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70화 (270/410)

제68장 폐허유지(廢墟遺址) (2)

본래 엽산초부의 병기는 공교부(工巧斧)라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애들 장난감 같은 도끼였다.

그건 진즉 방수인에게 물려주었고, 그 후로 지닌 것은 흔히 장작 팰 때 쓰는 감시부(砍柴斧).

엽산초부가 그 감시부를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제가 빠져나왔던 곳입니다. 잡초가 무성해서 절벽의 무너진 틈을 잘 가려주었죠. 위로 올라가면 아까의 삼림과는 달리 나무도 별로 없고, 온통 바위와 돌무더기만 깔린 평지랍니다. 흠, 평지라고 하기엔 조금 불룩한 모양이지만.”

녹림장관의 대탐자이신 방수인을 보살피려고 하북에서 내려온 엽산초부다.

처음에는 안양에 거점을 두고 탐자들의 연락을 기다리려다가, 의심스러운 분위기에다 방수인의 종적이 뚝 끊기는 바람에 안양 외곽을 통해 내려오던 길.

창덕부 관원들이 몰린 은허를 옆으로 보며 빠져나왔기에, 지금 다시 되돌아가는 셈이다.

해원기가 방금 건넌 원하를 잠깐 돌아보았다.

“아저씨 덕분에 쉽게 건넜습니다만.”

엽산초부가 내려올 때 이용했던 작은 통나무 몇 개. 강변에 남은 그 통나무가 다시 유용하게 쓰였다.

절벽 아래에서 길을 가리켰던 엽산초부도 고개를 돌렸다.

“밥맛 떨어지는 것들은 계속 그 어울리지 않는 야점을 지키는 걸까요?”

해원기가 왜 돌아봤는지 금방 알아챈다.

비록 둘이 빠르게 움직이긴 했으나 잠종미리진을 벗어나 황무지를 거쳐 원하를 넘는 동안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거늘,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어마감, 상선감, 직전감의 태감이라고 여겨지는 셋. 그중 어마감인 사마대가란 자는 둔법으로 사무장을 불러내지 않았던가.

게다가 해원기가 먼저 겪었던 자들, 국감과 반룡령 잔당은 어디로 갔을까.

노련한 엽산초부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가 짧게 혀를 찼다.

“쯧, 아저씨 말씀대로입니다. 교활한 것들의 괴상한 짓거리를 일일이 따질 여유는 없죠. 속히 움직이면서 연꽃 문양을 찾도록 합시다.”

“넵. 공자.”

엽산초부가 기운차게 앞으로 나섰다.

휘어 도는 원하는 상당한 급류. 자신이 준비했던 통나무가 있긴 했어도, 해원기는 거의 물 위를 걷듯이 가볍게 건넜다. 참으로 기함할 부력답수의 경공.

삼림에서 사무장이란 넷을 한 수에 물리친 검왕수부터,

근 이십 년 만에 만난 ‘우리 해 공자’의 놀라운 능력에 괜스레 뿌듯해진다.

무성한 잡초 정도가 아니라 사람 키를 훨씬 넘는 엄청난 풀밭이었다.

엽산초부의 안내로 간단히 절벽을 올라온 해원기가 조금 기가 막혔다. 원하가 작지는 않아도 강 하나를 두고 이렇게나 다른 환경이라니.

잠종미리진이 펼쳐졌던 울창한 삼림에 전혀 뒤지지 않는 풀밭인데, 그러면서도 제대로 큰 나무는 몇 그루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연꽃 문양을 찾는 건 무리지. 그런데…….’

일단 앞장선 엽산초부에게 말을 걸었다.

“창덕부 관원들이 법석을 떤다는 곳, 은허와는 얼마나 떨어졌습니까?”

엽산초부가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웅크렸고.

“음, 해 공자는 이쪽이 처음이시지요? 뭐, 세상에는 은허라고 알려지긴 했습니다만, 사실 정확히 어디라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답니다. 이 절벽을 온통 뒤덮은 이 풀밭만 해도 수백 장 길이고, 이 풀밭을 벗어나면 눈 닿은 곳은 전부 바위와 돌덩이뿐. 그게 또 사방 이십 리는 족히 되는 넓이라, 전부를 은상제도(殷商帝都)라고 할 수 있을까요. 워낙 오래된 전설인데.”

해원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관원들이 들락날락하며 여기저기에 천막을 치더라고요. 딱히 관병을 조발하지도 않고서 관아의 인원으로만. 제가 본 것만도 족히 천 단위의 인원을 수용할 크기였기에 ‘위초산채’가 진짜 벌어지는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아까 들은 해 공자의 얘기에 문득 옛 기억이 겹쳐지더군요.”

옛 기억.

가만히 쳐다보는 해원기에게 엽산초부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무경신병(武經神兵)이니 삼색지보(三色之寶)니 전설에 시달렸던 기억입죠.”

지나온 일들을 자세히 일러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해원기는 간단히 동창이 장안과 낙양에서 일으켰던 일들만 간추려 말했건만,

난세를 겪은 사람답게 엽산초부는 바로 알아들었던 듯.

신마불독기(神魔佛毒奇)의 오대무경(五大武經).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을 지녔다는 칠대신병(七大神兵).

무공비급과 신병이기는 언제나 강호에 풍파를 일으키는 원천이요,

여기에 화법진(化法眞)을 마음대로 이룬다는 홍환(紅環), 녹판(綠板), 백합(白盒)의 황홀한 전설은 그야말로 무림을 뒤흔든 동경과 탐욕의 근본이었다.

옛 도읍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보물을 찾는다면 당연히 사라진 전설의 조각을 찾으려는 의도일 터.

그게 어처구니없는 힘에 대한 욕망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 형이 그런 암호를 전한 데에는 그런 염려가 있었을 겁니다. 녹림을 친다고 사방에 나팔을 불어댄다, 이건 다른 행동을 숨기기 위한 가림막이겠죠. 태감과 국감, 그리고 반룡령, 상당한 인원을 동원한 이유가 무엇일지. 뭐라고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신화라는 걸까요? 그러지 않아도 노조와 관주가 사마의 잔재가 엉뚱한 곳에서 되살아날까 은근히 걱정하던 판이어서. 후우.”

늙은 나무꾼의 한숨에 해원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강호의 안정과 무림의 회생.

과거의 난세가 마무리된 후에 근 이십 년에 걸쳐 모두가 노력했던 목표였다.

머리 셋 달린 요괴로 여겨졌던 벽세, 천하의 모든 마류를 낳는 마도의 종주 지부. 사부에 의해 그 머리가 잘린 사마는 이름 그대로 세상 밖과 땅속으로 기어들었고,

천극 탁관영을 비롯한 정세삼협이 이들이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단단히 빗장을 채웠지만.

백 년이 넘게 이어졌던 난세의 후유증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구주정문과 사라졌던 전통이 재건에 힘을 쏟는 동안, 사마의 잔재 또한 남이 알지 못하게 힘을 회복했으니.

강호와 무림만 생각했던 것이 실책이었을까. 강물과 우물물이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묵계를 지나치게 믿었을까.

그 순진함을 비웃듯이 당세의 혼란은 황궁에서 시작되었다.

해원기는 엽산초부의 말에서 녹림장관이 일찍부터 동창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 목적도 어느 정도 파악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은 내 잘못이었다.’

맨 처음 사건에 연루된 곳이 호중객잔. 그때 아예 녹림장관을 찾았다면 사태의 핵심에 조금 더 빨리 접근했을 터.

무림에 발을 들이기 싫다는 자신의 고집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자책이 들었다.

순간,

해원기와 엽산초부가 말을 멈추고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불현듯 나타난 기척과 말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이쯤이면 끝이잖아? 대충 여기다 놓고 돌아가자고.”

사사사.

엄청나게 자란 풀이 한꺼번에 갈라지면서 붉은 옷을 걸친 인물이 투덜거리자,

바로 뒤의 키 큰 인물이 가볍게 혀를 찼다.

“쯧, 굳이 따라와서 훼방을 놀 셈이냐?”

웬만한 장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늠름한 체격에 흑의 경장을 걸친 중년 사내. 앞에서 투덜거리는 자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나풀거리는 얇은 경사(輕紗)를 신경질적으로 다듬는 붉은 옷은 머리에 여러 장식을 꽂은 젊은 여인이었다.

“훼방이라니! 다 오래간만에 만난 오라버니를 신경 써주는 거잖아. 기껏 불려와서는 이런 일이나 하는 게 말이 돼? 하여간.”

대뜸 허리에 손을 얹으면서 중년 사내를 째려본다.

거구의 중년 사내가 고소를 지으며 달래듯 손을 내밀었다.

“아까부터 입이 나와 있더니만. 자, 그럼 네 말대로 여기에 설치하고 바로 돌아가자꾸나. 그리고…….”

툭.

중년 사내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꽤 무게가 나가 보이는 물건.

“남들 앞에선 불만을 드러내지 말아라. 밀각 육학사가 문무제신(文武諸臣)을 동원했고, 대내아문(大內衙門)이 절반 넘게 모이는 자리야. 쓸데없이 트집 잡히는 건 좋지 않다. 더구나.”

다독이는 말투에 홍의 여인이 콧방귀를 뀌며 종알거리더니,

“흥, 알았어, 알았다구. 분위기가 묘하다는 건 나도 느꼈으니까. 그래도 이런 하찮은 일이라면 창덕부 아랫것들이 있을 때 시켰으면 되잖아. 게다가 밀각의 명령이란 게 영 마뜩잖아서. 우리가 밀각의 아래도 아닌데.”

그러면서도 부지런히 소매에서 누런 황지(黃紙) 몇 장을 꺼내 뿌려대고,

기묘하게 두 손을 엮는 수인(手印).

“훙(吽)!”

입속으로 웅얼대는 짧은 기합과 함께 몇 장의 황지가 저절로 재가 되어 흩어지자,

홍의 여인이 손을 탁탁 털며 돌아섰다.

“됐어. 우리가 맡은 남쪽은 이걸로 끝. 이 풀밭은 진짜 짜증 나니까 요 위쪽으로 가서 좀 쉬자. 아까 하던 얘기도 마저…… 오라버니?”

말끝이 위로 올라붙는다.

거구의 중년 사내가 돌연 몸을 세우며 두 눈에 날카로운 빛을 담는 바람에.

그 시선이 향하는 곳.

홍의 여인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중년 사내가 묵직하게 목소리를 울렸다.

“누구신지? 영접의 연락은 없었소만?”

한 치 앞도 분별하기 어렵게 시야를 가린 풀들이 그 목소리에 눌린 것처럼 좌악 눕는다.

십여 장 거리가 단번에 훤해지면서 해원기와 엽산초부의 모습이 드러나고,

엽산초부가 거센 바람을 만난 듯 드러눕는 풀을 훑어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허, 눈치도 빠르고 대응도 적절하네. 솜씨가 제법입니다, 공자.”

원하를 건너 절벽을 오르는 동안 주위를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건만, 이렇게 가까워진 후에야 흑의 사내와 홍의 여인의 기척을 알아챘다.

숨을 죽여가면서 둘의 행동을 살폈는데도 기어이 발각되었고, 흑의 사내는 섣불리 손을 쓰기보다는 먼저 시야부터 밝혔으니.

범상치 않은 자다.

알뜰하게 그런 의미를 전하는 엽산초부의 말에 해원기가 시선을 슬쩍 내렸다.

홍의 여인의 발치에 놓인 물건.

그건 쇳덩이로 만든 듯한 새의 조각이었고, 그 모양이 날렵한 제비로 보인다.

“부진(符陣)의 포설에 기척이 드러났다면 그 목적이 대개 지역을 정화하는 데 있기 때문이죠. 이것도 희한한 짓이로군요.”

부진은 형상을 갖춘 실체로 일정한 방위를 점하고, 거기에 부적 따위를 덧붙여 발동하는 진법.

그 설치가 상당히 번거롭고 공을 들여야 해서 이제는 거의 실전된 옛 방식이다.

그나마 부진의 형태가 아직도 쓰이는 곳이라면 속된 방사(方士) 나부랭이가 과장되게 흉내 내는 액막이 굿판 정도.

흑의 사내가 해원기와 엽산초부의 기척을 발견한 건 홍의 여인이 부적을 살랐기 때문이다.

오가는 대화에서 동창이란 걸 확인했으나,

여기에 갑자기 부진은 왜 설치하는가.

정결하게 제사라도 지낼 것처럼.

해원기와 엽산초부의 차분한 대화에 흑의 사내의 눈썹도 꿈틀거렸다.

하나는 커다란 도끼를 든 늙은 나무꾼, 또 하나는 허름한 용모에 장검을 걸머진 젊은이.

‘공자’라는 호칭에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고.

자신이 펼친 힘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비록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부드러운 경력을 쓰긴 했어도 산들바람으로 무시할 수는 없거늘.

홍의 여인이 홱 돌아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는 어디 소속이야? 이따위 작자들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

철딱서니 없는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걸 흑의 사내가 얼른 손을 들어 막았다.

“불청객이로군. 명호를 알 수 있을까?”

홍의 여인과 달리 진중한 성격인 듯.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흑의 사내에게서 슬그머니 기세가 일어나자, 그제야 홍의 여인의 얼굴도 굳어진다.

절벽을 오를 때부터 엽산초부는 감시부를 허리띠에 비스듬히 찔러 넣었고,

그래서 한 손을 도끼날에 올린 모습이 마치 허리의 검에 손을 올린 모양 같았다.

“호오, 상대가 누군지 아는 게 먼저다? 의도는 좋다만, 제대로 배우진 못했구먼. 어른의 존함을 얻어들으려면 먼저 제 이름부터 대는 게 예의란다.”

어른이라.

칠십대에 접어든 엽산초부는 당연히 흑의 사내와 홍의 여인보다 어른이지만, 엽산초부의 말에는 자신뿐 아니라 해원기도 포함하는 의미가 담겼다.

무림에선 나이보다 배분. 당세에 누가 해원기 앞에서 어른을 자처할 수 있겠나.

아울러 가벼운 도발.

“이놈들잇! 우리가 누군지 알고 감히…….”

과연 홍의 여인이 바로 쌍심지를 세우지만,

중년 사내는 여전히 신중했다.

“모르고 찾아온 손님은 아니군. 어쩐지 윗전에서 밀각의 명령에 따르라고 하시더니. 역시 무뢰배들이 끼어들 것을 예상하셨던 거였어. 어쨌든 지루하던 참에 잘되었다. 네놈들을 꿇려 끌고 갈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려주마. 나는 흑벽(黑壁)이라고 하고, 여기 네 여동생은 홍장(紅牆)이라고 부르지.”

검은 울타리에 붉은 담장.

희한한 이름을 대봤자 신분을 알 수는 없다.

그렇게 이름을 밝히면서 달라진 건 둘에게서 선명하게 일어나는 기세. 흑벽이라는 사내에게선 차갑고 묵직한 쇳덩이가 연상되고, 홍장이라는 여인에게선 현란하고 어지러운 느낌이 전해진다.

이름을 밝히면 본연의 능력을 쓴다는 뜻인지.

그런데.

나서려는 엽산초부보다 먼저 해원기가 입을 열었다.

“흑벽, 홍장. 청(靑)과 백(白)의 성보(城堡)도 있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엽산초부뿐 아니라 자세를 잡아가던 흑벽과 홍장도 주춤하게 만든 질문.

그 목소리가 땅속으로 가라앉듯 무거워진 걸 깨닫기 전에 홍장이 어이없다는 듯 가벼운 주둥이를 놀렸으나.

“헤에? 청성(靑城)과 백보(白堡)를 안다고? 네놈이 어떻게 제독사대수비(提督四大守備)의 이름을……!”

제멋대로 나오던 말이 뚝 끊긴다.

해원기의 두 눈. 새파란 신광이 번갯불 치듯 이르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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