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75화 (275/410)

제69장 비도궁상(秘都窮桑) (3)

그렇구나.

군림검의 오행어검대법과 귀왕검의 귀왕천형을 함께 쓴다. 소위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이 언제나 검왕법신의 기초가 되도록.

허허, 어지간한 녀석 같으니라고. 우리 세휘가 아가를 아주 많이 아꼈었구먼.

다만, 생사여일(生死如一)의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활살(活殺)의 구분을 뜻대로 하기 어려울 게다.

기억하거라. 네 사부가 어이해 검왕수를 창안했는지.

정(情)을 정(精)하고, 의(意)를 의(義)할지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에 해원기가 이를 악물었다.

군림검을 꺼내긴 했어도 신령검역이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삼품소원장을 상대했을 때처럼 생각했던 것보다 과한 결과가 또 나올 수도.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얄팍한 주저.

그 주저를 검에 깃든 사조는 알아채셨는가.

심령으로 전해지니 부드러운 말투를 쓰셨어도 사실은 꾸짖음이란 걸 모를 수 없다.

두 손을 엇갈려 검결을 짚자,

번쩍.

번갯불이 공간을 갈기갈기 찢는다.

팽조린이 전광식이라고 했던 발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단숨에 가지를 쳐 뻗어가는 빛줄기가 아홉.

수정지력을 품은 풍뢰의 검이 곧장 등목구룡(藤木九龍)으로 화했고,

퍽, 퍽.

돌처럼 굳어졌던 갑사 여섯이 손에 쥔 깃대와 함께 지면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화륵.

몰아치는 폭풍에 아홉 갈래 번개에 화염이 일었다.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한 오치공정의 삼품장 셋. 급급히 손에 쥔 병기로 어떻게든 공격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니.

쌍겸이 포악하게 베어오고, 단봉이 우직하게 찍어 들며, 대기는 어지럽게 휘말려서. 참으로 대단한 기세.

하지만, 바람을 얻은 불, 폭령진화(爆令眞火)는 이미 그들의 전신을 뒤덮어버렸다.

퍼퍼펑.

“크아악!”

대단한 기세를 보이던 병기들이 숯이 되어 부서지고, 삼품장 셋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삼품소원장과 같이 오치공정의 위치를 맡은 자들이라서 패왕창에 버금가는 단단한 외가공부(外家功夫)을 익힌 듯, 불구덩이 속에서도 어떻게 육신은 보전했으나.

폭풍에 의해 일어난 뇌화(雷火)는 이미 그들의 내부를 모조리 태워버렸을 터.

군림검은 그리고도 멈추지 않았다.

신령검역이 이룬 공간의 이상(異常)을 감지한 건 그만큼의 수준에 이른 자들.

첨유진이 기겁해서 명령을 내리기 전에 팽조린과 좌우 호장은 빠르게 자세를 갖추었다.

그래도 언월대도를 방패처럼 세우고, 허리에 찬 검을 빼드는 그 짧은 순간에,

구호농정을 맡은 여섯 갑사와 외가공부를 제대로 익힌 삼품장 셋이 죄다 쓰러질 줄이야.

줄기줄기 내리친 번개와 화염을 몰아치는 폭풍은 어떻게 된 일인가.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다.

“으득.”

팽조린이 이를 갈아붙이자 언월대도의 도신에 창백한 기운이 와락 일어난다.

칼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솟구치는 기괴한 기운. 팽조린의 거구를 이룬 살집이 순식간에 희뿌연 기운으로 바뀌고,

칼등을 척추 삼아 도신으로 뻗어가는 건 분명히 갈비뼈. 그 갈비뼈가 단숨에 도강을 이루었다.

카카칵.

몰아치는 뇌화를 튕기며 뻗는 도강. 확실히 고루왕에게서 비롯된 형해도의 능력이다.

해원기가 곧장 검결을 바꾸었다.

츠츠츠츠.

군림검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한 덩어리 금광으로 화하면서,

무엇이든 꿰뚫고 베어버리는 금광섬삭(金光閃爍)이 화염 속에서 튀어 나갔다.

콰앙!

“큭.”

늑골의 도강으로 방패처럼 막아서던 언월대도가 부러질 듯 휘면서 팽조린이 신음을 토하지만,

회백색의 기운은 오히려 짙어졌고.

폭풍에 미친 듯이 날리는 머리칼 속, 피골이 상접한 얼굴 위에서 두 눈이 흉하게 빛나더니.

“우와압!”

귀청이 찢어질 듯한 기합을 지르며 언월대도를 내지른다.

전광, 광풍, 섭백, 쇄봉, 그리고 암혼. 소위 오절신도라고 떠들던 도법이 하나로 이어져 거꾸로 군림검을 물어뜯을 셈.

부와아아앙.

회백색 도강이 늑골에서 대가리까지 완연한 해골 형상이 되었다.

신령검역 안에서 도강으로 형상을 구현하기까지. 더구나 그 뒤에는 좌우 호장이 서로 검을 교차하면서 묘한 자세를 취하고, 검은 부채를 활짝 편 첨유진에게서 음울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니.

반격할 틈을 본 것처럼.

그렇게나 해원기의 신령검역이 물렀던가.

형해도의 도강, 그리고 첨유진 쪽.

전부 해원기의 눈을 벗어날 수 없다.

‘정을 정하고, 의를 의한다’라는 가르침의 뜻을 아직 정확히는 모르지만,

사부가 검왕수를 만든 이유.

검왕오형의 오의를 하나씩 깨달을 때마다 알, 았, 다.

착하고 순해 빠진 아이, 살기가 없는 아이. 그래도 무인이 되어 남을 돕겠다는 뜻을 세운 아이.

그 뜻을 이루어주고자. 그리고 그 뜻을 이루려다 혹여 힘에 부칠까 봐.

하나밖에 없는 제자, 아니.

당신의 친아들처럼 대해주셨다.

팽조린이 언월대도의 도강을 방패 삼아 금광섬삭을 견디는 순간에 손을 바꾸었다. 내딛는 발을 따라 오른손을 스치고 나아가는 왼손에,

치링.

차가운 검명이 울고. 팽이처럼 회전하던 군림검이 폭포 밑의 수차처럼 방향을 바꾸었다.

횡에서 종으로, 금광섬삭이 등목구룡으로 좌라락 늘어나고.

더구나 찬란한 빛을 뿜는 군림검에 새까만 그림자가 어리면서 태산이라도 쪼갤 엄청난 힘이 실렸다.

아홉 개의 빛, 아홉 개의 그림자.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검이 아홉 자루로 불어나 동시에 내리긋는다.

얼마나 빠르고 얼마나 강한지.

우르릉.

언월대도의 도강이 토한 굉음조차 풍뢰에 묻히고,

광영(光影)의 검형이 해골의 형상과 팽조린을 무차별하게 갈아버렸다.

금광섬삭에서 등목구룡으로, 또 등목구룡에 대괴무극(大塊無隙)을 더하는 건, 금극목(金克木), 목극토(木克土)의 상극.

게다가 오행어검대법과는 전혀 다른 단순한 검법.

마치 농부가 황소를 몰아 밭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귀왕천형(鬼王天刑)의 하나인 이서형(犁鋤刑).

거침없이 형해도를 덮치자,

콰앙!

“으아악!”

해골의 도강과 언월대도가 한꺼번에 박살 나면서 팔뚝이 통째로 찢겨 날아간 팽조린.

엉덩방아를 찧으며 질러대는 비명도 두통이 날 만큼 큰데.

위에 걸쳤던 융의가 벗겨지면서 드러난 체형은 처음에 보았던 거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홀쭉하고,

볼이 쑥 꺼진 입이 비명 끝에 덜덜 떨린다.

“이, 이따위, 어검이. 서, 설사 어검이라도, 촉루도강(髑髏刀罡)을…….”

도강과 도강을 이룬 대도, 그리고 그 대도를 쥔 팔뚝까지 찢어버리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의혹이 비명까지 삼켰고,

그건 틈을 엿보던 첨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어검, 유의어검의 법식에 다시 검강을 더한다고……?!”

어검대법을 이룬 검광, 그 빛에 깃든 새까만 그림자가 검강을 이룬 별개의 한 자루 검이란 걸 목격했으나,

어검과 검강은 함께 펼칠 수 없다.

물론 이런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경지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 봤자 어검과 검강을 처음부터 적당히 버무린 어검강에 그칠 뿐.

이렇게 광상(光狀)의 어검대법에 전혀 별개의 검강이 함께 구현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의혹을 따질 새가 어디 있나.

어느새 공간에 퍼지는 무수한 검영(劍影). 기겁했던 검광(劍光) 대신에 전신이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새까맣게 덮쳐든다.

토극수(土克水). 대괴무극이 수원광한(水源廣寒)으로 나아가자 군림검이 숨고 사신검이 드러난다.

쓰이면 행해지고, 아니면 간직한다. 구리거울을 뒤집은 것처럼.

뼈를 에이는 냉기는 불을 토하던 빛의 반면.

엉덩방아를 찧은 팽조린과 갑주를 걸치고 장검을 교차한 좌우 호장을, 그리고 첨유진을.

전부 새까만 그림자로 얼려버린다.

단호한 결심이 감로보병의 수정지기를 빙정(氷精)의 검강으로 구현해 쏟아지려는데.

좌우 호장이 묘한 자세를 움직이기 전에,

첨유진이 부채에 음울한 기운을 모으기 전에.

셋의 신형이 불쑥 치솟았다.

누군가의 낚싯줄에 걸려 잡아챈 것처럼 돌연히 벌어진 일.

쿠쿠쿠쿵.

그리고 별안간 지면이 거세게 흔들리면서 바닥이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포도의 흔적이 마구 쪼개져 돌조각과 흙더미가 분수처럼 뿜고,

쩌저적.

정면에서 두 쪽으로 갈라지는 땅. 첨유진과 좌우 호장 쪽만이 아니라 팽조린이 엉덩방아를 찧은 곳도 불끈 일어난 언덕에 온통 뒤집혀서.

해원기가 빠르게 물러나며 검을 거두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천재지변.

주변이 제멋대로 융기하고 함몰하며 그 때문인지 사방을 가득 메운 구름이 미친 듯이 휘말려 올라가 엉망진창이다.

신령검역은 벌써 해제되었고,

표풍결을 운용해 몸을 날리던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에 공간을 비트는 듯한 감각과 함께 풀밭에서 이 희한한 환경으로 들어왔었다.

그런데 이번엔 심각한 지진.

첨유진이 ‘운해신조경’이라고 한 이 은허의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쿠쿵.

지형의 변화를 훑던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바닥으로 내려섰다.

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울어대던 진동이 시작되었을 때처럼 불시에 뚝 그치고,

구름이 무겁게 가라앉으면서 어느새 만들어졌는지 정면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제대로 보이진 않아도 포도가 이어지던 앞은 전부 깎아지른 절벽이 된 듯.

그 절벽 앞에 비석처럼 반듯하게 다듬은 바위 위,

또 새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건 또 무슨 변화지? 첨유진이 도주하려고 발동한 건 아닐 텐데.’

아무리 교활해도 의외의 상황에 마주치면 내심의 경악이 드러나기 마련.

첨유진과 좌우 호장은 이 변화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팽조린을 챙기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고, 쓰러진 오치공정과 구호농정의 수하들을 살필 새도 없이.

첨유진 자신도 매우 놀랐다는 의미다.

“음, 오구(五鳩), 그리고?”

비석 같은 바위에 새겨진 그림은 다섯 마리 비둘기. 그중에 맨 왼쪽 한 마리만 고개를 숙였고, 그 아래에 조그맣게 병 하나가 놓여서 마치 비둘기가 병 입구를 쪼는 듯한데.

그 병의 모양이 지나치게 눈에 익었다.

바로 고력사의 무덤 지하에서 보았던 감로보병과 똑같잖은가.

운해신조경 안에서 신기역의 마지막 유물을 볼 줄이야.

해원기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예감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구는 교육, 군대, 건축, 형벌, 그리고 기물(器物)을 관장하는 다섯 관직. 이 한 마리는 사사(司事)의 직위인 산비둘기이니 운해신조경은 궁상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왜 궁상에 신기역 보병요의 흔적이?”

갈수록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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