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66화 (266/410)

제67장 농교성졸(弄巧成拙) (2)

이전과 다른 신왕검이 왜 구현되었는지 따질 새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살며시 깃드는 미묘한 느낌. 생소한데도 어쩐지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렇게 따뜻하고, 이렇게 포근하고,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머릿속을 스치는 무수한 절학보다 바로 이 마음을,

믿고 따르리라.

언덕 위엔 병장감과 궁사 둘,

동쪽인 안양 방향에는 침공감과 사원감, 그리고 침선랑과 과채부라는 여자들 열둘,

여기에 북쪽에서 내려온 반룡령의 인마가 또 백여 명.

이 상황에서 포위를 뚫으려면 가장 인원이 적은 언덕을 택하는 게 상식이지만,

언덕을 등진 해원기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니, 어떤 무공을 쓸 것인지, 어느 검상을 택할 것인지도 정하지 않았는데.

우웅.

웅장한 검명이 한 차례 울고,

신왕검이 순백의 빛을 번쩍 뿜었다.

그리고,

“으읏?”

“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갖가지 소리. 그건 갑작스레 몸이 덜컥 굳는 통에 입 밖으로 저절로 튀어나온 의혹과 경악이었다.

해원기를 중심으로 제대로 포위망을 이룬 것도 아니어서,

해원기가 등진 언덕은 채 십 장도 되지 않게 가깝고, 동쪽으로 한데 몰린 침공감과 사원감은 이십 장 정도. 막 북쪽에서 몰려나온 반룡령 무리는 맨 앞에 선 백문량을 빼곤 거의 삼십 장이나 떨어졌거늘.

이 모든 인원이 동시에 움찔, 동작을 그쳤다.

한낮에는 아직 해가 따가운 초가을. 더위가 여전히 남았을 때건만, 돌연히 하늘이 높아지고 공기는 맑다 못해 서늘해지기까지.

해원기를 노리던 자들은 전부 목덜미가 선뜻해졌다.

공간이 갑자기 바뀌었다.

빛을 뿜은 건 검이었나. 아니, 눈에 얼핏 스친 빛보다 이렇게 주위가 고요해지다니.

메마른 흙먼지는 어느새 잦아들었고, 엉망이 된 광경도 숨을 죽인 것처럼 조용하다.

모든 것이 정물처럼 가만히 멈추었을 때,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해원기의 검.

그것도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해원기가 가리키는 손짓을 따라 이리저리 꿈틀거린다.

쏴아아아.

거센 바람 휘몰아쳐 언덕을 휩쓸자,

퍼퍼퍼퍼퍽.

바위가 뒤집히고 흙이 무너지는데 누가 버틸까.

“으아앗.”

재빨리 몸을 빼려던 병장감과 궁수들이 기겁하며 사태(沙汰)에 휘말리고,

우르르릉.

바닥을 울리는 은은한 뇌성이 동쪽을 울리자,

따다다다당.

침선랑의 대바늘과 과채부가 양손에 쥔 호미와 가위가 한꺼번에 부러진다.

“어억.”

“크으윽.”

수하들뿐 아니라 급하게 손을 뻗던 침공감과 쇠스랑을 세우던 사원감까지 신음을 토하며 벌렁 나자빠졌다.

바람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후려갈기고,

우레는 땅을 울리며 하늘까지 울어 젖힌다.

빛을 뿜고 나자마자 정도 오악검법을 품은 유리검이 천풍(天風)을 일으켰고, 동시에 마도 절세오검을 머금은 사신검이 지뢰(地雷)로 떨었다.

이 둘을 잇는 건 바로 적멸검.

수십 장 범위의 모든 적을 일시에 못 박아두었던 결계 안에,

땅을 후려갈긴 천풍은 사방을 휩쓸어 퍼지고,

하늘까지 울었던 지뢰는 벼락이 되어 쏟아진다.

- 풍뢰가 본디 존재하더냐? 때가 되면 이르고, 때가 지나면 사라지잖느냐.

다 저절로 그리되는 것이니, 굳이 음양과 강유를 따질 필요가 없구나. 이 천지가 다 그렇단다. 그래서 천지불인(天地不仁)하니, 억지로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 기어이 살리려는 것도 아니다.

애석(愛惜)도 붙이지 말고, 원한(怨恨)도 더하지 말아라.

바람은 구름을 부르고, 우레는 비를 내리는 법.

이치를 찾아 세우듯이 또한 이치를 풀어쓰도록,

세휘가 그렇게 마련해두었더구나.

허허허.

처음 듣는 목소리. 귀에 들린 것도 아니었다.

해원기의 마음 한구석에 깃들었던 미묘한 느낌, 그 느낌이 그저 마음속에서 조용히 울리니.

마치 자기 뜻인 양 그 말을 그대로 따를 뿐이었다.

적멸검으로 적대하는 자들을 가두고, 유리검으로 바람을, 사신검으로 우레를 펼친 것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춤추듯 흔들었던 양손을 모으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마음속에서 울리는 너털웃음을 따라.

콰콰콰콰.

천풍은 씨줄이 되어 팔방을 휩쓰는 폭풍이요,

지뢰는 날줄을 세워 천지를 잇는 번갯불이다.

검왕오형의 재단경위, 그 오의인 저사직금이 운용되긴 했지만,

반룡령 무리에게 쏟아지는 건 수백 자루의 검. 전신을 갈가리 찢을 듯한 바람에 몸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번개가 내리꽂힌다.

폭풍은 맷돌처럼 갈리고, 뇌전은 우박처럼 떨어지니.

옴치고 뛸 곳도 없다.

“으악!”

“컥.”

“와아악!”

“끄윽.”

온갖 비명이 터지면서 백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살짝 숙인 머리, 치켜세운 어깨, 등이 조금 굽었고 허리는 쭉 폈으며 가지런히 모은 두 발.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으로 검을 쥔 채 해원기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공이 깊고 두터우며 깨달음이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기권(氣圈)을 이룰 수 있다.

무인의 싸움이란 바로 이 기권을 서로 펼쳐 주도권을 다투는 것.

이 기권에도 수준의 고하가 있어서 허술한 기권은 진법의 결계만도 못하고,

심도경에 이른 고수가 펼치는 심병지권 앞에선 한 푼의 가치도 없다.

그렇지만 기권이든 심병지권이든 어차피 정해진 공간을 규획(規劃)하여 강제하는 능력. 시전자를 중심으로 십 장, 이십 장, 심지어 백 장에 이르더라도 대상은 바로 공간이거늘.

지금 해원기가 펼친 것은 전혀 달랐다.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대상이다. 언덕 위엔 셋, 동쪽에는 열넷, 반룡령은 백여 명. 해원기를 적대하는 자들이라면 공간에 상관없이 지정했다.

적멸검이 이룬 결계에선 본디 내부를 부수는 무량대적(無量大寂)이 발동해야 하는데,

이건 결계가 아니라 심병지권조차 능가하는 계역(界域), 바로 검역(劍域)이었으니.

마음으로 지정한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 검역에 갇혔다.

폭풍만뢰(暴風萬雷)의 검역에.

‘사부님께 배운 풍우검권(風雨劍圈)의 원형. 그러나 그건.’

몰아치는 검풍(劍風)과 쏟아지는 검우(劍雨)를 엮는 검결. 그건 이름 그대로 권역에 그쳐서 이처럼 기고한 위력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부가 너무나 지나친 살기를 저어해서 원형 일부분만을 흉내 냈기 때문.

사부가 저어할 정도의 지나친 살기. 이름하여 흉살지기(凶殺之氣)라고 했었고,

오직 귀왕검으로만 현현한다.

귀왕검이 사라졌으니 다시는 풍우검권의 원형인 원악참풍(怨岳斬風)과 한천검우(恨天劍雨)가 나타날 수 없고,

이는 곧 귀역(鬼域)의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풍우검권을 배울 때, 사부는 그리 일러주셨었다.

한데,

마음속에 울리던 그 말소리.

귀왕검이 아니기에 귀역이랄 수 없어도, 분명히 사부에게 들었던 것과 같은 계역을 이루게 해주었다.

해원기가 다시 가슴 앞에 세운 검에 시선을 모았다.

도로 하나가 된 유리검과 사신검은 이미 신왕검 고유의 순백색 빛도 사라져 고검 본래의 형태.

이 검을 만든 두 분을 기려 이제검(夷齊劍)이라 하지만, 처음부터 이름은 고검이었고.

고죽천년의 영령이 담긴 선영이면서 한없는 원한이 뭉친 귀왕검이기도 했다.

사부는 남은 생명을 전부 진혼위령에 바쳐서 귀왕검을 당신에게 깃들도록 했으니, 흉살지기를 낳았던 선조의 원령(怨靈)은 하나도 남지 않았을 터.

그렇다면 해원기의 마음속에 가르침을 전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조님.’

한 번도 뵙지 못했으나 알 수 있었다.

사부를 위해 스스로 귀왕검을 귀숙(歸宿)으로 삼으셨다는 그분이란 걸.

사부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며 웃으셨잖은가.

형언하기 어려운 심정도 잠깐.

해원기가 주위를 빠르게 훑으면서 검을 거두었다.

철컥.

병장감 쪽은 죄다 무너진 언덕에 파묻혔고, 침공감과 사원감 쪽은 전부 인사불성. 백여 명이나 되는 반룡령 쪽도 전부 질펀하게 나뒹굴어서 제대로 일어서는 자가 하나도 없다.

비록 백문량이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긴 했어도 그런 쥐새끼 하나 따위 지금은 중요치 않다.

파앗.

해원기의 신형이 마치 힘껏 내던진 검처럼 무서운 속도로 날았다.

아무리 면면부절의 수정지력을 지녔다 해도 폭풍만뢰의 검역을 펼친 이상 공력의 소모가 적지 않은데.

오소민을 찾는 게 무엇보다 급해서,

전신을 어검으로 삼는 신화검형을 전력으로 펼쳤고,

단숨에 백 장을 가르며 안양으로 향하니.

언덕을 뚫은 관도 옆, 작은 수림 속의 야점이었던 곳은 온통 부서진 병기와 널브러진 신체, 붉은 핏물과 고통에 찬 신음만 가득하다.

누가 보았다면 수천 병마가 짓밟고 지나간 대전(大戰)의 흔적으로 여겼으리.

참혹하기 그지없는 광경.

그런데 반 각이나 지났을까.

관도 북쪽에 형태를 겨우 남긴 언덕 위에 홀연히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적멸검의 결계가 펼쳐지자마자 사라졌던 백문량.

허옇게 질린 얼굴이 잔뜩 굳었지만, 두 눈은 땅바닥에 그득한 자들이 아니라 해원기가 날아간 안양 쪽과 자신이 내려온 북쪽을 차례로 향하고.

“저놈이 왜 여기, 올라온다는 둘은 상의신모와 도지태사겠고, 또 삼국(三局)이 뒤를 따랐는데. 저놈은 엉뚱하게 안양으로 간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흐음. 우리 반룡령을 영접이란 이유로 잔뜩 소집해놓고는. 흠, 흠.”

이마에 주름을 가득 잡고서 의혹을 중얼거리더니,

냉큼 몸을 돌린다.

떠받들던 자들이 인사불성으로 나뒹굴든, 데리고 온 수하 백여 명이 한심스러운 몰골로 끙끙대든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

어울리지 않는다는 유성비서와 장신둔형의 경공이 해원기에 못잖은 속도를 내며 북쪽으로 사라졌다.

야점이 있던 곳이 안양에서 십 리쯤 떨어진 언덕인 십리파라고 했었다.

신화검형의 무지막지한 속도, 단번에 안양의 커다란 성문이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해원기가 순간적으로 공중에 멈추었고,

마치 잠자리가 제자리에서 놀 듯 파르르 떨리는 신형.

그대로 허리를 뒤틀더니 곧장 관도의 왼쪽으로 내려섰다.

내부에 충격이 올 정도로 무리한 정지지만, 동시안의 시선이 왼쪽 바위 위의 희미한 흔적에 고정되었다.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 둥글고 넓적하며 바늘로 찌른 듯한 외곽선.

눈에 잘 띄지 않아도 그게 오소민이 지닌 보패 하화의 모양인 걸 금방 알아챘다.

“북쪽?”

가리키는 방향이 북쪽인 걸 깨달은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안양의 성문을 지척에 두고 갑자기 북쪽으로 틀었다.

조화부인은 소위 미심환영(迷心幻影)이라는 경공을 쓴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가 물거품처럼 꺼지곤 하는 괴이한 신법이니 그 형적을 뒤쫓기가 대단히 어렵다.

야점에서 도주한 조화부인을 제때 잡지 못했다면, 오소민이 취할 방법은 두 가지였을 터.

하나는 해원기에게 돌아와 힘을 보태는 것, 또 하나는 침착하게 조화부인의 뒤를 밟는 것.

오소민은 두 번째를 택했다.

은밀한 기호를 남긴 건 해원기가 따라오리라 예상해서겠지.

미간의 주름이 굵어졌다.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던 의문. 백문량이 반룡령의 수하들을 끌고 영접이랍시고 몰려나오면서 더욱 의심스러웠던 부분.

이십사아문의 태감과 국감들이 등장했으니 동창의 수뇌부가 대거 나섰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목적이 진정 녹림장관을 공격하기 위함일까.

처음부터 조화부인의 거래하자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만일의 사태를 돌보지 않을 순 없었다.

신향에서 이미 금의위에서 선발된 수족들이 인근 지역에서 이십사개조나 소집되었다고 듣지 않았던가.

비록 그들의 우두머리인 칠성검 서문창이라는 대영반이 상당한 불만을 표했다 해도.

동창의 환관, 금의위의 대영반, 그리고 조화부인. 그 언행이 하나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해원기가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몸을 띄웠다. 오소민이 남긴 흔적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과거에 역용한 봉대저, 즉 제갈봉을 찾아냈던 육지비행과 초상비의 경공으로 바위 뒤에 펼쳐진 빽빽한 삼림에 스며들었다.

지대가 차츰 높아지고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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