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63화 (263/410)

제66장 장상속출(將相續出) (3)

원(元)이 천하를 정복하고 사한국(四汗國)을 건립했을 때.

그즈음이었으리라.

성길사한(成吉思汗)은 자신의 내부에 자리 잡은 마(魔)가 기어이 자신이 차지한 천하를 멸망시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사흉(四凶)에 붙여 네 쌍의 녹판(綠板)에 봉인하고, 전설의 신수(神獸)인 환계수(幻界獸)로 지키도록 하였단다.

그 힘을 탐낸 자들. 녹판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환계수로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지력(四大之力)을 얻었고, 또 혼돈, 궁기, 도철, 도올의 사흉지마(四凶之魔)를 깨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봉인은 또 한 가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으니.

사대와 사흉이 뒤섞여 이루어진 절대사기(絶對邪氣).

그건 정종의 신공도, 마종의 마력도 가리지 않고 담아내는 그릇과 같았기에.

결국, 벽세의 극사(極邪)와 지부의 진마(眞魔)를 불러냈었다.

그 절대사기의 이름이,

바로 사황령이다.

도지태사의 장원필법은 실전되었던 정종의 두 가지 신공을 바탕으로 하는 무공이고,

상의신모가 군림검을 고치로 만들려고 펼쳤던 바늘과 실 역시 잊혔던 정종 절학에서 비롯한다.

그런 자들이 음정수백이라는 요물을 거리낌 없이 흡수했으니.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장원필법은 유가(儒家), 침선(針線)의 절학은 선가(仙家)의 공부거늘.’

방원 십 장에 걸쳐 소나기처럼 떨어진 불줄기들.

흙먼지와 후끈한 열기가 어지럽게 휘도는 사이에 요물을 하나씩 먹어치운 둘에게선 아까와는 전혀 다른 막대한 힘이 전해지지만,

난세의 잔재라면 더욱 용서할 수 없다.

해원기의 심성이 정한 바를 따라서 태양 같은 빛을 뿜던 고검이 검상을 바꾸었다.

치이이이.

달군 쇠를 물에 넣은 것 같은 소리를 내는 검신이 새파랗게 물든다.

추상검.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먼저 달려든 건 도지태사와 상의신모였다.

“진묵휘쇄(陳墨揮灑)!”

도지태사의 거필이 풍차처럼 돌면서 먹물 같은 기운이 왈칵 뿌려졌고,

“천침만수(千針萬繡)!”

상의신모의 외침에 그 먹물을 실로 삼은 것처럼 무수한 바늘이 공중을 뒤덮었다.

이미 군림검의 위력을 겪었기에 해원기에게 아예 어검술을 펼칠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선공.

하지만,

도지태사와 상의신모는 꿈에도 몰랐다.

군림검은 어검술이 아닌 어검대법. 게다가 해원기는 이미 검상을 바꾸었다.

해원기의 두 발이 사뿐히 지면을 밟으면서 추상검이 가볍게 향하자,

고오오오.

먹물과 바늘뿐 아니라 주위에 떨어진 불꽃까지 제멋대로 휘돌기 시작했다.

홍몽무변.

새파란 기운이 공간을 휘젓는다. 어느 게 먹물이요, 어느 게 바늘인지. 불꽃까지 덧붙은 공간이 조여들어 뭐가 뭔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어검술을 봉쇄하려다 예상 밖의 반격을 받은 셈이지만,

도지태사가 풍차처럼 돌리던 거필을 신속하게 뒤집었다.

“천고전송(千古傳誦)!”

촤라라라라.

무수한 글자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한 줄로 이어져 너울대고,

퍼퍽, 퍼퍽.

조여드는 공간을 밀어내면서 휘도는 불꽃이 미친 듯이 부서진다.

그리고 그 글자들 사이를 물고기 떼처럼 헤엄치는 바늘들.

“자사천탁(刺絲穿托)!”

공간을 조이는 새파란 기운을 헤집으며 거꾸로 타고 넘으려는 듯.

천손검법의 제일초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레 역공을 시도하는데,

해원기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이 역공을 기다렸던 것처럼 양손이 살짝 좌우로 벌어지고,

작은 동그라미 두 개가 그려졌다.

“두 개의 기틀은 서로 얽히니.”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구결을 누구도 듣지 못하지만,

그보다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도지태사와 상의신모의 안색이 홱 변했다.

어검술이 아니란 것은 알아챘으나,

두 자루 검이라니.

각각 도지태사와 상의신모를 가리키며 검극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이 두 자루는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해원기가 간파한 대로 장원필법은 첩폭운필법의 화필과 금방제명체의 서필을 합한 절학이지만, 먹물을 뿌리고 문장을 써내려 그림을 이루기까지는 막대한 공력이 필요하다.

도지태사는 두 구가 합체한 음정수백 하나를 흡수했기에 비로소 내외형신(內外形神)까지 이어나갈 힘을 얻었고.

일단 그림을 이루어 격조신운(格調神韻)까지 나아가면 어검술이든 뭐든 모조리 꺾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음정수백이 충분했다면 처음부터 사문위일신공(斯文爲一神功)을 운용할 수 있어서, 이따위 순서를 따를 필요가 없었을 터.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쌍검이 출현한다?

저 빌어먹을 애송이가 대체 어디에 검을 숨겼기에?

상의신모도 마찬가지 심정.

천침만수는 어검술을 예상하고 도지태사의 먹물을 실로 삼았지만, 마침 해원기가 공간을 옥죄는 기운을 펼치기에 옳거니 하면서 자사천탁으로 나아갔다.

자사천탁은 본디 상대의 기운을 내 바늘귀에 꿰어 쓰는 절학. 공간을 옥죄는 기운을 모조리 빼앗을 참이었는데.

이대로 진행되면 도지태사의 장원필법보다 먼저 절세검왕이란 놈의 검까지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을 터.

어디서 튀어나온 검이 놀리듯 동그라미를 그리나?

더구나 자신을 가리킨 검은 공간을 옥죄던 그 새파란 검신이지만,

도지태사를 향해 동그라미를 그린 검은 진묵휘쇄를 죄다 빨아들인 것처럼 새까맣다.

서슬 퍼런 기상을 품은 새파란 검과 달리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것 같은 먹빛.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자루 검, 눈속임일 수가 없다.

“에잇.”

도지태사가 억지로 내외형신을 이루려고 이를 악무는 소리에,

상의신모도 몸에 걸친 청의백상이 벗겨질 정도로 흔들어댔다.

솨아아앙.

그녀도 완성하지 못한 태상현도기기(太上玄道氣炁)를 한껏 끌어올려 검을 부술 생각이었다.

또 하나의 검상이 구현된 건 해원기에게도 의외.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되리란 걸 미리 짐작했던 것처럼.

사부에게 검왕수를 배우고, 남들 앞에서 처음 드러냈던 게 열여섯 때였던가.

사부가 창안한 검형수를 기초로 군림검의 오행어검의 이치를 더하고, 열 손가락에 하나씩 검상을 부여하는 희세의 검학.

그렇게만 알았었다.

양손이 각각 오행상성과 오행상극을 짚는 이유가 오행상성을 이루기 위함이요, 그 오의가 검왕오형에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왜 사부는 검기핍인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왜 사부는 검왕오형에 오의가 담겨있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나.’

강호에 발을 들이지 않으려는, 무림과는 떨어져 있고자 했던 나 때문이었다.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원하는 대로 사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만약. 혹시라도.

아들 같은 제자가 참혹한 강호를, 끔찍한 무림에 얽혀 기어이 그 험난한 길을 걷게 된다면.

그 누구도 감히 해하지 못하게 하리라.

사부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너는 이 사부와 다르다. 그래서, 허허, 너의 천손검법도 이 사부와는 다를 것이야. 네 사조께서 보셨다면 참으로 기뻐하셨을 텐데. 허허허.”

항상 해주시던 말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천손검법 제이초 양의상전.

추상검에 이어서 사신검이 저절로 구현되고,

두 개의 작은 동그라미가 서로 꼬리를 물고 돌기 시작했다.

하나가 음이면 하나가 양. 하나가 검강이면 하나가 어검.

하나가 종이면 하나가 횡. 하나가 하늘이면 하나가 땅.

너무나 평범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고.

그래서 비범하니.

이를 신령(神靈)하다 하지 않을쏜가.

한 줄로 이어졌던 먹물이 거필을 따라 번져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게 내외형신일 터. 굳고도 바르며 그윽하고 오묘한 기운이 십여 장을 뒤덮지만,

떵!

망치로 쇠를 때리는 소리 한 번에 거필이 산산이 조각나고,

“으아악!”

양쪽 어깨가 통째로 떨어져 나간 도지태사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떨어졌다.

먹물 대신 공중을 채우는 시뻘건 핏물 사이로 새까만 사신검이 얼핏 검신을 보이는 사이,

어지러이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어우르듯 퍼지는 아득한 기운에는 추상검이 날아들었다.

깊은 물에 잠긴 물고기는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놓칠 듯.

그러나 엄혹한 서릿발은 모든 걸 무시하고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사아악.

종이를 접을 때보다 더 여린 소리.

헤아릴 수 없이 많던 바늘이 전부 가루가 되면서,

“크으으.”

상의신모가 피를 줄줄 흘리는 입에서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리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와중에도 몸에 걸친 청의백상이 갈기갈기 찢기다 못해 바스러지니.

공중을 휘돌던 검은 어느새 해원기가 좌우로 벌린 양손 위에 단정히 얹혔다.

맑게 가라앉은 검신.

추상검의 새파란 서슬도, 사신검의 먹빛 살기도 다 사라진 채.

다시 한 자루의 검.

검강으로 바늘을 짓이긴 추상검은 어검으로 상의신모의 신공을 파괴했고,

어검으로 그림을 쪼갠 사신검은 검강으로 도지태사의 거필을 박살냈다.

이 자리에 화산검협 마린이 있었다면 감격에 눈을 부릅떴을 일초.

검강과 어검을 하나로 붙이는 혼원일검을 넘어서 필요에 따라 두 개의 검상이 제 역할을 할 뿐이고, 또한 서로가 하나처럼 이어져 뜻대로 주고받는다.

의상(意想)으로 검을 다루는 경지.

심검(心劍)에서 가장 심오한 심령(心靈)의 검이다.

해원기가 오른손으로 검병을 쥐고 왼손으로 검신을 닦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사부의 말대로.

자신의 천손검법은 사부와 다르구나.

양의상전을 펼치자마자 사신검이 구현된 건,

바로 검왕오형의 마지막 다섯 번째 유야무야(有耶無耶)가 저절로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상념이 들끓지만,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두 팔이 어깨부터 잘려나간 도지태사는 질펀한 피 웅덩이에 잠긴 채 혼절했고,

전신 공력이 파괴된 채 심대한 충격을 받은 상의신모도 벌벌 떨면서 피거품을 게워낸다.

둘 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으나, 그 입에서 알아낼 게 남았다.

그런데.

해원기가 검집으로 되돌리려던 검을 기쾌하게 휘둘렀다.

채채챙.

미친 듯이 튕기는 불똥. 등 뒤로 날아든 암습을 막아낸 해원기가 얼굴을 굳혔다.

“화살?”

손바닥 길이만 짧은 편전(片箭). 기억에 있다.

아무리 도지태사와 상의신모를 상대하느라 정신을 집중했다고 해도 해원기의 이목을 피해 암습을 가할 수준의 궁술이라면.

예전에 인색이귀 때문에 놓쳤던 탈명궁사라는 자.

과연 돌아보는 시선 속, 성문처럼 솟은 언덕 위에 활을 든 인물이 들어오고.

그 옆으로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르는 십여 개의 인영. 그중 전신에 갑주를 걸친 자가 버럭 고함을 지른다.

“침공(針工)과 사원(司苑)은 아직인가?”

그 고함이 그치기 전에 두 방향에서 날 듯이 달려오는 그림자들이 또 수십.

“흥! 하여간 병장(兵仗)은 나서는 걸 어지간히…… 에구머니나!”

코웃음을 치다가 기겁해서 상의신모에게 뛰어드는 궁장 여인.

“허어, 이거 큰 변고가 생겼구먼. 태사와 신모가 황망히 떠나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늙수그레한 음성으로 중얼대는 이는 커다란 방갓을 쓰고 황의를 걸친 사내. 질질 끌던 쇠스랑을 세우며 인상을 쓴다.

대번에 수십 명에게 포위당한 처지가 된 해원기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침공, 사원, 병장.

전부가 동창의 소위 이십사아문에 속하는 명칭들.

또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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