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79화 (279/410)

제70장 가파영붕(架破嶺崩) (3)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대학사라는 금포 노인의 가는 눈매가 잔뜩 비틀렸다.

밀각육학사의 우두머리인 수보, 누구나 우러러보는 자리요, 같은 육학사에 속한 나머지 다섯도 함부로 자신을 대하지 못한다.

조정의 내각을 고스란히 흉내 낸 구조이니만큼 수보는 바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

궁상에 신화의 힘이 깃들었다는 소식이 없었다면 이렇게 직접 나서는 일도 없었을 터.

이십사아문의 내분 같은 건 그저 귀찮음을 더하는 자질구레한 문제에 불과하다.

낙양에서 어정쩡하게 발이 묶인 황 학사를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이,

남은 네 학사를 전부 동원해 일을 처리해버리면 그만.

하지만, 운해신조경이 예상보다 먼저 발동한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이런 장면이 되었으니.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방해꾼들의 목을 베고 싶었으나.

대학사로서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제대로 학사들의 보고를 받고, 상황을 파악한 후에 어울리는 적절한 결정을 내리고.

그게 바로 수보, 즉 승상의 역할이잖나.

그런데.

이 더벅머리 젊은 놈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학사들이 셋에 밀각 각주를 비롯한 장교와 대부가 백 명이 넘게 모였거늘 겁먹은 기색도 없이.

절세검왕이든 뭐든.

해원기가 엽산초부와 나눈 대화의 내용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짜증이 확 일었다.

시선이 해원기를 넘어 뒤쪽으로.

“각주는 무얼 하는가? 상황을 정돈하려고 내보낸 이들이 다 모였고, 남 학사의 오괴(五怪)까지 있음에야. 이미 내린 처분, 속히 시행하게나.”

여전히 의젓한 목소리로 재촉하자,

백 학사를 살피던 첨유진이 눈을 껌뻑이다가 벌떡 일어났다.

“명을 받습니다!”

기운찬 대답. 자신을 지키던 호장 둘에게 백 학사를 맡기고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선다.

장안에서 체신을 잃었고, 종루에서 곤욕을 치르고 도주했던 첨유진이다.

이 운해신조경 안에서도 해원기가 팽조린의 팔 하나를 끊는 것까지 본 주제에,

대학사의 명을 받자마자 다시 기가 살아난 듯.

검정 섭선을 착 펼치며 좌우를 둘러본다.

“대학사의 말씀을 다 들으셨겠지요. 그러면 금궁오괴(禁宮五怪)는 나무꾼과 혼절한 유룡개를 잡고, 조양선사(朝陽仙士)와 암야무명(暗夜無明) 두 분이 절세검왕을 맡도록. 되도록 생금하는 걸 잊지 말고.”

대학사의 재촉하는 말이 지휘권을 넘긴다는 뜻이었나.

남 학사 앞의 다섯과 현 학사 쪽으로 밀려났던 인물 둘이 선뜻 위치를 바꾼다.

오구지신을 맡았던 다섯이 금궁오괴. 새 탈을 뒤집어쓴 그대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서 동쪽으로.

심의의 중년인이 조양선사, 전신을 검은 천으로 가린 자가 암야무명일 텐데. 이 둘은 가벼운 걸음으로 해원기를 향하니.

엽산초부 쪽으로 몸을 틀었던 해원기가 비스듬히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는 대학사와 백여 명, 옆으로는 세 명의 학사와 그 무리. 백 학사와 호장 둘이야 가장 멀리 있지만, 금궁오괴는 완전히 등 뒤에 늘어선 셈.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은 처음부터 신경 쓰였던 고수들, 그렇다고 엽산초부와 오소민을 노리는 금궁오괴를 무시할 수도 없어서.

엉성해 보이는 이 대형이 밀집한 포위보다 더 교묘하게 압박을 가한다.

차라리 반룡령 무리를 상대할 때처럼 한곳에 몰려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겅중거리며 뛰었던 검은 돌이 더는 아까와 같은 공간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남 학사가 이미 해원기의 움직임을 통해 운해신조경의 숨겨진 비결을 눈치 챘기에.

세 학사가 전부 검은 돌을 밟은 이상, 사시지역은 완전히 고정되었다.

이제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엽산초부와 오소민을 지키면서.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조화부인을 밀어붙이며 공간의 변화를 극도로 일으키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아니, 대학사가 백여 명을 이끌고 달려올 때라도 어느 한쪽을 정해 뚫고 나가기라도 했다면.

그러지 않고 평소답지 않게 입만 놀린 건 해원기의 실책일지도.

‘고구마 대장’이라는 답답한 성격이라서 ‘바부탱이’짓을 한 게 아니다.

단조관을 깨고 사시지역에 뛰어들어 엽산초부를 구할 때부터 눈에 들어왔던 검은 돌.

운해신조경이 본래 어떤 형태인지 모르기에 언제 생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사라는 자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건 분명했고.

그 검은 돌이 기이하게 해원기의 눈길을 끌었다. 마치 예전에 알았던 사이처럼.

그래서 엽산초부를 구하고 나서 계속 학사란 작자들이 떠들어대는 걸 참고 있었다. 오소민을 찾는 게 무엇보다 앞섰으니까.

둥글게 원을 그리며 깔린 검은 돌. 그 위에는 마모된 흔적만이 흐릿하게 남아있었으나,

동시안은 그 흔적에서 본래의 형상을 유추해냈다.

그건 새 그림. 그런데 주위의 검은 돌이 조금씩 다른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새 그림이라면 나무와 꽃을 같이 배치하기 마련. 소위 화조도(花鳥圖)일 텐데.

검은 돌 위의 그림들은 의외로 하늘과 곡식이 배경이었고,

바람, 비, 서리, 눈에 곡식이 자라고 여물고 떨어지는 그림. 더구나 새들도 그 배경만큼 다양한 종류가 등장하는 듯했다.

짧은 시간, 제한된 시야에서 살펴본 검은 돌은 몇 개가 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해서 이 검은 돌이 무엇이고 수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

스물네 개의 절후석이었다.

사시지역(四時之域)은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로 이루어지고,

바르게 운행하지 않으면 공간이 제멋대로 뒤집힌다.

구호농정, 오치공정, 오구지신을 다 합하면 열아홉. 이들을 거느리는 사시지관은 바로 현백청단(玄白靑丹)의 넷.

현조는 제비이니 춘분에 와서 추분에 떠나는 고로 사분지관(司分之官), 백조는 백로이니 하지에 울기 시작해 동지에 멈추는 고로 사지지관(司至之官), 청조는 왜가리이니 입춘에 울기 시작해 입하에 멈추는 고로 사계지관(司啓之官), 단조는 금계이니 입추에 이르러 입동에 떠나는 고로 사폐지관(司閉之官)이라.

과거에 배웠던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분(分)은 낮과 밤이 똑같을 때요, 지(至)는 그중 하나가 가장 길 때고,

계(啓)는 열어서 비로소 시작하는 때요, 폐(閉)는 닫혀서 마침내 끝내는 때이다.

천시(天時)의 운행이요, 소장(消長)의 규율이니,

‘음양의 조화이면서 태극이 무극임을 가리킨다. 이건 바로 탁 소숙이 가르쳐주신 그 이치!’

이 운해신조경의 심오한 비결, 그 핵심이 하필 예전에 탁 소숙이 일러준 이치에 통할 줄이야.

어째서인가.

엽산초부를 구하고 오소민을 찾으려고 애쓴 결과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경이(驚異).

더구나.

이 경이가 해원기의 내부를 격렬하게 흔들어댄다.

엽산초부는 백초환으로 일단 내상을 다스려놓았으나,

오소민에게는 쓸 수가 없었다.

혼절해서 입을 벌리기 어렵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혼절한 원인이 무엇인지 당최 모르겠다.

외상은 거의 없는 편, 신공장력에 격중된 흔적도 보이지 않고, 중독이라면 제탁지검이 먼저 발동했을 것이다.

맥이 대단히 빠르고 혈행도 급해서 마치 지나친 활동으로 인한 피로나 과도한 음주에 취해 곯아떨어진 것 같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단내 나는 숨결. 그러나 이렇게 깨어나지 못하는 건 정상이 아니다.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려놓으려고 오소민의 손목을 쥐고 신왕공을 끌어올렸었다.

그런데.

그때부터였다.

오소민의 이상을 되돌리려는 의도였으니 당연히 청정력(淸正力)이 고양되어야 하거늘.

감로보병의 수정지력이 돌연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운해신조경의 비결을 궁리하느라 복잡해진 머리에 풍뢰가 환하게 몰아치더니,

수정과 풍뢰가 하나로 이어져 용솟음치기 시작한다.

스윽.

엽산초부의 어깨를 가만히 짚는 왼손.

“아저씨, 여기서 오 형을 지켜주십시오.”

“어, 해…… 네, 넷.”

웃음을 그치고 다시 긴장하려던 엽산초부가 전신을 관통하는 맑은 기운에 그저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솨아아아아.

짚었던 왼손이 떨어지기 전에 주변을 휘감고 사방으로 퍼지는 거대한 바람.

지면을 대패로 민 것처럼 흙먼지가 자욱하게 치솟고,

뒤로 반 바퀴 돌아가는 발을 따라 공간이 울어댄다.

우르르르르.

이 뇌명에 놀라 깨어난 듯 홀연히 머리 위로 날아오른 고검.

지면을 깎으며 퍼지는 바람과 공간을 채우며 울어대는 우레를 굽어보며 빛으로 화한다.

위이이잉.

풍뢰를 이끄는 군림검의 찬란한 빛이 해원기의 정수리 바로 위, 태양처럼 떠오르자.

해원기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양손을 좌우로 내질렀다.

번쩍.

한 손은 금궁오괴, 또 한 손은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이 있는 쪽. 검왕오형의 발검제형을 양쪽으로 펼쳤으나.

태양 같은 군림검의 광구(光球)에서 빛줄기가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간다.

금궁오괴에겐 다섯 줄기,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에게는 각각 하나씩.

전부 검의 형상을 띤 일곱 줄기는 그야말로 일곱 자루의 광검(光劍)이었다.

따다다다당.

미처 막아낼 틈도 없이 금궁오괴 다섯이 전부 광검에 찔려 나가떨어지고,

조양선사와 암야무명이 다급히 몸을 뒤집었다.

옥빛이 환하게 일어나자 힘차게 두 손바닥을 떨치는 조양선사. 그 손바닥에는 또 금광이 일렁인다.

펑.

다급한 대처임에도 광검을 제자리에서 막아내는데,

암야무명은 더욱 기괴한 반응. 검은 천이 흩날리며 광검과 마주치자 전신을 기묘하게 꿈틀거릴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예상했던 대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들.

더구나 광검을 막아내자마자 곧장 몸을 날려 닥쳐든다. 광검이든 뭐든 공격이 무산된 틈을 노리는 반격.

조양선사의 쥐었다가 펴는 쌍장은 순식간에 두 배나 커져 금광으로 물들었고,

암야무명의 검은 천은 수초처럼 어지럽게 흔들려 장막처럼 밀려온다.

“찻!”

짧은 기합은 조양선사가 내뱉은 듯.

그러나 두 배나 커진 쌍장도, 장막처럼 밀려오는 검은 천도 해원기를 노리기 전에 뒤집혀야만 했다.

“음?”

입 한 번 벙긋하지 않던 암야무명이 놀란 신음을 삼키면서 뱀처럼 휘돌고, 조양선사는 쌍장을 옆으로 밀면서 허리를 꺾는다.

그러지 않았다간 뒤에서 날아드는 무서운 기세에 머리통이 날아갈 테니까.

퍼펑. 찌이익.

어깨를 흔들며 겨우 중심을 잡는 조양선사.

“이게 무슨……?”

길게 찢겨나가는 검은 천 한 자락에 암야무명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분명히 광검을 막았는데 이 무서운 검기는 어디서 날아든 건가.

게다가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다 막아냈는데 왜 내부의 경맥이 떨어대는가.

해답은 엉뚱한 입에서 튀어나왔다.

성격 급한 주 학사가 기함하고,

“이기어검, 아니, 어검대법이라고? 저런 어검대법이 어디.”

그 말끝을 채간 이는 바로 현 학사.

“어검대법에 비천경혼음마검을 끼워 넣다니!?”

둘 다 남 학사의 전음을 들으면서 운해신조경의 비밀을 풀려고 은근히 바닥의 검은 돌을 살피던 중이었으나.

풍뢰와 태양, 그리고 광검과 이에 이은 이유 모를 검기에 넋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들어본 적도, 아예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는 광경.

절세검왕에 대한 그간의 기록을 익히 아는 자들이다. 무공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혼자서 결계를 구축할 수 있고, 심지어 심병지권(心兵之圈)이라는 심도의 경계까지 이룬다고 했지만.

이건 그 심병지권조차 뛰어넘는 게 아닐까.

풍뢰가 결계면 태양은 어검대법의 심병지권일 터. 그런데 태양 같은 검이 공간을 누비는 게 아니라 일곱 자루나 되는 광검을 내뿜었다. 그 일곱 자루는 일종의 검강(劍罡)이요, 어디서 출현했는지 모를 마지막의 비천경혼음마검은 또 은형의 검경(劍勁).

하나하나의 무공은 알아보았어도 이걸 혼자서 한꺼번에 엮어낼 수 있다니.

솨아아아, 우르르르.

여전히 풍뢰성이 공간을 메우고, 해원기의 머리 위에는 찬란한 광구가 뜬 채. 차츰 해원기와 그 곁에 붙은 두 사람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환각에라도 빠진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