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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287화 (287/410)

제72장 유궁후예(有窮后羿) (3)

이렇게 호언장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답답할 정도였고, 그나마 무공을 발휘할 때나 좀 빠릿빠릿한 편.

그런 해원기가 이렇게 대담한 표현이라니.

밀각육학사에서 수보를 포함한 넷, 각주인 첨유진과 하북팽가의 팽조린이 나타났다고 했고. 이들이 끌고 온 수하가 백여 명이라던데.

혼낸다고. 혼자서.

낯설어서 다시 한번 쳐다보는 오소민에게.

해원기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겁을 먹지 않으면 두고두고 귀찮게 할 작자들이잖아. 앞으로 곤란하다고.”

오소민의 동그랗게 떴던 눈이 깜빡.

낙양에서부터 왜 여기까지 왔던가. 북향하는 이유가 비로소 떠올랐다.

동창의 내막을 파악하는 게 목적, 그걸 위해 동창에 잠입한 정록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는다.

이런 식으로 계속 쫓겨 다니다간 앞으로의 행로에 지장이 있을 터.

아직 해원기와 자세한 얘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영민한 그녀가 말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그래도.

머뭇거리는 걸음.

마침 엽산초부가 책군을 둘러업고 다가왔다.

“오래전에 뚫은 토굴이라 어찌 되었을지 모릅니다. 서두릅시다.”

굴이 막혔을 경우도 상정해야 한다. 이제 막 인사를 나눈 사이지만, 남장여자에는 익숙한 편이라선지 서슴없이 재촉하는 말에.

오소민이 겨우 입을 놀렸다.

“아, 그럼. 다시 모이는 곳은 어디로?”

“제대로 토굴을 나서면 자산(磁山) 부근. 배회촌(徘徊村)이란 마을로 가겠습니다.”

이 좁은 동천의 기묘한 석옥. 전부 엽산초부가 안내한 곳이니, 토굴의 끝이 어디로 통하는지도 당연히 알 터.

해원기에게 내용이 충분히 전달된 걸 확인하고서야,

오소민이 엽산초부를 도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하게.”

염려의 한 마디를 건네고.

두 사람이 토굴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해원기가 상공을 올려다보며 성큼 밖으로 나섰다.

[아저씨와 오 형을 지켜봐 줘.]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동강이라서 한 번쯤 불러 내리고도 싶었으나, 엽산초부에게 인사시킬 여유도 없이 부탁부터 해야 했다.

스윽.

어느새 십여 장 높이까지 내려온 동강이 날개를 활짝 펴고 빙글빙글 공중을 선회한다.

건방지고 불평투성이인 녀석이 웬일로 아무 소리 없이 따라주는 건,

상황이 긴박한 걸 아는 듯.

해원기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일각 정도 지났을까.

과연 좁은 골짜기 안으로 눈에 익은 인영들이 새까맣게 밀려들었다.

왼쪽 앞에는 사마대가를 중심으로 상선태군과 직전고사, 그 뒤로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자들이 오십 명 정도. 개중에 붕대를 칭칭 감은 자들 몇도 끼었다.

오른쪽은 수보를 위시해서 학사들과 첨유진, 조양선사, 암야무명 등. 새로이 헐렁한 피풍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다섯은 금궁오괴일 테고, 밀각의 대부와 연갑을 걸친 무장들이 그 뒤로 꾸역꾸역 모습을 보인다.

백오십.

이 좁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서,

바위 더미가 쌓여 이룬 석옥 앞으로.

십 장도 되지 않을 거리.

워낙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바람에 오른쪽 왼쪽의 구분도 없이 뒤엉켰고,

자연스레 앞에 서게 된 수보와 사마대가의 일그러진 시선이 교차했다.

“공공들께서는 좀 늦으실 줄 알았더니. 어흠.”

골짜기 앞에서 마주쳤었나. 수보가 헛기침으로 인사를 대신하자 사마대가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허허, 대학사의 명인데 어찌 게으름을 피우겠소. 어쩐지 들러리가 된 듯해서 무안하던 판이라. 그런데 누가 잡혀갔다던데?”

억지웃음이 분명하다. 건네는 말에는 은근히 가시가 돋쳤으니까.

수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돌린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오직 제독대인을 위해 진력할 뿐이지요. 음, 중간에 일이 이상하게 뒤틀려서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고. 그 때문인지 제독대인께서 근시(近侍)를 급파하셨던 모양인데. 허, 이게 전부 저 더벅머리 젊은 놈 하나 때문이니. 쯧쯧.”

일단 해원기를 발견해서 조금 마음이 놓였을까.

대충 설명을 얼버무리며 혀를 차는 모습에, 사마대가 역시 눈길을 해원기에게 향했다.

가슴속엔 불만이 한가득하지만,

우선은 눈앞의 대적을 상대하는 게 우선.

밀각 수보가 운해신조경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쯤은 이미 알 수 있었고, 그 또한 몰래 도모했던 야점의 일이 헛수고가 되었잖은가.

“흐흥, 절세검왕이라지. 얼마 전에 밀각에서 제일대적으로 올렸다던데. 저놈이 또 도지태사와 상의신모까지 해쳤다 하오. 당장 잡아 꿇려서 물고를 내야지, 대학사.”

사마대가의 음성이 노기를 품지만,

수보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저도 그 흉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 분 말고도 국감을 맡으신 세 분까지 큰 곤욕을 치르셨다고. 몇 분이나 오시는지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예기치 못한 불상사는 미리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마중을 그저 반룡령에게 맡겨놓는 실수를 범했지요. 많은 분이 이렇게 열의를 보이실 줄은. 어흠, 그러면 따로 준비하셨다는 걸 이쯤에서 보여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은허의 변화쯤은 그냥 짓밟을 수 있다고 하셨던.”

경어체를 알뜰히 구사하면서도 대뜸 나설 생각은 없는 듯.

묘하게 얽어 들어간다.

사마대가의 미간에 확 주름이 잡혔다.

한쪽은 밀각육학사의 우두머리, 다른 한쪽은 이십사아문의 하나를 맡은 태감.

말투를 보면 태감 쪽이 지위가 높은 것 같은데.

사마대가의 바로 뒤에 선 직전고사가 대뜸 머리를 들이밀었다.

“에엥? 이건 뭔 소리야? 지금이 그런 걸 따질 땐가. 아니, 제독을 들먹이면서 우릴 우습게 보는.”

성질 급한 직전고사라 나오는 말도 험하고. 그런 직전고사를 제지하는 상선태군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가만히 있어. 대가가 말씀하시는 중에. 그나저나 별별 것들을 다 끌고 왔으면서도 겁이 난다는 걸까? 어차피 온갖 무력을 다 틀어쥔 주제에.”

직전고사를 말리는 척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나불나불.

평소 같으면 점잖게 꾸짖을 사마대가가 가볍게 고개만 젓는다.

“이런, 이런. 대학사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구먼. 뭐,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지. 수족이든 주구든 강호를 다루는 일은 전부 밀각에서 맡으니까. 절세검왕도 결국은 강호에 속하지 않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지만,

다 수보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요,

따로 준비한 게 무엇이든 지금은 수보 쪽에서 알아서 하라는 투다.

동창의 밀각이란 게 본래 강호를 목표로 한 조직이었던가. 그렇다면 이십사아문은 강호가 아닌 다른 부분, 즉 대내라는 의미.

수보의 눈썹이 꿈틀했다.

“허, 이건 또 어인 말씀? 성조에 힘쓰는데 어찌 강호와 대내의 구분이 있을지. 똑같이 제독대인의 분부를 받들 뿐인 걸요. 다만, 이번 일의 책임 소재가 저한테 있는지라.”

지휘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거다.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가볍게 떨쳐 허리춤을 짚는 자세에도 은근히 위엄을 담아서.

모른척하려던 사마대가의 얼굴이 누가 잡아끄는 것처럼 천천히 옆으로 돌아가려는데.

“그쯤 하지. 보기 흉하군.”

불쑥 낭랑한 음성이 끼어들어서,

도로 바위 더미 앞의 해원기를 바라보아야 했다.

해원기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백오십이 넘는 인원이 빡빡하게 골짜기를 채웠건만.

겁을 먹거나 긴장하긴커녕, 되레 한심스럽게 둘러보는 시선.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나에게는 좋은 얘기긴 한데. 그래도 소위 윗자리라는 작자들이 수하들 앞에서 서로 팔밀이나 하는 꼴은 참 딱하다.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 줘야지.”

하찮은 풀이나 돌멩이 보듯 한다.

웬만하면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수보와 사마대가의 대화를 통해서 동창의 내부에 모종의 알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아울러 이렇게 시간을 끌면 엽산초부와 오소민이 피신하기엔 더 좋은 상황이 된다.

그러나 더는 참기 어렵다.

와르르 밀려 들어와 저렇게 주둥이만 놀려대는 건 상대가 혼자라서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을 품었기 때문인가.

어떻든 참으로 바보스럽고 무례한 언행이다.

설사 무력에 의지해야 할 상황이라도 그에 걸맞은 예의와 절도가 있는 법.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해원기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뭣하면 내가 순서를 정해주마. 흠, 대내의 환관 따위는 별 관심 없고, 학사랍시고 잔머리만 굴리는 작자들도 구미엔 맞지 않아. 그래, 내가 강호인이니 그래도 강호 물 좀 먹은 것들이 낫겠다. 너희 둘부터 시작하자.”

손가락이 향한 곳은 첨유진의 옆.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의 둘이었고.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 내딛는 걸음. 백오십은 아예 눈에 두지도 않고 곧장 둘에게 다가갈 참이다.

뜻밖이었나.

열심히 입을 놀려대던 수보와 사마대가가 멍하니 대응도 하지 못한다.

그러든 말든.

휘적휘적 나아가는 해원기에게서 무형의 기세가 아득하게 일어나고,

입이 굳어버린 수보와 사마대가뿐 아니라 둘의 주변에 있는 자들까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옴츠러든다.

그건 마치 밀어닥치는 거창한 바람에 숨을 죽이고 엎드리는 본능이랄까.

마치 천에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골짜기 전체로 퍼져나가니.

바로 검왕의 위풍(威風)이다.

뜻밖의 자극은 격렬한 반동을 낳는다.

“각주!”

“쳐랏!”

첨유진을 부르는 수보의 고함과 뒤를 돌아보며 외치는 사마대가의 고함이 동시에 터지고,

퍼뜩 정신을 차린 자들이 와르르 몸을 날렸다.

대부 차림이 열, 연갑을 걸친 무장이 스물, 팔국에 속한 다양한 차림새가 또 수십 명.

마치 거친 파도가 연달아 밀려들 듯, 아니, 아예 해일이 일 듯.

골짜기 위를 뒤덮은 나뭇가지를 부수면서까지.

해원기 하나쯤은 단숨에 깔아뭉갤 기세.

그러나 해원기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어리석은.”

안타까이 중얼거리는 말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고,

번쩍.

찬란한 백광이 번개 치듯 솟구쳤다.

절로 검집에서 뽑힌 신왕검이 곧장 빛으로 폭발했는가.

해원기를 중심으로 팔방으로 뻗는 무수한 번갯불은 전부 양손 열 손가락에서 비롯되었다.

오른손 엄지는 해운파랑, 검지는 단홍검, 중지는 수미전단, 무명지는 기수검봉, 소지는 복룡검식.

오악검법이 일시에 어울리는 건 이른바 산신검진(山神劍陣)이요.

왼손 엄지는 섬전, 검지는 추풍, 중지는 탈백, 무명지는 붕악, 소지는 음마검이니.

절세오검이 한꺼번에 떨쳐야 비로소 비천경혼(飛天驚魂)이다.

오악검법과 절세오검을 동시에 펼치는 바탕은 전진에서 유래한 십절경화도해, 열 가지 검법을 한데 엮어내는 운용은 검왕오형의 재단경위.

더구나 오행제림의 오른손 산신검진에는 팔풍결이, 오귀전륜의 왼손 비천경혼에는 뇌정결이 담겨서 검왕오형의 역상정위까지 덧붙었다.

걸음을 내디디는 순간부터 신령검역은 자연스레 이루어졌고,

그 검역 안에서 산신이 비천하고 검진은 경혼한다.

무수한 번갯불로 화한 가공할 검기. 아니, 그건 이미 검기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전부 신왕검. 그야말로 수백 자루의 신왕검형(神王劍形)이었다.

콰쾅!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골짜기가 통째로 뒤집혀서 땅거죽이 박살이 난 나무를 휘감아 까마득히 치솟았다.

부서진 병기와 날리는 핏물, 합창처럼 울린 비명과 신음 따위는 아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거친 파도? 해일? 뭔 소용이 있을까. 바다를 아예 거꾸로 엎어버렸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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