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83화 (283/410)

제71장 제천신궁(制天神弓) (3)

쾅.

빛보다 소리가 먼저 울렸다.

시위를 놓는 걸 보지도 못했건만 무서운 강기가 날아들고, 그 위력은 열 폭 병풍 따위 그대로 날려버릴 듯.

과연 굉음과 함께 장생십경이 한쪽으로 확 쏠리지만.

병풍. 바람을 막거나 가림막으로 쓰는 물건이니 횡으로 곧게 펼칠 수도, 직각으로 꺾어 세울 수도, 둥글게 둘러칠 수도 있다.

맥없이 접힐 것 같던 열 폭이 좌르르 펴지며 빠르게 원을 그린다. 위에 하나씩 그려진 십장생이 겹쳐 보일 정도로 돌아가는데.

공간을 바탕으로 삼고 먹구름을 먹물로 써서 그린 그림이라서,

제천신궁이 구현한 강기의 화살에 혹시라도 상할까 봐 종이를 바꾸고 다시 듬뿍 먹물을 찍었을까.

해원기의 왼손이 검신을 훑으면서 신기가 더욱 올라갔다.

입속으로 외우는 초식의 구결, 춤추듯 나아가는 입무의 보법.

위이이잉.

회오리치는 장생십경은 병풍이라는 이름 그대로 외부의 어떤 기운이라도 거절하는 바람의 장벽. 더구나 주변을 감싼 먹구름이 회오리에 빨려들면서,

해원기의 전신이 삽시간에 소용돌이치는 먹구름에 휩싸인다.

천손검법은 공방자재(攻防自在)의 절학. 그러나 이런 변화를 일으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풍기운용(風起雲湧)?’

바람이 불면 구름이 인다. 사물의 이치를 비유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무학의 요결이나 초식의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지만, 이렇게 말 그대로 구현될 줄이야.

쾅.

그새 또 한 발이 날아들었으나.

이번에는 먹구름이 조금 흔들릴 뿐, 소용돌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우르르르.

되레 성질을 건드렸다는 듯이 나직하게 우레까지 울어댄다.

해원기의 신광이 깃든 두 눈이 상대의 반응을 놓칠 리 없다.

제천신궁을 거푸 당긴 이공자의 낯빛은 붉으락푸르락, 옆으로 선 자세가 조금 전만큼 차분하지 않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책군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조화부인만은 단지 이맛살만 잔뜩 찡그린 채, 눈동자가 자신의 손에서 보패지광을 발하는 하화 쪽으로 오르락내리락.

셋 다 다가오는 먹구름의 소용돌이에 크게 당황한 모습이다.

제천신궁의 첫 사격에 형편없는 몰골이 되었던 해원기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신위를 드러내니.

대적할 때 마음이 흔들리는 건 무인의 금기. 승패와 관계없이 삼가야 한다.

하지만, 상대의 당황을 보는 해원기의 마음도 그리 고요하진 않았다.

천손검법이 자신이 익힌 바를 뛰어넘는 변화를 보이기에.

두 번째.

신령검역을 이룬 이후로 두 번째다.

첫 번째는 군림어검대법으로 금궁오괴, 조양선사, 암야무명을 상대했을 때. 광상(光狀)의 군림검이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을 병용하면서 적을 공격할 뿐 아니라 엽산초부와 오소민을 두호했었다.

그리고 지금.

제천신궁의 사선에서 엽산초부와 오소민을 가로막아야 하기에 정면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저번엔 안개, 이번엔 구름.

왜 이렇게 되는 걸까?

폭풍만뢰로 처음 신령검역을 깨달았을 때나 형해도를 쓰는 팽조린의 한쪽 팔을 베었을 때처럼 가르침이 전해지면 좋을 것을.

사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미 다 가르쳐주었다는 듯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게 해원기의 나쁜 버릇이다.

아니, 아예 맹추라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가면 좋은데.

뭔가 알 듯 말 듯.

깨닫기 직전에 화두를 놓기가 더 어려운 법.

그래도 싸움에 집중해야지 딴생각을 해서야 쓰나. 마음을 다잡느라 뒤에 있는 엽산초부가 뭐에 홀린 것처럼 오소민을 끌고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걸 눈치 챌 수 없었다.

더구나 책군과 조화부인이 급히 자세를 바꾸어 끼어들 태세다.

팍.

하화의 보패지광이 사라지자 셋이 들어왔던 문도 꺼지고.

조화부인의 신형이 여덟 개로 나뉘어 다가든다.

이전에 수차제에서 주작모가 보였던 팔마반경의 사술. 그러나 신형을 겨우 넷만 만들었던 주작모와 달리 조화부인은 단숨에 여덟 개. 게다가 미심환영의 신법이다.

스스스.

전부 다른 사람인 양 흩어져 제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는 여덟. 화려한 명부관복이 현란하게 너울거리고,

이리저리 오가며 교태를 부리기 시작하자 은근히 열기까지 느껴진다.

조화부인 여덟이 요사스럽게 시야를 어지럽히는데, 책군은 반면에 침착하고 부드럽게 두 손을 엇갈렸다.

조용히 일어나는 허허로운 기운.

한 손이 느릿느릿 펼쳐지고, 다른 한 손은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이공자에게 건네며.

“주인께서 기다리십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공자가 움찔.

거침없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아까와는 달리. 자세를 풀면서 얼른 책군이 건넨 물건을 입에다 털어 넣었다.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했던 건 제천신궁의 공격이 먹히지 않아 당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지.

대번에 정상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거린다.

책군의 시선은 해원기를 향한 채. 이공자를 보지도 않고서 느릿느릿 펼치던 한 손을 주욱 뻗었다.

퍼퍼퍼펑.

조화부인의 팔마반경이 거의 다 터져나가고,

뇌성을 품고 소용돌이치는 먹구름이 크게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한 손을 뻗는 책군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서 조금 전의 당황이 더 진해졌으니,

진짜 한 자루 검이 만들었단 말인가.

열 폭 병풍이 아니라 이미 뇌운(雷雲)이 겹겹이 쌓인 용소(龍巢)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광경을.

사막에서 불시에 발생하는 거대한 폭풍. 그걸 흔히 용권풍(龍捲風)이라고 부르는 건 모래를 휘감아 하늘까지 치솟는 모양이 마치 용의 승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용권풍이 이곳에. 그것도 으르렁대는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면서.

그 안에는 분명히 보기만 해도 담이 뚝 떨어질 무시무시한 묵룡(墨龍)이 도사리고 있으리.

팔마반경의 여덟 분신이 제대로 다가가기도 전에 차례로 파괴되어서,

혼자 남은 조화부인이 오만상을 쓰며 물러섰다.

“분심미묘무(焚心媚妙舞)가 시야조차 가리질 못하다니.”

보는 사람을 욕화(慾火)에 빠트리는 요사스러운 춤사위. 팔마반경으로 이룬 여덟이나 되는 분신이면 고수라도 헤어나기 어렵거늘. 아예 시작하지도 못했다.

이곳은 운해신조경의 안. 실제로는 하남 북쪽의 은허이니 용권풍이 일어날 리 없고.

저 먹구름도 어차피 운해신조경의 변화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잖나.

이게 무슨 검법, 아니, 검법이기나 한 건가.

누구보다 해원기의 진짜 능력을 잘 안다고 여겼던 조화부인은 기가 막혔다.

이래서야 시간을 벌 역할조차 못 할 판.

그런데 먹구름이 별안간 확 커지면서 자신을 집어삼킨다.

‘칫, 책군은 뭘 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팟.

어깨를 흔들면서 신형이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리고 곧장 공간에 밀려드는 허허로운 기운.

두웅!

신조경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에 묵룡의 용소까지 떨리면서 먹구름이 마구 끓어오른다.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장생십경을 무시하고 직접 해원기의 내부를 뒤집으려는 기운.

어느 방향인지조차 알 수 없다.

검왕법신이 전신을 지키지 않았다면 단숨에 목숨이 끊겼거나 적어도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터.

‘태허신수(太虛神手)?’

어떤 무공인지는 즉각 알아차렸으나 말이 되지 않는다. 설사 십이성의 태허신수라도 장생십경을 뚫을 수는 없다.

신음은 되레 공격한 책군의 입에서 새어 나오고,

“으음, 현도기기(玄道氣炁)가 막힐 줄은.”

불신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공자의 기합이 터졌다.

“야아앗!”

번쩍.

제천신궁이 무지막지한 빛을 토한다.

사조께선 다 가르쳐주셨다.

우매한 내가 몰랐을 뿐.

다 저절로 그리되는 것, 굳이 따질 필요가 없고. 생사여일의 각오가 활살의 구분을 뜻대로 하게 한다.

정이라고 다 베풀고, 뜻이라고 다 지켜야만 하나?

다정(多情)은 남정(濫情)이 아니니,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정은 허약한 음(淫)이요.

뜻에만 얽매여 행하기를 주저하니, 옳다고 고집만 하는 뜻은 한심한 겁(怯)이로다.

정(情)을 정(精)하고, 의(意)를 의(義)하라.

마침내 해원기는 사부가 검왕오형을 창안한 이유를 알았다.

자식을 위하는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

다 컸다고 이제부터는 자기 뜻대로 살아가겠단다.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제는 곁에 붙어서 잔소리도 못 하게 되었구나.

그저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험한 세상에서 혹여 어디 상하지나 않을까, 자칫 좋지 않은 사람에게 어디 다치지나 않을까.

만약 실망이 지나쳐 여린 마음을 꼭꼭 닫아걸면 어쩌나.

끝까지 지켜보는 훌륭한 아비는 되지 못했을지언정,

원기가 타고난 따뜻한 정을 잘 지니고, 처음에 세운 뜻을 반드시 이루도록.

힘이 되어주마.

이 사부의 모든 것을 다 엮어서.

사부의 검형수에 군림어검대법의 바탕인 오행어검을 더한 것이 검왕수. 상생은 오행제림, 상극은 오귀전륜. 양손으로 나누어 익혔다.

사실 오행제림은 신왕공의 정(正), 오귀전륜은 신왕공의 반(反). 천생살기를 타고난 사부는 신왕공을 사왕공(死王功)으로 뒤집어쓸 수 있었기에, 살기가 없는 해원기라도 정반을 고루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했었다.

그 방안의 돌파구는 바로 사부가 아우인 탁 소숙과 함께 구현한 고천무쌍진(孤天無雙陣).

심도경에 이른 형제가 함께 펼치는 이 고금무적의 합벽진은 그때까지 세 가지 법결(法訣)로 이어졌는데.

마침 해원기가 청강주로 수정지력을 얻고, 연달아 풍뢰동의 기연을 만났다.

삼산(三閂)의 빗장을 지니지 않은 해원기. 사부가 살기를 타고난 것과 반대로 해원기는 덕을 타고났으니 대지체(大地體)와 상상지(上上智)만 구현하면 삼전태(三全泰)가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세 가지 법결과 두 개의 기연을 천손검법을 관통하는 무상검(無相劍)의 도리로 묶었다.

그래서,

검왕오형에는 각각 하나씩 숨겨진 오의가 담기게 되었다.

비록 완전하진 않더라도.

여간해선 검을 쥐지 않으려는 제자의 성품에 걸맞도록.

사조의 가르침이 사부의 진심을 슬그머니 일러준 말이란 걸,

해원기는 깨달았다.

그런데 그 계기가 장생십경에 터져나가는 조화부인의 팔마반경이었으니.

요사스러운 분신이 아무리 사람의 형상이라도 결국 거짓 허상에 불과한 것. 사마요괴에 물드는 순간, 생명은 진실(眞實)을 잃나니. 이에 검을 들어 휘두름은 살(殺)이 아니라 멸(滅)이요, 활인(活人)이야말로 사람이 스스로 왕(王)이 되는 완인(完人)의 길임에야.

조화부인이 알았다면 기겁할 일이지만,

깨닫는 순간에 열 폭의 그림이 전부 빙글 돌면서, 신왕검에 저절로 사신검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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