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폐허유지(廢墟遺址) (1)
조화부인을 뒤쫓는 오소민을 찾아 북쪽으로 향하다 삼림에 펼쳐진 잠종미리진에 휘말렸고, 그 중심에 또 조화부인이 마련한 것과 똑같은 모양의 야점이 존재하며, 동창의 고위 태감으로 보이는 자들이 모여들었으니.
조금 더 지켜보면서 그 내막을 알려고 했었다.
이치를 파악한 진법, 파진운보를 겸용한데다가 나무 위에 숨을 때는 부신수형까지 섞었기에 어떤 고수라도 쉬 알아챌 수 없을 터.
본래 부신수형 자체가 정종 무공이라 하기 어려운 은형(隱形)의 신법이니까.
그러나 엽산초부를 알아본 이상,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바로 뛰쳐나가 사무장이란 자들을 일거에 물리쳤지만, 계속해서 마음속에 걸리는 부분 때문에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저를 따라 빠지시죠.]
검왕수를 펼치면서 전음을 보냈고,
엽산초부의 감격에 겨운 탄성도 바로 그쳤다.
휘익.
해원기의 오른손이 다시 발검제형으로 뻗고, 동시에 엽산초부와 함께 바람처럼 숲으로 뛰어든다.
공간을 가르는 검형이 곧장 사마대가를 노리지만,
파앙.
적시에 뻗는 불진과 채도에 가로막혔다. 중간에 직전고사와 상선태군이 있는 바에야 사마대가에 닿기는 어려운 일.
물러나기 위한 허초일 뿐이라 굳이 결과를 볼 생각도 없었는지라.
직전고사와 상선태군이 급히 손을 써서 막았을 때는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어? 이게.”
불진을 털며 어이없다는 소릴 내는 직전고사. 상선태군은 채도를 거두지도 않고 서둘러 사마대가를 돌아보는데.
“사마대가! 저 젊은 놈은…….”
손목의 팔찌를 바짝 당긴 사마대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들은 대로의 용모로군. 검왕수라고 했지. 본 성조(聖朝)의 행사에 사사건건 끼어들었다고 하더니만. 흐음, 절세검왕이라.”
진도금환에도 표시되지 않은 채 나타났고, 녹림장관의 늙다리와 서로 아는 사이. 사무장을 한 손으로 격파한 놀라운 능력은 검왕수라고 했다.
더벅머리 애송이가 누군지 당장 알아채면서,
사마대가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려는 모습에 상선태군과 직전고사는 눈치만 살필 뿐.
나뒹구는 사무장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고, 공자, 손을 좀.”
엽산초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단숨에 이십여 장을 날아가던 해원기가 비로소 신형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를 따라 빠지자고 전음을 보내놓곤 지금까지 잡아끌고 다닌 셈.
손을 놓으면서 머쓱하게 주변을 훑어본다.
“에. 이쯤이면 진법의 바깥일 겁니다. 묘한 지형이로군요.”
지대가 조금 높아지면서 울창한 삼림이 누가 칼로 자른 것처럼 뚝 끊겼다. 평평하고 넓은 땅, 인가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가 시야를 메운다.
안양 성문으로 통하는 관도에서 북쪽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잠종미리진이 펼쳐진 곳은 안양의 성벽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삼림이었고, 그 삼림을 벗어나자 바로 이런 황무지.
“저 위로 가면 원하(洹河)가 있어서. 아니, 어떻게 여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리를 설명해주려던 엽산초부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말재주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질문조차 헷갈리는 건 워낙 기묘한 상황에서 해원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해원기도 복잡한 심정에 머리를 긁으려다,
얼른 손을 내리며 표정을 고쳤다.
지금은 평소처럼 굴 때가 아니다.
“저도 지금 제대로 파악하질 못해서. 음, 아저씨, 일단 움직이면서 제 마음대로 얘기를 해보죠.”
양해를 구하고 바로 북쪽을 가리켰다.
사방이 툭 터진 이곳보다는 원하가 있는 물가가 나을 듯.
원하 강변이 가까워지면서 왜 이런 황무지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원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황하고도(黃河故道), 태항산맥에서 발원하는 위하(衛河)로 흘러들어 멀리 천진(天津)까지 이어지는데,
태항산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마주해서인지 안양 북쪽에서 급격하게 남쪽으로 구부러지는 만곡하류(彎曲河流)요, 그 때문에 강의 남쪽은 이런 황무지가, 강의 북쪽은 높은 절벽이 막아선 형태가 되었다.
거친 모래가 퇴적한 강변을 보며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저 원하 북쪽이 은허일 텐데.”
곁에서 도낏자루를 짚은 엽산초부도 심각한 표정.
“네. 평소에는 인적도 없는 곳에 창덕부의 관원들이 갑자기 몰려들어 법석을 피우는 통에. 그러지 않아도 정록이 보낸 소식 탓에 탐자들이 정신없이 바쁜 판인데, 대탐자란 녀석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고…….”
정록이 보낸 ‘위초산채’의 암호. 녹림장관이 태항산에 간판만 내건 산장을 미끼로 동창의 동정을 파악하려고 팔대탐자를 다 움직인 일은 이미 방수인에게 들었다.
그러나 방수인이 미처 말하지 못한 한 가지. 그건 막 대탐자가 된 방수인을 보살피려고 엽산초부가 보호자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말하지 못한 게 아니라 일부러 말하지 않았겠지.
신향에서 소집된 금의위를 골려 먹으려고 몰래 빠져나왔으니 해원기에게 슬그머니 그 사실을 숨긴 모양이다.
‘이 맹랑한 녀석.’
만약 앞에 있었다면 꿀밤 한 대는 먹였을 터. 엽산초부와 우연히 만나게 된 배경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나.
상황을 모르는 건 여전하다.
오소민과 함께 길을 떠난 건 태항산의 녹림장관을 찾아 정록과 연락을 시도하고, 동창의 내부를 적극적으로 살피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동창이 녹림장관을 토벌한다는 위초산채의 소식부터, 안양 근처의 십리파 야점에서 조화부인을 만나고 나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이다.
조화부인이 도주하기 위해 마련한 수단이라고 여겼던 음정수백. 요물단지를 다 제거하기 전에 부리나케 달려온 상의신모와 도지태사. 정종의 신공을 익혔으면서 음정수백을 흡수하는 사황령의 흔적이 보였고.
둘을 제압하자마자 병장감, 침공감, 사원감의 세 무리가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이 또 불러낸 반룡령의 소령주 백문량.
이들이 전부 조화부인의 안배일까.
‘그녀는 음정수백을 빌려왔다고 했지. 상의신모와 도지태사가 남은 음정수백을 흡수했었고. 그 둘은 태감, 세 국감은 태감 둘을 따라온 거로 보였어. 북쪽에서 내려온 백문량이 영접이라고 했으니까 본래 계획된 회합이 있다는 뜻이다. 반룡령이 대기하던 곳은 아마도 황무지와 삼림 중의 하나였겠지만.’
그럼 또 다른 세 명의 태감은 무슨 의도로 삼림에 잠종미리진을 펼쳐놓았을까.
잠깐 들은 대화에서 사마대가를 비롯한 셋은 상의신모 일행을 기다렸던 것 같았고, 영접을 맡은 반룡령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사마대가가 얼핏 중얼거렸던 농교성졸이란 탄식. 계획했던 게 꼬였다는 의미가 담겼었다.
동창이 얼마나 거대해지고 복잡해졌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알려진 이십사아문에서 태감이 다섯, 국감이 셋이나 나왔으니 상당한 규모요. 그간의 행사와는 사뭇 다른 느낌.
무엇보다 조화부인이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전혀 티가 나지 않는데다가,
오소민은 행방불명이다.
어떻게 된 노릇인가.
“험, 개방의 순행장로, 오 장로랑 같이 오셨다고 했지요? 해 공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조화부인이라는 자가 여간 아닌 요물 같은데. 혹시 진법에도 일가견이 있을까요?”
일단 방수인이 철금장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고,
해원기가 초조해하는 이유를 대강 짐작한 듯.
엽산초부의 말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이전에 여러 가지 괴이한 진세를 운용한 적도 있고.”
아암귀명진이니 구구염양진이니. 공동파의 도결을 익힌 흔적도 보였으며, 곤혹도를 얻었다면 사술에도 뛰어날 터.
“그렇다면 조금 전의 미리진 정도는 쉽게 통과하지 않았을지. 진법에 어두운 저도 어떻게 진안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안양 성벽을 타는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이치에 통했다면 얼마든지…….”
이것저것 따져보는 말에는 노련함이 묻어나서.
해원기가 황연히 표정을 고쳤다.
삼라잠종진을 기초로 만든 듯한 잠종미리진. 딱히 암습이나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흔적을 숨기고 미로를 헤매게 하는 목적으로 설치한다. 엽산초부가 진안까지 이르렀던 건 북쪽 삼림의 진세가 상대적으로 허술했기 때문이지만, 역시 어느 정도 흐름을 알아야 가능한 일.
조화부인이라면 미리 다른 길을 마련했을 수도 있고, 그녀 자신이 잠종미리진에 통달했을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확실히 그 삼림의 진법은 남쪽에서의 접근을 막는 데에 중점을 두었었다. 일부러? 게다가 그 야점의 똑같은 형태.’
조화부인이 미리 알고 있었으리라는 심증이 강하게 들었다.
역시 노강호. 칠십 대의 엽산초부는 그냥 나이만 먹은 게 아니다.
“상당히 서둘렀던 모양입니다. 뒤를 쫓던 오 장로가 표시를 더는 남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올바른 추측.
다급하게 오소민을 찾느라 진법에 갇힌 줄도 모르고 헤맸지만, 어지럽게 남긴 연꽃 표기는 한결같이 북쪽을 가리켰었다.
조화부인이 그냥 도주한 게 아니라, 이곳저곳을 바쁘게 오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냈다면.
“그렇군요. 제가 놓친 게 많았습니다. 후.”
왜 합리적으로 따져보지 못했는지 절로 한숨이 나오고.
엽산초부가 빙그레 웃었다.
문득 눈앞에 과거의 정경이 떠올라서.
태원의 외진 주루, 가슴 떨린 싸움과 예측 못 할 위험이 도사렸던 그곳에서 열 살배기 꼬마는 의연하게 자기 뜻을 밝히고선 백년제일검사의 제자가 되었었다.
이제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훌쩍 큰 사나이가 되었으나, 심성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구나.
“원체 괴상한 짓을 일삼는 것들이잖습니까. 도망갈 구멍을 세 군데나 파는 교활한 토끼나 온갖 잔머리를 다 굴리는 구두조(九頭鳥)라고 여기는 게 속 편하지요. 흠, 역시 원북(洹北)이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대관원이라는 고귀한 가문을 지키던 신분에서 녹림삼성이라는 하찮은 어릿광대로 전락하면서도,
백여 년에 걸친 난세의 음모를 전부 겪었던 엽산초부.
방수인을 찾으려고 창덕부를 지나 안양 외곽을 통해 신향으로 가려던 길에서 해원기를 만난 건 우연이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음모의 냄새를 대번에 맡을 수 있었고.
이런 모호하고 괴이한 냄새에는 자못 익숙한 그다.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다 늙은 나무꾼을 보았다.
둔하고 투박해 보이는 모습은 그대로지만, 늙은 생강은 매운 법이라.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해답이요, 어쩌면 갖가지 의문의 핵심일지도.
“속히 가봐야겠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허허, 당연하죠. 위초산채란 얘기에 녹림을 도우려고 오셨잖습니까. 해 공자가 필요 없다고 해도 기어이 들러붙을 셈이었고.”
엽산초부가 도끼를 어깨에 척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동심적(童心賊)과 당상폐관(堂上弊官)은 지하에서도 부러워 죽을 겁니다. 핫하하하, 아! 이왕이면 나중에 낭랑과 노조께 이 늙은 나무꾼이 아주 쓸모가 있다고 칭찬도 좀 해주시고. 푸하하하.”
동심적과 당상폐관은 녹림삼성의 나머지 둘. 이미 죽은 이들을 입에 올리면서도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 잔망스러운 엉너리를 덧붙이는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혈기가 솟는다.
천하제일검. 아니, 검왕을 수행하게 되었잖나.
예전의 호기가 불끈 일어난 듯한 모습에 해원기의 굳었던 표정에도 미소가 떠오르고,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동창의 환관도, 반룡령 같은 무리도 더는 나오지 않는 이 황무지에서,
저 원하를 넘어 북쪽 절벽으로.
소위 은허라는 곳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