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장 장상속출(將相續出) (4)
당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동창. 그 조직은 십이감과 사사팔국(四司八局)을 합쳐 이십사아문이라 불린다.
그중 팔국에 속한 침공, 사원, 그리고 병장.
이름 그대로 침공은 궁중 제복을 만드는 곳, 사원은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는 곳, 병장은 갖가지 병기를 만드는 곳이고.
이곳에 나타난 수십 명은 각기 그 이름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었다.
성문처럼 솟은 언덕 위. 전신 갑주를 걸치고 병(兵)이란 글자를 수놓은 깃발을 든 자가 우두머리일 터. 그 좌우로 장검, 단검, 장도, 대도, 장창, 사모, 단극, 부월, 철편, 순패를 든 자들이 늘어섰고, 오른쪽 가장 끝 단궁을 쥔 자 뒤에 또 한 명이 일어나 장궁을 세운다.
전부 열두 명.
동쪽과 남쪽에서 달려온 침공과 사원도 마찬가지. 궁장을 걸친 여인이 여섯에 비단을 한 필씩 짊어진 사내가 여섯이요, 쇠스랑을 든 장한 여섯에 호미와 가위를 쥔 여인이 여섯이다.
사원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눌러 쓴 방갓을 올렸다.
“이거…… 설마 저 애송이가 저지른 짓일까?”
축 늘어진 얼굴만큼 느릿한 말투지만, 도지태사와 상의신모의 참혹한 모습에 상당히 당황한 표정이고.
서둘러 상의신모를 앉히면서 상세를 살피던 궁장여인이 벌컥 화를 냈다.
“에잇, 사원감(司苑監)은 뭘 하는 게야? 어서, 태감, 아니, 태사 공공(公公)을 돌보지 않고. 병장감(兵仗監),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봤어?”
공공은 태감을 높여 부르는 호칭.
굼뜬 사원감을 답답해하는 궁장여인은 침공감인 모양인데, 다급하게 수하를 불러대면서도 상황부터 파악하려 한다.
그제야 도지태사 쪽으로 걸음을 내딛는 사원감. 그래도 딱히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 생각은 없는 듯.
양쪽 어깨가 끊겨나가 콸콸 쏟아지는 자신의 핏속에 잠긴 도지태사는 이미 죽은 것과 진배없거늘 뭘 어쩌란 건지.
차라리 언덕 위에 선 병장감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게 낫다는 듯 슬쩍 고개를 돌린다.
“우리 탈명궁사의 눈이 좋은 건 다 알지? 저 더벅머리가 태사와 신모에게 해를 끼친 걸 겨우 발견했다. 그래서 빨리 따라오라고 재촉했던 거고. 어제저녁부터 낌새가 이상했어. 너희 둘이 함께 운반하던 그 항아리들, 화숙인이 죄다 가져갔었잖아. 쳇.”
뚝뚝 끊기는 말투에 불만이 가득하다.
야점의 술독으로 늘어놓았던 열 개의 항아리.
그 단어가 나오자 침공감과 사원감의 시선이 날카롭게 바뀌어 해원기를 향했다.
등 뒤로 날아들던 화살을 쳐낸 자세 그대로 비스듬히 선 해원기.
신광이 어린 동시안이 주위를 차분히 살폈다.
서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병장감과 열두 명, 동쪽과 남쪽을 차지한 침공감과 사원감의 인원들.
이십여 장의 범위에 총 서른아홉이나 되는 자들이 해원기를 포위했고, 당장 무거운 압력이 은근히 밀려든다.
동창에서 흔히 부리는 번역 따위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게다가 각기 속한 소위 ‘아문’이 달라서인지 세 무리가 풍기는 기세 또한 판이하다.
병장국은 손에 든 병기만큼 살벌한 예기를, 침공국은 종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 기운을, 사원국은 진득하게 감겨드는 느낌을.
마치 별개의 세 문파가 한데 모인 것 같다.
십이감은 사사팔국의 상급. 그래서 십이감은 태감이 우두머리요, 사사팔국은 그냥 감(監)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탈혼궁사를 수하로 거느린 병장감뿐 아니라 침공감이나 사원감이 풍기는 기운은 절대 도지태사나 상의신모보다 아래로 보이지 않고.
어쩌면 음정수백을 흡수하기 전의 도지태사와 상의신모보다 더 강할지도.
이런 자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것은,
‘조화부인의 함정일까? 흠.’
해원기가 주위를 훑어보며 미간을 좁혔다.
야점 주인으로 위장해 자신을 기다렸던 조화부인. 상담이니 거래니 하더니 사로잡힐 처지가 되자 음정수백이란 요물을 내세웠다. 만일을 위해 도주할 준비를 해두었다는 뜻이고, 그녀가 도주하자 곧장 도지태사와 상의신모가 나타났다.
빌린 물건과 빌려준 주인. 음정수백은 본래 도지태사와 상의신모 소유였던 듯. 병장감의 말에서 음정수백이 담긴 열 개의 항아리를 침공과 사원의 무리가 운반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함정이라면 차라리 한꺼번에 몰려드는 게 이치에 맞는다.
이렇게 차례로 나타나는 이유가 뭘까.
조화부인의 의도가 단순하지 않다는 느낌.
그러나 마냥 생각만 할 수는 없다.
정확하게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지금, 오소민은 벌써 조화부인을 쫓아갔고, 해원기는 또 발이 묶였으니.
호들갑을 떨며 상의신모를 보살피다가 돌연 손을 멈춘 침공감, 처음부터 도지태사에겐 별반 관심을 두지 않던 사원감. 그리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노려보던 병장감.
도합 서른아홉이나 되는 인원들의 변화를 자세히 살필 여유가 어디 있나.
해원기의 왼손이 검결을 짚고, 발끝이 사뿐 지면을 밟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사람이 많아져서 다행이다.
도지태사와 상의신모에게 물으려던 질문.
사황령에 관해 답할 입이 더 생긴 셈이니까.
“음정수백을…….”
“그 열 개의 항아리를 어떻게, 음!”
느릿한 사원감의 말을 채가던 침공감이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일어섰다.
키이이이잉.
갑자기 울려 퍼지는 소음. 해원기가 뒤로 늘어뜨린 검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토하는 소리지만, 정면에 선 침공감과 사원감은 그 소리보다 공간을 채우며 덮쳐오는 가공할 기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층운밀포(層雲密布).
한여름 불시에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반드시 먼저 겹겹의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는 법이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딱 그런 기분이 들었으나, 덮쳐오는 건 그냥 구름이 아니라 검이요, 그것도 겹겹이 쌓여서 대체 수가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눈에 보인다는 착각이 들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리도 되지 않았고, 음정수백을 담은 항아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도지태사와 상의신모를 해친 흉수라는 저 더벅머리에게 말을 붙일 새도 없었는데.
대뜸 가공할 기세를 드러낸다. 혼자서 달려들 셈으로.
저 더벅머리 젊은 놈은 미친 게 아닐까?
생각이야 어떻든 덮쳐오는 기운은 소름이 돋을 듯하니, 침공감과 사원감도 마냥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눈짓 한 번에 앞뒤로 나뉘어 감싸는 수하들.
침공감의 앞에는 비단을 짊어진 여섯이, 사원감의 앞에는 쇠스랑을 쥔 여섯이 좌르르 늘어섰고, 열을 이루자마자 두 가지 장대한 형상이 맞서듯 일어섰다.
침공감의 앞은 그야말로 비단 한 필을 펼쳐놓은 듯, 시야가 흐려지며 은은한 광채까지 흐르고. 사원감의 앞은 빽빽하게 목책이라도 친 것처럼 삼엄하게 뻗어가는 기세가 침공감과 사원감만이 아니라 둘의 뒤에 늘어선 나머지 수하들조차 가린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손을 쓴 건 서쪽.
핏, 핏.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든 건 역시 탈명궁사의 편전. 여기에 장궁에서 쏜 화살이 높이 솟아 해원기의 머리에 떨어질 판이다.
한 호흡 늦게 병장감의 호령이 터지고,
“쳐랏!”
병기를 든 열 명이 동시에 해원기를 향해 뛰어내렸다.
장병(長兵)과 단병(短兵)이 뒤섞여 한꺼번에 짓쳐 드니 단번에 도륙이 날 판.
그러나.
검을 쥐지 않았다.
가지런히 모인 오른손 끝에서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고검. 새하얗게 물든 검신이 선풍과 폭풍을 나사관천으로 감아 돌리면서 부챗살처럼 퍼지자,
탈명궁사의 편전이 가까이 이르기도 전에 바스러진다.
츠츠츠츠.
귀를 울리던 소음이 잦아드는 대신 회전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두 발이 춤추듯 뒤집히면서 해원기의 신형이 팽이처럼 돌았다.
부챗살처럼 퍼지는 새하얀 검신이 삽시간에 하나로 이어져 마치 백룡(白龍) 한 마리가 휘도는 듯.
한 줄기 백광에 하늘과 땅이 나뉘었다.
콰앙!
천지가 뒤집힌 듯 엄청난 굉음.
열 가지 병기가 전부 두 조각이 나는 것보다 병기를 쥔 열 명이 짓쳐 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날아가 언덕에 처박히는 광경이라니.
“꺽.”
비명은커녕 제대로 신음조차 내는 자가 없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분간하기도 전에,
해원기가 두 바퀴째 제자리를 맴도는 순간,
한 마리 백룡은 둔갑이라도 하는 것처럼 겹겹이 쌓인 구름을 휘감았고,
그게 접었던 병풍을 펼치듯 늘어서는 건 환상 같았다.
열 폭의 병풍.
하늘에 해와 달이 걸렸고, 땅에는 산과 강이 자리하며, 땅에서 하늘로 솟은 수목에는 사슴과 영지가 깃들었고, 하늘에는 학이, 물가에는 거북이 노닌다.
침공감과 사원감을 앞뒤로 에워쌌던 자들은 병장감의 수하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보다 이 기막힌 광경에 넋이 빠졌다.
이게 뭐냐.
영험하기 그지없는 열 폭 병풍이 와락 다가오는데도 멍하니 바라보기만.
콰콰콰콰.
“으아아!”
“크억.”
“와악!”
앞에서 막아서려던 인원이 양쪽으로 열두 명이라 그나마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었던지.
비단을 짊어진 여섯이 산지사방으로 날아가고,
쇠스랑을 짚었던 여섯은 땅바닥에 머리를 들이박으며 고꾸라졌다.
어마어마한 위력.
하지만, 멈춰 선 해원기의 시선은 곧추세운 검만을 향했다.
순백의 검신을 처음 보는 양.
검상은 신왕검(神王劍).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지는 자신도 몰랐다.
오소민을 염두에 두고 서둘렀다.
서른아홉이나 되는 자들, 각각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아직 정확히 모른다.
평소라면 배운 대로 상대의 능력을 충분히 가늠한 후에 그에 맞는 힘을 썼겠지만,
이번에는 최대한 빨리 제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수정지력을 한껏 일으키고, 풍뢰결을 전부 동원하면서 천손검법을 연달아 펼칠 마음을 먹었다.
홍몽무변과 양의상전에 이은 초식.
심병지권에 뛰어드는 자들은 판분천지(判分天地)로 쪼개고, 버티려는 자들은 장생십경(長生十景)으로 무너뜨린다.
당연히 양의상전 때처럼 두 자루의 검상이어야 하는데.
뜻밖에 출현한 것은 신왕검.
청정정명(淸淨正明)의 으뜸이긴 해도 군림검이나 사신검보다는 강대한 맛이 부족한 편이라고 여겼던 검이,
이렇게나 결백(潔白)한 형태를 이룰 줄이야.
입으로 읊조리며 발로 춤추는 구음입무(口吟立舞)가 미처 따르지 못할 정도로 움직였다.
그 이유는 바로 완전한 수정지력과 일시에 불러낸 풍뢰결.
신기역(神奇域)의 신기란 바로 생명의 젖줄인 감로(甘露)를 말함이니, 이를 보병(寶甁)처럼 일신에 담을 것이요.
지밀경(至密境)의 지밀이란 바로 생성사멸의 지극한 비밀을 가리키니, 풍뢰(風雷)로 그 변화의 바탕을 다룰 것이다.
마침내 이유를 깨달은 해원기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기연으로 닿았다고 여겼던 수정지력과 풍뢰결의 진정한 의미.
삼산이 존재하지 않는 자신이 사부처럼 대지체와 상상지의 힘을 완전히 습득했다는 건가.
고상하고 결백한 검.
이제검이 이렇게나 고결한 자태를 드러낸 적은 없었다.
오직 검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주위의 황망한 움직임을 살피지도 못했다.
삐이익.
침공감이 호각을 길게 불고,
파르르.
화살 한 대가 붉은 연기를 뿜으며 높이 오르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