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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273화 (273/410)

제69장 비도궁상(秘都窮桑) (1)

쩡.

쌍창을 십자로 엇갈려 발검제형을 막는 모습에 해원기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패왕창.’

좌우의 갑사가 지녔던 깃발도 평범하지 않아서 깃대가 수십 근이나 나가는 쇳덩이. 나사관천은 방어에서도 상대의 공격을 빗겨 넘기는 효용이 있다.

그러나 해원기는 이미 검왕오형의 오의를 거의 다 깨달은 상태.

고검을 뽑으면서 자연스럽게 펼쳐진 발검제형에는 수발여의가 담겨서,

찌르기가 저절로 베기로 이어진다.

패왕창을 의식해서인지 검상은 본연검, 게다가 흑백연주오절검의 일주포원(一柱抱元)까지 더해졌다.

까라랑.

엇갈린 깃대가 불똥을 튀기며 깎여나간다.

“크윽.”

대번에 양쪽 소매가 터져나가자 삼품소원장이 신음을 토하며 있는 힘껏 양손을 밀어냈다.

나사관천을 실은 패왕창이건만 거꾸로 휘둘리는 충격. 파부철장 덕에 호구가 찢기지는 않았으나 팔뚝이 통째 꺾일 뻔했다.

어떻게든 해원기의 검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릴 셈.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힘을 썼으나,

그 바람에 십자로 엇갈렸던 깃대가 벌어졌고, 해원기의 본연검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번개로 화했다.

깃대가 벌어진 공간을 쪼개는 두 줄기 번개.

촤악. 터텅.

핏줄기가 솟구치며 깃대 두 개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처음에 재단경위에 의해 나동그라졌던 좌우 갑사가 그 순간에 막무가내로 덤벼들었고,

해원기의 신형이 슬쩍 흔들리더니 본연검이 검극만 얼핏 드러냈다. 새침을 떨 듯.

하지만, 좌우 갑사가 갑자기 얼어붙은 듯 멈추어서고.

삼품소원장을 포함한 셋이 동시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커, 컥. 어, 어떻게 이럴…… 우웩!”

흑백연주오절검의 절영쌍살(絶影雙殺)에 갈기갈기 찢긴 손목. 삼품소원장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보다가 기어이 피를 왈칵 토했다.

파부철장을 익힌 덕에 손목이 뎅겅 잘려나가는 건 면했어도 대단한 충격을 받았고, 거기에 좌우 갑사와 함께 삼음망세(三陰忘世)의 검력을 뒤집어썼으니 내부가 죄다 뒤집혔을 터.

떨어뜨린 깃발이 손목과 입에서 쏟아진 핏물에 잠기는데.

검을 내린 해원기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패왕창을 쓰는 상대를 꼼짝 못 하게 제압하려면 강하고 무거운 검을 써야 하지만,

그렇다고 오악검법이나 절세오검을 썼다간 지나칠 수 있다. 하물며 천손검법은 무리.

그래서 굳이 본연검으로 검왕오형에 흑백연주오절검을 병용했건만,

좌우 갑사가 달려들자마자 초식이 줄줄이 이어질 줄이야.

마치 검이 알아서 반응하듯 움직였다.

삼품소원장의 손목을 끊기만 하면 될 일이 아예 피를 토하고 쓰러질 참이잖나.

철컥.

검을 거두고 서둘러 삼품소원장의 양쪽 어깨를 찍었다. 혈도를 점해서 피는 멈추었어도, 숨이 간당간당한 판. 바로 얼굴을 갖다 댔다.

“동창이 여기서 뭘 찾는 거지? 누가 주재자고, 무슨 진법을 베풀었느냐?”

묻고 싶은 게 잔뜩이지만, 무엇보다 먼저 이 희한한 상황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러나 삼품소원장의 귀에는 다그쳐 묻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허억, 마, 말도 되지 않. 컥, 왜, 왜 사대수비가 안 보였는데, 왜 날 도공정(陶工正)의 자리로. 끅!”

피로 물든 입이 허망한 불평을 중얼거리다가,

눈이 뒤집히더니 그대로 숨이 끊겼다.

패왕창의 공력이 절영쌍살로 파괴된 상태에서 삼음망세의 검까지 맞았으니.

양쪽에 엎어진 좌우 갑사는 다시 살필 필요조차 없었고.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린 채 몸을 일으켰다.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살수가 거북한 건 여전해도 우선 마음을 굳히고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싸움이 그치자마자 다시 자욱하게 몰려드는 구름이 참혹한 광경을 가려주는 게 다행이랄까.

해원기가 몸을 돌리며 눈썹을 세웠다.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운해. 그래도 아까 발견했던 석판이 있는 곳만은 뚜렷하게 보인다.

하찮은 단서라도 놓칠 수는 없다.

‘도공정이라고 했다.’

삼품소원장이 좌우 갑사를 거느리고 찾아온 곳. 남방공정위는 남쪽 공정의 자리라는 말이니, 해원기가 발견한 석판이 바로 도공정의 자리였던 거다.

석판에 흙을 구워 새긴 문양. 들꿩이 불을 뿜는 그 문양은 바로 도공(陶工)의 솜씨요, 도공정이란 도공의 우두머리라는 의미.

좌우 갑사가 들었던 깃발의 그림이 정녕 호조라면.

해원기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후, 설마 이곳이 은허, 그들이 섬겼던 현조(玄鳥)가 이룬 왕국을 고스란히 재현한…… 신묘(神廟)란 말인가?”

그건 숨길 수 없는 탄식이었다.

어렸을 때 학문을 오래 닦지는 못했으나 기초는 탄탄히 다진 셈이었고, 사부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독특한 환경 덕에 특히 고대(古代)의 희귀한 지식을 많이 접했었다.

들꿩의 문양과 호조의 그림, 그리고 남방을 맡는 도공정의 자리.

이것만으로 홀연히 전이된 이 운해가 어떤 곳인지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해원기 자신도 쉬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천조지국(千鳥之國). 즉 새의 나라.

그 나라에서 백성의 농업과 공업을 돌보는 관직은 아홉 마리의 호조와 다섯 마리의 들꿩이 맡는다. 소위 구호농정(九扈農正), 오치공정(五雉工正)이란 글귀대로.

비록 오는 도중에 오소민과 화제로 삼긴 했어도,

이는 아득한 상고(上古)의 신화거늘.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갑자기 들이닥친 삼품소원장 때문에 또 시간이 흘렀다. 비록 짧은 단서를 얻어 현재의 상황을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해원기가 도로 석판 위로 와서 빠르게 포도 위를 움직였다.

삼품소원장이 달려온 곳은 이미 운해에 뒤덮여 방향을 분간하기 어렵고,

추측이 맞는다면 이 포도가 중추에 이르는 길일 터.

한 발을 내디디면 그만큼 물러나는 구름이 마치 약 올리듯 사람을 유혹한다.

해원기가 지면에 시선을 두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치공정은 각각 목금도피염(木金陶皮染)의 공업을 맡는다. 목공과 금공에, 도공이 화공이고, 피공은 토공(土工)이며, 염공은 수공(水工)이니 오행의 방위에 대응하지. 아저씨가 은허는 사방 이십 리쯤 된다고 했었다. 빠르게 처리하긴 했어도 고수라면 싸우는 기미를 감지했을 거리고, 삼품소원장의 말대로 다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머릿속에는 예전에 배운 신화의 기록을 바쁘게 되살리면서,

조금씩 이 희한한 진법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흑벽과 홍장이 새의 조각과 부적으로 진을 포설했던 장면, 그리고 도공정의 석판과 호조의 깃발.

자신이 갑자기 혼자 떨어진 이 장소는 은허 안이다.

상(商)은 현조(玄鳥)를 신으로 숭상하던 나라. 수도였던 은(殷)에는 당연히 존숭하던 신을 모시는 사당을 두었을 것이다.

역대의 왕조가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모시는 것처럼.

이른바 신묘(神廟).

바위와 돌덩이만 남은 은허에 아득한 예전의 신묘가 남았을 리 만무한데, 이렇게 운해의 진법이 발동한 건 우연이 아니다.

‘진법이 예정보다 일찍 이루어졌다는 말투였어. 이런 규모의 변화는 일반적인 부진으론 불가능하다. 심지어 진법의 대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고 해도. 오치공정과 구호농정을 기반으로 삼았더라도 기껏해야 오행(五行)에 구궁(九宮)을 더한 정도여야.’

생각이 멈추고 동시에 걸음도 멈추었다.

불쑥 전해지는 감각.

휘이잉.

바닥의 포도가 돌연히 멀리까지 드러나면서 좌우에서 날아드는 살기.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정수리로 떨어지는 맹렬한 기세에,

해원기가 껑충 뒤로 물러났다.

콰작.

바닥의 부서진 포도가 낫에 찍힌 것처럼 박살이 났다. 좌우에서 날아든 살기와 정수리로 떨어진 기세는 바로 세 자루의 기다란 과.

운해가 흩어지면서 아홉 명이 나타났고, 그건 조금 전에 겪었던 삼품소원장과 똑같은 구성이었다. 과를 쥔 하나와 그 좌우에 붙어 깃발을 든 갑사 둘. 다른 점은 오직 삼품소원장이 걸쳤던 홍의 대신에 백의와 청의, 그리고 황의를 걸쳤다는 것뿐.

오행에 맞춘 오치공정답게 오방색에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는 건가.

과를 내리찍었던 황의 중년인이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제장(諸將)은 쳐랏!”

우측의 청의 중년인이 기다란 과를 허리에 돌려 무서운 속도로 후려치고, 좌측의 백의 중년인은 손목을 떨쳐 과가 어지럽게 흔들리게 하고.

바닥을 찍었던 과를 따라 미끄러지듯 달려드는 황의 중년인은 바닥에 달라붙는다.

팔 척이나 되는 길이의 과다.

부우웅.

쇠몽둥이와 진배없이 짓이기려는 드는 자루, 피하려고 해도 날과 자루가 종잡을 수 없게 흔들려 시야를 가리고, 아랫도리로는 곡식을 베듯 날이 감겨들었다.

같은 과인데도 세 명은 전부 다른 용도로 쓰는 듯. 그러나 참으로 절묘한 배합이라 옴치고 뛸 틈이 없다.

해원기가 바닥을 찍어 공중에 거꾸로 튀어 올랐다.

‘봉(棒), 기(旗), 겸(鎌).’

몽둥이, 깃발, 낫의 초식이다. 여기에 패왕창과 방패가 곁들여진다면 대단한 합격술이 될 터.

조금 전의 삼품소원장에 못잖은 능력을 지닌 자들.

공중에 물구나무를 선 채 해원기의 두 손이 빠르게 엇갈리고,

차앙!

손도 대지 않은 고검이 뽑혀 나왔다.

재단경위의 저사직금이 그물을 이루어 셋을 뒤집어씌운다. 그런데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던 갑사 여섯이 동시에 깃발을 올려붙이고,

퍼엉!

폭음과 함께 해원기가 빠르게 몸을 회전해 내려섰다.

휘르르르.

천막처럼 이어져 검기의 그물을 밀어낸 여섯 장의 깃발이 갈기갈기 찢겨 날리지만, 그 밑의 아홉은 멀쩡한 모습.

오치공정에 해당하는 중년인들이 좌우 갑사의 어깨에 기대어 신속하게 세 방향으로 거리를 벌리니.

해원기의 예상대로 본래 합격진이었나 보다. 삼품소원장과 달리 공격과 방어 모두 한 단계 높은 수준을 보인다.

그러나 해원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사아아아.

검상은 본연검이언만 검신 위로 하얗게 번져가는 서리.

해원기의 눈에도 서늘한 신광이 맺힌다.

차라리 잘된 일. 삼품소원장 대신에 질문에 답할 입들이 생긴 셈이잖나.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이 진법이 진짜 궁상(窮桑)을 재현한 것인지 확인해야 엽산초부도, 오소민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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