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폐허유지(廢墟遺址) (3)
참혹하기 그지없었던 과거의 난세.
천외육가에서 가장 위대한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던 고귀향 대관원의 호원가신도 겨우 셋만이 남아 세상을 희롱하며 살아가는 산적이 되었고.
백여 년이나 숙성한 사마의 세력은 그야말로 요괴나 망령과 다름없었기에, 녹림의 기인이라고 불렸던 세 명의 호원가신으로는 힘겨운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위한다는 거창한 이유는 몰라도 대관원이 새로이 선택한 녹림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목숨은 아깝지 않았다.
녹림삼성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죽는 장렬한 최후. 그거면 충분했다.
그러나 운명은 어차피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
까맣게 잊힌 마두들이 튀어나오면서 엽산초부가 가장 먼저 당했었다. 머리와 가슴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리고 독기에 육신이 녹아 버릴 지독한 중상. 그렇게 숨이 끊길 찰나에,
형제의 의리란 걸까. 첫째인 동심적과 둘째 당상폐관이 기어이 막내를 위한 희생을 마다치 않았고. 두 형제의 희생으로 간신히 한 가닥 생기를 얻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어 정신을 차렸으나, 남은 건 자신 혼자. 그리고 영원히 되돌릴 길 없는 죄책감뿐.
대관원 직계만이 익히는 무상창궁기를 전수받고, 소림 대환단과 무당 자소대법의 도움까지 받아 망가진 육체를 복구하면서도,
혼이 빠진 허깨비와 같은 삶이었다.
그 삶의 의욕을 되살린 건 바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으니.
녹림삼성이 공동으로 청강주를 선사했던 소년이 어느새 연검지회(練劍之會)를 주재할 만큼 컸다는 소식,
팔자의 언약으로 자신의 공로를 지운 백년제일검사가 은거한 후에 귀여운 따님을 얻었다는 소문,
그리고 방온화와 탁관영이 마침내 가약을 맺어 대관원의 후예를 얻은 사실.
엽산초부가 살아가는 이유다.
슬쩍 해원기의 소매를 잡았다.
“호오, 흑백청홍의 사색(四色)으로, 그 무슨 제독사대수비? 벽장성보(壁牆城堡)니까 수비라는 말은 되네그려. 가만, 이거 진짜 제독태감께서 납셨는가? 어이쿠.”
주름진 눈을 껌뻑이며 일부러 놀란 시늉.
해원기가 왜 갑자기 날카롭게 반응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짐작은 할 수 있었고,
섣부른 판단보다 중요한 건 일의 경중이다.
가볍게 주둥이를 놀려댄 홍장 때문에 인상을 쓰던 흑벽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멋모르고 숨어든 것들은 아니었구나. 홍아, 보고를.”
성큼 나서며 빠르게 허리를 스치는 손.
철컹.
허리 뒤에 매달았던지 오른손에 커다란 수갑(手甲)이 씌워지고,
강한 기운이 확 밀어닥친다.
엽산초부가 얼핏 낭패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오소민의 행방을 찾는 게 우선이고, 그다음은 동창이 이 은허에서 무슨 수작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
괜히 상대를 경동시키지 않는 게 좋은데.
‘제독태감’이란 말을 듣자마자 흑벽이 달려들고, 홍장은 대뜸 품에 손을 넣어 신호를 올릴 자세다.
비록 해원기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했지만, 내력을 알 수 없는 상대요, 손에는 보기 드문 수갑까지 끼웠으니. 서둘러 먼저 나서는 게 옳다.
무상창궁기를 끌어올리면서 허리춤에 꽂았던 감시부를 그대로 내던졌다.
흑벽이 먼저 나섰으되 공격은 엽산초부가 더 빠르다.
쉬익.
커다란 도끼가 공간을 가르고 곧장 날아들자 흑벽이 수갑을 힘차게 휘둘렀다.
차앙!
쇳소리가 울리면서 멈칫하는 신형. 비록 도끼를 튕겨 내긴 했으나 충격이 상당하고,
어느새 엽산초부가 튕겨 나간 도끼를 가볍게 잡아채 거리를 좁혀온다.
다 늙은 나무꾼이라 여길 수 없는 경쾌한 신법과 커다란 도끼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솜씨.
흑벽이 인상을 쓰면서 오른손의 수갑을 당겼다가 왼손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용수철이라도 달린 것처럼 무섭게 튀어 나가는 수갑.
크다고 해도 손 크기의 두 배도 되지 않던 것이 단숨에 엽산초부를 덮을 만큼 펼쳐진다.
휘릭.
엽산초부가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감시부를 뒤집어 날 부근을 잡자,
도낏자루가 마치 검이나 창처럼 사방으로 뻗었다.
차차차차창.
귀를 찢는 소음에 불꽃까지 튀는데,
“헉!”
엉뚱하게 홍장이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린다.
촤륵.
내던졌던 수갑을 회수하며 흑벽이 급히 시선을 돌리자, 그 눈에 박살이 난 호각과 창백한 안색으로 손을 떠는 홍장이 들어왔다.
“홍아! 무슨 일이…….”
뭐가 어떻게 된 건가.
그러나 그 대답을 들을 새도 없다.
“허, 완전 초짜구먼.”
휘잉.
엽산초부의 비웃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밀어닥치는 맹렬한 기운. 싸우다가 상대에게서 눈을 떼는 건 초심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다.
흑벽이 황망히 몸을 틀며 왼팔을 흔들었다. 오른손의 수갑으론 제때 막을 수 없으니 왼팔을 희생할 셈일까.
하지만,
따앙!
망치로 쇳덩이를 때린 듯한 굉음. 거목을 찍는 것처럼 도끼날을 횡으로 날렸던 엽산초부가 되레 감시부를 거두며 뒤로 밀려났다.
엄청난 반탄력에 손아귀가 저릿하게 울려서 눈매가 저절로 일그러졌다.
흑벽의 왼팔. 충격으로 찢겨 나간 소매 속에 반드르르 윤이 나는 비늘이 눈에 띈다. 그건 아마도 팔뚝을 전부 덮은 토시일 터.
오른손의 수갑도 보기와는 달리 무수한 쇳조각을 이어붙여 만든 물건이다. 그냥 철수(鐵手)가 아니라 쇠사슬로 이어져 우산처럼 확 펴지기도 하는 기이한 병기.
‘기병에 호신의 토시, 그리고 내 도끼를 견디는 공력이라.’
아까 잠깐 손을 섞어보았던 상선태군이나 직전고사보다 오히려 상대하기 어려운 느낌.
엽산초부가 감시부를 고쳐 쥐려는데.
해원기가 훌쩍 어깨를 나란히 했다.
흑벽과 홍장이란 이름을 듣자 바로 떠오른 생각에 조금 성급했었다.
사부의 마지막 싸움. 사부의 얼굴이 절반이나 상하고 반신을 제대로 움직이기 어렵게 만들었던 그 처절한 결전.
상대는 지부의 주인인 천마였고, 그것도 천괴성을 타고 난 진정한 천자마왕이었다.
하늘에 닿는 지혜와 대지를 뒤엎을 능력을 지녔다고. 그래서 지부의 마공뿐 아니라 신주의 정종무공까지 모조리 통달했으며.
그런 천마를 모시는 사대시위(四大侍衛)가 흑백청홍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들었다.
필경 해원기가 아는 무림은 사부에게서 들은 과거의 내용이 태반. 동창에게서 보이는 벽세와 지부의 흔적이 짙어질수록 민감하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게 된다.
오는 도중 풀지 못했던 사황령의 문제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사황령의 진정한 의미는 세상에서 사라진 마종지기(魔宗之氣)의 복원이니 절대로 소홀히 대할 수 없다.
다행히 엽산초부가 그런 성급함을 제때 깨우쳐 주었다.
지금껏 제대로 문제를 풀어낸 적이 있었던가.
무공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상황을 잘 파악하고 핵심을 정확히 짚은 후에야 무공도 효과를 내는 법.
일단 마음을 다스렸고,
홍장이 신호를 보내려는 것부터 막았는데. 발검제형을 지법으로 응용해 호각을 부수면서 새삼스럽게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바로 엽산초부가 흑벽에게 ‘초짜’라고 한 것과 같은 느낌. 멀쩡하게 상대가 앞에 있는데 아무런 방비도 없이 호각을 내보이며 불려 하다니.
해원기 자신도 무림에 발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동창의 인물들은 지닌 능력과 상관없이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물론 강호가 아닌 대내에서만 지냈기에 함부로 남을 깔보고 자존망대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전부가 다 그런 것도 아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선은 엽산초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해원기가 가만히 엽산초부의 손목을 잡았다.
“저건 용린귀갑수투(龍鱗龜甲手套)라는 물건 같군요. 그런데 공교부를 수인에게 넘겨주고선 검법을 익히셨나 봅니다.”
엽산초부가 반탄력에 조금 손해를 본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대적하면서 우리 사정을 숨기는 건 싸움의 기본이다.
엽산초부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히죽 웃었다.
“혼자 놀기 영 심심해서 귀동냥, 눈동냥 좀 한 걸 금방 알아보시는구려. 이거 창피해서. 아, 용린귀갑수투라면…… 사천당문 쪽에서 나온?”
자신의 공교부법에 삼성진(三星陣)의 변화를 섞고 나중에 검도총론(劍道總論)을 배우면서 나름 새로운 부법을 만들었다. 연검지회에서 공개한 검도총론은 해원기의 사부가 무림의 회생을 위해 전한 것.
흑벽을 몰아붙인 새로운 부법에 검법이 담긴 걸 알아본 해원기는 역시 절세검왕이로구나.
그런 감탄과 함께 노련한 산적답게 각지의 희귀한 물건에 관한 소문을 기억해 냈다.
용린귀갑수투는 사천당문이 독물과 암기를 다룰 때 보호를 위해 사용하는 특이한 장비.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산철장이지요. 과거에 당문과 가까웠다던.”
조화부인의 수하가 펼쳤던 철릉쇄혼관에서 이미 흔적을 발견했었다.
이 또한 아직 풀지 못한 문제 중 하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떼어 등 뒤로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초짜들 상대는 저에게 맡기셔야죠. 남들이 보면 저 욕합니다.”
엽산초부가 눈을 끔뻑하곤 입맛을 다셨다.
해원기가 괜히 말리는 게 아니다.
잡혔던 손목에서 얼핏 전해지던 청정한 기운. 자신이 혹시 내상이나 독상을 입었는지 확인했다는 의미다.
일대일로 싸워서 흑벽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해원기는 상대의 내력을 이미 아는 듯하고.
검을 쥐는 모습에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고검.
사마를 멸하고 천하를 구한 검을 그 주인이 뽑는데 누가 끼어들 수 있겠나.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흑벽보다 멍청하게 호각을 날린 홍장이 분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
“이놈잇!”
오랜만에 만난 오라버니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어디서 굴러먹던 천둥벌거숭이가 이따위 야료를 부리다니.
저놈이 호각을 부수는 바람에 오라버니가 늙다리에게 밀리는 수모를 당했거늘, 눈앞에서 또 여유만만하게 늙다리와 노닥거린다.
속이 뒤집혀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치링.
허리띠에 붙였던 철편(鐵鞭)을 잡아 뽑아 더벅머리부터 갈기갈기 찢을 셈.
“홍아!”
이 갑작스러운 돌격에 흑벽이 놀라 황급히 땅을 박찼다.
촤르르.
홍장을 지키려고 귀갑부터 화살처럼 쏘아내고 사정없이 질러대는 왼팔에선 용린이 시퍼런 빛을 뿜어댄다.
단번에 공간을 뛰어넘어 해원기에게 들이닥쳤다.
그런데.
그렇게 홍장과 흑벽의 공격이 한꺼번에 이르고, 해원기가 막 고검을 뽑으려는 순간.
우웅.
돌연 천지가 흔들리는 진동.
바닥을 딛고 선 해원기와 엽산초부뿐 아니라 공중에 뜬 홍장과 흑벽도 덜컥 몸이 기울었다.
이 괴변에는 해원기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지진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비틀어지는 감각. 바로 앞으로 닥쳐들던 홍장과 흑벽의 모습이 이상하게 뒤틀리면서 그 기척까지 사라지고, 곁에 있는 엽산초부가 문득 아득히 멀어지는 듯하다.
검을 쥐려던 손을 뒤집어 엽산초부를 와락 채보지만,
팍.
그전에 해원기가 물거품처럼 꺼져 버렸고.
연달아 남은 셋의 신형도 공간에 삼켜진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슈르르르르.
풀밭이 이 기막힌 변화에 놀란 듯 미친 듯이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