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장 유궁후예(有窮后羿) (2)
천외육가.
강호의 정기를 수호하려고 아득한 과거부터 존재해왔다는 여섯 집안.
그 근원은 상고신화에 나오는 풍백, 운사, 우사였다.
풍백은 지혜를, 운사는 덕을, 우사는 신체를.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간곡히 전하고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진리를 알리고자 가르침의 한 자락을 맡았는데.
세상은 갈수록 번성하고, 사람은 갈수록 많아졌다.
이에 풍백의 후대인 지밀이 셋을 내외로 나누어 육합을 아우르고자 했고.
그래서 셋이 여섯이 되었다.
지밀경 풍뢰동, 천금가 천응령, 신기역 보병요가 내삼가,
고귀향 대관원, 염부주 해중천, 무진장 적성문이 외삼가.
더 커진 세상을 지키려는 뜻이었지만.
집안이 나뉘고 세월이 흐르자 본래의 의미를 차츰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킨다는 생각.
그 생각이 남보다 위에 있으려 했고, 힘이 필요해졌으니.
태초에 맡았던 진리의 전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사람으로서 사람과 어울려야 할 여섯 집안이 하늘 밖에 있게 되었다.
그래도 풍뢰동은 화(化)를, 대관원은 변(變)을 따랐고. 보병요는 본(本)을, 적성문은 말(末)을 지켜서.
변화를 궁구하여 이치를 밝히는 지혜, 바탕을 다져서 결과를 얻는 신체는 그나마 세상에 널리 전해졌으나.
덕은 그저 해중천에 부부의 사랑으로만 남았다.
천하를 전부 지키겠다는 천응령의 대덕(大德)은 도리어 패도(霸道)로 흘렀더라.
아니, 어찌 천응령만 그랬겠는가.
무도(武道)가 인도(人道)임을 잊고 그저 강호무림에만 국한된 일개 문파로 전락한 바에야.
무에만 기울어 힘에만 집착하면,
사람이 사람인 소이를 잊는 법.
위대한 천외육가가 세상의 풍파에 물들어 사라짐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삐잇.
주위가 안전하다는 뜻. 동강의 울음에 해원기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엽산초부를 보았다.
“괜찮답니다. 그나저나 용케 이런 곳이 있군요.”
해원기를 따라 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엽산초부가 히죽 웃었다.
“얘기는 들었지만, 저놈 정말 영물이 되었습니다그려. 아, 뭐 대단한 게 아니라. 녹림 본색이죠. 훌륭한 산적은 언제나 피신할 장소를 미리 봐두어야…… 허허.”
운해신조경을 빠져나온 곳은 은허의 북쪽.
남쪽에서 물길을 건너 올라갔을 때처럼 엄청난 갈대가 사방을 뒤덮어서, 처음에는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동강이 찾아온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수보와 세 학사를 비롯한 동창의 많은 인마는 여전히 은허의 동쪽 구석에 몰려있었고,
그 틈을 타서 조용히 물러날 길을 찾았다.
지리를 잘 아는 엽산초부의 안내로 반 시진 정도 이동하자, 묘한 모양의 골짜기 하나가 시작되었는데.
겉으로는 숲이 우거진 완만한 언덕으로 보이면서, 속에는 상당히 복잡하게 얽힌 좁은 동천(洞天).
더구나 바위가 얼기설기 쌓인 안쪽에는 마치 가산(假山)의 내부처럼 몇 개의 숨은 방까지 있으니.
돌로 지은 석옥(石屋) 한 채나 다름없다.
엽산초부의 말대로 제대로 길을 찾아 들어오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는 피난처.
한쪽 방에 혼절한 책군을 밀어 넣고, 이제야 숨을 돌리는 판이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로 빠져나왔는지……?”
궁금해하는 엽산초부.
마지막에 예의 영령이 출현한 걸 전혀 알지 못한다.
해원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외육가의 한 집안이 또 사라진 걸 자세히 설명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앞에 있는 엽산초부 또한 쇠망한 대관원의 호원가신 출신이잖나.
“천응령의 마지막 안배였겠지요. 대관표기를 알아보는 천외육가의 다른 집안을 보호하려는.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온 셈입니다. 그나저나, 아저씨는 괜찮습니까?”
대강 뭉뚱그리고. 엽산초부의 내상부터 살피자.
굳이 캐물을 필요가 없다는 눈치쯤은 이미 지닌 엽산초부. 얼른 화제를 돌렸고,
“아. 저야 뭐. 해 공자는 어떠신지? 음, 오 소저가 먼저로군요.”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엽산초부 자신은 이미 백초환을 복용했고, 이제 약효를 돌릴 시간만 있으면 될 일.
사실은 거듭 격전을 치른 해원기가 가장 피로할 테지만, 오소민이 우선이다.
바로 몸을 일으켰다.
“책군이란 놈도 지켜봐야겠고. 제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노련하게 자리를 피해준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곤 구석에 눕힌 오소민을 향했고,
요대자에서 보명오석과 또 한 가지를 꺼내었다.
지독한 음기에 침습당한 오소민을 회복시킬 방법을 이제는 짐작할 수 있었기에.
금오혈석, 아니, 구양금오를 보명오석에 덧붙인다.
호법을 선 건 겨우 일각이나 되었을까.
자리를 피하자마자 도로 불려온 셈인 엽산초부가 오소민과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얼른 조식에 들어갔다.
오소민이 정신을 차렸으니 빨리 백초환의 약효로 내상을 회복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해원기가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빨리 회복시켰는지, 오소민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궁금하긴 마찬가지지만, 괜히 중간에 끼어들 만큼 둔하진 않다.
딱 봐도 그냥 친구 사이일 리 없잖나.
오소민이 그런 엽산초부를 보다가 시선을 방금 건네받은 하화로 돌렸다.
“후, 이게 목적이었단 거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뻔한 유인에 당했고.”
막 지난 얘기를 시작한 참.
영민한 오소민이라 경과를 되짚으면서 담긴 의도를 찾아낸다.
“어떻게 된 건가?”
앞에 앉은 해원기가 머리를 조금 가까이하고,
되찾은 하화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던 오소민이 조금 움찔했다.
정신을 차리자 백초환을 입에 넣어주더니, 옷에 묻은 검불과 먼지를 떨어주고.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힌 후에 얘기를 시작했는데.
어쩐지 이전보다 훨씬 차분하고 부드러운 태도다.
알뜰하게 보살펴주는 건 알겠지만.
뭔가 달라진 느낌.
해원기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정신을 잃은 동안 뭐가 벌어졌는지 알고 싶은 건 오소민도 마찬가지.
얘기를 서두른다.
조화부인을 뒤쫓은 오소민.
처음에는 안양성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성벽을 타고 북쪽으로 방향을 꺾더니.
숲에 들어가자 금방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일종의 미진(迷陣)이 펼쳐졌다고 직감한 오소민이 하화의 보패지력을 써서 길을 찾으려 하자,
갑자기 나타난 자들.
넷인지 다섯인지 헤아릴 새도 없이 지면에서 시커먼 불길이 치솟았고, 불길을 피하다가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게 기억의 끝.
간결하게 설명을 마친 오소민이 머리를 저었다.
“말이 안 돼. 그런 숲에 불을 질렀다간 크게 번진다고. 미쳤다고 여겼지. 더구나 내가 하화를 지녔는데도 어지러워졌으니. 흥.”
이제는 이유를 알았다는 듯 코웃음이 붙고.
“진짜 불이 아니었을 거야. 내가 당한 해괴한 독도 그래.”
미간을 잔뜩 찡그린 얼굴을 든다.
이전에도 중독되어 해원기의 도움을 받았다. 그 바람에 여자란 게 들통났고.
이번에도 똑같은 꼴이 되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보다 이유를 따지는 게 중요하다.
해원기가 짧게 혀를 찼다.
“쯧, 오대마도에 대한 조화부인의 조예가 심상치 않군. 그 불길은 아마도 곤혹도에 속하는 지심마화(地心魔火)였을 걸세. 처음부터 하화를 목적으로 자네를 유인했고, 이전에 일어난 일을 참고해 독을 준비했다…… 이렇게 봐야 할까.”
화청궁에서 독에 당했던 일.
“그런데 오온존자는 보이지 않았다면서?”
“음, 그때와 비슷한데 조금 달라. 이번엔 지독한 음기, 실제로 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떤 성질이든 지나치게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라지만. 에, 그래서…….”
해원기가 머뭇거리며 말을 흐렸고,
귀를 기울이던 오소민이 눈을 깜빡였다.
대화가 잘 나가다가 왜 이러나.
“왜?”
해원기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경맥이 굳어서 바로 숨이 끊어졌어야 할 자네가, 실은, 여자란 걸 알았을 걸세. 그러니까 조화부인이 직접 하화를 들었을 테지.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야.”
내부를 단숨에 얼어붙게 할 지독한 음기다.
극독과 다름없는 이 지독한 음기에 당하고도 오소민은 계속 숨이 붙어 있었으니.
조화부인이 원인을 확인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해원기가 머뭇거렸던 이유를 안 오소민이 코를 찡긋거리다가,
“하화는 본래 유일하게 여자만이 쓸 수 있는 보패니까. 제대로 운용되는지 보험이 필요했겠지. 완전히 노리개 취급이었네, 이런 젠장!”
입이 거칠어진다.
혼절한 오소민을 끌고 다녔던 까닭. 운해신조경을 파해하는 데에 보패가 충분히 도움이 되는지, 혹시 주인인 오소민이 필요할지 몰라서였다는 거다.
어지간히 만만하게 여겨졌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오소민이 하화를 품에 넣고 당장 일어날 기세.
“한 놈 잡아 왔다며? 그놈 어디 있어? 조화부인이라는 그 계집이 어디로 튀었는지부터 알아보자고.”
얘기를 마치는 것보다 분을 풀려는 마음이 앞서는 듯.
해원기가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자, 자.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걸 알면서 그러나. 아직 자네와 나눌 얘기가 많아. 엽산초부 아저씨 덕에 이런 곳을 찾긴 했지만, 밖에는 동창의 무리가 우글거리지. 그들 안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적지 않단 말일세. 어쩐지 관도의 야점에서 조화부인을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되도록 꾸민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고. 유인당한 사람은 자네 혼자만이 아니라…….”
성질대로 대뜸 나설 상황이 아니다.
오소민이 모를 리 없건만. 얼른 입을 놀려 말려보는데.
못 이기는 척 앉으려던 오소민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잠깐! 책군이라는 그놈, 몸수색했어?”
목소리가 고함치듯 크다.
조식으로 약효를 돌리던 엽산초부가 깜짝 놀라 눈을 뜰 정도.
어정쩡하게 끌려 일어난 모습이 된 해원기가 영문을 몰라서,
“왜…….”
반문하려다가 곧장 몸을 뒤집었다.
오소민이 별안간 왜 고함을 쳤는지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앞뒤 따질 새 없이 책군을 처박아놓은 쪽으로 몸을 날렸다.
멍청했다.
장안에서 첨유진의 체신을 생포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더구나 이제는 조양신문이 동창의 수하임도 알고 있으면서.
조양신문의 신패와 같은 물건. 서로 감응하는 술법이 걸려 있어 위치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책군은 밀각에 속한 것 같지 않지만, 어차피 동창. 비슷한 걸 지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과연.
책군에게 다가가기 전에,
삣.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동강의 미세한 경고음이 뇌리를 울리고,
해원기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신공을 끌어 올려 주의를 집중하자 빠르게 접근하는 기척이 어렴풋이 전해진다.
“아저씨?”
조식을 중지한 엽산초부가 금세 분위기를 읽었는지.
“예전에 작은 토굴을 뚫어놓은 적이 있긴 합니다만.”
상황이 어떤지 확실하지 않기에 우선 탈출로의 존재부터 알렸고.
해원기가 지체 없이 말을 받았다.
“아저씨는 책군을 끌고 그 토굴로. 오 형도 같이 가. 내가 시간을 벌지.”
‘혼자서?’
오소민이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엽산초부뿐 아니라 자신도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 자칫 해원기의 걸림돌이 된다. 무사히 토굴로 빠져나가려면 상대를 붙잡아둘 역할이 필요하다.
훤히 알지만, 속이 상해서 볼이 부어올랐다.
엽산초부 또한 어쩔 줄 모르는 눈친데. 해원기의 이어지는 말에 오소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아예 혼을 내도록 하지.”
시간을 버는 게 아니라 혼을 낸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