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77화 (277/410)

제70장 가파영붕(架破嶺崩) (1)

한쪽 무릎을 꿇고 헐떡이던 엽산초부. 감시도를 짚고 용을 쓰면서 옆에 내려선 해원기를 얼른 알아보지도 못한다.

“허억, 이, 어엇, 회랑(回廊)이 어찌, 어, 해 공자?”

당황해서 초점을 맞추기도 어려운 듯, 두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는 시선에.

해원기가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바로 답했다.

“접니다.”

삼 장 거리에 늘어선 다섯. 전부 연한 회의를 입었고 머리에는 기묘한 탈을 뒤집어썼다. 연한 회의는 솔기를 넓히고 여러 겹을 덧대서 학창의 같은 형태요, 머리에 쓴 탈에도 깃털과 부리가 달렸으니 영락없는 새의 분장인데.

구분하기 어려운 똑같은 차림새지만, 손에 든 물건만은 다 달랐다.

편(鞭), 창(槍), 도(刀), 척(尺), 형(衡).

단창과 대도는 그렇다 쳐도, 편은 대나무를 짧게 깎은 듯한 모양, 척은 끝이 직각으로 꺾인 곡척(曲尺), 형은 무게를 재는 눈금이 촘촘히 박힌 저울대 그대로니 병기로는 드물게 쓰이는 것들.

물론 세상에는 별별 기문병기가 다 있기에 특별할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해원기는 대번에 이 다섯 명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엽산초부가 당황을 금치 못하고 ‘회랑’이라고 했었다. 해원기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엽산초부도 운해신조경에서 기이한 환경에 처했을 터. 더구나 병풍처럼 둘러친 담장 안이었으니, 아마도 회랑 같은 곳을 빙빙 돌았던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장소.

‘운해신조경의 운해가 전부 사라졌다. 핵심에 가까워졌다는 뜻. 방금 무너뜨린 담장에서 사폐지관의 흔적을 보았으니 여기부터는 사시지관(四時之官)의 영역이 되고, 저 다섯은 오구지신을 흉내 낸 것이다.’

구호농정, 오치공정, 오구지신. 그리고 그 위의 사시지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운해신조경의 발동에 맞추어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자들처럼 사시지관의 영역 안에 오구지신이 설치고.

엽산초부는 회랑에서 이 다섯과 계속 맞붙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다섯이라도 엽산초부를 이렇게 몰아세우다니.

오치공정을 맡았던 삼품장들보다 훨씬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는 방증이다.

교육은 편, 병권은 창, 형벌은 도, 건축은 척, 기물은 형. 새로 분장한 다섯이 무엇을 표시하는지도 짐작했으나,

이들은 이전과 달리 그냥 모양으로만 든 게 아니다.

요대자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오구지신이라고 전부 비둘기 탈을 뒤집어쓴 거냐? 동창에는 죄 무식쟁이만 있나 보다.”

우선 엽산초부의 상세를 돌볼 셈.

백초환을 건넬 틈을 얻으려고 일부러 말을 붙였는데.

“이거 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그려.”

새 탈을 쓴 다섯 뒤에서 불쑥 늙수그레한 음성이 나왔다.

훤히 드러난 오십 장 넓이의 황량한 평지. 아무것도 눈을 가리는 장애물이 없건만, 어디서 나타났을까.

새 탈을 쓴 다섯 뒤에 남색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 복건을 올린 노인 하나가 인상을 쓰며 일어선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아주 우스운 꼴이 되지 않았겠나. 준비는 부족한데 신경 쓸 곳은 자꾸 늘어가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판에 불청객까지 끼어들었지. 그래, 절세검왕까지 등장하셨다? 게다가 오구지신을 구분할 정도로 아주 박식하신 것 같으니. 흐흠.”

절반만 남은 눈썹에 엉성한 수염, 주름이 가득한 지친 얼굴은 남의 집에서 오래 붙어산 노복처럼 보여도.

조그만 눈에서 뿜어지는 기광은 사람 속을 꿰뚫는 것 같다.

해원기가 한 걸음 움직여 엽산초부 앞에 섰다.

“나를 알아보는군. 밀각에서 나왔느냐?”

동창에서 처음 보는 인물이 자신을 알아보는 경우는 대부분 밀각 소속일 때였다.

남색 장삼의 노인이 히죽 웃으며 수염을 긁는다.

“아하, 차림새와는 달리 예의를 따진다고 했었지. 깜빡했구먼. 노부는 남(藍) 학사라고 한다네. 해, 대, 협.”

말투는 나긋해도 해원기에게 대협이라는 호칭을 하나씩 끊어 부르는 데에는 은근히 조소가 담겼다.

남 학사라. 해원기가 되레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밀각의 육학사는 전부 걸친 옷 색깔로 이름을 짓는군. 희한한 짓을 좋아하는 자들의 버릇일까?”

낙양 용문석굴에 나타난 자는 황삼을 걸친 황 학사였으니까.

남 학사라는 노인이 마주 웃음을 터뜨리고,

“허허허, 그렇게 되나? 허나, 오핼세, 오해야. 육학사 중에 성을 속이는 이는 없거든. 그나저나 무공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뛰어난 면이 있어서 깜짝 놀라게 되었어. 오구지신이란 이름도 아는 데다가, 에, 이왕이면 뭐가 다른지 일러주겠나? 이 무식쟁이에게.”

처음부터 들었던 해원기의 말꼬투리를 슬쩍 잡자,

해원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메추리, 뻐꾸기를 새매나 물수리와 헷갈리진 않지. 이곳이 어딘지 뻔히 알고 왔으면서 이렇게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건 각주니 주국이니 하는 졸개들이 모일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지. 어째 손이 좀 딸려 보이는데, 흠, 이십사아문은 다 어디서 뭘 하는지. 쯧쯧.”

오히려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기까지.

웃던 남 학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메추리, 뻐꾸기, 새매, 물수리, 산비둘기.

오구지신을 정확히 알고 있고, 아울러 자신의 속내뿐 아니라 이십사아문을 들먹였으니.

남 학사의 흉하게 비틀린 눈빛이 해원기의 얼굴에 머물렀다.

절세검왕이라는.

이 더벅머리 젊은 놈은 뭘 어디까지 아는 건가.

남 학사가 표정을 고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해 대협이 노부의 고충을 알아주시네. 참 고마운 일이고, 에, 기왕에 봐주신 김에 어쩐 일로, 또 어떻게 여기까지 왕림하셨는지 밝혀주셨으면 좋겠소만?”

노복이 상전을 대하는 것처럼 말투가 싹싹해지는데.

해원기가 평소의 덤덤한 얼굴로 돌아가 시선을 멀리 던졌다.

황량한 평지. 그러나 이 남 학사가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 알지 못했으니 비록 구름은 흩어졌어도 상황이 완전히 풀린 게 아니다.

담장을 뚫고 들어오기 직전에 들렸던 폭음. 그리고서야 엽산초부의 목소리를 듣고 하화의 보광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광이 보이지도, 오소민의 기척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직도 운해신조경의 영향이 남아있다.

“그보다, 이 운해신조경은 참 신기하외다. 그다지 넓지도 않은 곳에 절벽이 우뚝 서고 높은 언덕이 계속 이어지고. 신통한 재주를 지녔구려. 운해를 풀어준 덕에 겨우 사시지관까지 들어왔는데, 오구지신이 아직 머무는 건 좀 어긋난 듯. 천기역정(天紀歷正)의 대관(大官)이 크게 꾸짖을지도. 그 자리는 어디쯤이요? 서둘러 사죄를 드려야 할거요.”

남 학사의 말투가 싹싹해졌다고 해원기도 말투를 바꾸었으나,

내용은 그야말로 상전이 무지한 아랫사람 가르치듯.

남 학사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과연. 여기가 궁상인 걸 정확히 알고 왔구나. 수보(首輔)가 굳이 너를 제일적으로 매긴 이유를 이제 알겠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여간한 학자들도 모르는 고사(古史)까지…… 흥, 그렇지만 노부가 왜 여기에 있는지, 닫힌 게 열렸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느냐?”

어차피 시간을 끌기 위한 대화였을 뿐.

해원기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기는 글렀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말투가 홱 바뀌었고.

코웃음 끝에 냉혹한 기운이 뭉클 일어난다.

동시에 그의 좌우, 멀쩡했던 공간이 크게 일렁이면서 그림자가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마치 투명한 장막을 찢은 것처럼.

좌측에는 일곱.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건 팽조린이다. 방패를 둘러멘 자와 갑사가 양쪽에서 부축했고, 그 옆에는 흑벽과 홍장, 그리고 백의를 입은 뚱보가 한 명. 그들을 이끌 듯 앞에 선 이는 구부정한 몸에 붉은 장삼을 걸친 노인.

우측에는 여섯. 첨유진과 갑사 둘 옆에는 기다란 심의를 입고 머리엔 작은 관을 쓴 중년인과 얼굴까지 새까만 천으로 가린 인물이 섰고. 역시 맨 앞에는 마른 몸매에 짙은 현의(玄衣) 차림의 노인 하나.

붉은 장삼의 구부정한 노인이 넓적한 코를 벌름거렸다.

“크흥, 팽 주국의 팔을 찢은 절세검왕이 저놈인가?”

툭 튀어나온 눈을 부라리는데, 짙은 현의 차림의 노인은 쑥 꺼진 볼을 볼록이며 머리를 젓는다.

“사시지관의 자리마저 이 모양이라니. 결국, 운해신조경은 동쪽에서 발동된 거라고 봐야겠고. 따로 외부와 손을 잡은 셈이지만. 아무리 절세검왕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분탕질을 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쳇.”

각각 팽조린과 첨유진을 데리고 나타났으니 그간의 사정은 들었을 터.

그런데도 해원기를 그다지 눈에 두지 않는 태도들이다.

해원기가 빠르게 새로 나타난 자들의 면면을 훑었다.

팽조린을 양쪽에서 부축한 둘은 아마도 오치공정과 구호농정의 남은 자 둘. 백의 뚱보도 흑벽과 홍장 곁에 바짝 붙어선 게 소위 사대수비라고 했던 자들 중의 백보로 보인다.

여기에 첨유진과 호장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처음 보는 인물들.

‘남 학사와 마찬가지라면 붉은 장삼과 짙은 현의도 밀각육학사에 속한 자들이겠지. 사시지관을 육학사가 나눠맡았다면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자는…… 흠.’

운해신조경에서 운해가 사라지고서도 또 해괴한 변화가 일어났으나,

이는 해원기가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자신이 뚫고 들어온 곳은 단조(丹鳥), 즉 사폐지관의 닫힌 담장. 그런데 마주친 자들은 오구지신과 남 학사였다.

남 학사가 ‘닫힌 게 열렸다’라고 떠들었을 때부터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주시했던 건, 다시 하화의 보광이나 오소민의 기척을 기다렸기 때문.

사시지관에서 남은 곳은 하나요, 또 오소민이 처음 사라졌던 방향도 바로 동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선이 저절로 우측의 둘에게 머물렀다.

기다란 심의를 입고 머리에 작은 관을 쓴 중년인, 얼굴까지 전신을 새까만 천으로 휘감은 인물.

경지가 남다른 고수다.

해원기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쯧, 기다렸던 자들이 다 와야 시간을 끌었던 보람이 있을 텐데. 아직 한 덩어리가 부족하잖나. 여기는 붉은 장삼이니 홍(紅) 학사? 저쪽은 현의니까 현(玄) 학사? 그럼 남은 한 덩어리는 백(白) 학사가 이끄는 다섯, 아니 네 명이겠군. 더 기다려줄 수도 있어.”

호탕한 도발.

평소의 해원기에게선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상대는 알 리 없다.

구부정한 노인이 두꺼비 같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네 이놈! 어디서 감히. 홍 학사가 아니라 주(朱) 학사님이시다! 그러지 않아도 네놈을.”

“호오, 절세검왕이란 명호가 지나치다 여겼더니만. 남 학사, 어째 많이 다른가 보오?”

주 학사의 고함을 자른 이는 짙은 현의를 입은 노인. 호칭에 이견을 달지 않으니 현 학사가 맞는 듯하고, 주위의 상황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남 학사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궁상이란 것도 훤히 알고, 천기역정의 대관이란 이름도 읊더이다. 사시지역(四時之域)이 겨우 순행(順行)으로 돌아갈 즈음에 단조관(丹鳥關)을 깨고 들어왔소. 노부가 막 오구지신을 통어하게 되자마자. 후.”

“엉? 단조관을 깨? 어떻게…….”

고함을 치던 주 학사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지만,

이번에도 현 학사는 시선조차 보내지 않고.

“아무리 사시지역이 제멋대로 뒤집혔어도 단조관을 깼다? 흐음, 구호농정과 오치공정을 거의 다 잃은 게 당연하군. 이거,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소. 역시 황 학사 일행을 기다리는 게 옳았을까?”

고개를 갸웃갸웃. 주 학사가 튀어나온 눈을 굴리면서 얼굴을 들이민다.

“무슨 소리! 장교(將校)와 대부(大夫)가 잔뜩 있고, 현신장까지 동원한 판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우선 버르장머리 없는 저놈부터 처리한 후에 신조경을 열면 되잖소. 이 양반들이 참.”

어지간히 급한 성격인 듯. 해원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침이라도 튀길 것처럼 지껄이자,

그제야 남 학사와 현 학사의 시선이 돌아왔다.

“주 학사 말이 맞군.”

“백 학사도 염려되지만, 수보가 이미 손을 쓰기 시작했을 터. 서두릅시다.”

시선이 교차하면서 의견이 일치하고.

동시에 해원기를 보는데.

쿵!

갑작스러운 진동. 공간이 별안간 물결치듯 흔들린다.

예상치 못했던 운해신조경의 또 다른 변화인가? 아니, 이번은 바로 해원기의 발밑에서 시작되었으니.

학사라는 자들 셋이 떠드는 동안 해원기가 바닥을 살피다가 별안간 지유진으로 힘차게 밟은 곳. 바로 이 황량한 평지에 드문드문 깔려 둥근 형태를 이룬 검은 돌에서부터 퍼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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