 동창의 수족으로 전락한 금의위다. 기묘한 무공을 익히긴 했어도 기껏해야 졸개 노릇이나 하던 걸 숱하게 봐왔거늘.

돌연 등장한 이 인물은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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