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장 농교성졸(弄巧成拙) (3)
‘이제는 가을이지.’
해원기가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육지비행과 초상비는 모두 상당한 내력이 필요한 상승의 경공.
점차 어두워지는 삼림 속에서 희미한 흔적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한바탕 격한 싸움을 치르고 쉰 적도 없었다.
사람이 무쇠로 만들어지지 않은 바에야 지치는 게 당연한 일. 아울러 시야가 어두워진 것도 비로소 깨달았다.
한여름을 잘 보내서인지 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무성해진 숲에 간간이 스며들던 햇빛까지 없어졌다. 낮이 짧아진 탓이다.
반 시진은 넘었을 듯.
오소민이 남긴 연꽃의 문양이 줄곧 북쪽을 향하긴 하지만, 거리가 들쭉날쭉하고 위치도 꽤 어수선한 편이라.
찾는 데 애를 써야 했다.
처음에 보이던 안양의 성벽은 이미 지나쳤을 터. 태항산과는 차츰 멀어지는 셈이다.
방향과 거리를 가늠한 해원기가 이젠 걷기 시작했다.
컴컴해진 깊은 숲을 산책이라도 하듯 차분한 걸음.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소모된 내력을 보충하는 미앙보식(未央步息)이 펼쳐지고,
발걸음과 호흡을 맞추면서 동시안을 유지한다.
‘오 형이 이렇게 공을 들였다는 건 조화부인을 뒤쫓으면서 주의할 점을 발견했다는 뜻일 텐데. 흠.’
야점에서 음정수백을 불러낸 후에 곧장 미심환영 류로 도주한 조화부인이다.
지부의 마공 중 심마의 곤혹도(困惑道)에 속하는 미심환영은 경공에 술법이 결합한 기예라서 종적을 찾기가 극히 어렵다.
비록 오소민이 서둘러 뒤를 쫓긴 했으나 조화부인의 발을 묶지는 못했을 것이고,
그런데도 바로 해원기에게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추적이 가능했기 때문.
하지만, 굳이 해원기를 남겨두고 혼자서 조화부인의 뒤를 밟을 필요가 있었을까.
평소와 다르다.
그 이유가 궁금하면서 동시에 혹시 또 다른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더 짙어진다.
오소민은 개방팔선의 제자.
신비의 순행장로 유룡개로 불리고,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긴 했으나.
해원기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장안 화청궁에서 알게 된 오소민의 비밀, 그리고 이후에 취개로부터 들은 그녀의 내력.
새삼스럽게 그 무공을 살피게 되었다.
여자.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데 남녀의 차별이 있을 리 없지만,
성별은 또한 각기 어울리는 길을 택하기 마련이다.
사람이란 어차피 천지음양의 한쪽에 머물 수밖에 없기에.
개방의 뿌리인 팔선지학(八仙之學)은 한 사람이 전부 익힐 수 없는 광대한 공부요, 당연히 양강과 음유를 두루 망라한다.
취개 단삼육도 이철괴(李鐵拐)의 진전을 이었을 뿐이요, 방주인 금정령도 여동빈(呂洞賓)이나 남채화(藍采和)의 가르침을 얻은 데에 그치니.
아무리 오소민이 천부의 재질을 지녔다고 해도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보패 하화를 물려준 하선고(何仙姑), 흔히 철적옥판(鐵笛玉板)의 쌍장을 썼으니 한상자(韓湘子)와 조국구(曺國舅), 그리고 경묘하고 영활한 움직임이라면 종리권(鍾離權)일까.
팔선의 절반인 네 분을 계승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취긴 하나.
‘여덟 개의 보패가 전부 갖춰지지 않은 항룡진기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박대정심을 목표로 세운 해원기라서,
오소민의 무공이 박이부정(博而不精), 즉 정심하지 않다는 점을 바로 짚어낼 수 있었고.
그런 까닭에 화청궁에서 현신장 셋에게 곤욕을 치르지 않았던가.
해원기 자신이 조금 전 겪었던 상대들.
십이태감에 속하는 상의신모와 도지태사가 익힌 것은 전부 정종의 전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절학에다가, 음정수백을 흡수하는 삿된 술법까지 덧붙여 사황령을 의심케 했었다.
또 삼국의 국감이라는 자들은 죄다 기이한 공부를 익힌 수하들을 거느렸었고.
이들 외에도 그간 해원기 앞에 나섰던 자들. 밀각의 각주, 주국경, 육학사, 태백종사 등등. 이런 자들이 대체 얼마나 있을지.
생각할수록 더 걱정되어서,
미앙보식이 흐트러진다.
그만큼 해원기의 마음이 오소민에게 쏠려있다는 방증이지만,
이렇게 답답하고 초조하면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후우, 음?”
걸음을 멈추고 길게 숨을 몰아쉬던 해원기가 인상을 굳혔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다음에 이어지는 흐릿한 연꽃 문양을 발견하면서 갑자기 거북한 느낌이 가슴속에 치솟는다.
미앙보식이 흐트러지긴 했어도 이렇게 지치다니.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로.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연꽃 문양. 여덟 번째인가 아홉 번째인가.
수를 헷갈리는 것도 정상이 아닌데, 그 문양이 남은 바위가 낯설지 않다.
맨 처음 발견했던 그 바위. 다만, 관도에서 들어와 왼쪽에 있던 바위가 이번엔 오른쪽으로 바뀌었을 뿐.
계속 북쪽으로만 나아갔으니 이 바위가 다시 나타날 수가 없다.
대번에 이상함을 느끼면서 두 눈에 공력을 끌어올리자, 동시안의 비췻빛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해원기가 이를 악물었다.
‘진법!’
어느새 자신이 진법에 빠졌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신왕공의 잠심침령에 동시안을 운용하고 있었거늘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한 시진 동안 북쪽으로만 움직였다고 여겼건만, 사실은 빙글빙글 돌아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러면서 알지 못하는 새에 심신을 지치게 하는 이 진법.
삼산의 빗장을 지니지 못했어도 어느 정도 상상지를 이룬 해원기조차 한 시진을 헤매고서야 알아챘다면.
‘이건……?’
해원기가 두 발을 정자(丁字)로 모으고, 두 손을 가만히 늘어뜨린 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법에도 나름 공을 들였기에 지금까지의 경로를 되새기며 이목에 신경을 집중해 진법의 종류와 그 핵심을 찾을 셈이었는데.
눈매가 저절로 이지러진다.
조금 다르긴 해도 이와 유사한 진법을 얼마 전에 겪었었다.
화청궁 밖에서 중독된 오소민을 데리고 피신하도록 도와주었던 진법.
바로 제갈봉이 암암리에 울창한 숲에 펼쳐두었던 삼라잠종진이다.
‘제갈 소저가 베풀었던 삼라잠종진과는 차이가 나지만.’
바탕은 대동소이.
삼라잠종진의 요체가 침입하는 자를 해치는 게 아니라 숨은 곳을 찾지 못하도록 미로를 헤매게 하는 데 있어서. 고수라도 감지하기 어렵고 일단 빠지면 결국 길을 잃고 도로 밖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까지 똑같다.
그러나.
여기에 왜 삼라잠종진이 펼쳐져 있을까.
기묘한 느낌. 워낙 신출귀몰하는 제갈봉이니 동창이 대규모로 병력을 모으는 이곳에 끼어들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상황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무너진 제갈세가를 일으키려고, 또다시 난세를 조성하려는 동창을 막으려고 신세를 숨겨가며 동창의 내부에 파고들었다고 했잖나.
미덥지 않은 면이 있긴 해도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고,
장안에 유탕섭백대진이 펼쳐진 탓에 다음을 기약하지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해원기가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든 완전히 똑같은 진법은 아니야. 이 문제는 나중에 따지도록 하고.’
일단은 이 진법 안에 오소민이 남긴 표시가 있다는 게 문제.
해원기처럼 헤매다가 엉뚱한 지역으로 빠져나갔을 수도 있고,
제대로 조화부인을 뒤쫓아 진법의 핵심인 진안(陣眼)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해원기가 곧바로 방향을 잡아 움직였다.
삼라잠종진은 이미 파악한 진법이며 설사 다른 변화가 있다고 해도 파진운보를 곁들이면 다시 미로에 휘말릴 일은 없다.
처음에 정한 북쪽으로 빠르게 몸을 날린다.
서두르다가 오히려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한 시진이나 헤맸던 곳을 일 각만에 지나 높다란 언덕 위에 이르자,
해원기가 한 조각 구름처럼 바로 옆의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가늘게 뜬 동시안에 비치는 좁은 분지.
높은 언덕과 언덕 사이, 울창한 나무가 사방을 성벽처럼 에워싼 가운데에 작은 천막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이곳이 이 진법의 진안일 터.
그런데 그 천막과 안의 모습이 또 조화부인이 십리파에 마련했던 야점과 닮았다. 탁자며 조리대, 그리고 열 개의 거무튀튀한 술독까지.
의심스러운 점이 거듭되지만, 해원기가 정신을 집중해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잠종진은 무엇보다 종적을 감추는 데 특화된 진법. 평소 같으면 언덕 위에 이르기 전에 작은 소리나 기척 따위를 감지했겠지만, 지금은 오직 동시안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천막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소민은 대체 어디 있는지.
하지만, 돼지고기를 삶은 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니 섣불리 나서는 건 경거망동이다.
삼라잠종진에 바탕을 둔 진법, 그 진법의 진안에 차려놓은 천막.
누군가가 미리 준비해둔 장소요, 남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게 목적일 것이다.
‘조화부인이 이곳으로 왔다면, 오 형 역시 근처에 은신했을 텐데.’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는 순간,
세 개의 인영이 홀연히 천막 근처에 나타났다.
살집이 두둑한 체구에 넉넉한 금의를 걸치고 푸근한 인상을 지녀 얼핏 부유한 호상(豪商)으로 보이는 사람을 중심으로,
왼쪽은 후리후리한 키에 단정한 백의를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고,
오른쪽은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면서 화려한 문양의 의상을 여러 겹 휘감고 갖가지 장식을 더덕더덕 붙인 특이한 인물이었다.
중년으로도 노년으로도 보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셋.
울창한 숲에서 훌쩍 빠져나와 느긋하게 걷는 게 미리 천막이 차려져 있음을 아는 듯.
작은 체구의 사내가 짧은 목을 바쁘게 움직이며 찾는 시늉을 하더니,
“뭐야, 아직 오지 않았네. 대강 이맘때면 도착한다고 해놓고, 상선태군(尙善太君)?”
백의 여인에게 불퉁한 소리를 낸다.
상선태군이라는 묘한 이름의 백의 여인이 눈매를 찡그렸다.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이럴 리 없는데. 내 성격을 뻔히 아는 상의가…… 아니, 무엇보다 사마대가(司馬大家)께서 친히 납시는 걸 알면서. 쯧.”
생긴 대로 날카로운 성격인지 대뜸 짜증을 부리려다가 얼른 말을 바꾸며 혀를 찬다.
중앙의 호상처럼 보이는 자가 여유롭게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나름 조심하느라 그렇겠지,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나? 신모와 태사가 어련히 잘했으려고. 일부러 침공감과 사원감을 대동하겠다고 해서 내가 병장감까지 보낸 판이니 그리 조급해할 필요 없네.”
호상의 여유에도 작은 체구의 사내는 영 불안한 표정.
“뭐, 병장감을 보내주셔서 든든하긴 합니다만. 에, 괜히 거들먹거리면서 영접을 기대하는 게 아닌가 해서요. 사냥개들을 잔뜩 불렀다고 하잖습니까.”
사마대가라고 불린 호상이 윗사람인 것 같다.
반 존대의 말투지만 여전히 부산스럽게 좌우를 살피는 모습에 상선태군이 냉소를 쳤다.
“흥, 그러니까 직전고사(直殿高士), 서두르지 말자고 했잖아. 이번에 사마대가께 크게 폐를 끼친 셈이라고. 하여간 저 촐싹.”
마지막에 붙으려던 욕설을 참는 것도 사마대가의 눈치를 봐서다.
그렇다고 촐싹댄다는 비아냥을 못 들은 척 할 성격은 아니어서 직전고사라는 사내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사마대가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자, 자. 이왕 나온 김에 강호의 풍미란 걸 즐기면서 기다리세나. 소박한 야점이란 게 이런 모양이었구먼. 완의국(浣衣局)과 주초면국(酒醋麵局)에서 꽤 공을 들였나 본데. 물론 태군의 눈에는 차지 않겠지만. 허허허.”
윗사람의 넓은 도량이란 건가.
너털웃음과 함께 야점으로 향하는 통에 상선태군과 직전고사도 입을 다물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앞장서던 사마대가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내저었던 소매를 가만히 얼굴 앞으로 당기고,
“잠종미리진(潛踪迷離陣)에 불청객이 끼어들었구나.”
손목에 채운 팔찌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띠처럼 넓게 편 황금에 칠보로 복잡한 선을 정교하게 새겨 넣은 팔찌.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그 팔찌를 자세히 살피던 사마대가의 시선이 슬쩍 돌아가자,
상선태군과 직전고사가 빠르게 몸을 돌렸고.
사마대가가 바라보는 서쪽, 가지가 무성한 거목과 돌무더기가 빽빽하게 막힌 곳으로 돌연 무서운 기세가 왈칵 밀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