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88화 (288/410)

제72장 유궁후예(有窮后羿) (4)

좁은 골짜기를 뒤덮어 감춰주었던 숲이 통째로 사라져서, 치솟던 흙먼지가 금방 흩어지는 바람에.

그 가운데 고검을 비스듬히 내린 해원기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가늘게 뜬 눈에서 흘러넘치는 비췻빛 신광.

일거에 쓰러뜨린 자들이 오십 명이 넘고, 태반이 부서진 병기와 함께 골짜기 양쪽 기슭에 처박혔지만.

해원기의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동창 무리는 어느새 십여 장이나 거리를 벌렸고, 앞에 나섰던 수보와 사마대가 등은 더 뒤로 빠진 광경.

밀각의 대부와 연갑의 무장들이 몇 겹으로 늘어서 단단하게 벽을 쌓았고,

그 앞으로 해원기가 가리켰던 둘이 좌우로 나뉘어 나온다.

단정하게 양손을 쳐드는 조양선사와 전신을 가린 검은 천이 하늘하늘 일어서는 암야무명.

절후석 위에서 군림검의 어검대법을 겪은 적이 있어선지.

둘한테서 전해지는 경옥신공과 영사태화의 기운이 전에 없이 강하다.

‘이 둘도 현신장일 터.’

조양선사의 장법과 암야무명이 검은 천으로 구현한 구렁이 같은 공격은 유래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요술사, 오온존자, 진여신승과 같은 현신장이라면.

‘역시 육악의 힘이겠지.’

알유, 대풍, 구영을 제외한 나머지 셋. 신령검역 안에서도 힘을 쓸 수 있는 능력들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해원기의 움직임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혼을 낸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기에.

비스듬히 내린 신왕검에서는 순백의 광채가 일렁이고,

내딛는 걸음마다 바람이 일며 우레가 담긴다.

태양처럼 빛나던 검이었다. 어검술인줄 알았더니 빛의 검강과 그림자의 경력까지 마음대로 드러내던 어검대법.

금궁오괴를 장난감처럼 굴려 자신들에게 집어 던졌잖나.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은 이미 내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이전과 달리 순백의 광채가 어린 검은 아직 어검대법으로 바뀌지 않았으니,

선제의 이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미리 묵계라도 맺은 듯, 조양선사가 두 발을 교차하며 한 손을 내밀자 암야무명이 바닥에 바짝 붙어 헤엄치듯 미끄러졌다.

우웅.

조양선사의 활짝 펴진 손바닥을 따라 울리는 공간.

손바닥이 부푸는 대신 누런 금빛이 손가락 끝에 맺히고 뭔지 모를 힘이 곧장 해원기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동시에 암야무명의 전신에서 무서운 속도로 풀려나오는 검은 천.

화라라라.

지면을 제멋대로 누비며 얽혀들기 시작했다. 암야무명의 본체가 어디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서.

위에서는 장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덮치고, 아래에는 검은 천이 늪처럼 퍼져가니.

어떻든 걸음을 멈추고 막아야 하는데.

해원기의 두 발은 오히려 더욱 사뿐하게 땅을 밟고,

신왕검이 고개를 들어 둥그런 원을 그린다. 위아래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러나 이 한 동작에.

퍼퍽.

조양선사의 장력이 엉뚱하게 공중으로 날리고, 암야무명의 검은 천은 진짜 늪에라도 빠진 것처럼 땅속으로 파묻혔다.

지밀의 풍뢰와 보병의 수정이 완전히 하나로 이어진 홍몽무변에는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도 이미 잔뜩 대비하고 나온 자들.

조양선사의 발끝이 확 안쪽으로 꺾였다.

“찻!”

거꾸로 뒤집혀 오른손 밑에 붙는 왼손. 금빛이 아닌 은빛이 맺혔고 기합과 함께 떨치는 열 손가락이 날카롭게 구부러든다.

파앗.

돌연 공간을 격하고 출현하는 괴이한 형상. 그건 거대한 호랑이의 입처럼 해원기의 머리를 삼키려 들고. 엄청난 이빨이 수많은 창날처럼 엇갈렸다.

더구나 땅속에 파묻힌 검은 천들이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해원기의 아랫도리로 몰려드는데. 이 또한 독니를 드러낸 거대한 뱀의 아가리 모양.

구현한 강기가 홍몽무변의 검세를 뛰어넘었다. 어검이든 검강이든 모조리 씹어 삼킬 듯한 흉악한 짐승의 아가리.

깜짝 놀랄 대응이었으나 해원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무리 빠른 구현이라도 현상이 심상(心象)보다 빠를 리 없다.

홍몽무변을 그린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고, 왼손이 중심을 잡으려는 듯이 아래로 떨어지며.

두 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돈다.

또 하나의 홍몽무변. 아니, 양손으로 검왕오형의 검림소연을 그리면서 저절로 양의상전이 이루어졌다.

퍼펑!

폭음과 함께 무서운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자,

양손을 이리저리 돌리는 조양선사는 두 걸음이나 밀려났고, 검은 천을 휘말아 형체를 드러낸 암야무명은 정신없이 전신을 흔들어댄다.

심의 자락이 크게 잘려나간 조양선사나 검은 천이 갈기갈기 찢겨 창백한 얼굴이 거의 드러난 암야무명 모두 충격에 질린 안색.

“호치낭아(虎齒狼牙)를 밀어내……?”

조양선사의 떨리는 입술이 중얼거리는 소리.

등장한 후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던 암야무명조차 놀란 음성을 토한다.

“암혼사동(暗魂蛇洞)이!”

둘 다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한 건 각각 자신을 가리키는 손끝을 의식했기 때문.

해원기가 두 손을 나누어 겨누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래, 착치(鑿齒)와 수사(修蛇). 어지간히 복잡하게 숨겼구나.”

굳이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상상지가 기어이 이 둘의 무공 내력을 환하게 읽어 내렸다.

착치는 끌과 송곳으로 이빨을 박아서 무엇이든 물어뜯어 버렸다는 반인반수의 괴물이요, 수사는 코끼리조차 한입에 집어삼켰다는 거대한 파사(巴蛇)의 이름이다.

전부 육악에 속하는 흉한 짐승.

강기를 구상화하기 전까지 단정할 수 없었던 건 그만큼 다양한 무공으로 교묘하게 감추어서였다.

‘경옥신공에 대라금선장(大羅金仙掌)과 현은수(玄銀手)면 전부 도가의 오묘한 절학. 영사태화에 암혼번(暗魂幡)을 전신에 걸치는 것만으로도 가공할 위력을 낳는다.’

조양선사의 두 손. 금빛은 대라금선장이고 은빛은 현은수라는 도가의 실전 절학이었다. 하나씩 따로 펼쳐도 방향과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일종의 무형장력(無形掌力)인데. 두 가지를 합해 호랑이의 쩍 벌어진 입을 구현했고.

암야무명의 전신을 가린 검은 천은 그 자체가 암혼번이라는 기괴한 물건. 강령(降靈)이니 섭심(攝心)이니 너절한 명칭이 항상 따라붙는 사도(邪道)의 보물이요, 접하는 이는 부지불식간에 어둠에 빠져 오감의 기능을 잃는다던데. 그걸로 뱀의 아가리를 만들었으니.

무형장력과 부지불식이라는 이치에 어긋난다.

아무리 선명한 강기의 구현이 응강성상(凝罡成象)의 놀라운 경지라도.

육악지력을 이렇게까지 숨긴 이유가 뭔지.

해원기가 얼핏 떠오르는 의혹을 지우고 양쪽으로 벌어진 두 손을 가운데로 당겼다.

마치 무거운 물건을 잡아끌 듯 잔뜩 힘을 준 동작. 공중에 높이 떠오른 신왕검이 빙그르르 돌아가고.

“으읏.”

조양선사가 신음을 토하며 황급히 자세를 바꾸었다. 붙였던 양손을 가슴과 배로 나누며 발을 크게 벌려 중심을 잡는 자세.

암야무명도 마찬가지. 충격을 풀어내느라 허물 벗는 뱀처럼 꿈틀거리던 전신을 배배 꼬아서 똬리를 틀려고 한다.

후우우우우.

공간이 갑자기 뒤집힌 듯. 사방으로 퍼지던 무서운 충격파가 도로 해원기에게 집중하면서 숨이 콱 막힌다.

‘퍼져나간 경력의 여파를, 풀어낸 힘줄기의 흔적까지 끌어당긴다고?’

급하게 교차하는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의 시선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하다.

말도 되지 않는 엄청난 힘.

게다가 저 공중에 떠서 저 혼자 돌아가는 검은 무엇인가.

폭음을 내며 서로의 힘이 맞부딪쳤었다. 그리고 각자 한 마디씩 입을 놀리기까지 했거늘.

그들은 자신이 여전히 검역 속에 처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가운데로 모이는 해원기의 양손.

오른손의 홍몽무변은 착치의 힘을 거두었고, 왼손의 홍몽무변은 수사의 힘을 움켜쥐었다.

도가의 무형장력을 구사하는 금은의 빛을 고삐로.

사도의 암혼번이 퍼뜨리는 어두운 기운을 올가미로.

이치에 어긋났으면 제자리로 돌려야 하는 법.

검림소연이 수주개와의 오의로 나아가면서 다시 역상정위를 품었다.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얹는 바른 순서. 그리고 역상정위는 사물의 외형으로 담긴 이치를 궁구하니.

양의상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심을 잡아 버티든, 똬리를 틀어 견디든.

착치의 이빨이 뱀을 찢을 것이요, 수사의 아가리가 괴물을 집어삼킬 것이다.

조양선사와 암야무명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깨달았는지.

“이얍!”

조양선사가 가슴과 배로 나누었던 두 손을 연달아 때려내고,

“끙.”

암야무명의 검은 천에서 짧은 막대가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쉭쉭.

공간을 일직선으로 가르는 매서운 장력은 날붙이를 휘두른 것 같고,

촤라라라라.

짧은 막대에 붙어 요동치는 검은 천은 들불이 번지는 것 같다.

기막히게 빠른 반응이었지만, 해원기의 양손은 이미 하나로 맞붙었다.

짝.

가벼운 박수. 그러나.

쾅!

“으윽.”

“컥.”

머리에 쓴 작은 관이 박살이 난 조양선사가 허리를 꺾었고, 짧은 막대가 부서진 암야무명이 왈칵 피를 토했다.

고작 손뼉 한 번에.

해원기가 숨을 고르며 발을 들었다.

아무도 주의하지 못했지만, 호치낭아와 암혼사동을 물리치면서 두 발이 한 치나 바닥에 박혔었다.

과연 육악지력. 착치의 흉악한 기운과 수사의 거대한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허나 삼전태의 깨달음을 얻은 일신의 검왕법신은 이미 내외강유(內外剛柔)가 자연스럽게 바뀌는 경지.

바람이 불면 구름이 일고, 구름이 일면 번개가 치며, 번개가 치면 비를 뿌린다.

풍운뇌우(風雲雷雨)가 거침없이 순환하면서.

상상지가 변화를 꿰뚫고, 대지체가 힘을 북돋우며, 심중덕이 쓰임을 결정한다.

사부가 해원기를 위해 창안한 검왕오형.

그 안의 오의는 바로 사부가 이룬 필생의 심득.

따로 의식할 필요가 없다. 어떤 검법을 쓰더라도, 심지어 천손검법을 펼칠 때도 당연한 듯이 검왕오형의 오의가 담긴다.

이렇게나 자유롭고. 이렇게나 자연스럽다니.

신령검역 안에서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를 일러,

‘자재검도(自在劍道).’

마침내 사부가 전한 모든 걸 얻었나.

가슴 한쪽이 뭉클해져선지 해원기의 합장하듯 붙은 손이 흥을 내며 떨어졌다.

쨍!

공중에서 돌아가던 신왕검이 어느 순간 전면을 가리면서.

형해도를 머금은 오절신도를 퉁겨내고.

춤추듯 펼친 두 팔이 박자를 타고 흔들렸다.

퍼퍼퍼펑.

십 장 거리의 지면이 폭죽을 박아 넣은 것처럼 일제히 터지면서 금궁오괴와 첨유진의 좌우 호장이 비틀거린다.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이 밀리자마자 끼어들었겠지만,

신령검역을 범하는 어떤 기미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무표정했던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내디디려던 발이 신중하게 지면을 밟았다.

동창의 남은 인원은 대략 백 명.

무질서하게 뒤섞였던 자들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대부와 무장 차림이 고르게 늘어서서 반원을 이루었고.

그 뒤로 밀각의 학사 셋, 또 상선태군과 직전고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리를 잡았다.

맨 뒤에는 첨유진과 팽조린을 거느린 수보가 왼편, 붕대를 감은 국감을 주위에 세운 사마대가가 오른편.

싸우는 동안 몰래 진형을 갖추었나.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이 골짜기 전체에 은근히 퍼지고 있다.

절령제십팔(節令第十八) 상강(霜降)

상강은 가을의 끝. 겨울로 넘어가는 과도의 표지이다.

상강이 되면 ‘만물필성(萬物畢成), 필입우술(畢入于戌)’. 즉 모든 사물이 그 성장을 마쳐서, 성장을 마친 사물은 술(戌)로 들어간다. 술이란 무엇인가. 술은 곧 멸(滅)이라, 만물의 생기가 쇠멸하여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이때에는 양기가 지하로 들어가고 음기가 뭉치기 시작하여 날씨가 차츰 추워진다.

흔히 상강을 서리가 내린다고 잘못 이해하는데 상강은 결코 강상(降霜)이 아니다. 여름의 이슬이든 겨울의 서리든 어차피 땅에서 생겨난 것이니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고로, 상(霜)은 이미 서리가 내렸다는 의미요, 강(降)은 그 때문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는 뜻일 터.

낮과 밤의 온도 차가 가장 극심한 것도 이때이다.

승냥이가 먹이를 모아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초목은 누렇게 물들어 떨어지며, 벌레는 기어들어 겨울잠에 들어선다.

사람도 추수를 끝내 비로소 고된 농사가 한 단락을 지었으니. 술잔을 들고 국화를 감상하거나, 높은 곳에 올라 가슴을 트이게 하고. 쇠고기를 삶고 오리를 잡아 몸을 따뜻하게 하며. 때로는 달콤한 홍시 하나를 느긋하게 즐긴다.

다 다가올 겨울을 대비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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