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68화 (268/410)

제67장 농교성졸(弄巧成拙) (4)

펑.

폭발하는 돌무더기 속에서 훌쩍 튀어나온 인영 하나.

다 벗어진 머리엔 푸른 두건을 썼고, 흰 수염이 어수선하게 얼굴을 덮었으며, 짐승 가죽을 대충 걸친 옷차림에 손에는 커다란 도끼 한 자루를 들어서.

누가 봐도 평생을 도끼질이나 했을 늙은 나무꾼이었다.

꽤 큰 골격이지만, 구부정한 어깨를 힘겹게 펴더니.

“후아, 이건 무슨 일이래? 이 숲에 언제 야점을 차렸, 아니지, 여기 야점이 있을 까닭이 없잖아. 댁들은, 흐음, 요괴요?”

짓무른 눈을 치뜨며 웅얼웅얼 묻는 쉰 목소리. 어지간히 나이를 먹었나 보다.

그러나 어찌 평범한 나무꾼이겠는가.

사마대가가 자신의 팔찌를 힐끔 보곤 웃음을 흘렸다.

“허허, 잠종미리진을 뚫고 여기까지 기어온 걸 보면 예사 인물은 아니겠구나. 어디의 누구인지 좀 알아봐야겠는데.”

딱히 나무꾼에게 건넨 말이 아니다.

직전고사가 오만상을 쓰며 앞으로 나선다.

“젠장, 완의국과 주초면국에선 일을 대체 어떻게 했기에…….”

먼저 나서야 하는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평을 중얼거리다가 신경질적으로 나무꾼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늙다리야, 냉큼 네놈의 정체와 누가 네놈을 보냈는지 대지 못할까?”

삼십 장이 넘는 거리건만, 직전고사는 마치 나무꾼의 멱살이라도 쥐는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무꾼이 힘에 부친 것처럼 무거운 도끼로 땅을 짚었다.

팍.

바로 앞에서 풀썩 이는 흙먼지. 나무꾼의 처진 눈썹이 꿈틀했다.

“예의고 도리고 없구먼. 하여간 동창 것들은. 쯧.”

직전고사가 다짜고짜 암경(暗勁)을 날린 걸 간단히 막아냈으며, 어울리지 않는 야점에 모인 셋이 누군지도 아는 눈치다.

목줄을 쥐려 했던 직전고사가 눈을 껌뻑이자,

상선태군이 냉소를 치며 한걸음 내디뎠다.

“흥, 여기까지 그냥 들어왔겠어? 나름의 내력이 있을 테니 사마대가께서 알아보라고 하시는 거잖아. 경솔하긴.”

평소에도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은 듯. 직전고사를 경솔하다고 비웃기는 하지만, 내디딘 한걸음에 분지 기슭까지 미끄러져서.

직전고사와 양쪽으로 나뉘어 나무꾼을 노리는 위치가 된다.

도끼로 땅을 짚은 채 나무꾼의 주름진 눈가가 살짝 접혔다.

“흐음, 나누는 얘기를 대강 들어보니 소위 이십사아문에서 같잖게 기침깨나 하는 자들인 모양인데. 여기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영 감이 잡히질 않고, 에, 요새는 내시에 여관(女官)도 뽑나? 게다가 태군, 고사, 그리고 대가? 풋.”

이미 셋의 호칭까지 들었다는 뜻.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는 건 도발이다.

과연 직전고사와 상선태군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쉬잇.

직전고사의 소매에서 짧은 불진(拂塵)이 화살처럼 튀어나오고, 상선태군은 어느새 채도(菜刀) 한 자루를 쥐었다.

짧은 불진은 작은 기물의 먼지를 터는 먼지떨이. 채도는 주로 자르고 다지는 데 쓰이는 넓적한 칼이다. 청소와 요리에 쓰이는 도구가 우스워 보이지만, 줄기줄기 뻗는 기세가 그물처럼 나무꾼을 덮어간다.

이십사아문의 우두머리쯤이라 여긴 나무꾼이 미리 경계하지 않았을 리 없다.

지팡이처럼 짚었던 도끼가 장난감처럼 빙글 돌면서 아득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퍼펑.

불진과 채도의 기세를 가볍게 무너뜨리며 자루와 날이 각각 양쪽으로 뻗었다.

현란하게 흔들리는 불진과 어지럽게 움직이는 채도에 비하면 참으로 단순한 움직임.

그러나 그 단순함이 거침없이 직전고사와 상선태군의 허점을 찍어 누른다.

따당!

손때 묻은 자루는 웬만한 몽둥이보다 무겁고, 녹슨 도끼날은 채도보다 훨씬 두꺼우니.

거듭된 쇳소리와 함께 직전고사와 상선태군이 도로 원래 위치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나무꾼도 꽤 충격을 받았는지 손을 바꾸어 쥐며 한 걸음 물러나고,

시선이 빠르게 사마대가를 훑었다.

범상치 않은 솜씨에 노련한 대응이다.

“잠깐 손을 멈추게나. 어째 일이 묘하게 된 듯해서…… 쯧, 녹림장관의 산적이었더냐?”

불쑥 싸움을 중단시킨 사마대가가 혀를 차면서 시선을 모으고,

방비하던 나무꾼의 눈도 마주 초점을 잡았다.

“호오, 뭘 보고 장관을 들먹였을꼬?”

거드름을 피우는 사마대가의 말투에 오히려 아랫사람 대하듯 반문을 던지자.

사마대가가 손목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그게 무상창궁기(無上蒼穹氣)가 맞단 소리구나. 처음부터 계획이 쓸데없이 지저분하다고 여겼더니만. 하여간 지나치게 교묘하게 하려다 되레 졸렬해지는 법(弄巧成拙)이지. 제독(提督)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쉬 알아듣기 어려운 혼잣말이 덧붙었지만, 나무꾼은 그보다 무상창궁기라는 말에 얼굴을 굳혀야 했다.

직전고사와 상선태군의 공력도 만만치 않은데, 한 차례 격돌만으로 자신의 무공을 알아본 사마대가는 그들보다 윗길일 터.

슬그머니 도끼를 끌어당겼다.

“거, 환관 주제에 안목이 상당하네그려. 보아하니 청소나 하고, 채소나 볶으면서, 마구간이나 정리하는 주제. 흐흣, 그런데 무슨 계획이랍시고 묘한 짓거리를 벌이는 걸까? 아무래도 재수 없는 모임일 것 같아서 용돈이라도 거둘 마음이 싹 가시는걸.”

본래의 웅얼거리는 말투로 돌아가는데,

직전고사와 상선태군의 표정이 일그러지든 말든, 사마대가가 자신의 손목을 빠르게 두드린다.

“올 때는 마음대로였어도 갈 때는 다르지.”

스스스스.

분지를 둘러싼 삼림에 돌연히 기이한 소음이 일고,

그 소음을 따라 갑자기 사방의 공간이 일렁거려서.

웅얼거리는 말투로 주의를 끌다가 몸을 빼려고 했던 나무꾼이 움찔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십사아문 중의 십이감.

사마대가는 어마감(御馬監), 상선태군은 상선감(尙膳監), 직전고사는 직전감(直殿監) 소속일 터.

기껏해야 마구간과 부엌, 그리고 전각의 청소나 담당하는 내시들이 대가니 태군이니 고사니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이름을 붙였지만.

지금의 동창은 단순한 환관들이 아니다.

조바심에 억지로 삼림의 진법을 뚫고 들어왔어도, 나무꾼은 물러날 때를 모를 만큼 미숙하지 않았으나.

이 분지의 사방에 이렇게 대뜸 둔법이 시행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숲이 우거진 언덕이 성벽처럼 빙 두른 분지는 사발 같은 모양이다.

가운데 야점을 차린 곳을 중심으로 언덕에서 경사가 가파르게 내려가는 지점부터는 한 그루의 나무도 없는데.

사방의 가파른 경사에 네 명이나 되는 인물이 그림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일렁이는 공간을 통해 나타났다.

똑같이 흑의 경장에 붉은 흉갑(胸甲)을 걸쳤고, 각기 검도창부(劍刀槍斧)를 손에 쥔 네 명의 장한. 나타나자마자 사마대가를 향해 절도 있게 머리를 조아린다.

“무덕(武德), 무절(武節), 무략(武略), 무의(武毅). 명을 기다립니다!”

한 사람처럼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에 사마대가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장관의 늙은 산적이다. 사무장(四武將)은 전력을 다해 처리하도록.”

검이 무덕, 도가 무절, 창이 무략, 부가 무의.

“존명!”

절도있는 대답과 함께 지체 없이 몸을 날리려는데,

바로 그 순간.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나무꾼 아저씨.”

차분하면서 맑은 음성.

그러나 이 뜻밖의 음성에는 장중 모두를 멈칫거리게 하는 힘이 실렸고,

나무꾼 옆에 환상처럼 출현하는 인영에 다들 눈을 부릅떴다.

언제 어디서 날아들었나.

특히 삼라잠종진을 손바닥 보듯 알고, 원하는 대로 둔법을 써서 사무장을 불러냈던 사마대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팔찌를 흔들어대는데.

해원기는 오직 나무꾼만을 보며 빙그레 웃는다.

나무꾼 아저씨.

홀연히 곁에 이른 해원기에게 놀란 시선을 보내던 나무꾼의 늙은 눈매가 바르르 떨더니.

툭.

자신이 도끼를 놓친 것도 깨닫지 못하고 투박한 손이 덥석 해원기의 손을 찾는다.

“공자(公子), 해 공자? 이, 이런. 아, 아이고!”

웅얼거리던 말투는 어디로 갔는지. 두 손이 해원기의 손을 쥐었다가 팔뚝을 어루만졌다가 어깨를 쓰다듬다가.

잃어버린 자식이라도 찾은 것처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해원기가 그저 웃는 낯을 보였다.

옛날부터 아는 사람들이 해원기를 부르는 명칭이 다 다르긴 해도, 처음부터 ‘공자’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존칭을 쓰던 이는 딱 세 사람뿐이었고.

그만큼 남다른 인연이었다.

해원기가 사부의 제자가 되었을 때, 특별한 선물로 축하해주었던 셋.

과거 천외육가에 속한 대관원(大觀園)의 호원가신(護園家臣)이었던 녹림삼성(綠林三星)이었고, 그 특별한 선물이 수정지력의 기연을 얻게 한 청강주였으니.

지금 해원기의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이 늙은 나무꾼이야말로 바로 녹림삼성에서 유일하게 남은 막내 엽산초부(獵山樵夫)였다.

이십 년 만이다.

해원기가 엽산초부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바로 알아보질 못했지요. 죄송합니다.”

무상창궁기가 아니었으면 해원기도 긴가민가했을 만큼 변한 모습. 그런 해원기를 보는 엽산초부의 눈도 아련하다.

그 역시 마찬가지. 옛 기억 속에는 그저 어리고 약한 소년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늠름한 사내로 컸을까. 어깨 위로 올라온 고검의 손잡이가 아니었다면 길에서 마주쳐도 몰라봤을 것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못난 나무꾼이 그새 게을러져서. 하, 하하하. 간간이 소식을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하하하하.”

이제는 웃음이 자꾸 나온다.

이십 년 만의 해후가 믿기지 않아서 지금 상황 따위는 싹 잊어버렸다.

둔법으로 불려와 막 공세를 취하려던 사무장, 그들을 불러낸 사마대가와 어정쩡하게 지켜보던 상선태군이나 직전고사가 다 얼떨떨해할 정도로.

사마대가가 자신의 호화로운 팔찌를 다시 한번 훑어보곤 고개를 들었다.

진도금환(陣圖金環). 잠종미리진의 상태를 보여주고 그에 따라 진법을 뜻대로 변환할 수 있는 기물이건만,

대체 저 더벅머리 애송이는 어디서 튀어나왔는가. 마치 자신이 사무장을 불러낸 것처럼 불쑥 출현했다.

게다가 말소리와 함께 이 분지 전체에 은근히 퍼지는 기이한 기세. 늙은 나무꾼과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눈길도 돌리지 않으니.

“호오, 졸개가 더 있었나? 과연 산적들이라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게로군. 사무장은 뭣들 하는가!”

일부러 호기를 부려 목청을 높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해원기가 몸을 돌리며 힘차게 내딛는 발.

쿵.

지유진의 보법에 분지의 가파른 경사가 물결치듯 흔들리고,

오른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좌우를 무찌른다.

분지의 사방에서 나온 사무장이기에 해원기에게 달려들려면 중앙의 야점을 피해야만 한다. 그래서 검도는 왼쪽, 창부는 오른쪽을 돌아 둘씩 한 조가 된 셈인데.

사마대가의 호령에 응하기도 전에 해원기의 손이 먼저 눈앞으로 다가왔다.

활짝 펴졌으니 장법? 아니, 그 손바닥이 와락 조여드니 조법일까?

공력을 충분히 병기에 모을 틈도 없이 시야에 주먹이 스치고 손가락이 빳빳하게 일어서니 지법으로 바뀌었다고 여겼지만,

수십 장이나 떨어진 거리, 손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이르렀는지 미처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장법이면 찌르고, 조법이면 베고, 권법이면 때리고, 지법이면 휘둘러 자르는 게 당연한 반응이다.

검도창부가 신쾌하게 움직여 빛을 번쩍이는 걸 보면 사무장이란 자들도 상당한 수준일 터.

그러나 그 맨손이 마지막에 이룬 것은 검.

막대한 압력이 산이 무너지듯 덮치고, 무수한 산봉우리가 줄줄이 짓쳐 든다.

검과 도에겐 절세오검의 붕악이, 창과 부에겐 남악형산의 기수검봉이.

그것도 흑백연주오절검(黑白聯珠五絶劍)의 사우반고(四隅反顧)로 서로 갈마들 줄이야 어찌 알았으리.

콰쾅!

“으으윽.”

“허억.”

검은 부서지고, 도는 휘었으며, 창은 부러지고, 부는 뭉개졌다.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한 사무장이 가파른 경사에 나뒹구는데,

오른손을 얼굴 앞에 세운 해원기의 시선은 사마대가를 향했다. 여전히 왼손은 엽산초부의 손을 쥔 채.

“오오! 이게 바로 검왕수!”

엽산초부가 감격에 겨워 외치는 목멘 소리가 장중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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