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85화 (285/410)

제72장 유궁후예(有窮后羿) (1)

백여 년 전의 천하제일인.

당나라가 멸망한 후의 오대십국(五代十國), 다시 천하를 통일한 송나라도 요(遼)와 금(金)에 시달려 남쪽으로 밀려났고, 원(元)이 중원을 차지할 때까지는 전란이 그치지 않은 난세였다.

중원의 사슴을 누가 차지하든지 세상이 어지러우면 가장 고통받는 이는 백성.

전쟁에 끌려가 헛되이 목숨을 잃는 것만이 아니다. 길을 떠나면 사방에 도적이요, 숨죽이며 지내려 해도 온갖 사기꾼이 달려드니.

당시에 강호가 전부 의지했던 거인이 바로 대응왕 고자헌.

오대십국에서 암약했던 무수한 도적 떼, 남송에서 혹세무민했던 영광교, 원에서 포악을 부렸던 철기와 요승들이 모조리 그의 손에 무너졌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더 어지럽혀 마침내 마종의 본맥을 깨웠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그토록 장구한 세월을 독존(獨尊)한 일이, 그의 사후 백여 년간 벽세와 지부에 의해 무림이 참혹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하나의 배경이 되었지만.

사부에게 숨겨진 내막을 전부 들은 해원기가 아니고서야 누가 알 것이며,

세상을 더 어지럽혀 마종의 본맥을 깨운 이도 사실은 다른 사람.

대응왕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은 지나친 질책이요, 더구나 그 자신 마지막엔 후대를 위한 안배를 잊지 않았잖은가.

그러나.

구구절절 지난 사연을 나눌 때가 아니었다.

해원기에게 심어를 전하는 상대는 어차피 잔령(殘靈). 애달픈 집착에 얽매인 망념의 한 조각일 뿐이다.

해원기가 떠올리는 생각을 고스란히 읽어낼 텐데,

화제가 다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풍백(風伯)의 전승이 세상 밖에 처하고, 우사(雨師)가 세상 속으로 가라앉을 때도. 맹금은 타고난 부리와 발톱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대우(大禹)의 선양(禪讓)을 무시하고 그 아들 계(啓)가 힘으로 백익(伯益)을 몰아냈을 때부터 원망을 품었던 것이죠. 백익은 바로 우리 일족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기어이 하(夏)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전렵(畋獵)의 쾌락에 빠뜨려서.

선양은 덕 있는 이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 요순(堯舜)에서 우(禹)로 이어졌던 이 관습을 부자상속으로 처음 바꾼 이가 계다.

그 하나라를 전렵, 즉 사냥에 몰두하게 해서 무너뜨리려 했다면.

-네. 후예(后羿)가 바로 이 천응령 출신이지요. 그뿐 아니라 나중에 후예를 죽이고 자립한 한착(寒浞) 역시. 그래서 고향을 유궁국(有窮國)이라고 했던 겁니다. 원망을 갚는답시고 천하를 빼앗으려 했으니 어찌 감히 무궁(無窮)이란 두 글자를 쓸 수 있었겠습니까.

해원기가 눈을 크게 떴다.

하대(夏代)의 여섯 번째 군주며 명궁(名弓)이었던 유궁후예(有窮后羿). 사냥에 미친 태강(太康)을 몰아내고 중강(仲康)을 괴뢰로 내세웠다가, 중강이 죽은 후에는 그 아들 상(相)을 내쫓고 마침내 임금이 되었다. 그런 그도 임금이 된 후에는 태강과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제자인 한착에게 피살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역사.

실은 이 천금가 천응령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였고,

어쩐지 천외육가의 다른 다섯 집안과는 판이한 성격이었다.

-맞습니다. 천외라는 모자를 같이 썼으나 못난 맹금은 타고난 본성을 버리지 못했답니다. 후예와 한착 이후로 세상에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도록 봉금(封禁)까지 했음에도. 역정(歷正)의 자리에 후예가 썼던 제천신궁을 남겨 두고두고 경계로 삼았음에도.

놀랐던 해원기의 눈매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이공자가 들었던 제천신궁. 나중에 조화부인이 빼앗은 그 활이 진정 후예의 것이란다.

신화는 아닐지언정 전설로는 후예가 세상에 다시 없을 명궁이었다고 했고, 그런 그가 사용한 활이 평범한 물건일 리 없다.

-제천이라. 그 한심한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 경고임을 잊었더랍니다. 자헌이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지만, 이미 후회막급. 죄책감에 천금의 시렁을 전부 부순 것도 한낱 치졸한 광기였기에. 마지막으로 선조의 영령께 빌었습니다. 어떻게든 만회할 한 가닥 실마리를 내려주십사.

천외육가에서 나온 후예가 자신의 활에 제천이란 이름을 붙인 건 참으로 오만방자한 노릇. 세상의 흐름에 물들면서 이미 천외의 본분을 잊었다는 뜻이다.

그 활을 봉황의 자리에 두어 대대로 경계했건만, 지금 심어를 건네는 장본인은 또 고자헌을 길러 대응왕을 만들어낸 셈이니.

호리지실(毫釐之失), 천리지차(千里之差).

아무리 좋은 뜻으로, 아무리 바른 행실로 시작했다고 해도 인위의 강제는 결국 세상의 흐름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법.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자책과 실망이 스스로 망가뜨리는 광기를 불러왔으리.

그래도 어떻게든 만회하고자. 빌고 또 빌었구나. 목숨을 걸고.

해원기의 마음이 우울해졌다.

이전에 고력사의 무덤에서 신기역 보병요의 마지막을 보았을 때보다 더.

천금가 천응령의 최후는 너무나 참담하다.

-감히 천손을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고, 자부(紫府)는 볼 낯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백산(白山)에 기댈 용기도 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우사인 신기역(神奇域)의 마지막 후손이 서천(西天)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고 그 보답으로 일러준 외삼가(外三家)의 위치. 그게 도움이 될 줄이야.

우사의 일맥인 무진장(無盡藏)이 점을 쳐주었고, 풍백의 일맥인 고귀향(高貴鄕)이 대관표기를 가르쳐주었으며, 같은 운사의 일맥인 해중천(海中天)이 이 폐허를 환경(幻境)으로 가려주었습니다.

내삼가(內三家)의 하나가 이리도 구차한 최후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낸 것은 오직 선조의 영령이 내려주신 계시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었기 때문이지요.

“기다려라. 언젠가 천손의 굴레를 벗으신 이가 버려진 덕을 다시 찾아줄 터이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구하고자 스스로 천손의 자리에서 내려오신 운사, 이 천금가 천응령을 처음으로 여신 선조 예(羿)께서는.

쿵.

해원기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잔령의 심어가 마지막에 거론한 이름.

이 천금가 천응령을 처음으로 연 운사가 예일 줄이야. 더욱이 예가 본래 천손이었다가 스스로 운사가 되었다고.

‘천손의 굴레를 벗은 이.’

사부는 자신에게 묵(墨)이란 성을 주지 않았다. 고죽의 천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라고.

과연 이 잔령이 기다린 사람이 자신이었을까.

천외육가가 내삼가와 외삼가로 나누어 불렸다는 것도, 신기역 보병요의 마지막 후손 이백에게 길을 알려준 이가 이 잔령이란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청강지주에서 비롯된 기연. 지밀경 풍뢰동을 찾아냈고, 신기역 보병요의 마지막 수정지기를 흡수했으며, 이렇게 천금가 천응령의 폐허에 이르렀으나.

대체 이걸 기연, 혹은 운명이라고 여겨야 하나.

더구나 무엇으로 버려진 덕을 다시 찾아준단 말인가.

충격이 지나가면서 망연히 서 있을 뿐.

이 홀로 남은 밤하늘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기척이 사라진 이들은 괜찮을지.

운해신조경이란 환경을 완전히 벗어나면 혹시 동창의 무리와 또 마주치는 건 아닐지.

생각할 일은 태산 같은데,

잔령조차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더는 심어가 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웅.

불현듯 허리 어림에서 일어난 미약한 진동. 망연히 선 해원기를 일깨우듯, 잔령의 심어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전해진다.

운해신조경의 변화가 아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이 진동에 해원기가 급히 허리춤을 뒤졌고,

미세한 진동을 일으킨 물건이 무엇인지 알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요대자 안에서 꺼내 든 것은 바로 금오혈석.

파사삭.

종이로 만든 상자가 저절로 부서지면서 손바닥 위에 그 오리 알 같은 형상이 드러나는데.

전과 다르다.

희미하게 띠던 붉은빛 대신에 표면에 넘실거리는 기이한 무늬.

그건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며,

구름이 빠르게 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손이 떨릴 정도로 진동하면서 갖가지 무늬가 어지럽게 뒤섞이더니,

따뜻해지고, 서늘해지고, 뜨거워지고, 차가워지고.

분간하기 어렵게 반복을 거듭하면서 맨손으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

해원기가 본능적으로 신왕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전혀 다른 목소리가 홀연히 공간을 울린다.

「무(武)가 승(勝)함은 반갑지 않은 일. 그러나 대지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살길 없는 사람을 악한 금수가 해치는 바에야 어찌 가리겠는고.

힘써 가꾼 체력과 애써 익힌 지혜를 합하여 환란을 평정하니, 이를 신공(神功)이라 하더라.

가소롭구나!

신의 공적이 무엇이기에!

사람이 본디 하늘에서 내려와 서로 어울려 사는 존재라. 그저 받은 가르침을 잊지 않기만 하면 그만이거늘.

체력을 기르고, 지혜를 닦고, 덕을 베풀라.

하나라도 빠지면 전(全)이 아닐지니, 봉몽(逢蒙)의 무리가 깨닫지 못하는구나.

지밀(至密)이 내외로 육합(六合)을 아우르고, 신기(神奇)가 곳곳에 감로(甘露)를 전해도.

지혜에 빠지면 욕심이 지나칠 것이요, 힘에만 기울면 남을 짓밟으려 할 터.

이 셋이 끝내 사람을 수호할 본분을 잊는 근원이리라.」

짙은 구름이 깔린 밤하늘.

해원기 홀로 떠 있는 이 공간이 한꺼번에 말하는 듯 우렁찬 음성이라 귀가 먹먹해질 법도 하건만,

해원기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즉각 깨달았다.

예.

까맣게 타들어 가는 대지, 살길 없는 사람을 해치는 금수. 아홉 개의 태양을 떨어뜨리고 육악을 제압한 그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러면서 신화적 영웅의 제자로 그 기술을 이어받았음에도 시기심으로 사부를 해쳤다는 봉몽이 사실은 풍뢰동과 신기역의 제자와 함께 내삼가를 이어받은 셋 중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풍백의 제자가 지밀, 우사의 제자가 신기. 운사의 제자인 봉몽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천외육가가 성립된 근본에서 벗어났었다.

그 이유는 하나.

전(全)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원기의 머릿속에 저절로 신왕공의 구결이 스쳐 갔다.

‘신왕은 완인(完人)이니 셋으로 기르도다…….’

완인이 바로 전인(全人). 사람을 사람으로 기르는 셋은 지덕체(智德體).

사부에게 신왕공을 배운 이래로 이렇게 구결이 선명하게 새겨지기는 처음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해원기의 더벅머리가 마구 출렁이고,

맑고도 밝은 기운이 폭포수처럼 전신을 적시며,

어디선가 아득한 뇌성이 친다.

솨아아, 우르릉.

풍뢰가 자리한 상상지와 수정이 넘실대는 대지체가 완연히 이어지는데.

우렁찬 음성이 거듭 울렸다.

「차마 저버릴 수 없었도다. 타이르고 꾸짖어도 안 된다면 알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느니.

이에 육악을 봉인한 구양금오(九陽金烏)에 영원히 이 말을 남기노라.

너희가 천상(天上)의 지혜를 찾으려 해도 이 말을 들을 것이요,

너희가 동궁(彤弓)의 무력을 찾으려 해도 이 말을 들을 것이다.

덕이 있으면 운집(雲集)하고, 덕이 없으면 무산(霧散)하는 법.

셋(三)을 잇는 하나(丨)는 오로지 덕일 뿐, 사람(人)이 하나 된 셋(王)이어야 전(全)이로다.

천손이 따로 있더냐? 이를 행하는 백민(白民)이 전부 천손이거늘.

심지어 너희가 불사(不死)의 선약(仙藥)을 찾으려 해도 이 말을 들을 것이로다.

아끼고, 그리워하고, 좋아하여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덕이 없고,

사람이 사람을 지키는 것보다 더한 덕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을 내치는 것보다 더한 덕이 없느니라.

오호라, 세상이 다시 환란에 접어들 때야 이 말이 들릴지니.

무가 승함이 안타깝기만 하구나.」

스스스.

짙게 깔린 구름도, 별이 가물거리는 밤하늘도 어느새 사라졌고.

다시 양쪽에 책군의 목덜미와 엽산초부의 기척이 느껴졌다.

완전히 소실된 운해신조경. 사방에는 사람 키보다 더 자란 갈대가 무성해서 어디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데.

삐잇.

낯선 곳에 선 해원기가 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한 하늘에 맴도는 점 하나. 동강이 자신을 찾느라 어지간히 고생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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