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78화 (278/410)

제70장 가파영붕(架破嶺崩) (2)

본래 운해신조경은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비결.

밀각육학사가 몇 년이나 공을 들이고서야 겨우 운용의 단서를 찾았고, 그것도 육학사들이 전부 참가해 계역(界域)의 변화를 살펴야 완전히 풀릴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미지의 비결이니만큼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연구할 필요가 있었으나,

갑작스럽게 내려진 지시.

하백지령(河伯之靈)을 수거하러 간 황 학사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운해신조경의 운해(雲海)를 일으키는 사시지역의 변화를 제때 따라가지 못해서,

사시지관을 맡은 남, 주, 현, 백의 네 학사까지 휘말려버렸다.

육학사 여섯이 다 있었다면 상하와 좌우를 다른 두 학사가 세심하게 살펴 충분히 대응했을 터.

급한 대로 육학사의 우두머리 격인 수보가 외부에서 전체의 흐름을 헤아려 적시에 도움을 주는 식으로 꾸리긴 했지만,

무엇보다 계역이 갑자기 발동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외곽에 부진(符陣)의 결계를 설치하던 제독사대수비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제진(祭陣)의 의례를 맡을 구호농정과 오치공정을 다급히 위치에 보내자마자.

사시지역이 역류하며 닫혀버렸기에.

남 학사는 오구지신으로 운해를 헤쳐 신조경(神鳥境)의 열쇠를 찾는 역할이었다.

그런 그도 계역의 돌연한 발동에 오구지신을 모조리 잃어버린 채 기이한 환경 속을 맴도는 신세가 되었고,

간신히 계역의 흐름을 되돌릴 틈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오직 자신이 남(藍), 즉 청조(靑鳥)의 관직을 담당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사시지역이 역행에서 순행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원래의 계산대로라면 주 학사가 단단히 닫아두어야 했을 단조의 관문이 깨져버렸으니.

사시지역이 열린 상태로는 다음 윗자리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더구나 사시지역이 다 열린 줄 알았더니 주 학사와 현 학사만 흩어진 자들을 데리고 모였을 뿐.

백 학사가 보이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일까.

잃어버렸던 오구지신은 엉뚱하게 늙은 나무꾼 하나와 술래잡기를 한듯하고, 난데없이 절세검왕이 끼어든 것도 수상쩍다.

그래서 우선 힘으로 찍어누르자는 주 학사의 단순한 제안에 동의했지만,

계속 가슴속에 걸리는 찜찜함.

막 도착해 아직 어수선한 주 학사나 현 학사와 달리, 남 학사 자신은 해원기와 몇 마디라도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던가.

이 운해신조경이 궁상이란 걸, 또 궁상이 어떤 직위로 구성되는지까지 다 아는 더벅머리.

절세검왕이라는 저 더벅머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별안간 발을 구르진 않았으리.

두 눈이 자신도 모르게 해원기가 밟은 돌을 향하고,

물결치듯 흔들리는 공간을 느끼자마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헉, 이건 절후석(節候石), 절후석이었구나!”

몇 년이나 골치를 썩이게 했던 의문이 확 풀리는 바람에 목소리가 부르짖듯 높아졌다.

풀린 건 남 학사의 의문만이 아니어서,

바닥에 깔린 검은 돌을 따라 퍼져가는 공간의 물결이 동쪽 끝부분에 보이는 황량한 평지를 물로 닦는 것처럼 지워나갔다.

스스슥.

그곳에는 백발백염의 백의 노인이 양손을 기묘하게 꼰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그 뒤에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는 조화부인.

그리고 옆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 보인다.

남 학사가 ‘절후석’이란 소리를 부르짖을 때,

해원기는 이미 엽산초부의 소매를 쥔 채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 동작이 이상하다.

해원기가 남쪽의 단조관이란 담장을 뚫고 들어왔고, 지금 동쪽 끝부분에 조화부인이 나타났으니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삼십 장 남짓.

엽산초부의 소매를 쥐었어도 한 번의 도약으로 바로 이를 거리건만,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겅중겅중 뛴다.

상승의 경공은 다 잊어먹은 것처럼.

백의 노인은 육학사 중의 백 학사일 터. 검은 돌의 진동이 퍼지면서 하화와 오소민의 기척을 다시 포착했고, 조화부인까지 모습을 드러냈으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청년은 오소민이 틀림없다.

한달음에 달려가야 마땅할 해원기가 갑자기 이런 희한한 짓이라니.

그러나 더욱 놀라운 장면은 그다음이었다.

해원기가 겅중거리며 뛰자 현 학사보다 첨유진이 먼저 눈을 크게 떴고, 그 곁에서 무심한 모습을 보이던 둘이 신쾌하게 몸을 날려 덮쳐오는데.

심의를 걸친 중년인과 전신을 검은 천으로 가린 인물.

해원기가 남다른 고수라고 여겼던 자들답게 대단한 신법이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덮쳐들던 신형이 와락 멀어진다.

“어?”

심의 중년인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토한 게 무슨 신호라도 되는 양, 그 둘만이 아니라 동창 무리가 죄다 뒤로 밀려나고,

반면에 동쪽 끝에 있던 백의 노인과 조화부인이 순식간에 해원기의 앞으로 끌려왔다.

그야말로 어, 어하는 순간에 십 장도 안 되게 좁혀진 거리.

엽산초부가 백의 노인을 향하고 해원기는 전신을 바닥에 바짝 붙인 채 두 팔을 위아래로 펼쳤다.

어안이 벙벙하던 조화부인의 표정이 싹 변하면서 두 손이 급하게 튀어나오고,

그 와중에도 한쪽 발이 빠르게 백의 노인을 건드린다.

삽시간에 시야를 전부 뒤덮는 조화부인의 하얀 손.

퍼펑!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가운데,

“절세검왕이! 여기 백 학사님이 위험해요!”

조화부인이 빽 소리를 지른다.

백초환을 복용하긴 했으나 엽산초부의 내상에는 미봉책일 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백 학사를 견제하는 정도였는데도 조화부인의 무수한 손 그림자에 충격을 받았다.

해원기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오소민을 구출하는 것.

한 손은 대우신장으로 밀어내고, 다른 한 손으로 오소민의 팔을 붙잡았으나 백 학사와 조화부인을 밀어내긴커녕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대단한 위력을 가진 조화부인의 수법.

대우신장을 펼쳤던 손을 뒤집어 엽산초부의 앞을 가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겅중거리며 나아가던 걸음이 거꾸로 바뀌었으니.

흙먼지 속에서 동쪽이 도로 수십 장이나 벌어지고, 멀어졌던 심의 중년인과 검은 천의 인물이 잡아당긴 것처럼 닥쳐든다.

“옥수사명(玉手司命)……?”

[아저씨, 물러납니다.]

조화부인의 수법에 놀랄 새도 없이 해원기의 전음에 엽산초부가 당장 몸을 틀었다.

노련한 그라 상황이 급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해원기를 따라 겅중거리며 뛰었기에 아직도 일종의 진법 안에 처한 상태라는 걸 알고, 적들이 한꺼번에 닥쳐드는 판. 혼절한 사람 하나를 지키며 싸우긴 어렵다.

감시도를 등 뒤로 돌려 양손으로 잡고는 등을 내밀었다.

“해 공자. 음?”

오소민을 맡기라는 뜻.

오소민을 업자마자 전력을 다해 달릴 셈이었는데, 그만 몸이 굳어졌다.

원형을 그리는 검은 돌 바깥은 이미 운해가 해제된 평범한 황무지. 처음에 진입했던 무성한 풀밭 쪽을 보았으나 풀밭 대신에 백여 명이 벌떼같이 몰려드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니.

연갑을 걸치고 서슬이 퍼런 병기를 꼬나 쥔 자들이 절반, 회의 장포를 입고 얼굴에 면사를 드리운 자들이 또 절반.

그들 가운데에는 넉넉한 공간이 있고, 금포 노인이 소매를 펄럭이며 미끄러지듯 다가오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허허허, 절세검왕? 기막힌 만남이구나.”

각각 검은 돌 위에 발을 올린 남, 주, 현의 세 학사가,

“수보.”

가벼운 예를 취하는 것과 달리 나머지는 전부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인다.

“대학사를 뵈옵니다!”

팔 하나가 날아간 팽조린도 마찬가지. 예외는 호장 둘을 데리고 동쪽으로 달려간 첨유진뿐이었다.

“백 학사는 내상으로 혼절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화숙인이…… 으음?”

가라앉는 흙먼지 속에서 백 학사를 부축한 채 주위를 둘러보는 첨유진의 모습.

화숙인. 즉 조화부인의 모습은 그새 또 감쪽같이 사라졌다.

금포 노인이 웃음을 그치며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되었다. 그건 나중에 따질 문제지. 너는 밀각의 각주라면서 일의 경중도 모르느냐? 쯧쯧. 자, 남 학사.”

가볍게 첨유진을 꾸짖고 바로 돌리는 시선.

검고 굵은 눈썹 밑에 웃는 듯 가는 눈, 얼굴 피부가 관옥처럼 빛나서 단정하게 다듬은 회색 수염이 없었다면 젊은 나이로 오해할 정도의 용모요.

육척장신에 마치 상쾌한 바람이라도 맞는 듯한 자태는 그야말로 임풍옥수(臨風玉樹).

금포 노인의 시선을 받자 남 학사가 다시 목례를 보내고,

“예. 운해신조경이 의도치 않게 발동하는 바람에 혼란이 있었습니다. 역행으로 닫혔던 사시지역이 순행으로 풀리긴 했습니다만, 이 상태로 고착되면 역정대관으로 통하는 문을 찾을 길이 없지요. 다행히 단서와 함께 백 학사까지 찾았으니. 흠, 그런데 실종된 인원이 몇 됩니다. 개중에는 사대수비 중의 청성도.”

말을 끝내기 전에 금포 노인의 시선이 또 옆을 향한다.

“주 학사.”

“괜찮습니다. 쥐새끼들은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서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예상을 벗어난 부분이…… 에, 지금 수보가 보고 계시는 이 광경의 배경이 궁금해서. 저놈을 사로잡아야겠군요.”

성질 급한 주 학사도 얌전한 대답.

“현 학사.”

“네. 지금까지 보고된 내용에 누락이 좀 있다고 의심되더군요. 무공 수위, 내력과 주변 인연, 학식까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남 학사 덕에 운해신조경의 파해 방법을 파악했으니, 저도 주 학사의 의견대로 생금했으면 합니다.”

현 학사 역시 주 학사를 무시하는 듯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세 사람의 보고를 듣는 동안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금포 노인이 비로소 해원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웃는 듯 가는 눈에 은은한 빛이 맺히고,

“흠, 절세검왕이라. 그저 백년제일검사, 영세검주라는 엄청난 이름만 남긴 네 사부처럼 너도 신비투성이란 건가. 강호에 모습을 보인지 이제 반년 남짓, 참 어지간히 설쳐댔구먼. 그래, 네가 지금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알아듣겠느냐?”

온화한 음성이 타이르듯 묻는다.

해원기가 그제야 머리를 들었다.

동창 것들이 예를 취하든, 학사라는 자들 셋이 공손하게 보고를 올리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소민의 손목만 쥐고 있다가.

연갑을 걸치고 병기를 꼬나쥔 자들은 무장, 회색 장포를 입고 얼굴에 면사를 드리운 자들은 대부.

이른바 문무양반(文武兩班)을 백여 명이나 거느리고 나타난 금포노인은 밀각육학사의 우두머리인 대학사일 터.

해원기가 팔짱을 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밀각이란 건 이런 구조였구나. 그간 궁금하던 부분이 조금 풀렸네. 아저씨, 뭔가 이곳저곳을 흉내 낸 거 같지 않나요?”

오소민을 업으려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엽산초부가 올려다보자,

해원기가 말을 이어갔다.

“전에 동창의 밀각은 조정의 내각(內閣)을 본뜬 거라는 말을 들었죠. 내각 육학사의 지도자도 수보라고 불린다더군요. 에, 저기 남 학사는 주로 고대의 유적을 해석하고 술법에 능한 자일 거예요. 주 학사는 일종의 내부 감찰, 환관들끼리도 한 덩어리는 아닌 듯 동창이 이십사아문을 전부 지휘하지 못하니까. 음, 현 학사는 아마 무공과 인물 사항을 주로 담당하는 역할일까. 용호방과 풍운책이란 것도 저 사람이 주도했을 거로 여겨지고. 저 인사불성의 백 학사와 물귀신 잡는다고 설치던 황 학사도 각각 맡은 분야가 따로 있겠지요. 그 밑에 무장과 대부라는 명칭으로 졸개들을 늘어놓는 구조. 수보인 대학사는 승상(丞相)과 같은 직위겠지만, 이건.”

대학사라 불리는 금포 노인의 말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서,

차분하게 건네는 말에 엽산초부가 그만 쿡쿡 웃기 시작했다.

“헛, 맞습니다. 닮았군요. 그래도 불알 없는 것들이라 담이 작아서인지 왕후(王侯)는 어려웠나 보네요. 하하하.”

웃지 않을 수 있나.

새 탈을 뒤집어쓴 오구지신이란 다섯에게 곤욕을 치렀다. 지금은 그 오구지신을 포함한 스무 명이 뒤에 있고, 앞에는 우두머리가 백여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막아섰는데.

혼절한 오소민을 업은 엽산초부에게 한가로이 말을 건넨 해원기.

앞뒤를 에워싼 자들은 안중에도 없잖나.

그분.

해원기에게 그분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산해연고검(山海連孤劍), 오시단정세(傲視斷情世).

산과 바다를 외로운 검에 이은 채, 정이 끊긴 세상을 오연히 바라보던 그분이.

내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등에는 혼절한 오소민을 업어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처지건만.

엽산초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동창의 밀각이라는 것들이 어이없게도 지부의 오마왕과 오작위를 본떴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소롭기만 했다.

해원기의 미소도 더 짙어지고,

“그런데 또 자기들끼리 속고 속이더라고요. 십팔아문이 따로, 그러면 나머지 여섯 아문이 따로,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농간을 피우는 조화부인까지. 흠, 이렇게 머리를 세 개나 두는 수작까지 배우는 심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군요. 자기들이 무슨 처지인지 알아듣기나 할지. 쯧.”

대학사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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