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장 현조안귀(玄鳥安歸) (3)
“흥!”
주인이 차가운 코웃음과 함께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자 삽시간에 중년 미부로 바뀐다.
구슬이 달린 주관 대신에 높이 틀어 올린 머리채, 몸에 걸친 것도 내명부의 관복이 아니라 평범한 의상이지만,
확실히 조화부인이다.
그야말로 요신일변(搖身一變)하는 재주. 해원기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이미 제갈봉이나 정록의 놀라운 역용술을 알고 있지만, 조화부인의 이 변신은 또 다른 계통의 기예다.
“사람을 개 취급하는, 그 주둥이야말로 개차반이로구나. 신비의 순행장로? 그래 봤자 거지의 본성이 어디 가겠느냐마는.”
오소민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선 바로 고개를 젓는다.
“아니, 지금 이런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할 때가 아니야. 검왕 해…소협은 지금 태항산의 녹림장관으로 가는 길이겠지?”
해원기를 ‘소협’이라고 칭하는 게 어색한가.
조화부인이 미간을 좁히면서 빠르게 입을 놀린다.
“용문에서의 일 때문에 염려하는 건 당연해. 개방, 소림, 무당, 그리고 용문세가. 전부 견제를 받았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를걸.”
해원기가 묵묵히 조화부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낙양을 떠난 해원기를 천리추종향으로 추적해서 안양을 향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앞질러 이 야점에 주인으로 변장해 나타났다.
그리고 산공분을 뿌린 돼지고기를 내왔다는 건 이 야점이 매복이라는 뜻.
한데 신분이 노출되자 선선히 정체를 드러내고선 입을 놀리기만 한다.
오소민이 대신 말을 받았다.
“다르다? 뭐야, 겁주는 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빙글거리지만, 조화부인은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듣고 겁을 먹는다면 할 수 없지. 아니라면 미리 알아두는 게 좋아. 동창이 지금까지 천하를 손에 넣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로 여긴 대상은 누구였을까? 용호방과 풍운책을 샅샅이 연구하면서 말이야.”
말이 계속 이어지자 오소민도 입을 다물었다.
당세의 무림을 정리한 용호방, 과거의 인물을 기록한 풍운책.
강호를 지탱하는 구주정문으로는 개방, 소림, 무당, 화산, 종남 등이 있고. 비천무영 황정리나 약왕당의 단목정도 개인으로서 손꼽히는 고수다.
그러나 천하를 집어삼킬 야심을 품었다면.
그 누구보다 가장 큰 걸림돌이,
“영세검주와 천극 두 사람이야. 하지만, 영세검주는 그저 모호한 전설로만 남은, 실재하는지조차 불확실한 의문의 인물이고.”
조화부인이 먼저 답을 밝히면서 해원기를 뚫어지라 본다.
절세검왕은 영세검주의 제자. 분명히 그렇게 인지했기에 반응을 기대하는 듯.
실망스럽게도 해원기는 평소의 덤덤한 얼굴 그대로, 눈도 깜짝하지 않아서. 조화부인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천극이 비록 정도를 대표하는 맹주라고 하지만, 당세에 와서는 유명무실하지. 더구나 근 이십 년 동안 강호에 얼굴을 보인 적도 없어서. 흐음, 결국은 가상의 대적(大敵)이랄까. 그런데.”
주의를 끌려고 일부러 말을 끊은 거다.
한 손을 조리대 위에 가볍게 얹으면서 묘한 미소를 짓고,
“해 소협이 툭 튀어나왔네. 절세검왕이니 뭐니, 그거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는 풍문이었다고. 누가 퍼뜨렸는지, 누굴 가리키는지, 왜 그런 명호가 붙었는지 전혀 알 길 없는 헛소문. 그렇게 치부하고 있었는데 진짜가 나타났으니. 호호호.”
웃음이 낭랑하게 야점 안을 울린다.
말을 이리저리 꼬아도 뜻은 명확하다.
현재 동창의 눈에 가장 큰 장애로 인식된 이는 바로 해원기라는 얘기.
영세검주와 천극이 가상의 대적인 데 비해 해원기는 실재하는 걸림돌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시선만 보내고 있는 해원기.
조화부인의 웃음이 맥없이 줄어들고, 오소민도 힐끗 해원기를 보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대강 이런 상황이면 뭔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특히 해원기 앞에서 그 사부를 언급하거나, 과거의 사마를 내용으로 삼으면 누구나 깜짝 놀랄 무서운 기세를 뿜어내곤 했었는데.
왠지 지금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오소민이 침착하게 말투를 가다듬었다.
“무슨 의도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요?”
말투가 바뀌어서인지 이제껏 무시하던 조화부인의 눈이 슬그머니 돌아왔다.
“그냥, 해 소협이 좀 딱해서. 근래에만도 장안에서 낙양, 이제는 또 태항산 위로. 혼자서 동분서주, 너무 고돼 보여서 안쓰럽더라고. 아, 오 장로는 들었나 모르겠네. 내가 해 소협과 처음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딱하고 안쓰럽다.
아니, 그것보다 ‘처음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라니.
마치 조화부인과 해원기가 가까운 사이라도 되는 것 같은 요사스러운 표현에 오소민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지는데.
조화부인이 또 먼저 답을 내놓는다.
“사내 같지 않은 것들도 사내랍시고 무림쟁패와 강호통일에 열중한다고 했었거든. 시답잖게.”
나긋나긋한 음성과 요요하게 빛나는 두 눈.
대번에 오소민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해원기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비로소 흘러나왔다.
“본래 다른 배를 탔다? 아니면 지금 말을 갈아탄다? 미심(迷心)의 마공을 익힌 이가 하는 말은 믿을 게 없지.”
낮게 중얼거리는 말이지만, 야점의 요사스러운 분위기가 확 날아가 버린다.
오소민이 얼른 가슴에 손을 올리고, 품에 지닌 하화를 의식하면서 불쾌하게 혀를 찼다.
사람을 미혹하는 힘이 담긴 조화부인의 말.
여기에 휘말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마음을 진정하면서 해원기의 말을 새겨들었다.
조화부인은 자신이 동창과 다른 길을 걷는다고 암시했지만, 아무리 마공으로 미혹했다고 해도 누가 속을까.
기껏 이런 어린애 속임수나 걸어보려고 나선 것도 이상하고.
그런데 조화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웃음을 터뜨리면서,
“호호호, 이거 실례, 실례. 배운 게 몸에 익어서 어쩔 수 없다고. 천생의 교태라고 이해해주면 안 될까?”
낯 두꺼운 소리를 잘도 지껄인다.
오소민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로 해원기를 보았다.
평소와 조금 다른 해원기, 그래서 대화를 자청하고 맡은 셈이지만. 이 요사스러운 여인이 당최 무슨 뜻으로 이러는지 추측하기 어렵다.
해원기를 말살하려고 갖은 수를 썼었고, 심지어 동강마저 큰 부상을 입었지 않나.
해원기가 자신을 보는 오소민의 시선을 의식하곤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저었다.
조화부인이 떠드는 동안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진평현 수차제의 싸움을 생각하면, 이 야점에 어떤 술수를 부렸을지 모를 일. 암암리에 신왕공을 끌어올리고 잠심침령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른 기척은 없었고, 진법이나 사술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조화부인 혼자서 얘기나 나누자고 나왔단 말인가.
오방신수의 수하들을 부려 사면황제진으로 달려들면서, 장영비금이란 암살의 수법까지 감행했던 여인이,
이제 와서 동창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봐야.
의혹이 일단 계속 말을 듣게 만드는데,
의자에 앉은 해원기의 두 발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경계하는 것도 당연해. 진평현에서는 확실히 해 소협을 제거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때는 아직 해 소협의 진실한 신분을 몰랐을 때라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에서 의심스러운 인물로 막 지목되었을 뿐이었지.”
이건 사실이다.
당시에 해원기를 천문노인이나 동악검종과 연결된 이로 오인하곤 했었다.
조화부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내 입으로 떠들어봐야 믿을 리 없지만. 혹시 동창에서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들어본 적 있어? 무림쟁패니 강호통일이니 난 별로 관심이 없거든.”
함부로 ‘부인’을 칭한다고 밀각 대부들이 비웃었었다.
오소민이 고개를 다시 돌렸다.
“동창과 한통속이 아니다? 그러면서 내명부의 복식을 차려입고,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마공 따위를 익혔나?”
말도 되지 않는다는 반문이 연달아 나오자,
조화부인은 또 한숨.
“후우, 동창의 못난이들 취향이 그쪽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그리고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마공이라고 누가 알려준 적이라도 있었나? 그저 가르쳐준 대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악착같이 익혔을 뿐. 난 아무것도 모르는 일개 궁비(宮婢)에 불과했거든. 내시를 받들고 살아야 할 진짜 여자 종.”
계집종이나 여종이라는 단어 대신에 굳이 ‘여자’를 강조하면서,
어색한 얼굴에 슬쩍 올라오는 붉은 빛. 부끄럽고 창피한 표정이다.
황궁의 내밀한 사정을 알기는 어렵지만, 내시를 받들고 사는 여자라면 말 못 할 고충이 있는 모양이다.
얼른 표정을 고치고는,
“하여간 지금 녹림장관을 향하는 건 위험해. 이번에는 태상이 직접 명령을 내려서 문무양반(文武兩班)의 진짜 고수들과 내각육학사의 태반이 나온다고. 녹림을 기점으로 삼아 주의할 인물들을 전부 제거할 계획을 세웠지. 혹시라도…….”
두 눈이 번갈아 해원기와 오소민을 향한다.
“절세검왕과 연결되면 거사에 차질이 생길 공산이 커졌으니까.”
별안간 화제가 민감해지는 바람에 오소민의 눈썹이 위로 올라붙었다.
이게 이렇게 흘러가는 얘기였나.
동창이 최대의 걸림돌로 여긴 해원기. 그 우익(羽翼)을 자른다는 핑계로 무림의 명숙(名宿)들을 공개적으로 노린다?
여전히 조화부인을 믿지는 않지만, 언급한 내용이 너무나 중요해서 무시하기도 어렵다.
어떻든 동창과 깊이 관련된 여인이니.
그런데,
“왜 이런 기밀을 밝히는 거요?”
목적이 무엇일까.
배신. 아니, 동창의 입장에서는 아예 반역이라고 할 행동이다.
진평현에서나 낙양 연묵재 골목에서나 전부 동창의 수하로서 나타난 조화부인.
갑자기 왜 해원기의 앞길을 걱정해 동창의 계획을 누설하는지.
배경을 모르겠다.
오소민의 질문에 조화부인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냥…은 아니지. 어쩌다가 무공을 익히고, 또 제법 재질이 있었는지 남들을 부리는 자리에 앉았고. 나름 즐거웠었어. 무림쟁패든 강호통일이든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잖아. 그러다가 천하를 손에 넣는다는, 세상을 뒤엎어 새로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아휴, 그건 도저히 못 따라가겠더라고. 이쯤에서 빠져나와 남모르게 귀부인으로 살면 좋겠거든. 하지만, 동창이 그러라고 놔둘 리 없지.”
이게 조화부인의 본심인가.
해원기와 오소민이 어떤 얼굴인지 상관하지 않고서 넋두리처럼 늘어놓는 말.
“천하에 이목을 뻗친 동창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동창이 그 이목을 다 잃는 거야. 그러려면 한바탕 큰 싸움이 나서 동창이 망가져 버리는 수밖에. 마침 그런 기회가 왔으니까 나도 결단을 내려야만 해. 되도록 상대의 역량이 강해져서 동창이 힘에 부치도록…… 뭐, 나야 강호무림이 어떻게 되든 아무 관심 없어. 이기든 지든 내가 원하는 상황만 끌어내면 그만. 연묵재 골목에서도 봤잖아. 난 엉뚱한 곳에서 맥없이 목숨을 잃긴 싫다고.”
지독한 이기심이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간 동창의 명을 받아 별별 나쁜 짓을 일삼았을 여인이 이제 와서 제 한 목숨 살겠다고 따로 머리를 굴리는 꼬락서니.
그러나 일리 있는 설득이고,
“절세검왕이 실재하는데 영세검주를 단순한 전설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진짜 전설대로라면.”
어느새 가늘어진 목소리가 살짝 떨려서.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이것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저 혼자 살아남으려는 이기적인 여인에게 ‘그분’의 존재는 공포와 다름없었을 터. 동창의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으리.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데 해원기가 불쑥 입을 연다.
“태상이라는 자, 녹림을 기점으로 삼았다는 건 그만큼 녹림장관을 안다는 뜻이요?”
오소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우리 기특한 ‘고구마 대장’께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으신다.
그녀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중요한 부분은 동창의 행동. 풍운책에 녹림노조의 이름도 실려 있었을 텐데.
조화부인이 다시 해원기를 보면서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소림, 무당, 화산, 종남, 개방…… 어쩌면 당세의 구주정문을 통틀어도 녹림의 노조를 능가할 실력자는 없을걸. 모를 리 없지.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강수를 둬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뭐요?”
곧장 되묻는 해원기.
조화부인이 잠깐 망설이다가 이유를 밝혔고,
“아홉 개의 금오혈석이라고 알지? 그중 가장 중요한 세 개 중의 하나가 녹림에 있다고 여겨지거든.”
이 대답에는 해원기도 안색이 변했다.
설마 이런 이유를 댈 줄이야.