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60화 (260/410)

제65장 현조안귀(玄鳥安歸) (4)

조화부인은 동창의 수하. 즉 적이다.

그런 그녀가 여기 나타난 건 거래를 트려는 목적이란다.

당연히 믿을 수 없다.

거래를 트려면 상담이 필요하고, 상담을 시작하려면 무엇보다 신뢰가 있어야만 한다.

동창의 동향을 알려주고, 그녀 자신의 내력을 털어놓는다고 의혹이 풀리지는 않지만.

마지막에 꺼낸 정보는 확실히 예상을 뛰어넘었다.

해원기가 안색이 변해 멈칫거리자, 오소민이 얼른 말을 받았다.

“금오혈석이라. 무슨 근거로 우리가 알 거라고 여기는 거요? 허, 갑자기 생뚱맞은 얘기로…….”

“피차 괜한 가장은 그만두자고. 해 소협과 오 장로가 처음 동창과 부딪친 게 어딘지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대번에 몰아붙이는 조화부인.

해원기의 속내를 감추려고 나섰던 오소민은 말이 막혔다.

낙향하던 상보감 태감의 겁표 사건. 그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덕주로 갔던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치밀한 정보망을 지닌 동창이 이미 해원기의 행적을 샅샅이 살폈을 터.

해원기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금오혈석이었군.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

파삭.

손에 쥐었던 사발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산공분을 뿜었던 삶은 돼지고기도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뭉개졌고.

딱히 기세를 드러내거나 공력을 발휘한 흔적도 없이.

조화부인뿐 아니라 오소민까지 움찔했지만, 언제나 깊이 가라앉았던 해원기의 눈빛이 기이한 광채를 뿌려서 어쩐지 위압당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이라. 어느 정도 추측은 했었던 모양이지? 하긴, 당대 제일의 지혜를 지녔다는 약왕당주가 함께 있었으니. 좋아, 제대로 가르쳐주마.”

그런 기분을 벗어나려는 듯 어깨를 펴고 턱을 올리는 조화부인.

잘난 척을 더하며 말을 잇는다.

“누구나 아는 사일신화. 그 신화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아홉 개의 태양이 변한 돌이 바로 금오혈석이다. 언제부터 황궁에 전해졌는지는 아무도 몰라. 더구나 보고(寶庫)의 곳곳에 제멋대로 뒹굴어서 원래 아홉 개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더군. 우연히 그 비밀이 밝혀지고 난 후에야.”

“우연히 비밀이 밝혀졌다?”

그런 조화부인이 같잖아서 오소민이 대뜸 반문을 던지는데,

“음. 황궁의 보고에는 별별 희한한 물건이 다 있거든. 다 썩어버린 시커먼 나뭇조각이 설마 신화에서 예가 썼다는 동궁(彤弓)의 파편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 파편과 마주친 돌멩이가 또 아홉 개 가운데 삼원석(三元石)에 속하는 것일 줄도. 뭐, 그렇게 우연히 겹치면서 소위 육악지력이 봉인된 걸 알아냈다나.”

조화부인이 남에게 들었다는 말투로 가볍게 넘긴다.

그래도 그 내용에 오소민과 해원기가 동시에 미간을 좁혔다.

삼원석은 가장 중요하다는 세 개의 금오혈석을 가리키는 명칭일 듯. 그 삼원석의 하나가 동궁의 파편과 마주치면서 육악지력을 획득했다는 말이다.

특히 동궁소증(彤弓素矰)이라면,

신화에서 분명히 예가 하늘로부터 하사받은 활과 화살의 이름.

우연이라고 해도 그런 우연히 일어날 법한 확실한 근거다.

조화부인의 눈이 슬쩍 해원기를 향했다.

“해 소협은 벌써 몇 차례 겪어봤잖아. 육악지력 중의 셋, 세 사람의 현신장 말이야. 참 웃기는 이름을 붙였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장수들이라니. 흐흥.”

현신장이 그런 의미였나.

다시 입을 닫고 듣기만 하는 해원기.

오소민이 아예 대화를 도맡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현신장은 모두 여섯인가? 나머지 셋은 누구요?”

조화부인도 말을 나누기엔 오소민이 더 편하다.

“글쎄. 현신장 여섯이 누구누구인지는 그간 극비였어. 밀각에서도 아는 이가 드물었을걸. 그래도 대강 서쪽에 셋, 동쪽에 셋이 있다는 소문은 돌더라고. 이건 또 다른 얘기가 되네. 자, 삼원석의 하나가 여섯 개 금오혈석에 봉인된 육악지력을 획득하는 열쇠였으니. 나머지 두 개는 과연 무엇일까? 이걸 해명하려고 동창에서는 무진 애를 썼었고, 그러다가 마침내 알아낼 만한 인물을 찾아냈던 거야.”

“해명할 인물?”

“흐, 동창이 천하의 명현(名賢)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지 알아? 출사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은거하여 학문만 닦는 이라고 해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심지어 풍운책에는 해박공(該博公) 무외거사(無外居士)란 요상한 자도 기록되었다니까. 하여간 그래서 항주(杭州)까지 상보감의 태감이 직접 내려가게 된 거지. 금오혈석 아홉 개를 전부 가지고서.”

실각한 상보감의 태감이 가산을 챙겨 낙향하던 행렬, 그 목적지가 절강이라고 했으니 바로 항주를 가리킨 것이었다.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해박공 무외거사는 바로 천문노인의 변신. 동창이 그 사실까지 알아내진 못했어도 나름 과거의 무림을 상당히 열심히 조사하고 또 참고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얘기가 끝났다.

이후의 일은 바로 아홉 도적의 겁표. 굳이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고.

금오혈석에 관해 아는 바는 다 털어놓았다는 듯 조화부인이 입을 다무는데,

오소민이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아홉 개의 금오혈석을 나누어 가진 아홉 도적. 그중의 하나를 녹림이라고 여기는 근거는 뭐요? 그리고, 삼원석? 그건 다른 금오혈석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소?”

미묘한 질문이건만, 조화부인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바로 답을 낸다.

“겁표가 발생한 곳이 덕주. 아홉 도적이 누구누구인지 확신하긴 어려워도, 어차피 가장 가까운 곳에 녹림장관이 있잖아. 아홉 도적의 하나든, 아니면 뒤를 봐주었든 간에 깊이 관여했을 게 틀림없지. 에, 삼원석은 달리 술법을 걸어놓았다고 들은 적이 있어서. 하다못해 천리추종향 같은 걸 발라놓았을 수도 있고.”

녹림은 산적.

표물을 겁탈하는 데에 가장 어울리는 각색이요, 또 직접 손을 대지 않아도 같은 도적끼리는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게 관례니.

도둑맞은 쪽에서는 당연히 혐의를 둘 대상이다.

오소민이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냉소를 쳤다.

“흥, 녹림장관에서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을 대답이로군.”

녹림의 호한을 하찮은 도적 취급이라.

진짜 녹림장관이 나섰다면 태감 나리께서 그간 갖은 짓을 다 해 모아놓은 재물을 모조리 털어갔을 터.

오소민이 녹림장관을 대신해 어이없다는 표현을 하자,

그제야 해원기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뗐다.

“그게 다요?”

아무런 표정도 없는 덤덤한 얼굴. 그저 두 눈에만 기이한 광채를 띤 채. 그 기이한 광채도 차츰 사라져 평소의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돌아간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투로 들렸나.

조화부인이 살짝 긴장한 티를 내며 두 손을 내보였다.

“이런. 이게 얼마나 대단한 정보인 줄 몰라? 금오혈석은 동창에서도 기밀 중의 기밀이라고. 밀각에서도 육학사만이 알 정도로…….”

서둘러 핑계 아닌 핑계를 대다가,

해원기가 손을 가볍게 올리자 찔끔한 듯 말을 흐렸다.

사발을 가루로 만들었던 손.

“표행의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아홉 도적을 특정한 실마리는 무엇인지. 또 아홉 개 중에 몇 개나 회수했는지. 알고 싶소.”

해원기가 그 손을 꼽으며 차분하게 물었고,

조화부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나서기로 마음먹었을 때, 결과를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간의 다양한 정보로 이 해원기라는 청년이 무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지만, 세상 물정에는 상당히 어둡고 꽤 순진한 편이라고 파악했다.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라는 유룡개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새파란 애송이.

진심을 보이는 시늉만으로 충분히 뜻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 생각했었는데.

어쩐지 예상에서 자꾸 어긋나는 느낌이 든다.

예민하게 구는 유룡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더벅머리 절세검왕의 반응을 예측하기 어렵다.

저 덤덤한 얼굴에 차분한 음성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속내를 추측할 수 없고,

게다가 얘기를 진행하면 할수록 자꾸 주눅이 드는 건 왜인지.

한참을 입이 아프게 떠들었어도 전혀 듣지 않은 것처럼 툭툭 던지는 말. 자주 입을 열지도 않으면서 대화의 주도권을 제대로 뺏어간다.

이래서야.

조화부인이 살짝 입매를 당기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이거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지 않아? 지금 내가 일러주는 내용이 얼마나 귀중한지는 알겠지. 그렇다면 상응하는 대우를 보여줘야. 거래의 기본은 상호신뢰라고, 합작할 마음을 성실하게 보이는 게 도리가 아닐까?”

불만을 표하자마자,

해원기가 꼽던 손가락을 풀었다.

“합작? 흠, 누가 거래한다고 했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오소민이 훌쩍 뒤로 물러나 품에 손을 넣고.

휘이이이이.

어디선가 갑자기 바람이 일어 야점의 천막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성문 같은 언덕 뒤에 자리한 야점이라 여간해선 바람이 들지 않는 곳.

돌풍은 바로 해원기에게서 비롯되었다.

그건 바로 기세. 아니, 기세를 넘어서 실제로 공간을 제어하는 힘의 구현이다.

뜻밖의 상황에 조화부인이 입술을 깨물다가,

두 손을 내저으려던 순간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굼뜬 동작.

몸이 뻣뻣해져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느새.

“이, 이건…….”

더듬는 말보다 먼저 오소민이 빠르게 입을 놀렸다.

“주위에 다른 기척이 없는 걸 보면 다른 수를 마련해두었을 테지. 혼자서도 우리 둘 앞에 나설 자신이 생길 만큼. 합작이든 거래든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물러나기 편하도록. 쯧쯧, 그렇게 마음대로 될까?”

미리 전음으로 들었었다. 해원기가 암중에 야점 안을 살폈고, 기세를 발동시켜 권역을 펼친다는 것을.

안양으로 오는 도중에 들었던 검기핍인의 권역.

권역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물러나서 만일을 위해 퇴로가 될 곳을 차단한다.

여기서 조화부인을 생포할 계획이다.

해원기가 천천히 일어서면서 조화부인을 똑바로 보았다.

“둔법이나 은문진 모두 쓸 수가 없을 것이요. 부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아는 것을 다 일러줘야겠소.”

합작과 거래는 단지 조화부인의 생각일 뿐.

여간해선 무력으로 강압하지 않는 해원기지만, 이런 기회를 그대로 흘려버릴 바보는 아니다.

동창의 내부 사정, 금오혈석의 봉인이 풀린 경과, 그리고 그 배후로 의심되는 자까지. 가느다란 실마리라도 놓칠 수 없다.

굳은 얼굴로 다가가려는데.

“호오, 호호호, 정말 알기 어려운 사람일세. 점잔이나 빼면서 둔하기 그지없는 정파(正派)라고 여겼는데. 꽤 교활한 면도 있잖아. 하긴, 절세검왕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강호의 낭인에 불과하니.”

삽시간에 표정을 바꾸어 깔깔대는 조화부인.

도로 조리대 위에 올린 한 손에 기대듯 몸을 비틀면서,

“언제 이런 기권(氣圈)을 설치했대? 훌륭해, 전신이 옥죄이는 듯하구먼. 그런데.”

정면의 해원기를 무시하고 시선을 오소민에게 돌린다.

조금 전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표정은 연기였나.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개방의 순행장로 말대로 아무 준비도 없이 나 혼자 나왔을까. 주위에 기척이 없다? 그랬겠지. 둔법과 은문진을 다 막았다? 거기까지도 예상했었어. 그럼 어쩌나…….”

말을 이으면서 미묘하게 움직이는 조리대 위의 손.

해원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는 순간,

퍼퍼퍼퍼펑.

술과 물을 담았을 열 개의 독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이 단숨에 야점 안을 덮쳤다.

흐려지는 시야.

해원기가 벼락같이 두 손을 뻗었으나,

파팡!

물컹한 촉감과 거친 반탄력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나야 했다.

“빌려온 장난감들이지만, 만만치 않을 거야. 그리고 아무리 영세검주란 배경이 있다고 해도 너무 설치지 않는 게 좋을 걸? 일단 녹림장관부터 잘 살피라고. 어느 정도 합작할 마음이 생길 테니까. 호호호호.”

귓가를 울리는 조화부인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지지만,

해원기는 선뜻 뒤를 쫓을 수가 없었다.

물구덩이로 화한 야점 안. 천막과 조리대가 다 풍비박산이 된 곳에 기괴한 모습이 열 개나 흐늘거리며 일어서기에.

“이런! 이건 무슨 요물딱지지?”

퇴로를 지키려던 오소민도 해괴한 물세례와 앞을 막아선 형체에 인상을 썼다.

뻔히 눈앞에 일어서건만, 한 점의 생기(生氣)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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