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65화 (265/410)

제67장 농교성졸(弄巧成拙) (1)

공격을 가했던 병장감은 일거에 열 명이나 되는 수하가 언덕에 처박혔고, 방어하려던 침공감과 사원감은 각각 여섯씩 열둘의 수하를 잃었다.

졸지에 절반이 넘은 인원이 줄었으니 참으로 기겁할 노릇.

늠름하게 깃발을 세웠던 병장감이나 음정수백의 항아리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침공감과 사원감 모두 안색이 변할 수밖에.

사원감은 자신의 앞에 고꾸라진 수하들을 살피며 입술을 떨었다.

“뭐든지 비껴내는 육금포개(六錦鋪開)와, 어떤 것도 퉁겨내는 육정번연(六丁蕃衍)이 어찌 단 일검에 무너져…….”

침공감의 앞에는 육금포개, 사원감의 앞에는 육정번연. 각기 여섯 명씩 이룬 독특한 진세의 효과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는 듯.

침공감이 황망히 호각을 불어대고, 병장감이 남은 궁사를 재촉해 신호의 화살을 날리는 동안에도 어쩔 줄을 모른다.

호각을 불던 침공감이 눈을 흘기다가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저 둔탱이, 네놈,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설마 화숙인이 이따위 짓거리를?”

‘네놈’이 ‘너’로 바뀌었고.

자신과 같은 궁장 차림의 남은 여섯과 한 덩어리가 되어 훌쩍 거리를 벌리는 모습.

알뜰하게 보살필 것 같던 상의신모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호미와 가위를 든 여섯 여인도 사원감을 끌고 물러섰다.

다시 버려진 둘.

피 웅덩이 속의 도지태사는 이미 절명했고, 상의신모는 땅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는데.

신왕검을 보던 해원기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처음의 둘, 그리고 스물두 명.

거꾸러지고 처박히고 쓰러지고 나뒹굴고. 온전히 육신을 보전한 자는 하나도 없다.

질펀하게 뿌려진 피와 꺾이고 잘려나간 사지들.

목불인견의 참상 가운데 선 자신. 이 엉망진창의 끔찍한 광경을 바로 자신이 만들었다.

살기를 일으키긴 했지만,

이렇게나 가공할 위력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

천손검법과 신왕검을 익혔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위력.

무림에 정식으로 발을 들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적지 않은 일을 겪긴 했어도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다.

어째서 변했을까.

더구나 소수와 싸울 때보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스스로 깨닫기 전에 손이 먼저 나아가고, 그 손속은 적을 추호도 용서하지 않는다.

잔인하다.

끓어오르는 감정에 저절로 일그러지는 눈매.

잠시라도 눈을 감고 싶었지만, 해원기는 억지로 힘을 주어 버텼다.

이럴 때가 아니잖나.

서둘러 오소민의 뒤를 따라야 하고, 아울러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의 답도 빨리 구해야만 한다.

정종의 신공과 사도의 술법을 병용할 수 있게 하는 사황령의 존재.

침공감과 사원감이 내보이는 미묘한 느낌들.

이게 또 조화부인과는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무엇보다도 연달아 등장하는 동창의 인물들이 과연 조화부인의 함정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작용한 건지.

비록 방수인을 만나 태항산의 녹림장관이 허장성세임을 알았지만,

이들이 전부 녹림장관을 공격하려고 모인 것이라면 역시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시선이 만목창이(滿目瘡痍)의 주위를 넘어 십 리 밖을 향했다.

조화부인이 도주한 방향은 바로 안양.

처음부터 가려고 했던 목적지다.

해원기가 검을 비끼면서 성큼 나아갔다.

“침공국과 사원국이랬지. 음정수백이 뭔지 제대로 아는 모양이군. 사황령에 대한 답은 너희에게 들어야겠다.”

등 뒤에 남은 병장감과 탈명궁사 둘은 잊은 듯 다가서는 모습에,

침공감이 질겁하며 눈을 껌뻑였다.

“침선랑(針線娘), 어서…… 사, 사원감!”

급히 궁장의 수하를 앞세우고, 바삐 사원감을 찾고.

사원감도 마찬가지다. 남들보다 굼뜨다고 항상 욕을 먹는 편이지만, 지금은 조금도 굼뜨지 않아서 수하들을 이끌고 잽싸게 옆으로 움직인다.

“과채부(果菜婦)는 침선랑과 함께! 너, 멈춰라! 이게 무슨, 어?”

침선랑은 대바늘을 꺼내 드는 궁장여인 여섯. 과채부는 호미와 가위를 쥔 여인 여섯.

해원기의 기세에 눌려 자연스레 한 무리가 되는데.

퍼석.

손을 내젓던 사원감이 해원기의 뒤쪽에 풀썩 날리는 먼지 덩어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들을 향하면서 훤하게 드러난 해원기의 등. 이 틈을 놓칠쏘냐 하면서 날아든 탈명궁사의 화살이 가루가 되었다.

병장감 휘하 탈명궁사의 궁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는 그로선 이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뭐, 이런 괴물이 있나.

병장감도 크게 놀랐는지 외치는 목소리가 홱 뒤집혔다.

“뭐, 뭐냐! 이런 호신지기가 있다니?”

맨몸으로 막아낼 수 있는 화살이 아니거늘.

꿈쩍도 안 한 해원기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반룡령과의 관계도 알아야겠구나.”

반룡령의 소령주 백문량이란 청년이 인색이귀와 함께 습격했을 때, 강설궁진의 중심이었던 탈명궁사다.

알아낼 것이 하나 더 생긴 셈인데.

해원기의 혼잣말이 끝나자마자 돌연 굉량한 웃음이 터졌다.

“으하하핫, 어째 안양에 들기 전에 찾으시는 게요? 반룡령은 일찍부터 귀인들의 왕림을 기다리느라.”

북쪽에서 빠르게 다가드는 그림자들. 굉량한 웃음을 터뜨린 건 그중 맨 앞의 인물이고, 홀로 속도를 높여 접근하다가 웃음이 잦아든다.

그 또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랐는지.

그러나 해원기 또한 나아가던 발을 멈추어야 했다.

까만 점으로 나타나서 순식간에 형체를 갖추는 엄청난 경공. 그 뒤로 새까맣게 이어지는 그림자들도 전부 상당한 실력을 지닌 자들이다.

호각과 신호전이 부른 무리는 반룡령이었고,

엄청난 경공으로 먼저 날아든 인물은 아는 얼굴.

탈명궁사 때문에 떠올렸던 기억 속의 인물이 바로 눈앞에 대령한 셈이다.

반룡령의 소령주 백문량이 입맛을 쩍 다셨다.

멀끔한 얼굴에 풍류공자처럼 섭선 한 자루를 쥔 모습은 그대로인데, 어정쩡하게 일그러진 표정.

가까이 이르는 순간에 검을 쥔 해원기를 알아보았다.

도착하면 멋지게 섭선을 펼치려 했는데, 그 생각은 까맣게 잊고.

대신 섭선 끝이 급하게 해원기를 가리킨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 흐극.”

말이 제멋대로 나오다가 그만 딸꾹질까지.

해원기가 고개만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유성비서(流星飛絮)에 장신둔형(藏身遁形)은 어울리지 않지만. 안양에 동창의 일장성회(一場盛會)가 열리나.”

유성비서는 속도에 중점을 둔 경공, 장신둔형은 기척을 숨기는 비결이다.

단번에 백문량이 펼친 기예를 알아본 해원기가 머리를 슬쩍 꼬았다.

이전에도 경공은 꽤 뛰어난 편이었으나, 이번에 보인 건 훨씬 높은 경지. 실력을 숨겼었던가.

백문량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른 섭선을 펼쳤다.

“허, 이거 정말 뜻밖일세. 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이기에…… 흐음. 아, 국감(局監) 귀인 세 분께 인사가 늦었군요. 어인 일로 여기로 부르시나 했더니만, 에, 어떻게 저자를 찾으셨는지?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을. 허허.”

펄럭펄럭.

이리저리 부채질하면서 아는 체를 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허튼 웃음을 덧붙이고.

태연함을 가장하는 가소로운 행동이지만.

가장 굼뜨다는 사원감이 웬일로 제일 먼저 말을 받는다.

“소령주, 자네, 저놈, 아니, 저자를 아는가?”

황망한 질문에도 백문량이 허튼 웃음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섭선을 접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이 난장판.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졌고, 동창의 국감이라는 셋이 크게 패했다는 걸 눈치 빠르게 읽어냈다. 일단은 어떻게든 시간을 좀 끌어야 한다.

“저희가 받은 명령은 귀인들이 오시는 대로 영접하는 것이었지요. 자세한 명단을 받지 못했어도 태감 대인과 국감 귀인들이 여러분 오신다고 들어서. 저희 반룡령이 그간 소홀했던 부분도 이참에 사죄드릴 때라 여겼고요. 그런데 이렇게 저희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직접 건네실 줄은, 흠, 저자가 바로 최근에 용호방 맨 윗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올시다.”

느릿한 말투.

그러나 반응은 콩 튀듯 빠르다.

“영세검주의 후대?”

“제일대적(第一大敵)이 될 거라는,”

“절세검왕이라고?!”

침모감과 사원감, 언덕 위에 선 병장감까지 한꺼번에 외치는 통에 얼핏 무슨 소린지 모를 정도.

경악이 지나쳐 경망스러운 반응이지만, 백문량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절세검왕 해원기, 여러 공공의 골칫거리입니다.”

반룡령의 인마가 이르는 기척. 대패했다고 해도 국감이 셋이나 멀쩡하고, 이런 상황이면 명령을 내린 상부에서도 바로 변고를 알아챌 터.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매달리고,

이 짧은 시간에 그의 뒤를 따르던 인영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대략 백여 명.

남녀노소 다양한 인물에 병기도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검은 바탕에 금색 실이 수놓인 복장을 걸쳤다.

오소민이 가르쳐주었던 금의위의 관복, 소위 비어복이란 것과 유사한 복장이란 걸 알아본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점이었던 이곳에서 십 리 떨어진 안양은 동쪽. 그런데 영접을 맡았다는 반룡령은 북쪽에서 달려왔다.

도지태사와 상의신모도 그랬지만, 동남서의 세 방향을 차지했던 침공감의 무리도 본래 북향하던 중이 아니었을까.

태항산은 안양을 지나고도 조금 더 동쪽에서부터 올라가야 하니,

그렇다면 녹림장관을 치려고 대규모의 인원을 준비했다는 조화부인의 말과 어긋난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사정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시선이 자꾸 안양 쪽을 향하게 된다.

신향에서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흔하다던 야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꼭 해원기를 노리고 조화부인이 미리 손을 써둔 것일까?

조화부인이 도주한 후로 등장한 자들은,

십이감의 태감이 둘, 팔국의 국감이 셋, 그리고 영접을 맡았다는 반룡령.

백문량의 말대로라면 이십사아문에서 더 많은 인원이 나왔을 수도 있다.

‘아예 안양 부근을 전부 봉쇄할 작정이었을 수도.’

그럴 힘을 지닌 동창이잖나.

뭔가 엉뚱한 해심(垓心)에 빠져든 듯한 느낌이 들고, 그러면서 조화부인을 쫓아 안양 방향으로 간 오소민이 불안해졌다.

오대마도 중 심마(心魔)의 능력을 익힌 조화부인. 그것만으로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요, 만약에 태감이나 국감 혹은 반룡령 같은 주구들이 합세한다면 오소민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터.

해원기가 연속으로 겪는 조우전(遭遇戰)이 오소민에게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아무리 사황령의 유래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해도, 오소민보다 앞서진 않는다.

비껴든 검을 힘주어 쥐면서 두 발을 번갈아 디뎠다.

‘단번에 돌파한다.’

참혹한 주검을 보면서 들끓었던 감정이 전혀 다른 열기로 확 타올랐다.

삶(生)이 죽음(死)보다 먼저요,

살림(活)이 죽임(殺)과 다르지 않다.

화아아, 쿠궁.

왼발에선 풍진이 자욱하게 일고, 오른발에선 우레가 치는 듯.

풍뢰를 딛고 서자 면면부절의 수정지력이 검왕법신을 가득 채우고,

머릿속에는 박대정심으로 담았던 수많은 절학이 연달아 명멸하니.

사방 수십 장이 모조리 해원기의 눈 아래에 갇혔다.

이른바 신령검역(神靈劍域)이라 불러야 할 경지가 세상에 처음 출현하는 순간이었으나, 심지어 해원기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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