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장 제천신궁(制天神弓) (2)
무림에 나와 젊은 축을 만난 적이 꽤 된다.
맨 처음은 오소민. 겉으론 경망스러운 척하지만, 명석하고 기민하며 무엇보다 마음이 맞는 친구. 그리고 과묵하며 진중한 악송령, 나중에 장안에서 사귀게 된 정록. 개성은 서로 달라도 모두 좋은 벗이 되어주었다.
벗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당령이나 황보관, 그리고 화산파 제자들. 속을 알기 어렵고 자부심이 강하다고 할까. 중간에 오해로 부딪쳤던 신유문의 노문기가 특히 그런 면이 심했는데, 그래도 딱히 혐오감이 들진 않았었다.
반면에 첫인상부터 거슬렸던 경우. 바로 반룡령 소령주인 백문량이 그랬다.
간교하다거나 음험하다는 건 쉽사리 판단할 수 없지만,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원인. 그건 바로 표리부동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심이 전혀 다르다.
해원기는 이공자라 불리는 청년 또한 그런 부류란 걸 직감했다.
책군이라는 중년인과 조화부인을 거느리고 굳이 보패의 힘을 써서 이 공간으로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예상대로였다고 떠벌리곤 바로 돌아가는 시늉.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누구도 눈에 두지 않는 척 여유를 부렸으나.
그건 전부 겉으로 꾸며댄 위장일 뿐이었다.
이공자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해원기다.
백년제일검사와 영세검주라는 사부의 예칭을 거듭해서 입에 올리며 어떻게든 도발할 셈이었고,
그래서 일부러 찾아 들어온 것이다.
사부를 함부로 입에 담는 것만으로 참지 못할 일인데,
해원기가 시비를 걸어주었다느니, 뭔가를 시험할 기회라느니.
가소로운 걸 넘어 가증스럽다.
해원기의 가라앉은 두 눈 깊이 불꽃이 튀었다.
“시비라. 틀린 말은 아니야. 워낙 궁금한 게 많아서 이렇게 시비라도 걸지 않았다간 또. 조금만 불리하면 바로 내뺀 적이 한두 번이라야지. 거기 조화부인이 잘 알 텐데. 수하든 상관이든 버리고 마치 도마뱀이 제 꼬리 자르듯이. 흠, 이번에는 젊은 꼬리를 붙였나?”
굳은 얼굴과 달리 입은 매끄럽게 돌아간다.
이런 자들을 상대하는 법은 사부보다 탁 소숙에게 배웠기에.
머리를 슬쩍 조화부인 쪽으로 돌리는 게 이공자의 속을 긁는 데 더 효과적이다.
졸지에 도마뱀 꼬리가 된 이공자의 히죽거리던 입매가 내려갔다.
더벅머리에 허름한 차림새. 절세검왕이라고 해도 보기엔 그저 어수룩한 심부름꾼 같은 놈이 감히.
“내가 누군지나 알고…….”
“누군데?”
이를 갈며 중얼거리는 말도 툭 끊어버리니.
이공자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둘 다 비켜서시오!”
와락.
거칠게 조화부인과 책군을 양쪽으로 밀어내면서 썩 앞으로 나서자마자 두 팔을 번갈아 뻗었고,
파파파파.
그리 빠르지 않은 동작에도 중간의 공간이 연달아 비명을 토한다.
십여 장이 넘는 거리건만, 두 팔을 번갈아 뻗는 간단한 동작에 거듭해서 일어나는 힘줄기. 더구나 그 힘줄기가 차례로 겹쳐져서,
이공자의 동작이 끝나기 전에 이미 해원기의 눈앞에 이르렀다.
도발했던 말대로 해원기의 얼굴 한복판에 큼지막한 구멍을 뚫으려는 듯.
그러나 해원기는 미리 준비했었다.
탁 소숙에게 배운 것. 흥분한 적은 언제나 서두르기 마련이요, 서두르면 반드시 허점이 드러난다.
해원기가 꼿꼿이 선 채로 역시 두 손을 빠르게 내질렀다.
한 손은 오행제림, 한 손은 오귀전륜. 이공자와 다른 것은 동시에 내지른 양손 사이에 기이한 광채가 어린 것뿐.
검왕오형의 네 번째인 역상정위다.
펑!
귀를 울리는 폭음.
해원기의 바로 뒤에 있는 엽산초부가 황급히 오소민을 챙기려다가 눈을 껌뻑이며 동작을 멈췄다.
폭음이 대단하니 충격도 상당해야 할 텐데, 어째 아무런 경력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다.
자신만이 아니라 맞은편도 똑같은 듯. 양쪽으로 밀려난 조화부인과 책군의 옷자락이 얌전하기만 하니.
해원기와 이공자. 둘 사이의 공간에 모든 힘이 집중되었다가 완전히 해소되었다는 뜻이다.
조화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책군은 엽산초부처럼 놀란 표정.
상대의 힘과 완전히 동일한 크기의 힘으로 막아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현상이다.
“호오.”
책군의 탄성에 속이 더 뒤집혔는지.
이공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집었다.
“네 이놈!”
왼발은 앞, 오른발은 뒤. 말을 탄 것처럼 무릎을 조금 구부렸고. 왼손은 어느새 등에 비스듬히 멨던 붉은 몽둥이를 앞에 세웠으며, 오른손은 왼손의 손목을 거쳐 몽둥이를 타고 내려온다.
참으로 경쾌하고 민첩한 동작. 눈 깜빡할 새에 자세를 바꾸는데.
역상정위의 오의인 격물궁리로 나아가던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 치솟았다.
은은히 붉은빛을 띠던 긴 몽둥이. 그리고 손목에 칭칭 감아놓았던 가죽끈.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면서 가죽끈을 몽둥이의 끝에서 끝까지 이어 붙이자,
몽둥이는 더는 몽둥이가 아니라,
활(弓)로 변했다.
도발은 시탐(試探)의 일환이다.
누구나 흥분한 상태에선 가장 능숙한 수법을 쓰게 되고, 그걸 통해 무엇에 뛰어난지,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므로.
적이 가진 능력을 전부 노출하게 하고, 그보다 한 푼의 힘을 더해 제압하며, 내 비장의 수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 것.
탁 소숙에게 도발을 배웠듯이, 사부에겐 제승(制勝)의 요결을 배웠다.
이공자의 등에 매달린 기다란 몽둥이는 당연히 독문의 병기일 터. 은은히 붉은빛이 돌아서 절대로 평범한 나무토막일 리 없다.
맨손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곧장 병기를 뽑아 들 것이고, 먼저 내뻗었던 기이한 장법과도 연관된 무공이리라.
왼손 손목에 감은 가죽끈도 그냥 장식은 아닐 것으로 유의했지만.
설마 두 가지가 활로 변할 줄은 몰랐다.
‘배운 적이 있다. 활의 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평소에는 시위를 풀어놓는다고. 그렇지만.’
의외.
활은 전혀 예상 밖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화살이 보이지 않았으니.
지금도 이공자는 아무것도 걸지 않은 빈 시위를 당기고 있잖은가.
그러나 해원기는 본능적으로 양손의 검왕수를 위아래로 나누었다.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경고.
충돌로 일어난 경력을 전부 풀어내던 역상정위가 검림소연으로.
이공자가 펼쳤던 기이한 장법의 내력을 간파할 여유가 없다.
해원기로선 드물게 서두른 반응이었지만,
화악.
“찻!”
이공자의 노한 호통보다 먼저 엄청난 빛이 날아들었다.
검림소연의 오의는 수주개와. 검기가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얹는 일종의 결계거늘.
기둥이 꺾이고 기와가 날아간다.
쾅!
오른손을 다급히 대우신장으로 떨치려던 시도도 헛수고.
정통으로 맞았다.
“해……!”
엽산초부가 부르르 떨리며 벌어지는 입을 억지로 다물었다.
뭔지 모를 엄청난 빛이 그대로 해원기에게 꽂혔고, 이번에는 눈도 뜨기 어려운 경풍이 휘몰아쳤다. 오죽하면 자신과 오소민이 일 척이나 밀려났을까.
해원기의 더벅머리가 미친 듯이 휘날리고, 양쪽 소매가 어깨까지 가루가 되었으니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을 터.
속에선 천불이 일고, 오소민을 팽개친 채 당장 뛰쳐나가고 싶지만.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해원기의 두 발, 그리고 거대한 기세를 풍기는 그 등.
엽산초부의 기억 속에 두려움과 존경으로 각인된 검이 그대로 걸려있다.
아무리 의외고 아무리 예상 밖이어도 신화검형에 풍뢰지결을 더한 신법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등 뒤의 엽산초부와 오소민. 엄청난 빛은 해원기의 전신을 뒤덮을 정도였으니.
검왕법신으로 막아서는 수밖에.
양쪽 소매에 가슴팍까지 전부 가루가 되었고, 기혈이 들끓어 입을 열 수가 없다.
가공할 속도와 위력.
검왕오형이 무너지고 검왕수가 깨졌다.
해원기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을 힐끗 스쳤다.
뚝뚝.
팔과 어깨가 저리고 드러난 피부는 덴 듯 화끈거린다. 풍뢰와 수정이 이어진 내부를 뒤흔들 정도의 충격. 대우신장을 떨치려 했던 오른손과 달리 찢긴 왼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지지만.
해원기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덤덤하다.
“강기를 화살로 구현한 건 처음 보는군. 거의 검환(劍丸)에 이른 경지 같은데, 활이 좋아서 가능했을까?”
검환은 검을 익힌 자가 검강을 이룬 후에 강기를 강환(罡丸)으로 응축하는 경지.
검기성강을 넘어 검강성상에 들어서야 가능하고, 파괴력이 크게 오르지만.
검강은 검강. 어검처럼 멀리서 적에게 날릴 수는 없다.
이공자가 쏜 엄청난 빛은 강기의 화살. 정확히 따지면 검환보다 훨씬 상승에 속한다.
해원기가 몰라서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막 양손을 내리던 이공자가 얼굴을 흉하게 찡그렸다.
활을 쏘고 난 후에는 실린 반동을 풀려고 활을 쥔 손이나 시위를 당긴 손 모두 힘을 뺀다.
보통은 연사를 위해 신체를 다듬는 행동이지만, 지금은 새로 얻은 활을 아끼는 게 목적.
시험 사격이 생각보다 훨씬 위력적이라 흡족했다가,
같잖게 부리는 오기에 기분이 상한다.
형편없는 꼬락서니로 손에서는 피까지 흘리는 주제에.
“그놈의 주둥이. 버티고 서있는 건 칭찬해주마. 흐흥, 그런데 시사(試射)라는 말을 아느냐? 본 공자가 이 제천신궁(制天神弓)을 손에 넣고 처음 쏴본 거거든.”
새 활을 장만하고서 활의 탄성이 얼마인지, 시위가 어울리는지 알아보려고 적당한 힘으로 쏘아보는 게 시사다.
즉, 아직 제대로 힘을 싣지 않았다는 위협인데.
해원기가 왼손을 움켜쥐며 바로 말을 받았다.
“제천신궁. 지나치게 광망한 이름이고. 그보다 강기의 화살을 이룬 바탕, 그거 아마 봉황화신결(鳳凰化神訣)인 듯하니. 그래, 이 모든 것이 역정대관을 몰래 찾으려는 이유였나 본데.”
이공자가 먼저 내뻗었던 장법. 격물궁리가 짧은 틈에도 기어이 그 안에서 내력의 단서 하나를 건져 올렸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해원기는 그 정체를 유추할 배움을 지녔다.
과거에 유불도속(儒佛道俗) 사가의 무공을 합쳐 새로이 창안한 신공들. 그중에 으뜸은 양을 대표하는 광무제왕검(光武帝王劍)과 음을 대표하는 단봉무후도(丹鳳武后刀)였고. 단봉무후도를 이은 이는 바로 이사모(二師母)였으며, 이사모의 사문이 또한 봉황화신결의 이론에 바탕을 둔 봉황문이었기에.
물론 봉황문도 이젠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니, 도대체 봉황화신결이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해원기는 이공자의 제천신궁과 봉황화신결로 이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운해신조경 안에서 모든 새의 위에 자리한 최고 관위. 역정대관인 봉황의 자리에 간직된 신궁과 비결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 몰래.
동창의 밀각육학사와 이십사아문의 무리를 전부 제치고.
해원기의 시선이 조화부인을 향하면서 말이 이어진다.
“동창도, 이십사아문도 아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 밑에 있는 걸까?”
그간의 여러 가지 풀리지 않았던 문제. 그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허나 이 이어진 질문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고.
봉황화신결이란 소리에 이공자뿐 아니라 책군과 조화부인이 죄다 소스라치는 경악을 추스를 새도 없이,
해원기가 가볍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뿐사뿐 춤추듯.
치잉.
등에 걸린 고검이 저절로 뽑혀 손에 잡히고 장엄한 신기(神氣)가 공간을 물들인다.
활을 겨눈 상대에게 곧장 달려가는 건 바보짓이건만,
거침없는 걸음과 함께 신왕검이 흔들리고,
해원기의 전면에 펼쳐지는 열 폭 병풍.
천손검법 제사초, 장생십경(長生十景)이 먹구름을 먹물 삼아 공간에 그림을 그린다.
강기로 화살을 구현하는 제천신궁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이공자가 황망히 시위를 당기고,
제천신궁의 붉은빛이 선명해지는데.
잔뜩 긴장해 눈도 떼지 못할 순간, 엽산초부는 뭔가 의식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얼핏 딴 곳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위라는 커다란 문틀이 소리도 없이 바스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