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80화 (280/410)

제70장 가파영붕(架破嶺崩) (4)

발검제형의 오의는 수발여의. 떨쳐낸 군림검이 거둘 때도 위력을 발휘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상대하는 적의 수에 맞춘 공격이라니.

금궁오괴가 발검제형에 나가떨어지자 수발여의는 해제되고, 그 여력은 반대쪽의 둘에게 모여들었다.

군림검을 막아낸 둘. 해원기는 이 둘이 어떤 무공을 썼는지 바로 알아챘다.

조양선사의 전신에서 환하게 일어난 옥빛은 바로 제남에서 왕 첩형이란 자들이 보였던 것과 같은 경옥신공이지만, 성취는 이미 십이성(十二成)의 완숙한 경지. 거기에 기이한 장법을 쓴다.

암야무명의 전신을 가린 검은 천에는 요사스런 기운이 담겼으나, 군림검을 막아낸 신법은 분명히 영사태화. 그 또한 대성(大成)해서 이미 신법의 수준을 넘었다.

어떤 무공이든 완전한 대성의 경지에 이르면 그 위력은 그 이전과 천양지차. 상승의 신공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광상(光狀)의 어검대법을 막아낼 정도. 그렇다면 빛이 아닌 그림자라면 어떨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군림검이 비천음마경혼검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나가떨어졌던 금궁오괴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기척에.

수발여의를 해제했던 손이 뒤집혔다. 좍 펴진 다섯 손가락.

빛이 사라진 오른쪽 공간을 어둠이 대신하고, 다른 한 손은 경옥신공과 영사태화를 똑바로 겨누었다.

치이이잉.

막 몸을 일으키는 금궁오괴를 한꺼번에 후려갈기는 어둠. 사신검의 파괴적인 힘이 마치 다섯 마리 호랑이가 달려들 듯 뻗고.

촤르르르.

파도처럼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을 한꺼번에 집어삼킬 듯 일어나는 검세. 거친 바다를 그려낸 유리검이 또 소름이 끼치게 차가워진다.

해원기의 정수리 위에 어린 군림검의 광구는 그대로건만,

검상이 바뀌었다.

광상의 어검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하게 일어나는 금궁오괴에겐 흑백연주오절검의 오호단문이,

경옥신공과 영사태화에는 오악검법 중의 동악 해운파랑검과 북악 복룡검식이.

어색하게 일어서던 금궁오괴의 동작이 갑자기 빨라졌다.

다섯이 서로 팔짱을 끼면서 어깨를 바짝 붙이는 모습. 새 탈을 쓴 머리와 어깨를 바짝 옴츠려 한 덩어리 벽이라도 된 것처럼.

오호단문의 사신검을 정면으로 맞설 자세다.

퍼엉!

폭음과 함께 새 탈과 전신에 걸친 옷이 갈가리 찢겨나가고.

벽이 무너지듯 금궁오괴가 한꺼번에 옆으로 나뒹구는데,

어째 비명 소리 하나 없다.

조양선사의 두 손바닥은 더욱 부풀어 올라 누른 금빛이 완연하고, 그 손바닥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해운파랑검을 통째로 눌러갈 때.

암야무명의 신형은 그야말로 물뱀처럼 꿈틀거리며 검은 천도 그에 따라 수십 조각으로 풀려 일렁거렸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펑, 펑.

해운파랑검을 밀어내는 거대한 손바닥, 복룡검식을 풀어내는 검은 천.

비천경혼음마검에 놀라면서 경각심을 올렸나. 전력을 다한 대응이 능히 유리검을 버텨냈으나.

그래도 한 걸음씩 옆으로 비켜서지 않을 순 없었다.

어검의 대법이 검강을 내뿜고 검경을 날리더니,

이번엔 그저 광대한 검기.

그런데 이 검세가 더욱 무겁다.

그래도 겨우 잡은 반격의 틈.

나뒹구는 금궁오괴에는 눈길도 보내지 않고 조양선사과 암야무명이 빠르게 자세를 고쳤다.

조양선사의 두 발이 연달아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부풀어 올랐던 손바닥이 확 줄어들면서 무형의 기세가 용솟음치고,

암야무명이 꿈틀거리던 전신을 마구 떨어대면서 불꽃처럼 일렁이던 검은 천이 저절로 말려 검은 구렁이가 된다.

“합!”

“죽엇!”

기합과 고함.

무형의 기세가 눈 깜짝할 새에 해원기의 머리를 쪼개오고, 검은 구렁이 한 마리는 허리와 다리를 동시에 물어뜯었다.

흐릿해지는 해원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조양선사와 암야무명 모두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왜 흐릿하게 보일까.

오소민을 업은 엽산초부는 해원기보다 더 알아보기 어렵지만, 그 이유를 따질 새가 없다. 선수를 다시 뺏겼다간 무슨 검이 날아들지 모르니까.

해원기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앞뒤를 막은 적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지 않은 건 다행이랄까.

몇 번이나 겪어봤기에 동창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자들이 쓸데없는 겉멋에 절어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

오소민과 엽산초부를 지키며 이 포위를 벗어나려고 처음부터 신령검역을 시전 했었다. 백여 명의 반룡령 무리를 일거에 무너뜨렸듯이.

금궁오괴, 조양선사, 암야무명을 상대하면서 대학사의 발을 묶어둘 셈.

물론 높은 경지에 이른 자들은 신령검역 안에서도 어떻게든 제 능력을 발휘하겠으나 잠깐의 멈칫거림만으로 충분하다.

한데 눈에 비치는 범위 전부를 가두던 검역이 발동하지 않는다.

운해신조경의 영향인지, 지켜야 할 두 사람을 의식해서인지.

해답을 얻기 전에 군림검의 어검대법은 시작되었고,

어검과 검강, 검경과 검기가 생각하는 대로 펼쳐졌다.

이런 적은 처음.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전혀 궁금하지가 않았다.

아랫배에서 들끓는 수정지기, 머리에서 울리는 풍뢰성. 이 둘이 하나로 이어져 쉼 없이 운행하면서.

그저 필요에 따라 검을 쓸 뿐.

박대정심을 목표로 익혔던 수많은 이치를 아무런 구애 없이 엮어낸다.

머리 위에 광구로 자리한 군림검도, 양손으로 연달아 펼친 검상도 때맞춰 구현된 것이요,

찌르고, 후려치고, 베고, 묶는 변화가 다음의 변화를 이끈다.

처음 발검제형, 다음 오호단문. 군림검에 이은 사신검이 두 번이나 금궁오괴에 격중했으나 전해지는 느낌은 철판을 두드린 것 같았다.

팔다리도 상하지 않은 기괴한 자들. 철판이라도 뚫어낼 검강이었건만.

조양선사와 무명암야도 고수에 걸맞게 비장한 절학으로 맞서서, 누른 금빛으로 부푼 손바닥과 불꽃처럼 일렁이는 검은 천이 연달아 검상을 막아냈다.

흑백연주오절검, 해운파랑검, 복룡검식이 전부 맞부딪혀 흩어졌다.

무산(霧散).

가공할 힘줄기가 안개처럼 흩어졌다고 해야 할까.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 헛되이 공력만 쓰였으니 힘이 빠질 만도 한데. 해원기의 얼굴엔 얼핏 미묘한 표정이 스칠 뿐.

무산된 모든 검력(劍力)이 정말 안개처럼 어느새 모여들기에.

광구로 회전하는 군림검이,

주위에 흩어지는 충돌의 여파를 남김없이 끌어 모아서 한 겹 한 겹 쌓아가니.

안개가 짙어지면 구름이려나.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흩어진다는 운소무산(雲消霧散)과는 정반대다.

해원기의 흐릿해지는 신형이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에 왼손은 오른손을 이끌고 오른손은 왼손을 따르는 모양.

우르르르.

바람이 우레로 울면서 주위에 무서운 압력이 휩쓴다.

아득한 신기(神氣)가 종횡으로 엇갈려 만든 그물. 재단경위의 저사직금이 움찔거리는 금궁오괴를 지면 째 얽어서 굴려대는 게 무슨 빗자루질 하듯.

풍뢰를 그물로 엮은 신왕검이 수십 수백의 검으로 변할 때,

그 앞은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으로 화했다.

지극한 변화. 극변(極變)은 무변(無變)이러니. 폭풍이 불기 전엔 고요한 법이고, 우레가 치기 전엔 모든 것이 잦아든다.

무형의 기세로 머리를 쪼개려는 조양선사와 검은 구렁이로 하반신을 물어뜯으려는 암야무명의 주변 공간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극변의 신왕검을 이끈 무변의 적멸검.

조양선사의 손바닥, 암야무명의 구렁이. 해원기에게 이르기도 전에 맥없이 주춤거리고, 그 위로 금궁오괴의 몸뚱이가 폭풍처럼 덮쳐들었다.

콰앙!

신왕검과 적멸검만이 아니라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의 공격도 뒤늦게 금궁오괴에 모이면서 엄청난 힘이 폭발했다.

지면이 쩍 갈라지고 흙과 돌이 분수처럼 치솟는 가운데,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이 금궁오괴와 뒤엉켜 뒤로 날아가니.

해원기의 군림검과 사신검도 막아내던 금궁오괴의 몸뚱이다. 지독한 반탄력에 중심이 무너진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이 그대로 현 학사를 덮쳤고,

그 뒤의 남 학사와 주 학사, 팽조린과 두 명의 갑사까지 기세에 휩쓸려 버렸다.

와당탕.

갑사 둘에게 의지하던 팽조린이 억지로 나서지 않았다면 죄다 엉망진창으로 뒹굴었을 터.

“이놈!”

“뭐, 뭐냐!”

팽조린과 주 학사가 노성을 지르는데.

돌연.

“멈췃!”

첨유진이 고함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황망히 검은 섭선을 내던진다.

슈왕.

톱날을 두른 것처럼 지독한 경기를 품은 섭선은 어검술에 버금가는 위력.

그러나.

눈치 빠른 첨유진이 그렇게 서둘렀어도 해원기의 두 발은 이미 바닥에 깔린 검은 돌, 절후석을 번갈아 밟은 후였다.

엉망진창으로 뒤엉켜버리는 바람에 세 학사의 발은 자신도 모르게 절후석에서 떨어졌고,

고오오오.

공간이 확 뒤집히면서 눈앞이 새까매진다.

화산이 터진 것처럼 어디선가 쏟아져 내라는 시커먼 구름. 사시지역 밖에서 시야를 가렸던 흰 구름이 아니라 숨이 막힐 듯 무거운 먹구름이다.

멈췄던 운해신조경이 다시 움직인다.

죽을 뻔했다가 의형제들의 희생으로 살아난 엽산초부다. 온갖 경험과 안목을 지녔다고 자부할 그였지만, 바보처럼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오소민을 업고 일어나려고 한쪽 무릎만 꿇었던 자세가 언제 책상다리로 주저앉았는지도 모르겠다.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안에서 직접 겪는 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자신과 오소민을 감싸듯 눈앞에 펼쳐지는 겹겹의 안개. 그게 일종의 고심한 검기가 적층(積層)된 것이란 걸 먹구름으로 바뀌면서야 깨달았다.

먹구름.

엽산초부가 둘러보는 모든 곳이 자욱한 먹구름에 덮였고, 아득한 하늘도 한밤중처럼 캄캄하다.

자신이 주저앉은 곳은 가파른 언덕 한구석. 어두운 천지 속에 높다란 언덕 하나뿐이라니 대체 그 많은 동창의 무리는 어디로 갔는지.

기막힌 상황에 넋이 빠질 지경이다가,

철컥.

검을 검집에 꽂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해, 해 공자?”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도느라 엽산초부의 뒤쪽에 선 해원기가 미간을 좁힌 채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엽산초부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껌뻑거렸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부서진 돌조각이 가득 쌓였고, 그 사이로는 녹슨 쇠기둥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특히 맨 위에는 마치 문틀과 같은 모양이 비스듬히 쓰러져있는데, 그 높이가 몇 길이나 될 듯.

본래 산봉우리처럼 뾰족하게 꼭대기를 만들고 그 꼭대기에 또 문틀을 높이 세웠던 형태로 보이지만.

이런 구조나 건축은 본 적이 없다.

말없이 그 문틀을 보던 해원기가 비로소 눈길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설마 여기가 그곳일 줄은. 아, 괜찮습니까, 아저씨?”

영문 모를 소리.

“네. 그런데, 여기가, 어딥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기 어렵고, 동창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일. 우선 현재 위치부터 확인해야 한다.

해원기가 몸을 굽히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엽산초부는 본디 대관원의 호원가신. 과거에 청강주를 선사했던 사람이구나.

“마침 우리가 있던 근처에 한로(寒露)부터 입동(立冬)까지의 절후석이 있었지요. 현재의 때에 맞추어 운행하면 운해신조경이 완전히 열릴 것으로, 그렇게 역정대관인 봉황의 자리로 피할 생각이었는데. 아예 금왕(禽王)인 신조의 자리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은나라가 현조를 숭상했다던데 그들이 숨겨놓은 신묘에는 그 현조를 은에 내린 천제(天帝) 소호(少昊)를 모셨다니. 더불어 저 솟대, 아, 저 문틀은 횃대지요. 그 횃대에 새긴 글귀대로라면 이곳은 바로.”

운해신조경은 바로 신묘 그 자체. 뜻밖에 가장 지고한 신위 바로 앞에 이르렀으나.

신위가 횃대란다. 어이없는 말에 엽산초부가 눈에 힘을 주고서야 문틀 위쪽에 새겨진 흐릿한 글귀를 겨우 알아보았고.

‘천금(千禽)의 시렁은 다 부서졌고, 천응(天應)의 고개도 다 무너졌도다.’

그 글귀를 다 새기기도 전에 이어진 해원기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도 아시겠지요. 천외육가의 하나, 천금가(千禽架) 천응령(天鷹嶺)의 옛터랍니다. 후.”

말을 마친 해원기가 다시 탄식하려다,

문득 아련히 귓가를 울리는 소리에 머리를 젖혔다.

삐잇.

아직도 운해신조경 안일 텐데.

홀연히 동강의 울음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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