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폐허유지(廢墟遺址) (4)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천지가 흔들리는 진동에 공간이 비틀어지는 것 같더니 주위가 엉뚱한 환경으로 바뀌었다.
사방으로 자욱하게 깔린 안개. 아니, 시야가 가로막혀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으니 안개가 아니라 구름 속에 있는 듯.
해원기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낚아채려 했던 엽산초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달려들던 홍장과 흑벽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분명히 절벽 위의 풀밭에 있었거늘. 사람 키를 훌쩍 넘게 자란 엄청난 풀밭은커녕 잡초 한 포기 찾을 수 없다.
일순간.
실제로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으니 일순간보다도 짧은 찰나였는데.
생전 처음 보는 곳에 혼자 서 있다니.
귀신이 곡할 일이지만, 침착하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진법에 의한 환경(幻境)인가.’
흑벽과 홍장이 새의 조각과 부적으로 부진을 포설하던 장면을 목격했었기에 자연히 진세에 휘말렸다고 여겼고,
그런 만큼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잠심침령을 일으키고 동시안을 펼쳤는데도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자욱한 구름뿐.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정경이다.
잠심침령은 고요히 자신을 살피는 신왕공의 유일한 심법이요, 동시안은 사물의 원형을 통찰하는 눈이거늘 아무런 이상을 찾지 못했다는 건,
‘실경(實景)이라고? 그럴 리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풀밭이 오히려 허상이었단 말인가.
믿기 어려워서 자신의 발밑부터 살폈고,
동시안이 강렬한 비췻빛을 반짝였다.
자신이 디딘 곳, 풀밭 대신에 돌조각이 잔뜩 깔렸다. 그것도 그냥 자연석이 어지럽게 부서진 게 아니라 일정하게 다듬은 모양.
석판을 반듯하게 잘라 가지런히 붙여놓은, 포도(鋪道)의 흔적이다.
해원기가 시선을 고정한 채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려던 풀밭에서 홀연히 바뀐 정경, 곁에 있던 엽산초부와 달려들던 적들이 사라졌으니 분명히 모종의 진법이 발동했다고 봐야 한다.
나름 진도지학을 공부했기에 함부로 움직이는 게 불리하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
그저 자욱한 구름이 일렁이며 앞이 조금 더 보일 뿐. 깨진 포도만이 계속 이어진다.
기이함을 넘어 막막할 정도.
대체 무슨 진법일까. 세상에 이런 진법도 있을까.
해원기가 당혹스러운 심정에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산산조각이 난 석판 하나. 그러나 지금까지의 부서진 돌조각과는 달리 위에 흐릿한 문양이 새겨져서 그 때문인지 꽤 원형을 유지했다.
작은 머리, 점이 가득 박힌 통통한 몸에 그 몸뚱이만큼 삐죽 나온 긴 꼬리를 가진 새 한 마리가 조그만 부리에서 불을 내뿜는 듯한 문양.
동시안으로 문양을 확인한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의 도식화(圖式化)된 고대의 무늬다. 고서에도 실려 있지 않은…… 흠, 이건 야계(野鷄)인 듯한데, 야계가 불을 뿜는 건 전혀 어울리지 않아.’
야계는 들꿩. 삐죽 나온 긴 꼬리가 딱 들꿩을 연상시키지만, 세상 어디에 불을 토하는 들꿩이 있나.
생전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진 곳이 또한 포도의 바닥 석판.
하지만, 괜히 이런 문양이 남아있을 리 없다.
이 기이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얻은 단서. 해원기가 그 흐릿한 문양을 뚫어지라 보았다.
‘아무리 기이막측한 진법이라도 공간을 뒤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기는 원하의 북쪽, 옛 은상의 제도였다고 전하는 은허. 설사 태항산 꼭대기로 날려졌다고 해도 이런 운해(雲海)가 보일 리 없고. 안양으로 향하는 관도에서부터 오 형이 남긴 표시를 따라 계속 북상했으니, 내가 있는 이 지점이 남쪽이라면?’
의식하지 못했으나.
잠심침령과 동시안을 계속 운용하면서 자연히 상상지가 깨어났고.
작은 단서를 어떻게든 해석해낸다.
무릎을 구부려 문양을 가만히 짚어보는 손이 자신도 모르게 세 손가락을 가지런히 편 모양. 남방은 화(火)에 속하기에 검왕수가 자연히 삼지화정(三指火正)의 형태를 이룬 건데,
파삭.
불을 내뿜는 들꿩의 문양이 바짝 마른 나무껍질처럼 부스러진다.
‘구웠다? 석판 위의 이 문양만.’
그냥 새겨진 게 아니었다. 다듬은 석판에 홈을 파고 흙을 구워 그 홈에 메워 넣은 것. 공력을 싣지 않았는데도 세 손가락이 석판에 닿자마자 문양만 먼지가 되어버렸다.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생각에 해원기가 눈을 부릅뜨는데,
그 순간.
촤아아.
매서운 바람이 벼락같이 날아들었다.
펑.
삼지화정을 그대로 내밀어 막아낸 해원기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얼굴을 굳혔다.
웅크린 자세로 급하게 내밀긴 했어도 삼지화정의 검왕수였거늘 손에 강한 충격이 전해지고,
기척도 없이 매섭게 날아든 것은 길이가 팔 척이나 되는 과(戈).
구름이 뭉클 흩어지는 오른쪽에서 인영이 어른거린다.
과는 긴 장대 끝에 낫을 붙인 것처럼 횡으로 날이 달린 병기. 멀리서 적을 잡아채거나 말의 다리를 베는데 쓰이지만, 지나치게 길어서 강호에선 거의 보기 어렵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 시진은 더 있어야 시작한다더니. 게다가 남방공정위(南方工正位)에 미리 와있는 놈은 또 뭐고. 젠장!”
과를 거두는 그림자에서 나오는 걸걸한 음성.
구름을 뚫고 쑥 빠져나오는 세 사람.
팔 척의 과를 한 손으로 흔들어대는 자는 거구에 홍포를 걸친 중년인. 화등잔 같은 눈에 거친 수염이 불같은 성격인 듯하고,
그 좌우에는 갑옷을 제대로 갖춘 둘이 각각 커다란 깃발을 들었는데,
상당히 급하게 달려오던 중이었는지 깃발이 거꾸로 펄럭이면서 그려진 그림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방금 해원기가 발견한 들꿩과 비슷하지만, 꼬리가 빗자루처럼 퍼졌고 수염이 날개인 희한한 새.
급습을 가하고 등장한 자들보다 깃발에 그려진 희한한 새 그림이 해원기의 시선을 더 끌었다.
“이놈, 네놈은 누군데 감히…….”
“깃발에 그려진 건 호조(扈鳥)인가?”
무례한 소리에는 관심도 없다. 대뜸 말을 끊고 묻자 과를 쥔 홍포 중년인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화등잔 같은 눈이 되록되록 해원기를 살피고,
“차림새가 문산계는 아니고, 음형사라기엔 너무 젊고. 에, 반룡령이라는 사냥개도 불렀다더니. 너, 거기냐?”
다짜고짜 과를 휘두르고 욕설을 내뱉을 때는 상당히 성급해 보였지만,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는 듯. 해원기를 파악하려고 일부러 말을 끈다.
해원기가 몸을 비스듬히 세웠다.
“동서남북 사방에 위치를 점하는 자가 하나, 호조를 두 마리씩 붙이고. 그렇다면 중앙에는 호조가 한 마리만 붙었겠군.”
질문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홍포 중년인의 반문으로 충분했다.
문산계, 음형사, 반룡령. 들먹이는 단어는 이자들이 동창 소속이라는 뜻이고, 남방공정위에 호조라면 이 기괴한 상황의 해답을 구할 열쇠다.
홍포 중년인이 큰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다 아는 내용…”
쉬왕.
멀거니 말을 받는 줄 알았더니. 손에 쥔 과가 굉음을 내며 해원기의 머리로 떨어진다. 세심한 게 아니라 교활한 자.
무지막지한 속도는 미리 준비했다는 거다.
그러나 해원기는 아예 홍포 중년인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사방을 메운 구름. 여간해선 흩어지지도 않고 기척을 알 수도 없게 한다.
그래서 해원기와 홍포 중년인 사이의 거리는 겨우 일 장 남짓.
팔 척이나 되는 과이니 무게도 적지 않고 긴 자루가 휘청거리기 마련인데 거구의 홍포 중년인에겐 젓가락과 마찬가지인 듯.
단숨에 해원기의 머리를 찍는데,
한 줄기 질풍은 어느새 홍포 중년인의 바로 앞까지 이르렀고, 돌풍이 과의 자루를 후려치면서 선풍이 홍포 중년인과 좌우의 갑사까지 휘감았다.
눈이 어릿한 신속(神速), 바람도 따라서 신풍(神風)으로 화한다.
따라락.
과가 여덟 조각으로 부서지고, 선풍이 광풍으로 돌변해 홍포 중년인을 때리는 순간.
홍포 중년인의 왼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펑!
바닥에 깔린 돌조각이 폭발하면서 해원기가 훌쩍 물러났다.
엄청난 장력. 단숨에 제압하려던 해원기의 광풍결이 흩어지면서 전면에 떠오른 시커먼 손바닥.
“이 무슨. 감히 나, 삼품소원장(三品昭遠將)에게, 으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두 개가 되었다. 솥뚜껑만 한 크기에 역시 솥 바닥을 닮은 색깔.
삼품소원장이라 자칭한 홍포 중년인이 그 거대한 손바닥을 미친 듯이 휘두르자,
콰콰콰콰.
쇳덩어리 같은 장력이 마구 쏟아진다.
세심하든 교활하든 지닌 무공은 극히 패도적인 자. 채 일 장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해원기를 짓이기려 들고, 동시에 갑사 둘이 깃발로 바닥을 쓸었다. 호조가 그려진 깃발로 교묘하게 해원기의 하체를 감으려는 것이 갑사들의 무공도 상당한 수준.
해원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두 손을 나누었다.
오른손은 횡으로 솥뚜껑만 한 손바닥을, 왼손은 종으로 감겨드는 깃발을.
추상검은 붕악이요, 유리검은 해운파랑검법이고. 두 개의 검상이 또 재단경위의 오의인 저사직금을 이룬다.
무겁고 오묘한 검기가 그물처럼 엮어지자,
퍼퍼펑!
뒤로 주르르 밀려나는 셋. 깃발을 휘둘렀던 좌우 갑사는 중심도 잡지 못해 나자빠지는데,
삼품소원장이라는 홍포 중년인이 재빨리 갑사들의 깃발을 잡아챘다.
전령이 흔히 등에 꽂는 영기(令旗)와 같은 사 척 길이의 깃대.
삼품소원장이 양손에 쥐자마자 깃대가 저절로 깃발을 휘감아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놈!”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호통을 치지만,
이번에는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다.
해원기가 짧게 혀를 찼다.
이 괴상한 진법의 내막을 밝히는 게 급선무. 그래야 엽산초부도, 오소민도 찾을 수 있다. 실마리를 잡았기에 조속히 세 명을 생포하려고 했지만,
삼품소원장이란 자가 만만치 않다.
처음과 두 번째의 과를 사용한 급습은 빠르면서도 무거워서 심후한 외공을 닦은 줄 알았다. 덩치도 당당했으니까.
팔풍지력을 써서 바로 제압하려 했더니 그제야 드러낸 패도적인 능력. 외모와 달리 상당히 노련한 자다.
게다가 양손에 깃발을 쥐면서 보이는 나사관천의 기예.
“쯧, 패왕창(霸王槍)을 제대로 익혔군.”
패왕창은 그리 희귀한 무공이 아니다. 다만 백 근이 넘는 무거운 창을 다루기 어려울 뿐. 무겁지 않으면 초식에 아무 위력이 없고, 무거운 창을 다루려면 반드시 독문의 내공을 익혀야만 하는데. 이 독문의 내공이 실전된 지 백 년이 넘었기에 그 후로 패왕창은 이름만 그럴듯한 삼류의 재주로 취급받아왔다.
이 내용을 가르쳐준 탁 소숙도 결국 자신의 건곤무극신공(乾坤無極神功)으로 대체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지금 삼품소원장이란 자는 그 독문의 내공을 익힌 자. 쇳덩어리 같은 파부철장(破釜鐵掌)과 양손으로 나사관천을 이루는 게 그 증거다.
‘탁 소숙이 봤으면 재미있게 여기셨을.’
얼핏 떠오르는 생각을 지우고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검왕수로 노닥거릴 여유는 없다.
두 발이 춤추듯 사뿐 나아가고, 두 눈에 신광이 번쩍인다.
쌍창으로 화한 깃발이 나사관천의 소음을 토하지만, 삼품소원장이란 자의 두 팔을 자르더라도 서둘러 싸움을 끝낼 셈이다.
남방공정위라는 이 위치.
바닥의 석판에 구운 흙으로 새긴 불 뿜는 들꿩.
그리고 삼품소원장의 좌우 갑사가 든 깃발에 그려진 호조까지.
여기가 은허라면 이 기괴한 진법의 의미는 정녕 간단치 않다.
절령제십칠(節令第十七) 한로(寒露)
한로가 되면 밤낮의 온도 차가 커지며 더욱 건조해진다. 옛사람은 한로를 한기점생(寒氣漸生), 즉 차가운 기운이 차츰 생겨나는 징표로 여겼다.
북쪽에서부터 한기가 세력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지루했던 우계(雨季)가 끝나니,
공기는 상쾌하고 바람은 서늘하며 비가 드물게 내려 바야흐로 가을이 짙어짐을 실감한다.
특히 백로(白露)보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므로 어쩌다 내리는 비조차 마치 이슬을 얼린 듯 차갑기에, 대개 한로(寒露)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으리.
이때, 기러기는 줄지어 남으로 날고, 하늘의 새 대신에 물가에 조개가 보이며, 국화는 노랗게 물들어서.
참으로 느긋하게 풍광 좋은 곳을 찾아 낚싯대 드리우고 술 한 잔 들이켜기 좋지만.
그러려면 미리미리 거둘 것은 거두고, 시간을 쪼개어 밀과 유채도 심어야 하리.
한 해의 수고가 자칫 헛고생이 될 수도 있음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