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76화 (276/410)

제69장 비도궁상(秘都窮桑) (4)

눈이 닿는 곳은 절벽의 삼 장 높이. 그 위는 또다시 자욱한 구름으로 덮였다.

그 구름도 아까보다 더 진해져서 해원기의 안력으로도 앞을 가로막은 이 절벽 꼭대기가 보이질 않는다.

여전히 사방을 분간할 수 없으니 이 절벽을 넘을 수밖에.

해원기가 생각을 정리하며 고검의 검대를 단단히 조였다.

지금까지 얻은 단서들.

은허라고 여겨지는 이 장소는 이미 운해신조경이란 기이한 환경으로 바뀌었다.

진법이든 결계든 이렇게나 기이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건만,

흑벽과 홍장이 마련했던 새 조각과 부적만으로는 불가능한 일.

또 삼품소원장을 비롯해 연달아 달려들었던 자들은 전부 이 운해신조경의 발동에 맞추질 못했으니, 예상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운해신조경은 은허에 숨겨져 있던 신묘의 현현이라고 봐야 하는데, 그저 작은 사당이 아니라 궁상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다.

온갖 신화와 전설의 흔적을 찾던 동창은 여기서도 뭔가 특별한 목적으로 운해신조경을 발동시켰을 터.

투입된 자들의 질과 양이 상당하다.

그러나.

‘운해신조경이 태감과 국감들이 모여든 배경일 텐데, 어째서 다 모이기 전에 발동한 거지? 운해신조경의 중요한 지점을 제대로 점거할 새도 없이. 우주국이라는 팽조린과 밀각의 각주인 첨유진이 다급히 뛰어나올 정도라면.’

상고시대에 천하를 다스렸던 상의 수도에 가장 존귀하게 받들던 신묘의 현현이다.

대개 이런 곳은 어울리는 의식을 거치고 정해진 법도에 따라야만 무사히 진입할 수 있는 일종의 성역.

구호농정을 거느린 오치공정. 그다음이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리는 오구. 이런 식으로 차츰 더 높은 직위를 두루 거쳐야 비로소 받드는 신위(神位)를 배알 할 자격이 된다.

그런데 아래 직위조차 어지러웠으니 오구, 즉 다섯 종류의 비둘기는 어떨지.

‘이렇게 방대하고 기막힌 환경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발동했을까? 뭣 때문에? 이렇게 방만하고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 짓거리는…… 확실히 사부님이 일러주신 벽세의 행태를 닮았다.’

동창이 과거의 난세를 일으켰던 사마와 연관되었음은 이제 의심할 여지도 없지만,

그 내막은 여전히 모호하다.

벽세에 유출된 수많은 실전 절학은 그렇다 쳐도 지부에서 비롯된 오대마도까지.

누가 어디에서 얻었단 말인가.

그리고 과거의 신화를 뒤져 또 다른 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이기에.

해원기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풀리지 않는 문제에 골몰할 때가 아니야. 이 운해신조경에 들기까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오소민. 그리고 엽산초부.

자신과 함께 운해신조경에 휩쓸린 엽산초부를 찾아야 하고, 어떻게든 운해신조경을 벗어나야 오소민의 종적을 찾을 것 아닌가.

곧장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휘익.

비석에 새겨진 감로보병의 그림은 잊었다.

진법인지 결계인지.

팔풍지력을 곁들여 육지비행술, 부신수영을 더한 초상비. 상승의 경공 요결을 전부 동원해 움직였다.

빠르고 가벼우며, 어떤 돌발적인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구름에 가려진 절벽 꼭대기를 단숨에 오르고, 그 위로 이어진 언덕을 따라 나아가다가 또 절벽을 만나면 뛰어넘고.

채 일 각도 되지 않아 산 하나는 넘었을 정도였는데.

세 번째 절벽을 만나자 빠르고 가벼운 해원기의 신형도 저절로 멈춰 섰다.

또 비석.

아무리 높이 올라도 하늘은 보이지 않고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도 그대로니 진짜 산을 넘었는지도 확신하기 어려운 이 운해신조경.

상승의 경공을 시전하고도 도로 제자리에 돌아온 듯하지만,

이번 비석에 새겨진 건 물수리(雎鳩). 발톱으로 길쭉한 낫 한 자루를 짓밟은 그림이다.

“이건 사마(司馬), 즉 병권을 관장하는 직위다. 동렬(同列)에 머물렀다는 건가? 흠.”

일직선으로 나아갔다고 여겼으나, 사마의 직위도 오구의 하나.

석판이나 비석은 아마도 일종의 품계석(品階石)인 듯하고, 이 기이한 환경은 쉽사리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마음이 급하다고 계속해서 이 기이한 환경 속에서 헤매기만 할 수는 없는 일.

해원기의 시선이 비석의 그림에 머물렀다.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은허는 바위와 돌만 남은 폐허라고, 그저 평평한 벌판이라고 했으니 절벽과 산은 전혀 말이 되지 않아.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경공으로 달린 거리만 해도…… 응?’

머릿속으로 지나온 과정을 되살리다가 눈매가 살짝 올라가고,

손이 석벽의 그림을 빠르게 더듬는다.

“저구는 물수리. 사마의 직위에 어울리게 오구 중에서 가장 맹금이지. 그런데 이건 낫이라기보다는.”

오치공정의 자리를 맡은 삼품장들이 하나씩 들었던 과(戈)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물수리가 이 과를 움켜쥔 게 아니라 꼼짝 못 하게 밟은 자세.

“그러고 보니 왜 그렇게 긴 과를 하나씩 들었을까? 설마.”

전부 다른 외문병기를 상당한 조예로 익혔던 자들이었다. 자신이 오랜 세월 공들여 익힌 병기를 놔두고 일부러 과를 든 이유.

해원기가 석벽을 더듬던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얼핏 스치는 생각.

“솟대?”

세로로 세운 나무에 가로로 갈라진 가지는 새들이 앉은 자리가 된다. 소위 횃대라고 부르는 물건. 어려서 해동청을 길렀던 해원기가 모를 수 없고,

그러면서 시선이 저절로 위를 향한다.

자욱하게 깔린 구름밖에 보이지 않지만, 문득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처 없이 떠돌던 일족. 그러나 어디든 머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기다란 장대를 높이 세우고 일족 모두가 절을 올렸었다. 오가는 새들이 머물러 쉴 횃대가 아니라 일족이 우러르는 하늘을 기리는 일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고, 그걸 솟대라고 부른다는 것도.

운해신조경이 궁상의 재현이라면 솟대 같은 횃대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삼품장들이 들었던 것들은 터무니없는 길이를 빼고는 완전한 병기였다.

지금 눈앞의 석벽에 새겨진 그림처럼.

머리를 긁던 손이 이마를 문지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어디로 갔는지 한참 소식이 없네.”

동강을 본 지 꽤 되었다.

되도록 세상의 분란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간해선 부르는 걸 삼가는 편이긴 해도,

이런 상황에선 동강이 큰 도움이 될 텐데.

운해신조경에 접어든 후로는 영교(靈交)가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답답하다.

“후우.”

해원기가 심호흡으로 초조해지는 심정을 가라앉혔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운해신조경에 휘말려 그저 뺑뺑이만 도는 처지. 차라리 동창의 졸개라도 나와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밀각 각주인 첨유진이라도 이 기이한 환경을 발동한 주재자로 보이진 않았다.

동강과의 영교가 차단되었고, 주위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곳. 오직 사방을 가득 메운 구름만이 무심하게 시야를 가릴 뿐이다.

‘환상은 현상에 기초한다. 지금으로선 이것만으로 이 운해신조경을 헤쳐 나가야겠군.’

박대정심을 목표로 세우고서 진법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접했던 글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다 믿기 어려워도,

처음 오치공정의 석판과 두 번째 마주하는 오구의 석비는 환상이 아니다.

과를 짓밟은 물수리. 궁상에서 병권을 쥔 사마의 직위.

다시 석비의 그림을 살피던 해원기의 눈이 차츰 깊이 가라앉고,

이마를 문질렀던 손이 어깨 위로 돌아갔다.

막 운해신조경에 접어들었을 때 혼자만이 오치공정 중 도공정의 위치에 떨어졌고,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자들과 연달아 싸우다가 귀왕천형 다음으로 빙정의 검강을 펼치려던 순간에 뜻밖의 변화가 일어났었다.

운해신조경이 혹시 그 영향을 받아서일까.

스르릉.

고검을 뽑으면서 공력을 충분히 끌어올려 보는데.

지잉.

바라보던 석비가 마치 고검이 뽑히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진동하더니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뿐이 아니라 사방을 메운 구름이 조금씩 물러나면서 정면을 가로막았던 절벽이 마치 뒤로 드러눕듯이 멀어지니.

과연 반응이 있다.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일 장, 이 장. 구름이 물러나면서 시야와 함께 감각까지 넓어지는 느낌. 그러면서 이제껏 막혔던 기척이 한꺼번에 전해진다.

자신이 지나온 곳은 부서진 석판이 곧게 이어진 포도. 처음 도공정의 석판에서부터 겨우 십여 장 정도만 더 왔을 뿐이었고,

그런 포도의 흔적이 멀지 않은 좌우에도 힐끗 드러난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을 상승의 경공을 썼음에도 벗어나지 못했단 건가.

가라앉는 석비 뒤로는 병풍을 친 듯한 담장이 보이고, 좌우의 포도 또한 그 담장을 향해 뻗은 모양.

그리고 아직 걷히지 않은 구름 속에서 어지러운 인기척이 들린다.

오른쪽에서는 첨유진, 왼쪽에선 팽조린. 짧은 호통과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 상당히 바쁘게 움직이는 듯.

해원기가 좌우를 빠르게 훑곤 시선을 담장으로 돌렸다.

자신이 거쳤던 것처럼 첨유진과 팽조린도 절벽과 언덕을 헤매는 듯. 아직 그들은 운해신조경의 변화를 깨닫지 못했다.

굳이 그들과 어울려 손을 섞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먼저 이 운해신조경의 이치를 밝히는 게 낫다.

길쭉한 석판을 이어붙인 듯한 기묘한 담장은 꽤 낮은 편이지만,

해원기에게서 물러난 구름이 전부 그 담장 위로 몰린 것처럼 잔뜩 엉겨서 안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담장이 서서히 움직인다. 한쪽으로.

‘이건 현상인가, 환상인가.’

높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그 절벽을 날아올랐더니 언덕이 이어지던 조금 전과는 딴판.

나지막한 담장이 꿈틀꿈틀 한쪽으로 흐르는 기이한 광경은 아담할 정도로 작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앞의 상황을 날카롭게 살폈기에 알아챘지만, 이 담장의 움직임은 대단히 느리고,

담장을 이루는 석판에 은은히 붉은 빛이 도는 것도 여간해선 눈치 채기 어렵다.

그리고 그 붉은 빛이 이루는 형상.

미리 궁상이란 걸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연상하기 어려웠을 새의 형상이다.

‘다섯 쪽의 석판, 저 붉은 빛은 단조(丹鳥)일 테니 바로 금계(錦鷄)다. 입추에 이르러서 입동에 떠난다고 하는, 사폐지관(司閉之官). 이대로는 저 담장이 열리지 않는다는 뜻인가.’

구호농정, 오치공정, 오구지신(五鳩之臣).

궁상의 직위를 아래서부터 차례로 밟아 올라왔고, 오구지신의 고비도 넘어서 마침내 사폐지관을 만난 셈이지만,

사폐는 말 그대로 문을 닫아걸었다는 의미다.

이것도 조금 전처럼 고검과 신왕공에 반응하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해원기가 다가가려는데.

그 순간,

펑, 퍼펑, 펑.

연달아 폭음이 터지면서 잔뜩 엉긴 구름이 제멋대로 뒤틀리고, 한쪽으로 움직이던 담장이 마구 비틀리기 시작했다.

운해신조경이 다시 변하는가 싶어 멈칫하게 되지만,

이어지는 소리와 빛에 해원기의 표정이 홱 바뀌었다.

“허억, 이 빌어먹을 놈들이…….”

허덕이는 목소리는 바로 엽산초부. 비틀어지는 담장 바로 뒤에서 들렸고,

파앗.

그보다 먼저 뒤틀리는 구름 사이로 번지는 맑고 부드러운 보광(寶光).

바로 한 톨의 속진(俗塵)도 묻지 않는다는 보패, 하화의 빛이었기에.

앞뒤 가릴 때가 아니다.

해원기가 발검제형으로 고검을 뽑으면서 곧장 몸을 날렸다.

비틀리는 담장, 석판을 그대로 쪼개버릴 셈이다.

위이이이잉.

번갯불처럼 뻗는 고검에선 군림검의 찬란한 광채가 폭발하지만, 손은 여전히 검을 쥔 채.

어검과 검강이 구분되지도 않고,

그야말로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꽝!

뒤틀리는 구름도, 비틀리는 담장도 모조리 날려버리는 어마어마한 위력.

미리 끌어올렸던 수정지력이 팔풍팔뢰를 한꺼번에 떨쳐내면서,

쏴아아아아.

수십 장 공간이 썰물에 말린 것처럼 쓸려나간다.

돌이 날리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지만, 순식간에 멀리까지 훤하게 밝혀진 시야.

엽산초부와 오소민을 찾으려고 빠르게 시선을 보내던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올라붙었다.

절벽도 없고, 언덕도 없는 황량한 평지.

사방 오십 장쯤 되는 바닥에 검고 긴 돌들이 둥근 원을 그리며 박혔고,

그 원의 가장자리, 서너 명이 뒤엉킨 곳에 해원기가 내려서게 되었으니.

이게 운해신조경의 원래 모습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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