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장 장상속출(將相續出) (2)
정녕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역심을 품었는가.
동창(東廠)이 아니라 동창(東昌). 성조니 뭐니 지껄이는 소리에서 마치 국명(國名)처럼 여기는 걸 엿볼 수 있었고.
동창에서 나온 자들이니 그 명호에서도 자연히 동창의 조직을 연상케 한다.
황궁의 십이감(十二監) 중 황제의 의상을 담당하는 상의감(尙衣監)과 황제를 따르면서 갖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도지감(都知監).
그 우두머리는 태감(太監)이라 부르고. 아무리 높은 품계에 올랐다 해도 어차피 내시들이거늘.
노파는 신모요, 노인은 태사라.
어처구니가 없지만.
떨어져 내린 경공이나 풍기는 기세가 전혀 만만치 않다.
도지태사란 노인이 냉혹한 얼굴을 찡그렸다.
“또 병이 도졌구먼. 그저 젊은 것만 보면, 쯧.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아는 게 우선이잖소. 네 이놈! 화숙인은 어디로 갔고, 네놈은 여기서 뭘 한 것인지 샅샅이 고하지 못할까!”
상의신모라는 노파에게 불만을 드러내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호통을 친다.
꽤 위엄을 갖춘 모습인데,
해원기가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머리를 저었다.
이 둘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 조화부인이 미리 손을 써둔 것일까? 그렇다고 여기기엔 모호한 점이 많다.
아마도 음정수백이라는 이름을 지닌 듯한 요물들이 출현하고 한참 지나서야 나타났고.
게다가 음정수백이 전멸할 뻔한 사실에 매우 당황한 모습. 해원기의 신분도 모른 채 조화부인의 소재를 아는 데 급급하다.
조화부인도 도주하며 ‘빌려온 장난감’이라고 했었다.
뭔가 이상하게 꼬인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렇다고 이 둘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직 남은 두 구의 요물도 그렇고, 오소민을 따라 조화부인을 쫓는 데에 장애가 될 것이다.
“상의라면 침모(針母)가, 도지라면 태사(台肆)가 차라리 어울리지. 샅샅이 알고 싶은 쪽은 오히려 나야.”
왼손이 들리고, 검을 당기고.
휘이이.
홀연히 바람이 일 듯 기세가 다시 펼쳐진다.
요물 두 구, 태감이라고 여겨지는 노인과 노파. 빠르게 정리할 마음을 먹었다.
“음?”
과연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다. 검기핍인이 다시 권역을 이루려 하자마자 상의신모가 남은 음정수백 두 구를 끌고 훌쩍 뒤로 물러나고,
도지태사가 잽싸게 등 뒤의 거대한 붓을 내밀었다.
파팟.
웬만한 기둥에 버금가는 두께에 작은 풀숲처럼 무성한 붓털. 커다란 빗자루에 가까운 붓이 기이하게 흔들리자 좌우의 지면이 마구 튀어 오른다.
놀랍게도 검기핍인의 보이지 않는 기세를 갈라쳤다.
무게가 상당할 거필(巨筆)을 한쪽 손목만으로 흔들면서.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잇.”
이를 갈며 노려보는 얼굴.
삯바느질이나 하는 침모, 수발을 들며 광대 짓이나 하는 태사. 자신의 명호를 비웃은 해원기에게 벌컥 화가 났다.
파르르르.
와락 내지르는 거필을 따라 미친 듯이 풀어진 붓털이 해원기의 전신을 덮는다.
붓이 아니라 몽둥이.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큰 대들보로 찍어 누르는 것 같다.
화가 나서 급하게 손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기권의 형성을 눈치 챘다.
해원기를 가벼이 보지 않고 선수(先手)를 점하려는 속셈.
그러나 검기핍인이 어떻게 생기는지 모른다.
해원기가 두 손을 엇갈리듯 내질렀고,
군림검이 푸른빛을 머금은 채 정면으로 뻗었다.
어검대법의 등목구룡(藤木九龍).
촤아아아.
줄기줄기 뻗는 검광이 붓털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아예 거필 전체를 쪼갤 듯.
상상도 하지 못했을 어검.
그런데 덮어오던 거필이 쑥 오므라든다.
“어검술? 흥.”
도지태사의 코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시야를 가리는 검은색. 빗자루처럼 풀렸던 붓털이 한데 모이면서 공간을 요리조리 누비고, 그 끝에서 환상처럼 퍼지는 것은 분명히 먹물이다.
커다란 네모(口) 안에 열십자(十)와 조그만 네모(口).
벽을 세운 것처럼 글자가 일어나며 먹물이 자욱이 퍼져 등목구룡과 마주치고,
펑!
해원기가 두 손의 손가락을 번갈아 접었다가 폈다.
위이이이잉.
왼손은 엄지와 검지만 접었고, 오른손은 반대로 엄지와 검지만 편 검결지.
군림검이 다시 빛을 뿜으며 돌아오지만.
거필이 공간에 세운 먹물의 벽을 뚫지 못했다.
“첩폭운필법(帖幅運筆法)에 금방제명체(金榜題名體)?”
도지태사의 무공을 알아보면서 눈썹이 올라붙었다.
지금까지 붓을 병기로 사용하는 동창의 인물을 둘 만났다.
하나는 조화부인의 수하인 용선생. 그가 쓴 판관필은 그림을 그리듯 움직이는 첩폭운필법이었고.
또 하나는 고력사의 지하무덤에서 마주쳤던 여 대부. 그의 철필은 글씨를 쓰는 형태로 움직였으나 자세히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도지태사의 거필은 그림을 그리듯 움직이다가 굳을 고(固)자를 써서 등목구룡의 군림검을 막아냈으니.
비로소 여 대부의 철필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화필(畫筆)과 서필(書筆)은 같아 보여도 쓰는 법이 전혀 다르다. 무공으로 승화해도 마찬가지. 한데 이 두 가지 다른 법식을 하나로 만들어냈다.
지혜가 뛰어나고 조예가 깊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초점을 모으는데,
크게 한 걸음 물러선 도지태사의 안색은 붉으락푸르락. 노기와 경악이 뒤섞였다.
뒤에서 여유를 부리던 상의신모 역시 깜짝 놀란 표정.
“태사의 장원필법(壯元筆法)이 밀려? 이게 대체…… 네, 네가 누구기에?”
첩폭운필법과 금방제명체를 합친 무공이 장원필법인 듯.
더듬는 말보다,
해원기의 두 손 사이에 놓인 군림검을 보는 시선이 더 흔들린다.
얼핏 양손 위에 눕힌 듯 보이지만, 빛을 뿜는 검은 분명 공중에 떠 있고.
두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벅머리의 새파란 애송이.
어검술을 시전한 것만 해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인데, 도지태사를 일격에 밀어내고, 심지어 장원필법의 근원까지 알아보다니.
이 어수룩한 외모의 청년은 대체 뭔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일.
해원기가 왼발을 천천히 내디디며 비로소 답했다.
“내 이름은 해원기다.”
목소리가 땅속에서 울리듯 가라앉고,
윙윙윙.
떠오르는 군림검에서 빛이 점점 강해진다.
본래 살기가 없었다. 타고난 성품이 워낙 순후해서 무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처음 사부를 만났을 때, 남을 돕는 무인이 되겠다는 바람을 밝혔었다.
결국 끔찍한 무림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혀야 했지만.
그래도 일부러 살기를 일으킨 적은 없었는데.
도지태사란 자의 무공, 장원필법. 분명히 여 대부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요, 혹여 여 대부의 사부일지도.
지금 동창에 있는 여 대부는 바로 정록의 변신. 아무리 정록의 역용이 뛰어나다 해도 이 도지태사란 자는 알아챌 가능성이 있다.
갓 사귄 벗인 해원기를 위해 험지에 뛰어든 친구.
이 도지태사를 죽여야 한다.
해원기가 살심을 품었다.
이름을 들었으나, 도지태사와 상의신모 둘 다 입을 뗄 틈이 없었다.
위이잉.
해원기의 정수리 위까지 떠오른 검이 거대한 광구로 화하는 광경. 마치 머리 위에 태양이 떠오른 것 같다.
전신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력.
도지태사가 거필을 두 손으로 안아 거꾸로 세우고, 상의신모가 괴장을 눕히면서 웅크렸다.
먹물을 구름처럼 뿜는 거필, 가느다란 실오라기가 아지랑이처럼 일어서는 상의신모의 등.
숨 한 번 돌리지 않았는데.
“질!”
해원기의 단호한 외침에 태양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군림어검의 금광섬삭(金光閃爍).
찬란한 금광에 시야가 어두워지는 순간, 목이 달아난다.
그러나 질 수 없다는 듯 도지태사와 상의신모가 동시에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압!”
“이잇!”
상하좌우. 사방으로 뻗는 먹물. 게다가 먹물이 만든 먹구름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닥의 실이 촘촘히 얽혀든다.
그야말로 먹물로 짠 휘장이 단숨에 펼쳐진 듯.
태양 같은 금광섬삭을 정면으로 막아섰고.
쾅!
땅거죽이 뒤집히는 거센 충격.
먹물로 짠 휘장이 갈기갈기 찢기고, 정신없이 뒤로 빠지는 도지태사의 모습이 얼핏 보였을까.
돌연, 상의신모가 내던진 괴장이 폭발하면서 작은 점이 무수히 솟구쳐 오른다.
멈칫했던 군림검으로.
무수한 점은 수를 놓을 때 쓰는 바늘. 수백 수천이나 되는 바늘이 전부 보이지 않는 실을 끌고 군림검을 얽으려는 광경.
하찮은 저항이다.
어검대법에서 예기(銳氣)가 가장 강한 금광섬삭에 바늘과 실이 무슨 소용인가.
해원기가 무표정하게 두 손의 검결지를 뒤집었다.
위이이이이잉.
군림검이 원반처럼 무섭게 회전하는데.
츠츠츠츠.
바늘과 실이 잘리는 대신에 사방으로 퍼져 둥글게 뭉쳐 든다. 군림검을 중심으로 고치라도 만들려는 듯.
평범한 물건도, 단순한 방어도 아니다.
해원기의 눈이 가늘어지고, 내딛던 왼발에 힘을 주면서 오른손을 벼락같이 내질렀다.
화악.
금광이 불길을 일으키는 건 폭령진화를 더했기 때문.
군림검의 회전이 종횡으로 바뀌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도 바늘과 실이다. 재단경위의 오의인 저사직금으로 한데 끌어 모아 자르고 태우면 그만.
어검대법과 검왕오형에 휘말리면서,
퍼퍼퍼펑.
기어이 고치가 되려던 뭉치가 연달아 폭발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
폭령진화의 영향인지 불줄기가 십여 장이 넘는 범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손을 바꾸려던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연이은 충격과 폭발에 흙먼지와 불꽃이 어지럽게 뒤섞인 전면.
어느새 이십 장 가까이 거리를 벌린 도지태사와 상의신모가 기괴한 광경을 보이고 있었다.
두 구 남았던 음정수백.
하나는 도지태사에 물처럼 스며들어 몸에 걸친 은의가 반짝반짝 윤을 내고, 또 하나는 상의신모에 꿀처럼 들러붙어 청의백상이 선명하게 빛난다.
원래 사람 크기만 했던 요물이 두 구씩 뭉쳐 한참 커진 덩치였는데.
해원기가 발견하자마자 감쪽같이 은의와 청의백상으로 흡수되었다.
요물을 먹는 옷이란 건가.
괴상하기 짝이 없는 짓을 행하면서 상의신모가 처음에 보였던 흉측한 미소를 짓는다.
“흐흐, 그래, 네가 바로 절세검왕이라는 놈이구나. 영세검주의 후예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정체를 알았나.
도지태사의 냉혹한 얼굴은 아예 얼음 가루를 뿌려놓은 듯.
“겨우 반의반도 안 되는 음정밖에 취할 수 없다니. 네놈 때문에 이십 년 적공(積功)이 물거품이 되었다. 으득.”
이를 악무는 소리에 찬바람이 인다.
해원기가 회수한 고검을 가슴 앞에 꼿꼿이 세웠다.
강호에서 흔히 검을 거두는 수검(收劍)의 예라고 하는 자세지만, 여기서 검을 거둘 리 없다.
두 눈의 동시안이 신광을 뿌리고,
“사황령(邪皇靈)이 아직 남았더냐?”
목소리가 더욱 음울하게 깔렸다.
마치 사부처럼.
눈앞의 둘. 그들이 펼친 무공과 지금 보이는 해괴한 짓. 전부 한 가지와 연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