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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274화 (274/410)

제69장 비도궁상(秘都窮桑) (2)

궁상(窮桑).

이는 소호(少昊)의 신화에 나오는 이름이다. 어느 시대인지 확언할 길은 없으나, 백제(白帝)의 아들과 황아씨(皇娥氏) 사이에서 태어났고, 전욱(顓頊)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고천자(古天子).

그 소호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 바로 궁상이다.

백제의 아들은 태백지정(太白之精), 즉 계명성(啟明星)을 의미하며.

하늘의 별을 이어받은 소호는 또한 현조(玄鳥)의 화신이라 일컬어져.

그가 도읍을 세우자 뭇 새들이 날아와 저마다 어울리는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은허에 숨겨진 신묘가 과연 궁상을 본떴을지.

삼품소원장에 이어 나타난 자들.

정면을 막아선 오치공정의 셋과 구호농정의 여섯에게 알아내야 할 사정이 적지 않다.

해원기가 본연검에 추상검까지 구현하며 왼손을 검신 위에 얹자,

세 방향으로 거리를 벌린 상대 역시 재빠르게 병기를 꺼내 든다.

가운데 황의인이 허리춤에서 빼든 건 두 자루 낫, 우측의 청의인은 들고 있던 과를 뚝 분질러 오 척 남짓한 봉을 만들었고, 좌측의 백의인이 과를 흔들자 날 밑에서 거창한 깃발이 후루룩 풀려나왔다.

쌍겸과 단봉, 그리고 대기(大旗). 처음에 펼친 초식에 어울리는 병기를 익힌 자들이다.

하나같이 상대하기 곤란한 병기들. 쌍겸은 칼보다 날래고, 단봉은 창보다 끈질기며, 대기는 공방의 전환을 예측하기 어렵다.

게다가 검기의 그물을 막아냈던 갑사 여섯이 깃대를 움켜쥐고 똑같이 품속에 손을 넣어서 암기라도 던질 자세.

본래 함께 손을 쓰는데 익숙한 모습이지만, 해원기는 오히려 조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삼품소원장 때처럼 뜻밖에 손이 과해져도 견디겠지.

한 발을 내디디며 왼손이 검신을 닦듯 미끄러지려는 찰나,

“멈추어라!”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우렁찬 외침.

그리고 이 쩌렁쩌렁한 목청에 걸맞은 거대한 그림자가 황의인 바로 뒤에 떨어졌다.

쾅.

화포라도 터진 것처럼 땅바닥이 진동하고 돌조각과 흙먼지가 뭉클 피어오르는 가운데,

“대체 뭣들 하는 게야? 어째서 함부로 움직이고, 응?”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던 인물이 그제야 해원기를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험상궂은 얼굴은 호랑이상이요, 보통 사람 두 배는 될 몸집에는 짐승 가죽을 이어붙인 커다란 융의(戎衣)를 걸쳤다.

묶지 않은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리고, 사 척이 넘는 대도(大刀)를 쥐었는데. 떨어져 내리며 땅바닥을 찍었는지 한 치 깊이나 꽂힌 칼이 무슨 기둥을 박은 듯.

엄청난 기세를 뿌리며 등장했지만,

해원기는 이 거한보다 그 뒤를 이어 연달아 이르는 자들 때문에 손을 거두어야 했다.

육중한 전신 갑주에 검을 비껴찬 장수 둘을 좌우에 거느리고 나타난 자. 사방건을 쓰고 남색 장삼을 걸쳤으며 검은 부채를 든 말쑥한 선비 차림의 중년인은 해원기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허, 우주국(右柱國)께서 이리 서두르시면. 어엇? 네놈은.”

남삼 중년인 역시 해원기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고.

“우(又), 주국? 똑같은 상황이지만, 이번은 진짜 같군.”

해원기의 간단한 대답에 얼굴이 확 일그러지니.

우주국을 또 주국이냐고 해석하게 만든 인물. 바로 장안에서 호경륭과 함께 등장했던 밀각의 각주, 첨유진이었다.

우주국이라는 거한이 첨유진의 묘한 기색에 고개를 돌렸다.

“흠, 각주는 저 낯선 자가 누군지 아시오? 어째 우리 삼품장(三品將)들과 한바탕 한 것 같은데.”

슬쩍 묻는 목소리도 우렁차서.

그 덕분에 겨우 신색을 회복한 첨유진이 부채를 가볍게 펼쳤고.

“허 참, 혹시 몰라서 나름 번거로운 소문도 냈건만. 역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골칫거리가 될 예감이 들더라니. 도대체 어떻게 여기 운해신조경(雲海神鳥境)까지 들어왔을꼬? 쯧쯧.”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건 놀란 심정을 다스리기 위함.

그런 속내를 모르는 우주국이란 거한이 부리부리한 눈을 껌뻑거렸다.

“아니, 누구냐니까. 어, 혹시 운해신조경이 갑작스레 발동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요? 그렇다면 저놈이 그 불손한 십팔아문(十八衙門)과…….”

“아아, 팽(彭) 주국. 그런 게 아니라.”

착.

첨유진이 얼른 말을 끊으며 부채를 접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거한이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곤란하다. 부채 끝으로 해원기를 가리키면서,

“얼마 전에 제일적(第一敵)에 올린 이름 기억하시는지? 저놈이 바로 절세검왕이랍니다.”

“음?”

밀각의 각주가 자신을 성으로 부르고 말을 끊는 건 드문 일.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대답에 팽이라는 주국의 커다란 눈이 기이한 빛을 머금었다.

거한에 이어 밀각 각주까지 나타나자 오치공정과 구호농정에 속한 아홉은 절로 물러선 상황.

쓱.

팽이라는 주국이 거창한 대도를 바닥에서 뽑아 앞으로 나섰다.

“네 이름이 해원기렷다? 듣자 하니 네가 장안에서 우리 호(胡) 주국을 해쳤다고?”

어지간히 큰 목청에 꾸짖는 말투.

해원기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검을 옆으로 눕혔다.

“주국경이라던 호경륭이 말이냐? 그러고 보니 너도 주국이로군. 너는 또 뭐라고 부르느냐.”

동창 것들의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는 한두 번이 아니지만,

여전히 익숙해질 수가 없어서.

해원기의 대답도 자연히 거칠어졌고.

“하핫, 이놈 봐라. 네놈이 진짜 해원기라면 호 주국 말고도 팽조린이란 이름도 알겠지. 그래, 그게 바로 내 이름이다. 네놈을 진즉 찾지 못해 속이 타던 참이라.”

되레 흥을 내며 대도에 손을 올리는 팽 주국.

위맹한 기세가 확 밀려드는데,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소림사 부근 등봉에서 조우했던 팽조린. 하북팽가의 가주로 구주신도라는 외호를 지닌 고수이고, 금의위 행천호의 직위로 나타나 악송령 일행을 쫓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바로 자신의 손에.

그런데 지금 거창한 대도를 쥐어가는 이 거한. 호경륭보다 윗사람인 듯한 우주국의 이름이 팽조린이라니.

그러고 보니 이 거구와 생김새가 팽조린을 닮았다.

“하북팽가의…….”

“심심풀이로 세운 강호의 별장이지. 명문세가도 몇 개 만들어두어야 했거든. 내 역할을 하던 녀석, 금의위 천호까지 올랐는데 어이없이 횡사했고. 그게 네놈 짓이라고 들었다. 흐흥, 절세검왕이라고?”

해원기의 반응이 재미있는 듯.

코웃음조차 큰데,

번쩍.

눈앞이 캄캄해지는 엄청난 섬광.

해원기의 눕혔던 고검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쨍!

등봉에서 이런 쾌도를 겪었었다. 그러나 지금 팽조린이라고 밝힌 거한의 칼은 그보다 몇 배나 빠르고, 전해지는 충격도 가볍지 않다.

이전에 검왕수로 간단히 막아냈던 것과는 천양지차.

더구나 그때와 달리 눈앞의 팽조린은 대도를 거두지 않고 똑바로 겨눈 채.

“과연 전광식(電光式)을 알아볼 실력은 되는구나. 그럼 다른 건 어떨까?”

대도.

사 척이 넘는 길이에 한 뼘 가까운 넓이. 두꺼운 칼등이 크게 휘어서 마상에서나 쓸 법한 언월도(偃月刀)인데. 이 무겁고 거대한 칼을 한 손으로 쥔다.

팽조린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손목을 흔들며 덮쳐들었다.

콰아아아.

섬광을 일으켰던 전광식과 달리 도풍이 미친 듯이 일고, 그 속에서 괴이한 기운이 뭉클거리며 퍼져간다.

해원기의 눈썹이 또다시 꿈틀.

고검이 크게 휘돌아 미친 듯한 도풍을 휘감으니. 본연검이 마치 바람결을 죄다 읽은 것처럼.

그 순간,

키키키키.

팽조린의 대도가 돌연 요악하게 울며 뭉클거리던 괴이한 도기가 뱀처럼 해원기의 전신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 괴성을 기다렸던 것처럼 고검 또한 기음을 토한다.

끼이이잉.

나사관천. 맹렬하게 회전하는 검신에 뱀처럼 달려들던 도기가 흩어지는데,

팽조린의 도법이 또 한 번 신속히 바뀌었다. 흩어지는 도기가 도로 하나로 뭉치면서 대도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떨어진다.

그야말로 산봉우리를 거꾸로 때려 박는 듯한 기세.

해원기가 손목을 연달아 세 번이나 퉁겼다. 나사관천의 본연검이 대도와 마주치기 전에 검극에서 튀어나가는 세 줄기 힘.

퍼퍼펑.

검경(劍勁)과 도세(刀勢)가 부딪치면서 자연스레 거리가 벌어지자,

팽조린이 대도를 거꾸로 쥐고 지면에 내리꽂았다.

거침없이 몰아붙이다가 홀연히 취하는 기묘한 자세, 손을 바꾸어 왼손 다섯 손가락이 손잡이를 누르고, 오른손이 두꺼운 칼등에 붙는다. 그러면서 양손과 대도가 삽시간에 회백색으로 물들고,

“으득.”

게다가 팽조린이 이를 가는 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

해원기가 얼굴을 굳힌 채 검을 뒤로 끌었다. 세 번의 탄환관천(彈丸貫穿)을 쏟아낸 고검을 한껏 당긴 활에 매긴 것 같고,

이 가는 소리와 동시에 검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았다.

따땅!

쇠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드드득.

세 걸음이나 물러나는 팽조린의 대도가 깨진 돌바닥을 깊숙이 가르는데.

어느새 검을 고쳐 쥔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도 한 걸음 물러났다.

“팽 주국!”

다급히 불러대는 첨유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팽조린이 몸을 세우며 커다랗게 웃었다.

“푸하하하, 광풍식(狂風式), 섭백식(攝魄式), 쇄봉식(碎峰式)에 마지막 암혼식(暗魂式)까지. 오절신도(五絶神刀)를 버티는 걸 보니 절세검왕이 괜한 헛소리는 아니었구나!”

명백히 고하가 갈렸건만, 약세를 감추려는 건지 오히려 감탄을 표하며 광소를 터뜨리는데,

대도를 짚은 양손의 회백색은 아직 본래의 혈색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어쩐지 그 남다른 체구가 조금 마른 듯한 느낌.

해원기의 가늘어진 눈이 팽조린을 향하며 왼손이 오른손 위에 얹힌다.

“절세오검을 도법으로 바꾼 건 칭찬할 만하지만, 당세에 절세오검의 마지막 한 가지를 아는 이는 없다.”

전광, 광풍, 섭백, 쇄봉은 바로 섬전, 추풍, 탈백, 붕악을 기초로 한 변화.

“그래서 도산초벽이라 부르는 거지. 절세검왕과 도산초벽. 정말 어울리는 싸움이잖아. 허, 그런데 너는 절세오검을 다 아는 것처럼 따지고 드네. 하핫.”

팽조린이 자못 호기롭게 받지만,

해원기는 본래 대화하려고 입을 뗀 게 아니었다.

절세오검의 마지막은 비천경혼음마검(飛天驚魂陰魔劍). 천하에서 이 검법을 아는 이는 사부와 교노인 둘뿐이었고, 이제는 오직 해원기 혼자.

팽조린이 암혼식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도세가 절대 이 비천경혼음마검에서 비롯하지 않았음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굳이 탄환관천까지 써가면서 팽조린의 오절신도를 끝까지 상대해준 이유.

목왕팔준경을 익힌 호경륭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등봉에서 죽은 팽조린이 이 자의 분신이라면 그 참혹한 최후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내려 했기 때문이었고,

위이이이잉.

두 손으로 쥔 고검이 하얗게 달아오른다.

“네 도법엔 형해도(形骸道)가 담겼군.”

고검의 변화에 팽조린이 움찔하든 말든. 해원기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두 손을 떨쳤다.

지부 절대오력 중의 또 한 가지.

암혼식은 바로 그 마공(魔功)에서 연유한 것이었고, 이를 확인하자 즉각 군림검이 출현했다.

혈고루유명심(血骷髏幽冥心).

지부의 마종을 이루는 다섯 기둥 중 고루왕에게선 끔찍한 검마(劍魔)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그 고루왕의 밑천이 바로 형해도.

심왕의 곤혹도, 유왕의 황량도에 이어 형해도까지.

이렇게 지부의 힘이 계속해서 풀려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거대한 언월도와 함께 팽조린을 일검에 꿰뚫을 심산,

그런데.

검결을 짚은 두 손을 떨치자마자 해원기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뻗는다.

콰르르르.

바람이 휘몰아치고 우레가 울며 폭발하듯 치솟는 백광(白光). 군림검만이 아니라 해원기까지 빛으로 화하면서,

주위를 가득 메운 구름조차 좌악 밀려났다.

“갑사들, 삼품장, 다들 한, 꺼, 번에 막, 아!?”

팽조린보다 첨유진이 먼저 고검의 변화를 눈치 챘고,

황급히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그 또한 자신의 말이 뚝뚝 끊기는 바람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만이 아니라 부채를 휘두르는 손은 왜 이리 굼뜨나? 깃대를 쥔 여섯 갑사는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오치공정을 맡은 삼품장 셋은 느릿느릿. 그나마 제대로 자세를 취하는 이는 팽조린과 자신의 좌우 호장(護將)밖에 없다.

뭐에 홀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

신령검역 속에서 군림검이 폭풍만뢰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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