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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281화 (281/410)

제71장 제천신궁(制天神弓) (1)

아주 잠깐, 귓가를 스치듯 들린 희미한 울음이다.

해원기가 먹구름으로 캄캄해진 하늘을 잠깐 살피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영교(靈交)가 미약하기 그지없어서 동강의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고, 속으로 부르는 소리도 닿지 않는 듯.

동강 역시 해원기가 어디 있는지 찾질 못하는 답답함에 울어댔나 보다.

운해신조경의 영향이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울음이 들렸다는 건 이 기이한 공간의 변화가 많이 약해졌다는 뜻이겠지.’

신묘의 주인, 즉 신위가 있는 곳까지 이르렀으니 운해신조경도 마침내 해제될 기미가 보이는 걸까.

아직 운해신조경의 신기한 변화나 벗어나는 방법을 습득하지 못했고, 이 신묘가 천금가 천응령의 옛터라는 게 영 믿기지 않지만,

엽산초부에게 업힌 오소민부터 살펴보는 게 우선이다.

잠깐 넋이 나갔던 엽산초부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 어떻습니까? 이, 오 장로, 아니, 오 소저일 텐데.”

돌아보는 표정에는 여전히 경악이 남았지만, 오소민을 등에서 내리는 손길은 조심스럽다.

그런데 오 소저라.

해원기가 오히려 움찔하게 되었고,

“아저씨? 오 형이 여자인걸, 어찌 알았습니까?”

미리 알려준 적이, 그럴 겨를도 없었다. 단삼육이 개방에서 방주와 호법장로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라고 했었거늘.

엽산초부가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개방 신비의 유룡개라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 신비가 남장여인일 줄은 몰랐네요. 아까 업는 순간에 알았습니다. 예전 일이긴 합니다만, 저희 셋이 녹림의 꼬마 여우를 키웠으니까요. 허.”

녹림의 꼬마 여우는 여의낭랑 방온화의 어렸을 적 별명.

그제야 해원기는 예전에 사부와 사모들이 나누던 대화를 들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꾀가 말짱해서 소호리(小狐狸)라 불렸던 방온화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서 거의 녹림삼성이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고.

말썽꾸러기 딸내미 뒤치다꺼리하는 어머니나 다름없었다니.

어떻게든 축 늘어진 오소민을 지키려고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던 엽산초부가 오소민이 여자란 걸 알아채지 못했을 리 있나.

강호 여자가 남장하는 게 그리 드문 일도 아니고.

움찔했던 해원기가 괜스레 쑥스러울 판.

“그, 그렇죠.”

혹시 눈이 마주칠까 얼른 시선을 돌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엽산초부다. 쓸데없는 소리는 일체 입에 올리지 않는다.

“중독도, 몽혼도 아닌 것 같던데요. 딱히 눈에 띄는 외상도 없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누인 오소민의 상태를 살피는 모습에,

해원기가 어색한 감정을 털고 다시 오소민의 손목을 잡았다.

오소민을 구해냈을 때는 자세히 살필 상황이 아니었지만, 지금도 정신을 잃은 이유를 알기 어렵다.

엽산초부의 말대로 독이나 미약에 당한 게 아니요, 그렇다고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된 거지? 조화부인을 쫓다가 무슨 일이…… 음?’

서둘러 보명오석을 꺼내려고 요대자를 더듬던 손이 멈추었다.

이전에도 오소민을 치료한 적이 있다. 그때는 독상, 그러나 그 독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고.

정체 모를 독기 한 톨이 들러붙었던 것도 나중에 알아차렸었는데,

지금 세심하게 오소민의 상태를 살피려 하자 불현듯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스슥.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신왕공을 한껏 끌어올리자 청정한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곁에서 지켜보던 엽산초부가 눈을 둥그렇게 뜰 정도로 선명하게.

조금 전에 군림검을 정수리에 띄우고 싸울 때처럼 아랫배에는 수정지기, 머릿속에는 풍뢰지력.

겨우 오소민의 손목 하나를 붙잡은 채지만,

고양된 신왕공에 힘입어 잠심침령과 동시안이 오소민의 내부를 샅샅이 훑기 시작하고,

마침내 원인을 찾아냈다.

‘음기(陰氣). 그것도 지극히 무거운 음기다.’

장안 화청궁에서 오소민에게 독을 쓴 자는 오온존자였고, 당시에 해원기는 얼핏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었다.

음침지독(陰沈至毒). 음침하고 지독하다는 말로 들렸고, 무슨 의미인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정체 모를 독의 이름일 수도.

그러나 비록 독에 관한 공부가 부족한 해원기라도 음침지독은 처음 들어본다.

다른 말로 이해했을 만큼 의미가 불명했던 그 네 글자가 지금 정확히 기억나는 건,

바로 오소민 체내에 고인 음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보명오석으로 제거했던 독보다 더욱 은밀하고 더욱 무거운 음기.

‘그때 오 형이 당했던 독과는 다르지만 미묘하게 흡사한 구석이 있고.’

해원기의 손가락 끝에 달라붙어 따라왔던 한 톨과는 조금 더 닮은 느낌.

다만, 지금 오소민의 체내에 고여 경맥의 흐름을 막는 음기는 독이 아니다.

신왕공을 한껏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원인이라고 여기지 못했을 터.

‘오 형이 여자라서 알아보기가 더 어려웠다.’

팔선의 제자로 항룡진기와 사실보허의 내공을 익혔더라도 오소민의 체질은 기본적으로 음.

음이 양보다 강한 바탕이니 내부에 음기가 고이는 게 딱히 이상할 리 없다.

특히 순음지체(純陰之體)같이 천성적으로 음기가 강한 체질이었다면 혼절한 상태에서는 흔히 보이는 증상이기에.

해원기가 요대자에 올렸던 손을 뗐다.

두 손으로 오소민의 양쪽 손목을 쥐고 양화지력(陽火之力)을 주입할 셈.

원인을 알았으면 치료가 먼저다.

이전에 독기를 모조리 태웠던 삼매마려는 혹여 경맥에 손상을 줄 수도 있으니 양강(陽剛)을 부드럽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런데 미처 오소민의 손목을 쥐기 전에.

“으음, 해 공자!”

엽산초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해원기의 검을 맞고도 멀쩡하게 일어나던 오구지신. 새 탈을 뒤집어쓴 다섯에게 곤욕을 치르면서 내상까지 입었던 엽산초부.

해원기에게서 퍼지는 청정한 기운이 자신의 내상까지 다스리는 바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즉각 호법을 서려고 했다.

앞뒤로 압박하던 백 수십의 동창 무리가 전부 사라진 상황이라도 이 기묘한 공간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그분’의 후대인 해원기를 어떻게든 지켜야만 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얼굴이 어쩔 수 없이 일그러진다.

내공을 사용해 남을 치료하는 행위는 신공을 운용하는 상태와 다를 바 없어서 외부가 소란스러우면 주화입마와 같은 화를 부르기도 한다.

그런 걸 뻔히 아는 엽산초부지만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조차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변화.

가파른 고개를 휘감고 하늘까지 새카맣게 만들었던 엄청난 먹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누가 휘저은 것처럼 한 방향으로 돌면서 차츰 그 속도가 빨라진다.

본래 대관원 호원가신이었던 엽산초부라 이곳이 천외육가의 다른 한 집안인 천금가 천응령이란 사실이 남다르긴 하지만,

지금은 한낱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잖나.

잔뜩 낮춘 음성으로 해원기에게 경고를 보내야 했다.

청정한 기운을 거두면서 해원기가 벌떡 일어나려는데.

달싹거리는 오소민의 입술.

요상에 들어가려고 바짝 다가앉았기에 겨우 그 입술을 읽을 수 있었다.

‘하화.’

신왕공의 청정한 기운 덕분이었을까. 인사불성이던 오소민이 어떻게 입술을 움직일 수 있는지. 아직 양화지력을 주입하지도 않았거늘.

기묘한 느낌을 접어두고 상황을 살피려던 해원기의 미간에도 힘이 들어간다.

치이이.

회오리치는 먹구름 한쪽 귀퉁이에서 가늘게 새어 나오는 빛.

부드럽고 맑은 빛이 조금씩 커지면서 먹구름에 문을 만들고 있다.

신묘의 핵심인 이 가파른 고개에 들어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그 빛이 눈에 익는 해원기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고,

엽산초부도 감시도를 쥐면서 자세를 갖추었다.

먹구름이 전부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한쪽 귀퉁이만 열리다니. 진법이나 결계에 문외한이라도 평범하지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는 변화다.

그러는 통에 해원기와 엽산초부는 가파른 고개 꼭대기, 신위라는 커다란 문틀에 미세한 금이 가는 걸 미처 알아챌 수 없었다.

휘르릉.

부드럽고 맑은 빛이 마침내 적당한 크기의 문을 이루자 그림자 세 개가 훌쩍 안으로 들어선다.

“과연. 여기도 먼저 찾아내다니. 밀각의 행사가 사사건건 틀어진다는 얘기 그대로구나.”

키가 훤칠한 장한의 묵직한 음성이 먼저 나왔지만,

해원기의 시선은 왼쪽에 선 조화부인에게 향했고.

오소민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던 이유였을까. 조화부인의 손에 들린 하화. 바로 그곳에서 부드럽고 맑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확인하자마자 해원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운해신조경, 그렇군.”

개방팔선 중 하선고가 오소민에게 넘겨준 보패. 그 공효는 불염진(不染塵), 즉 속진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조화부인의 손에서 보패가 능력을 발휘했다는 건 운해신조경의 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의미다.

그 혼잣말을 알아들었던지 오른쪽의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다.

“허름한 외모와 달리 보통이 아니구먼. 궁상을 여는 열쇠가 절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보패는 훌륭한 보조가 되거든. 그나저나 여긴, 흠,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걸.”

머리엔 소요건(逍遙巾), 관옥처럼 환한 얼굴에 가늘고 깊은 눈, 세 가닥으로 다듬은 검은 수염이 자못 지혜가 출중해 보이는 인물이고,

반면에 가운데 선 장한은 해원기와 비슷한 나이인 듯. 긴 머리칼을 질끈 묶어 올린 각진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다부진 체격에 기다란 팔다리가 눈에 뜨이는데.

셋 중에 가장 젊으면서도 이 장한이 우두머리인 듯.

“책군(策君)의 예상이 맞았군. 굳이 부인이 수고할 필요가 없었겠어. 뭐, 절세검왕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책군이라는 중년인과 조화부인을 번갈아 보더니 미련 없이 몸을 돌리려 한다. 그 등에 비스듬히 걸린 길쭉한 물건. 앞에서 볼 때는 검을 멘 것 같더니 검이 아니라 단단한 몽둥이. 붉은빛이 조금 돈다.

그런데 해원기의 얼굴 한 번 보려고 왔다?

조화부인과 책군이 아무 소리 없이 뒤를 따르려는 기색이라.

해원기가 앞으로 나서며 짧게 외쳤다.

“멈춰라.”

쿵.

지유진의 경력이 지면을 울린다.

웅.

지유진의 경력이 벽에라도 부딪힌 듯 세 명의 일 장 밖에서 흩어지고.

젊은 장한이 다시 몸을 돌렸다.

“호오, 뭔가 볼 일이 있는가? 이대로 운해신조경이 풀리면 밀각육학사가 여전히 기다릴 테고. 그래, 자칫하면 이십사아문과 엮여서 고생이 막심할 텐데. 굳이 여기서 힘을 빼려고?”

나이가 젊은 만큼 민첩하고도 예리한 반응. 말투에 은근한 조롱이 담겼다.

밀각육학사와 이십사아문을 입에 올렸으니 처음부터 해원기가 겪은 과정을 다 아는 모양.

해원기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젊은 장한을 보았다.

“너는 누구냐?”

땅 밑으로 들어갈 것 같은 저음. 이전의 해원기를 아는 조화부인의 눈이 조금 흔들리지만, 젊은 장한은 되레 흥겨운 듯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어지간히 무게를 잡는구나. 백년제일검사의 후대라 이거지. 하긴 역대의 골칫거리들을 전부 젖히고 제일대적에 올랐으니까. 그런데.”

말을 멈추고 어깨를 크게 추스르더니 왼손을 들어 해원기를 가리켰다. 손목에 칭칭 감긴 가죽끈을 흔들면서.

“너, 자신 있냐? 난 실제로 네 사부가 영세검주라고 불리는 것도 의심스럽거든. 그간 꽤 설치고 다녔다고 콧대를 세우다간 여기서 얼굴 한복판에 구멍이 뚫릴걸? 흐흥.”

코웃음을 더한 도발.

책군이라는 중년인이 당장 인상을 쓰지만.

“이공자(二公子), 왜 괜한 분란을.”

“가만히 있어 보쇼. 절세검왕이 먼저 시비를 걸어주잖소. 마침 시험도 할 수 있을 테니 좀 좋은 기회요?”

말리는 책군의 말을 자르며 히죽 웃는 시선은 여전히 해원기를 노려본다.

혈기가 넘치고, 말투도 거칠어서 ‘공자’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는 젊은 장한.

해원기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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