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61화 (261/410)

제66장 장상속출(將相續出) (1)

해원기가 재빨리 오소민을 살폈다.

열 개의 독에 담겼다가 폭포수처럼 야점을 뒤엎은 액체. 술은 아닌 듯한데, 묘하게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게 신경이 쓰인다.

해원기 자신이야 저절로 발동한 신왕공의 호신지기로 괜찮지만.

퇴로를 미리 차단하려 했던 오소민이 조화부인을 쫓다가 도리어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다행히 쏟아지는 액체를 잘 피한 모양. 손을 넣은 품에 은은한 빛까지 어려서 진즉 하화의 보패지력까지 운용했나 보다.

마음이 놓이자 눈앞에 일어서는 형체에 집중했다.

꿈틀꿈틀.

급하게 쳐내긴 했어도 검왕수를 튕겨낸 열 개의 형체.

조화부인이 떠드는 동안에 암암리에 야점의 공간을 속박했었다. 둔법도 은문진도 쓸 수 없게 하는 방법을 마침 장안에서 영락진인을 통해 알게 되었고,

비록 검기핍인에 의해 이루어지긴 했으나 조화부인이 아는 척했던 ‘기권’보다는 한 단계 높은 경지였다.

이른바 심병지권(心兵之圈)의 초입에 든 속박이거늘.

그 안에서 능히 검왕수를 버티다니.

구부렸던 팔다리를 펴고,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드는 형체는 사람 같지만.

도저히 사람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아니, 아예 털 하나 보이지 않는 새빨간 몸뚱이는 꿀로 덮였는지 진흙으로 뭉쳤는지 흐물거리고, 귀도 코도 입도 없는 머리통 가운데엔 시꺼먼 점 하나가 눈처럼 매달렸다.

이게 대체 무엇인가.

더구나,

스스스스.

야점 안을 뒤덮었던 시큼한 액체가 이들이 일어나는 동작에 맞추어 도로 희한한 몸뚱이로 빨려 들어간다.

오소민이 놀라 외친 대로 ‘요물딱지’.

“자넨 조화부인을.”

해원기가 짧게 말을 끊으면서 왼손을 세우고,

오소민이 인상을 쓴 채 해원기를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몸을 날렸다.

“조심하게.”

천막이 날아가고 탁자와 의자가 엉망으로 나뒹구는데도,

야점이었던 공간 전체를 휘감는 매서운 기운.

비스듬히 옆으로 서는 해원기의 전신에서 드러나는 거대한 검기였다.

요물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열 개의 형체를 단번에 베어버릴 듯하고,

오소민 자신은 이 권역에 오히려 방해가 될 터.

몸을 빼 도주한 조화부인을 뒤쫓아야 한다.

조화부인의 의도가 무엇이든 생포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빠져나갈 수단을 미리 마련해놓았다고 해도 놓칠 수는 없는 일.

해원기가 거침없이 왼손을 당기면서 오른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위잉.

어느새 뽑힌 검이 한 줄기 섬광으로 화해 공간을 횡단한다.

무시무시한 쾌검.

검을 뽑은 건 검왕오형의 발검제형이지만, 그 안에 절세오검의 섬전추풍과 오악검의 단홍기수가 담겼고.

시큼한 냄새를 감안해 제탁지검의 기운까지 덧붙였다.

요물 열 구의 허리를 단번에 베어버릴 셈.

촤아아아아.

과연 일거에 물보라가 일면서 해괴한 형체가 전부 양단되는데.

해원기가 되레 미간을 좁히며 두 발의 위치를 바꾸었다.

검왕수를 내쳤을 때 느꼈던 물컹한 촉감과 거친 반탄력은 어디로 갔는지.

고검이 진짜 물을 벤 것처럼 지나치게 수월하게 통과해버렸고,

허리가 두 동강 났어야 할 형체들이 어느 순간 옆으로 주르르 늘어서기에.

무슨 일인가를 밝히려는 동시안이 비췻빛을 머금었다.

횡단한 검.

분명히 허리를 베었건만, 해괴한 형체들은 그 위력을 못 견딘 것처럼 전신이 뭉그러지더니.

그대로 횡단하는 검세를 따라 옆으로 흩날렸고.

그게 도로 뭉쳐져 형체를 이루었다. 물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처럼.

이유를 알아낸 해원기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수요(水妖)로군.”

오면서 오소민과 대화 중에 은허에 또 빙이 같은 물귀신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나누었더니.

동티가 난 것처럼 수요, 물귀신이 나왔다.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야말로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요물이 열 구.

사지를 흐늘거리고 몸뚱이를 꿈틀대는 모습이 흉측하기 짝이 없다.

그런 주제에 지각은 있는지 검을 한 차례 맞고는 미끄러지듯 좌우로 거리를 벌려 해원기를 에워싸는 행동.

주먹질을 하거나 장력을 내치지는 않지만, 모여드는 것만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든다.

해원기가 왼손으로 검신을 죽 훑고는 빠르게 양손을 교차했다.

한두 군데 베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안 이상,

재단경위의 오의인 저사직금.

고검이 순간적으로 수십 수백 자루가 된 듯,

파파파파파파.

열 구의 요물을 어지럽게 난자하기 시작했다.

폭죽이 터지듯, 번개가 흩어지듯.

물과 같다면 작은 물방울조차 쪼개버리면 그만이다.

열 구의 요물이 산산조각으로 쪼개지고 또 쪼개지면서 아예 물안개가 되어 삽시간에 공간이 뿌옇게 흐려졌다.

이때를 기다렸던 해원기의 검이 홀연히 뒤집히고,

폭풍결이 물안개를 모조리 휘몰아 가는데.

파앙!

폭음과 함께 정면에서 덮치는 엄청난 반동.

급하게 검을 세운 해원기가 주르르 밀려났다. 젖은 바닥에 밭고랑처럼 길게 흔적을 남기면서.

스르르르.

그리고 동시에 눈앞에서 뭉쳐 드는 물안개. 커다란 몸뚱이 다섯 개가 환상처럼 나타난다.

수막(水幕). 아니, 물안개로 이루어졌으니까 무막(霧幕)이라고 해야 할까.

공간을 뿌옇게 채웠던 물안개의 장막이 폭풍결에 날아가긴커녕 폭풍결을 도로 튕겨냈다.

처음 검형수를 튕겨냈던 것처럼.

‘뭉클한 촉감과 거친 반탄력. 마치 수지(樹脂)나 아교(阿膠) 같구나. 쯧.’

물귀신인 줄 알았던 이 요물이 물이 아니란 걸 비로소 깨닫고서,

해원기가 입속으로 혀를 찼다.

신속하게 해결하고 바로 오소민을 따라 조화부인을 쫓으려 했는데.

돌파가 쉽지 않다.

조화부인이 마련한 수단. 해원기를 제압하려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발을 묶을 심산이었나.

딱히 공격을 가하지도 않고, 그저 음산한 기운만 뿌려대면서 해원기를 막아서는 요물들이다.

물안개의 장막을 이루는 걸 보면 경공으로 빠져나가기도 어려울 터.

또 이 요물들을 이곳에 그냥 버려두고 갈 수도 없다.

열 구가 다섯 구로 줄었지만, 형태는 훨씬 커졌으니 저사직금에도 거의 손실이 없었다는 뜻이고. 형체를 합치거나 늘릴 수도 있는 모양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물. 이렇게 싸워가면서 특성을 파악하고 처리해야 한다면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을지.

또다시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다섯 구를 보면서,

해원기가 염두를 굴렸다.

‘물과 같으면서 수지처럼 탄성이 있고 아교처럼 끈끈하다. 그래도 형태를 구성하고 지각을 가지려면 뭔가 핵심이 있을 터. 그 핵심을 찾아 부수던가 아니면 강대한 힘으로 단번에 으깨버리던가…….’

물안개로 만들어도 멀쩡하게 장막을 만들었으니 핵심을 찾는 건 불가능.

검을 고쳐 쥐면서 신왕공을 한껏 끌어올렸다.

오행상극에 따라 흙은 수성(水性)을 이긴다. 삼산을 깨달았다면 지산을 열어 대지체, 특히 토(土)의 힘을 빌려 꼼짝 못 하게 알 수 있으련만.

본래 삼산이 존재하지 않는 해원기로선 완전해진 수정지력에 의지하는 수밖에.

다섯 구를 겨누는 왼손의 검결지가 한데 모였다가 두 개의 손가락만 폈고,

오른손에 얹힌 고검이 하얗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누를 수 없다면 물기를 모조리 증발시켜 버려야 한다.

군림검을 구현했다.

“찻!”

단호한 기합과 함께,

츠츠츠츠.

군림어검대법의 폭령진화(爆令眞火)가 어마어마한 열기를 품고 날았다.

화악.

그야말로 태양을 통째로 내던진 듯. 야점이었던 주변이 한순간 백광에 물들어 지워진다.

‘음?’

그런데 해원기가 문득 눈썹을 꿈틀거렸다.

검을 다룰 때는 절대로 정신을 분산해선 안 된다. 처음 검을 잡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왔던 원칙.

하지만, 허리 어림에서 홀연히 전해지는 기이한 느낌.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펑, 펑.

미끄러지듯이 좌우로 피하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종횡으로 회전하는 군림검이 가운데의 두 구를 꿰뚫자 화약을 터뜨린 것처럼 폭발하고,

물안개로 화하기도 전에 재로 만들어버렸다.

과연 폭령진화.

물이든 수지든 아교든 전부 태워버린다. 나머지 세 구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굼떠졌는데.

그 순간.

“멈춰라!”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시퍼런 기운이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쾅.

주변의 나무가 모조리 뽑혀나가고, 야점이 기댔던 성문 형태의 언덕이 충격에 쩍 갈라졌다.

해원기가 군림검을 회수하며 눈을 부릅떴다.

남은 세 구를 모조리 태워버리기 직전에 날아든 시퍼런 기운.

한 구는 재로 만들었지만, 기어이 폭령진화를 밀어내 버렸다.

유성처럼 떨어져 내린 두 사람.

충격의 여파에 휩싸인 사방은 온통 흙먼지가 들썩인다.

둘의 형상을 파악하려고 집중하느라 해원기는 허리 어림에서 전하던 느낌을 깜빡 잊었다.

일남일녀.

우측의 남자는 백발에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 뾰족한 얼굴에 길게 찢긴 눈매가 무척 냉혹해 보이는 인상이고, 전신에는 반질거리는 은의(銀衣)를 입었으며, 등에는 자기 몸집만 한 거대한 붓 한 자루를 메었다.

좌측의 여자는 흰 머리를 고풍스럽게 틀어 올린 노파. 노인과 남매로 여길 만큼 흡사한 용모고, 파란 저고리에 풍성한 백색 치마, 살짝 굽은 몸을 의지하듯 기다란 괴장을 짚었다.

청의백상(靑衣白裳)의 노파가 대뜸 좌우를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아이고, 우리, 우리 음정수백(陰精粹魄)이, 이를 어째?”

은의 노인도 냉혹한 눈매를 찡그리다가 해원기에게 고함을 지른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네놈이 감히…… 아니, 화숙인은 어디 있느냐?”

노인과 노파가 선 곳은 바로 살아남은 요물 두 구의 옆.

그 요물의 이름이 음정수백인 듯하지만,

그보다 해원기는 ‘화숙인’이라는 명칭에 주목했다.

화청궁에서 밀각의 대부들이 제멋대로 지껄였을 때, 조화부인이란 이름을 비웃으며 화숙인이라고 불렀었다.

그렇다면 이 둘은,

“동창, 밀각에서 나왔느냐?”

고검을 늘어뜨린 채 무겁게 물었다.

그제야 노인과 노파도 이상함을 깨달았는지. 둘의 시선이 빠르게 엇갈리고, 노인의 음성이 더욱 차가워졌다.

“감히 성조(聖朝)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고 밀각을 안다? 네놈은 누구냐?”

상대가 심상치 않다는 걸 인지한 듯. 묻는 노인의 손이 슬그머니 등에 멘 거대한 붓으로 향하는데.

해원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 어째서 동창에 속한 자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인가.

“요물 따위와 어울리는 것들이 올바를 리 없지만, 그래도 남의 이름을 알려면 먼저 자기가 누군지 밝히는 예의도 모르느냐.”

한숨이 나올 것 같다.

“헤에? 이놈 참 맹랑하네. 그래, 노신이 상의신모(尙衣神母)요, 같이 온 양반이 도지태사(都知太史)라고 하면 알아보겠니? 어린놈이 꽤 그럴듯한 재주를 익힌 모양이다만. 흐흥.”

그런 해원기를 요리조리 훑어보며 노파가 이상한 콧소리를 흘리자,

찌푸렸던 해원기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이런 명호는 들어본 적이 없고, 관직에도 신모나 태사를 함부로 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상의’와 ‘도지’는 분명히 들어본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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