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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284화 (284/410)

제71장 제천신궁(制天神弓) (4)

천지가 처음 나뉘면서 태어난 영험한 생명. 그렇게 천지와 함께한다고 일컬어진 열 개의 생명이 도로 천지로 되돌아가려나.

병풍의 배면(背面)은 어떤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 새까만 바탕이다.

제천신궁이 토한 무지막지한 빛을 끓어오르던 먹구름이 기다렸다는 듯이 휘감더니,

콰직.

먹구름은 어느새 수백 수천의 검형을 종횡으로 쌓았고. 그건 장생십경의 배면이 구현한 열 자루의 사신검, 더구나 검왕오형의 재단경위다.

무엇이든 꿰뚫을 강기의 화살이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버리면서.

틱.

“크윽!”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비틀대는 이공자에게서 핏물이 확 인다.

강기가 부서지는 반동으로 끊겨버린 활줄이 그의 오른손을 찢고 얼굴을 그어버렸다.

자신의 장공이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는 바람에 얼떨떨해하던 책군이 황망히 이공자를 부축하곤.

“부인!”

급하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기의 화살을 부순 먹구름이 단숨에 밀어닥친다. 전신을 사정없이 찢어버릴 기세.

그 순간.

사라졌던 조화부인이 홀연히 해원기의 등 뒤에 출현했다.

팔마반경의 분심미묘무가 맥없이 무너지자 그대로 몸을 뺀 줄 알았더니.

과연 미심환영의 놀라운 신법. 더구나 소용돌이치는 먹구름에 휩싸인 해원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서.

오소민과 엽산초부를 노린다.

해원기가 제천신궁에 정면으로 맞선 이유를 처음부터 알았던 듯.

겉옷이 너울거리는 건 이전에 해원기를 암습했던 장영비금(帳影飛錦)의 살수일 터.

그러나.

신왕공에 속한 동시안과 잠심침령은 바로 박대정심을 이루는 근간.

한 번이라도 접한 사물과 기예는 기어이 그 이치를 찾아내고야 만다.

조화부인의 신형이 사라지자마자 상상지가 그녀의 위치를 쫓았고,

등 뒤에 기척이 나타나는 순간에,

해원기의 두 손이 벼락같이 교차했다.

장생십경의 배면이 이공자를 향했으니 병풍의 화면은 뒤쪽.

번쩍.

먹구름 속에서 한 줄기 번개가 뻗는다. 열 개의 영험한 생명이 되돌아간 곳은 오직 천지일 뿐.

천손검법 제삼초 판분천지(判分天地). 신왕검의 섬전이 공간을 횡으로 베어버린다.

팍.

그러나 허리에서 양단된 건 조화부인이 걸친 명부관복.

번개가 치는 그 짧은 순간에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빠져나간 조화부인도 보통이 아니지만,

“윽!?”

경악까지 숨길 수는 없다.

이공자와 책군의 바로 앞, 불쑥 나타난 조화부인은 속옷만 겨우 걸친 민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딱 벌린다. 하필 간신히 피한 곳이 바로 밀어닥치는 먹구름의 정면이니까.

해원기의 시선이 그녀를 뒤쫓으면서 장생십경에 판분천지가 더해졌다.

우르릉.

바람이 구름을 부르고, 구름은 우레를 울리니. 이것은 또한 재단경위에 검림소연이 섞인 격.

속옷 바람으로 간신히 피한 것도 소용없이 제일 먼저 목이 달아날 판인데.

조화부인이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지르며 손을 휘둘렀다.

“이야아악!”

화악.

돌연 피어오르는 광채.

그건 조화부인이 있는 힘껏 집어던진 하화였고, 흑풍백뢰(黑風白雷)의 먹구름이 일순 멈칫했다.

사조의 가르침을 깨달아서인지 마음먹은 대로 펼쳐지는 검.

정을 정하고 의를 의하니,

주저(躊躇)하지도, 유예(猶豫)하지도 않는다. 죽이고 살리는 결단이 이미 마음에 있음에랴.

책군의 태허신수가 예상 밖의 힘을 보인 이유나, 조화부인의 미심환영이 더욱 놀라운 경지를 보이는 까닭도 나중에 따져볼 일.

사신검과 신왕검을 한데 엮어 일거에 제압할 셈이었는데.

그대로 하화를 부술 수는 없다.

오소민의 사부가 오소민에게 내린 보패.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남이 함부로 판단할 게 아니다. 똑같이 귀한 정이잖나.

검세를 비틀며 몸을 날렸다. 왼손으로 하화를 받아내고 오른손은 그대로 검을 밀어낸다.

그러나 아무리 신속한 대응이라도 미세한 틈이 생기는 법.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심환영의 신법을 지닌 조화부인은 바로 그 틈을 노리고 비명까지 질렀고,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휘릭, 펑.

거꾸로 몸을 뒤집은 조화부인의 한 손은 제천신궁을 짚고, 또 한 손은 책군의 품에 빠른 일장을 갈기니.

“어?”

“억.”

이공자와 책군의 황망한 반응보다.

고오오오오.

사방이 흔들리며 공간이 울부짖기 시작하고. 가파른 언덕에 어지럽게 널린 흔적이 마구 무너지면서, 하늘을 뒤덮고 주위를 메운 먹구름까지 구멍이 뻥뻥 뚫렸다.

공중에서 거꾸로 한 바퀴 돈 조화부인은 진즉 이 변화를 알았던 듯. 제천신궁을 쥐자 지체없이 가까운 구멍으로 뛰어든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하화를 막 받아들던 해원기조차 놀랐다.

급한 김에 암기로 삼아 내던진 줄 알았다. 검세를 유지하며 하화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손에 닿자마자 보패의 빛이 사그라든 하화. 조화부인은 그저 보패지광만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신조경을 뒤흔든 변화. 먹구름이 제멋대로 찢기고, 가파른 언덕이 마구 무너진다.

스스스.

조화부인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보다 지면이 조금씩 움직인다는 느낌이 심상치 않다.

아직 당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공자와 책군에게 오른손을 내뻗었다.

검세를 이룬 먹구름은 이 변화와는 무관한지. 흑풍백뢰가 단숨에 폭풍만뢰로 화해 둘을 덮친다.

콰쾅!

“으악!”

“커억.”

손과 얼굴이 찢겨 피를 흘리던 이공자는 그야말로 핏덩이로 변해 삼 장이나 날아가고, 급히 막으려던 책군도 땅바닥을 뒹굴었다.

조화부인에게 제천신궁을 뺏기고 가슴에 일장을 맞은 게 믿기지 않는 둘. 봉황화신결도 태허신수도 펼치지 못한 채 당했다.

철컥.

하화를 요대자에, 고검을 검집에.

해원기가 그림자처럼 책군에게 따라붙으며 양손 열 손가락을 튕기고,

점혈로 제압하기 무섭게 그 목덜미를 쥔 채 뒤로 미끄러졌다.

이공자가 목숨을 건졌든 말든 상관할 때가 아니었다. 주위를 감싼 먹구름에는 이미 무수한 구멍이 뚫려 바깥 풍경이 은은하게 비치기 시작하니.

모호하긴 해도 무수한 사람 그림자.

신조경이 해제되면 이곳은 조금 전에 있었던 사시지역으로 돌아갈 터. 밀각의 수보와 세 학사를 비롯한 백여 명을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책군이란 자를 생포한 이상, 오소민과 엽산초부를 데리고 벗어나야 한다.

해원기의 움직임이 전에 없이 표홀한데.

“아저씨, 어서…….”

서둘러 말을 건네기 전에.

“해 공자, 저기, 저 지가(鷙架)로 가야만. 여기, 여기 주인이 대관표기(大觀標記)로. 어, 어떻게?”

당황한 엽산초부가 먼저 손을 가리키는 곳은 바로 가파른 고개 꼭대기. 쓰러진 횃대였다.

그러고 보니 엽산초부와 오소민은 처음보다 횃대 쪽으로 더 가까워진 위치. 그러나 땅바닥엔 끌린 자국이 없다.

‘저절로 가까워졌다?’

물을 새가 어디 있나. 주위를 차단했던 먹구름은 이제 고개 꼭대기에만 남아 엉겼고, 지면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져서.

해원기가 오소민을 업은 엽산초부의 소매를 잡아 꼭대기로 날아올랐다.

스스스스.

먹구름이 사라진 대신 지면이 회오리치는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조경은 꼭대기를 중심으로 거대한 소용돌이로 바뀌는 중이었고, 고개를 어지럽게 채웠던 수많은 바위조각과 부서진 횃대들이 늪에 빠진 것처럼 가라앉는다.

삽시간에 지면이 모든 걸 빨아들인다.

화려한 누각(樓閣)을 지나면 넓은 원(院)이 있고, 그 뒤에는 흐르는 물 가운데의 주(洲). 물가 양쪽에는 헌(軒)과 재(齋)가, 물을 건너서는 그윽한 관(館)이 있었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상향.

예전에 그 이상향은 천외육가에서 첫손 꼽히는 고귀향(高貴鄕) 대관원(大觀園)이라 불렸단다.

그 대관원에서만 쓰던 독특한 표기를 아는 이는 이제 녹림노조와 여의낭랑, 그리고 엽산초부 세 사람뿐이거늘.

방수인도 배우지 못한 그 표기가 이 천금가 천응령의 다 무너진 횃대 위에 드러날 줄이야.

엽산초부가 아니었다면 그 횃대의 이름이 지가라는 것도, 이 운해신조경이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지가에 이르러야 한다는 의미도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횃대가 오래되어 바스러진다고 여겼을 것이다.

바람처럼, 번개처럼, 거의 유령처럼 여겨질 정도로 빠른 해원기지만.

횃대 앞에 이르자마자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는 듯 먹구름 낀 하늘이 퍽 내려앉았다.

아니, 하늘만이 아니라 디디고 선 지면까지.

천함지몰(天陷地沒)이라는 말 그대로 횃대를 중심으로 한 좁은 공간이 순식간에 꺼지면서.

가파른 고개도, 부서진 횃대도 다 어디로 갔는지.

눈에 보이는 건 그저 다 닳은 바위와 돌조각만 구르는 황폐한 평지뿐.

몰려드는 밀각의 인원들 눈앞에는 이공자였던 참혹한 핏덩이 하나만 불쑥 출현하는 광경이었다.

“으음.”

엽산초부가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내는 앓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원기 자신도 어지러움을 견디느라 신공을 끌어올렸으나.

이건 대체 무슨 일인가.

공간이 기이하게 비틀리는 감각. 왼손으로 목덜미를 쥔 책군도, 오른손으로 쥔 엽산초부의 소매와 그의 등에 업힌 오소민의 기척조차 사라져간다.

‘운해신조경이 아직도?’

의아함에 동시안으로 바삐 사방을 살피는데, 어찌 된 노릇인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그저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만이.

어지러움을 느끼게 했던 비틀린 공간은 어느새 아득하게 넓어진 듯. 딛고 선 지면에는 구름만 가득 깔려서.

마치 밤하늘에 홀로 둥실 뜬 것 같다.

당연히 의혹이 뭉클 일어날 상황이건만, 이상하게도 전혀 당황스럽진 않았다.

여전히 아랫배엔 감로보병의 수정지력이 용솟음치고, 머릿속엔 바람과 우레가 치며 온갖 지혜가 번뜩이니.

이 신기한 느낌이 기이하게도 편하다.

이미 알았던 것처럼, 이윽고 일어날 일도 아는 것처럼.

그리고 해원기의 앞에 하나의 형상이 날아들었다.

익숙한 모양. 독수리다.

‘동강이 아니야.’

걸핏하면 해원기의 머리통을 횃대로 삼는 녀석과는 달리, 발톱을 구부리고 날개를 조심스럽게 접으면서 뾰족한 부리를 가만히 숙이는 모습.

팔뚝에 얹을만한 크기라도 독수리가 분명한데 땅바닥에 내려앉아 절을 올린다.

이 희한한 동작을 마치자,

해원기의 마음속에 무거운 울림이 전해졌다.

- 삼가 천손을 뵈옵니다. 이렇게 황폐한 곳에서 이런 몰골로 인사 올리는 걸 용서하소서. 내리신 덕(德)을 함부로 패(覇)로 내던진 이 못난 맹금(猛禽)은 끝내 운사(雲師)의 자리까지 잃었더랍니다.

마음에 직접 울리는 소리. 해원기는 놀라지 않았고, 또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다.

운사의 자리를 잃었다는 맹금. 해원기 자신을 천손이라 부르니 천금가 천응령의 주인일 터. 이름을 들어봤자 알 리 없다.

그러나 대체 언제부터, 왜 이곳에 있었을까.

- 하걸(夏桀)의 무도함을 경계하고자 상탕(商湯)은 나라를 세우면서 은밀히 신묘를 세웠고. 은상(殷商)의 역대 군주는 그 전통을 이어 수도를 옮길 때마다 신묘도 같이 옮겼습지요. 은허가 된 뒤로는 이곳이 계속 천금가 천응령이었습니다. 천하가 혼란에 빠진 당말(唐末)에 제 손으로 무너뜨릴 때까지.

은나라에서 당나라 말까지. 그토록 유구한 세월을 지낸 천응령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렸다?

해원기가 의혹을 품자 바로 답이 나온다.

참으로 기막힌 심어(心語).

- 무궁한 덕택 대신에 무극한 폭력에 빠졌으니 천금의 시렁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한 갑자가 넘도록 천하를 횡행하는 마종(魔宗)의 기운. 이를 걱정하다 못해 마침내 제 주제를 모르고 세상을 바로잡는답시고 공들여 키운 제자 하나, 그 아이가 결국은 세상을 더욱 어지럽혀 마침내 마종의 본맥(本脈)을 깨우게 될 줄은. 하아, 아닙니다. 자헌(子軒), 그 애가 아니라 바로 제 잘못이지요.

‘자헌? 설마 대응왕(大鷹王) 고자헌(高子軒)?’

마음속의 경악이 넘쳐 입이 떡 벌어졌다. 이곳이 천금가 천응령의 유적이요, 심어로 대화를 나누는 독수리가 그 주인임은 짐작했으나.

이제는 희미해진 전설로만 남은 과거의 천하제일인, 대응왕 고자헌의 사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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